심원(心遠)
【정견망】
회화(繪畫)는 신(神)이 사람에게 전하신 한 문의 기예(技藝)로, 배후의 내함이 매우 심오하다. 오늘날의 사진술과는 비교할 수 없다.
고대 서적 《국사보(國史補)》에는 왕유(王維)가 그림을 판별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번은 왕유가 장안의 초국방(招國坊)에 있는 유경공(庾敬空)의 집에 갔다가, 실내 벽에 그려진 《주악도(奏樂圖)》 한 폭을 보았다. 왕유가 한참을 보더니 웃었다. 함께 간 사람이 무엇 때문에 웃느냐고 묻자 왕유가 말했다.
“이 그림은 《예상우의곡》 제3첩 제1박을 연주하는 것을 그린 것이오.”
진실을 따지길 좋아하는 사람이 이 말을 들은 뒤 특별히 악공을 청해 검증하게 하였는데, 악공이 전혀 틀림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왕유는 어찌하여 그렇게 정확히 볼 수 있었을까? 그림의 배후에는 단지 한 폭의 그림만이 아니라, 아마도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 요소가 존재하고 하나의 층차와 경계가 있음을 설명한다.
대법 사부님께서는 《파룬궁》 “제1장 개론”에서 말씀하셨다.
“어떠한 물체든, 그것이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다른 공간에서는 다른 모양으로 나타난다. 컵 한 개를 예로 든다면 그것을 만들어 낼 때, 그것의 영체가 동시에 다른 한 공간에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영체가 존재하기 전에는 또 다른 물건일 수도 있다. 천목 층차가 제일 낮으면 보이는 것은 컵이고, 한층 높아지면 보이는 것은 다른 공간의 그 영체이며, 또 좀 더 높으면 보이는 것은 그 영체 이전의 물질형식이다.”
시인이 본 것은 다른 공간의 그 생명이며, 아마도 생명이 여전히 그곳에서 연주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매우 정확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의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림 배후에만 내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공간 역시 이렇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버뮤다 또는 신기루 현상은 모두 다른 공간과 관련이 있다. 다른 공간이 엇갈려 열리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
신화 속의 무슨 ‘남천문(南天門)’, ‘북천문(北天門)’ 같은 것을 우리는 왜 볼 수 없는가? 그것들은 평상시에는 닫힌 상태이기 때문이다. 오직 특정한 시간에만 열린다.
우리가 보는 그림의 배후에는 내함이 있다. 자신의 상상을 확대해보면,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모든 것 역시 모두 한 폭의 그림과 같지 않은가? 그 뒤에는 모두 층층의 내함이 있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