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베이 대법제자
【정견망】
최근 나는 사부님의 설법에서 요구하신 ‘구세력을 전면 부정한다’에 대해 몇 가지 새로운 인식을 얻었기에, 이를 공유하며 동수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1. ‘불이법문(不二法門)’ 각도에서 구세력 부정을 이해하기
2년 전 《전법륜》 속의 한 단락 설법이 문득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것이 당신을 안배하는데, 그러면 당신이 수련 성취했다 해도 수련되어 어디로 갈 것인가?”[1]
나는 문득 깨달았다. 맞다, 대법제자의 수련은 사부님의 안배에 따라 닦아나가는 것이며, 만약 수련 과정에 시종일관 구세력의 교란이 동반된다면, 그것은 반드시 사부님의 정법 속 요구—구세력 전면 부정—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의 수련은 ‘불이법문’의 문제에도 연루된다고 본다. 대법제자의 수련 길은 오직 사부님께서만 안배하실 수 있으며,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가 박해 속에서 수련하도록 안배하지 않으신다. 박해 속에서의 수련은 반드시 구세력이 개입하여 조성된 것인데, 도대체 구세력이 어찌 대법제자의 수련 길에 개입할 자격이 있겠는가? (박해가 발생한 후 사부님께서 비록 더 높은 차원에 서서 ‘계략에 맞춰 계략을 쓰는(將計就計)’ 방식으로 일체를 주도하실 수 있을지라도, 박해가 발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반드시 대법제자가 ‘구세력 전면 부정’을 해내지 못한 데 기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어떤 동수들의 수련 중에는 구세력의 교란이 나타날 것인가? 나는 이러한 동수들의 잠재의식 속에 여전히 구세력을 승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가지려는 것은 누구도 상관하지 않는데, 이것이 이 우주의 이치다.”[1]
예를 들어, 어떤 대법제자는 다음과 같은 인식이 있다.
“자신에게 병업 상태나 중대한 난관이 나타나면, 곧바로 단호하게 안으로 찾으며 집착심을 닦아내고, 이를 부정하며 구세력의 박해를 부정한다.”
이러한 방식은 언뜻 안으로 찾고 부당한 행위를 바로잡는 것을 통해 구세력의 안배를 부정하는 것 같지만, 이러한 수련법에는 알아차리기 어려운 잘못된 인식이 하나 있다. 바로 대법제자가 잘하지 못할 때 구세력이 박해를 진행할 수 있음을 변상(변형된 방식)적으로 승인한 것이다. 이 사상 속의 누락이야말로 구세력의 개입 핑계가 되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는 ‘구세력을 전면적으로 부정’은 다음을 뜻한다.
“나는 리훙쯔 사부님의 제자이며, 나는 오직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수련 길만 승인한다. 내게 집착심이 있든 없든, 구세력이 나의 수련에 개입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안으로 찾는 것은 대법제자의 수련 방식이며 구세력과 무관하다. 또한 대법제자가 수련 과정에 과오가 존재한다고 하여 구세력에게 박해의 핑계가 생겼다고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 아니, 그것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법제자의 수련 길에 개입할 자격이 없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구세력의 대법제자에 대한 교란을 내가 승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대법제자는 나의 제자이기에 누구도 관리할 자격이 없으며, 더욱이 그것들이 대법제자를 이용하고 강압해 그것들의 목적에 도달하며, 이로써 나의 제자를 훼손하려는 음모를 이루어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2]
2. 선해(善解)는 가장 좋은 구도 방식이다
최근 법공부를 할 때, 몇 가지 설법이 나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여러분과 공유한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모든 중생들이 교란을 하지 않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서 줄곧 바르게 나아간다면, 가장 좋지 못한 생명, 더욱 나쁜 생명, 역사상에서 더욱 큰 잘못을 범한 생명일지라도 모두 원래 자리로 원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좋지 않은가?”[3]
“중생을 구도하고 법을 실증하는 이것은 당신들 개인 수련을 훨씬 넘어선 것으로서, 더욱 큰 일이다. 이것은 구세력이 바르게 처리하지 못하는 것으로 당신들을 교란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부정하고 정념으로 이 일체를 대하라!”[3]
“무엇이 전부 선해하는 것인가? 이 우주가 안 되는데, 안 된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안 되기에 비로소 훼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는 당신과 은혜와 원한이 있고, 그는 다른 사람과도 은혜와 원한이 있다. 됐다, 누구도 은혜와 원한을 갖지 말자. 진 빚을 정말로 갚을 수 없으면 사부가 대신 갚는다. 여러분 모두, 누구도 누구의 빚을 갚으라고 하지 말고, 누구도 누구에게 빚지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닌가?”[4]
위 설법에 대한 나의 이해는 이러하다.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체 생명의 선해이며, 정법 속에서 일체 생명이 바로잡히는 것이다. 윤회 속의 온갖 은원(恩怨)에 대해 사부님께서는 일체를 선해하실 수 있고, 이를 통해 최대 한도의 중생 구도를 달성하신다. 정법 시기 대법제자에 대한 사부님의 요구는 법을 증명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중에서 제고하는 것이며, 중생을 구도하는 동시에 대법제자를 원만하게 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 구세력의 개입은 허용되지 않는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이미 법에서 “사실 중생구도 중에는 개인수련의 제고 요소를 포괄하고 있다.”[5]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이해하는 정법 수련은 다음과 같다. “대법제자는 법을 증명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중에서 수련 제고해야 하며, 구세력이 안배한 병업 마난과 세속의 은원 속에서 수련 제고해서는 안 된다.”
사부님께서 “신 수련생을 제외하고 사부는 99년 7ㆍ20 이후에 당신들에게 개인 수련을 위한 어떠한 관(關)도 만들어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신들의 개인수련은 전면적으로 중생을 구도하고 대법을 실증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법제자의 수련 속에는 다시는 병업 마난, 세속의 은원, 경찰의 소란 등 어떠한 형식의 교란도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모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정법 수련과 부합하지 않으며, 중생이 구도되는 것에 손실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원 재학 시절, 본래 주변 동급생들에게 진상을 전할 기회를 찾으려 했으나, 현실의 표현은 거의 모든 주변 사람이 온갖 이유로 나를 배척하고 소외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법의 요구에 따라 ‘인(忍)’을 닦았고, 비록 잠시 그들과의 관계를 완화할 수 있었을지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나는 계속 이러한 반복 속에 빠져 아예 입을 열어 진상을 전할 수 없었고, 몹시 괴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는 중생을 구도하러 온 것이지 업을 갚으러 온 것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윤회 속의 은원 때문에 나를 소외하여 마침내 진상을 들을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손실이겠는가.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 내가 이 일념을 발한 이후, 그들과의 관계는 모두 좋아졌다.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수련생 중에 역사적으로 목숨을 빚진 사람이 적지 않는데 모두 사부가 당신들을 도와 선해(善解)해 주었다.”[3]고 말씀하셨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이미 대법제자를 위해 일체의 은원을 선해하셨으나, 당시 나는 이 층차를 인식하지 못하고 여전히 개인 수련의 각도에 서서 문제를 생각했다—안으로 찾고, 과오를 바로잡고, 모순을 화해하는 것. 만약 개인 수련이라면 이러한 방식에 잘못이 없으나, 지금은 정법 수련이며 중생 구도 위주이다. 나의 이해는 이러하다. “사부님이 이미 대법제자를 위해 일체의 은원을 선해하셨는데, 이러한 현상은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는 구세력 전생의 은원을 이용하여 대법제자에게 마난을 조성한 것이고, 이러한 행위는 중생의 구도를 심각하게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상 중생과의 일체 은원을 승인하지 않는 것 역시 구세력의 안배를 부정하는 것이며, 중생 구도의 난도를 경감하는 것이다. 사부님이 이미 대법제자를 위해 일체를 선해하셨으므로, 우리와 세상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오직 구도와 구도받는 관계일 뿐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대도(大道)는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쉽다”[6]
3. 사상을 바로잡아 중생이 대법을 원용(圓容)하게 하라
초기 수련 시에 이런 인식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친인과 모순이 발생할 때, 그들은 이러한 방식을 사용하여 우리가 제고하도록 돕고, 우리의 집착심을 인식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는 초기 수련에서 매우 보편적인 인식이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이러한 인식은 사부님께서 정법 중에서 일체를 선해하신 법리와 부합하지 않는다. 나의 이해는 이러하다. “사부님이 원하시는 것은 일체 중생의 은원을 선해하고, 중생 구도를 위해 최대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법을 증명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일로 하루 종일 분주하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친인들이 여전히 우리가 제때 밥을 짓지 않았고 청소를 하지 않았다고 원망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법 증명과 중생 구도를 위해 편의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겠는가? 정법 속에서 우리의 친인척은 또 자신을 어느 위치에 놓는 것인가? 이것이 어찌 구세력이 대법제자 및 그 친인에게 강제한 박해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은 절대 승인해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와 주변 친인의 은원은 오래전에 사부님에 의해 선해되었는데, 오직 우리의 인식이 제고되지 올라오지 않아 이러한 현상이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여전히 친인척과의 모순이 우리의 수련 제고를 돕기 위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이러한 수련 방식을 승인한 것이고, 우리의 수련 환경은 자연히 이러한 표현을 띠게 된다. 그러나 일체 중생은 모두 대법을 위해 온 것인데, 어찌 구세력이 우리의 친인을 이토록 이용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현상을 부정하는 것 역시 구세력의 안배를 부정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이번 정법 중에서 대궁(大穹)의 일체 중생에게 가장 좋은 기연(機緣)을 창조해 주었다. 일체 중생에게는 모두 자신을 위해 다지는 미래의 가장 좋은 기회가 존재하게 되었다.”[7]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생을 자비로 대하는 각도에 서서, 기꺼이 중생이 정법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잘 놓기를 바랄 것이다. 만약 대법제자가 법 증명과 중생 구도 일에 분주하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친인이 이미 밥과 반찬을 만들고, 청소를 했으며, 생활 속의 모든 사소한 일을 해결해 주었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이것이 과연 그들이 자신의 층차 속에서 정법을 원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정법 속에서 마땅히 놓아야 할 위치이다.
전제는 사부님께서 이미 대법제자를 위해 일체를 선해하셨음을 믿는 것이다. 물론 이 일체의 기점은 중생을 자비로 대하고 구세력의 안배를 부정하는 것이지, 자신이 게으름을 피우고 긴장을 풀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의 한 단락 설법으로 이 교류 문장을 마치고자 한다.
“사람을 제도하는 신을, 사람이 박해하는 이런 일이 더는 있을 수 없으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과 같은 이러한 일은 절대로 다시 나타날 수 없다.”[3]
이상은 최근 구세력 부정 방면의 몇 가지 인식이며, 부당한 곳이 있다면 동수들께서 자비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주:
[1] 《전법륜》
[2] 《각지설법6》〈아태지역 수련생 회의 설법〉
[3] 《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4] 《각지설법14》〈2016년 뉴욕법회 설법〉
[5] 《정진요지3》〈길을 바르게 걷자(走正路)〉
[6] 《파룬궁》
[7] 《각지설법2》〈2002년 보스턴법회 설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