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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간 도를 기다려 60년 후에야 수수께끼를 풀다

작자:원무명(袁無名)

【정견망】

고생스런 어린 시절

내 이름은 이모선(李慕仙 가명)이다. 집은 중원의 어느 현에 있고 1919년 대대로 소도(小道)를 수련하던 가정에 태어났다.

조부님은 일찍이 현 동남쪽 구역의 장을 지내셨다. 당시 우리 집에는 5-6경(약 수만 평)의 땅이 있어 비교적 생활이 넉넉했다. 그러나 조부님이 아편에 빠져 얼마 지나지 않아 가세가 기울었다.

내가 8살 때 나는 현에서 큰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았는데 나중에 시골로 이사했다. 형제 5명 중 내가 셋째인데 십대 때 모친이 돌아가셨다. 식구들은 내 명이 짧고 운수를 보니 상이 불길하다고 하여 나를 절에 보내려 했으나 결국 보내지 못했다.

10대 때 나는 현소재지에 있는 채소가게에 들어가 점원이 되었다. 당시 점포는 우물과 2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나는 후문으로 나가 물을 길어오기를 하루에도 40여 차례나 해야 했다. 오고가는 거리를 모두 합하면 수십리에 달했고 당시 나이가 어리고 키가 작아 두 번이나 물통을 떨어뜨려 야단을 맞기도 했다.

청년 시절에 한 착한 일

중화민국 32년, 중국에 큰 가뭄이 들었다. 우리 현에서도 유랑하며 밥을 구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길 양쪽에 남녀노소가 자식들을 데리고 저녁까지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먹다 남긴 감 껍질을 도랑에 버리면 구걸하는 사람들이 주워서 후후 불어서 먹는 것을 직접 보기도 했다. 나는 당시 이미 독립해 쌀 식초 가게를 하고 있었다.

이날 나는 한말의 쌀로 식초로 만들었는데 가게 문을 막 열자 어떤 늙은이와 어린애가 들어왔다. 노인은 4-5세 된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간절히 애걸했다. “마음씨 좋으신 분, 제 손녀에게 먹을 것 좀 주십시오! 우리는 이틀간 먹지 못했고 아이 어미는 굶어서 젖이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마음이 약해 그에게 밥 한 끼를 차려 주었다. 그들이 막 떠나가자 즉시 100여 명이 왔다. 나도 장사하는 사람인데 모두 다 베풀고 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내게 무릎을 꿇었는데 나는 얼른 일으켜 세웠다. 그저 전부 다 주는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은 늦게 와서 누룽지를 긁어 먹었다. 그들이 간 후 집주인이 내게 훈계했다. “나는 땅이 수만 평이 있어도 감히 희사하지 못한다. 너 내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과연 다음날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왔는데 모두 합해 280명이었다. 나도 돈이 없었기 때문에 매 사람마다 한푼씩 나누어 주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 푼이면 가게에서 약간의 물건을 살 수 있었다.

풀지 못한 고인(高人)의 수수께끼

아마 중화민국 34년쯤의 일일 것이다. 그때는 일본인이 비행기로 우리 현을 폭격할 때인데 나는 어느 절로 들어가 방공호를 파고 목숨을 건졌으나 부친은 그해 세상을 떠나셨다.

아마 1950년 내가 32살 때의 일로 기억나는데 나는 현의 어느 거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산속에 집이 있는 파사가(婆娑街)란 친구가 있었는데 당시 45세 가량 되었다. 어느 날 그가 나를 끌고 어느 수도인(修道人)에게 데려 갔다.

수도인은 당시 6-70세가량 되었고 동남의 어느 현에서 왔다고 했다. 그는 키가 매우 크고 얼굴색이 불그레했다. 목소리가 우렁차서 천정의 먼지가 떨어져 내릴 것 같았고, 집 밖에서도 발아래 땅이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어쨌든 도가 매우 깊어보였다.

같이 간 우리 너댓 명은 그를 매우 흠모했으며 산속 친구에게 부탁해 한수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래서 입도(入道)의식을 거행했는데 의식이 아주 장중했다.

수도인은 우리에게 의식을 거행한 후 오후에 떠났는데 매우 조급해보였다.

떠날 무렵 수도인은 매우 엄숙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인류의 대겁난이 곧 닥쳐올 것이다. 미륵 불조(佛祖)께서 세상에 내려와 불법을 전하고 중생을 제도하실 것이다. 너희들은 절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얼른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물었다, 수도인은 “수탉이 세 번 울고 난 후”, “장백산 아래 반월담(伴月潭)”에서 속가의 성은 “십팔자(十八子)”라고 했다. 나중에 우리가 따라가면서 묻자 그는 비로소 웃으며 “어쨌든 동북쪽이다”라고 했으며 그 외 다른 해석은 없었다.

나중에 나는 또 이웃 현에서 사형제들과 수도인을 한번 만났다. 그때는 공산당이 이미 도를 전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우리 사형제들은 문을 닫고 담화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문을 밀고 들어와서 깜짝 놀랐다. 바라보니 당시 우리의 스승이었던 수도인이 크게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뭘 그리 두려워 하느냐?”

우리는 마음을 놓았다 도인은 또 우리에게 도 닦는데 관한 일을 좀 이야기 해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음해에 동남쪽 현의 사형제가 말하기를 수도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당시 이웃현의 상점에도 이 도를 배운 사람이 많았다. 당시 스승의 속가 성은 조(趙)씨였는데 외부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오랜 기다림

나중에 중국 대륙에 많은 일이 발생했다. 무슨 “진반, 삼반, 오반, 사청, 강철제련”, “문화대혁명”, 학생을 진압하는 등등으로 사람이 지내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삼십대가 되어 가정을 이뤘다. 사회가 매우 혼란했지만 나는 시종 수련을 잊지 않았다. 일부 도가의 풍수와 <성명규지(性命圭旨)> 같은 수련서를 보았고 한때는 다른 종교의 일부 신도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미륵이 세상에 내려와 사람을 제도한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다.

숙원을 이루다

세월은 물처럼 흘러 나와 함께 입도했던 사람들(나의 계모와 여동생도 포함)이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줄곧 관련 소식을 듣지 못했으므로 나 역시 이 일을 점점 잊어버렸다.

1997년 1월 5일이 되어 내가 이웃마을의 친구를 찾아갔는데 사람들이 스승님의 강의를 틀어놓는 것을 보았다. 들어보니 불법을 널리 전하며 중생을 구도한다고 했다. 특히 천목, 현관을 말할 때 매우 도리가 있어 나는 진법(眞法)이라고 느꼈다. 갑자기 활연대오했는데 “수탉이 세 번 운다”는 것은 바로 닭의 해(酉年)를 지난다는 것이 아닌가?(간지로 따지면 유년은 12년마다 한번씩 돈다)

사부님께서 1992년 5월 공을 전하셨으니 바로 세 차례의 유년이 지난 후였다(50년 후 93년 계유년이 네 번째 유년이다) 또한 길림성은 바로 동북이 아닌가? “십팔자(十八子)”란 또한 “이(李)”가 아닌가?

대법을 수련한 후 나의 신체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자전거를 타도 어떤 사람이 밀어주는 것 같고 고구마 몇 포대를 실어도 사람이 밀어줄 필요가 없었고 또 늘 파룬과 연꽃을 보았다.

손을 꼽아보니 48년이 지났다

60년 후 대법이 미혹을 파하다

우리 가족은 보통 5-60년 살았고 가장 길어야 72년 살았다. 명을 보는 사람이 나더러 72세까지 산다고 했지만 나는 79세 되던 해에 다행히 대법을 얻었다. 어쩌면 이는 내가 청년시절 선행을 한 것이 그 원인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당시 그 수도인이 예언한 “장백산 아래 반월담”은 줄곧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내가 동북에 가본 적이 없으므로 줄곧 “반월담”은 못의 이름이라고 생각했으며 아마 스승님 고향 부근이라고 생각했다.

작년에야 나는 이 예언의 뜻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월담”이란 “정월담(淨月潭 장춘 동남쪽에 있는 호수)”의 약칭이며 “장백산 아래 반월담(伴月潭)”이란 장춘을 가리키는 것이다. 장춘은 마침 장백산 아래에 있으며 또 “월담(月潭)”을 끼고(伴) 있다. 이는 스승님께서 법을 전하기 시작하신 지점을 말한 것이다.

동수들이여, 이것은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이다. 절대 이 만고의 기연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선량한 사람들이여, 사악의 거짓말을 믿지 말고 빨리 진상을 알아 대겁난의 도태를 피하기 바란다!

발표시간 : 2010년 7월 29일
정견문장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0/7/29/676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