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오(明奧) 정리
【정견망】
소병가시해(燒餅歌試解)
명태조가 어느 날 내전에서 소병(燒餅)을 먹다가 막 한 입을 베어 물었을 때, 갑자기 국사 유기(劉基)가 입궐했다는 보고가 들렸다. 태조는 곧 그릇으로 소병을 덮어 가린 후에 유기를 들게 했다. 예우를 마친 후 황제가 물었다.
“선생은 과거와 미래의 일을 능히 안다고 하니, 이 그릇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시겠소?”
유기가 곧 손가락을 꼽아 계산해 보고 답했다.
“반은 해와 같고 반은 달과 같은데, 일찍이 금룡(金龍)에게 한 입 베어 먹힌 자국이 있으니 이것은 음식물입니다.”
그릇을 열어보니 과연 그러했다.
황제가 즉시 천하 후세의 일이 어떠할지 물었다.
“주(朱)씨의 천하가 길게 이어지겠소?”
유기가 말했다.
“망망한 천수(天數)에 우리 주군께서는 만자만손(萬子萬孫)을 두실 것이니 어찌 물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황제가 말했다.
“비록 예로부터 흥망에는 원래 정해진 바가 있고, 더구나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오직 덕이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나, 말해본들 어떠하겠소. 시험 삼아 간략하게나마 말해 보시오.”
유기가 말했다. “천기(天機)를 누설하는 것은 신의 죄가 가볍지 않으니, 폐하께서 신의 만번 죽을 죄를 사해주셔야 비로소 감히 아뢸 수 있겠습니다.”
황제는 즉시 면사금패(免死金牌)를 하사하며 말했다.
“경을 대명국사(大明國師)로 봉하니 경은 미래의 일을 하나하나 분명히 밝히되, 머리만 감추고 꼬리는 드러내는 식으로 하지 말라. 그리하면 사직에 공이 되어 만고에 유전될 것이다.”
이 단락의 문장을 현대어로 간단히 설명하면, 어느 날 명태조 주원장이 내전에서 소병을 먹다가 막 한 입을 베어 물었을 때 문득 유백온(劉伯溫)이 알현을 요청했다는 뜻이다. 이에 태조는 그릇으로 소병을 덮고 유백온이 들어오자 그릇 속의 물건을 맞혀보게 했다. 유백온이 황제가 한 입 베어 먹은 소병임을 매우 정확하게 말하자, 주원장은 매우 감탄하며 유백온에게 미래의 일을 묻는다. 이것이 바로 《소병가》의 유래다.
이 단락의 예언에는 오직 한 구절, “우리 주군께서는 만자만손(萬子萬孫)을 두실 것이니 어찌 물으실 필요가 있겠습니까?”라는 말이 있다.
명조의 강산은 명 사종(思宗) 숭정황제까지 전해졌고 그 후에는 만청(滿淸) 왕조의 천하가 되었다. 숭정 17년(서기 1644년),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 봉기군이 북경을 함락하자 숭정제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고 명조는 멸망을 고했다. 그런데 이 사종은 바로 신종 만력제의 손자였다. 유백온이 주원장의 물음에 답한 것은 명백히 중의적인 표현이다.
겉으로는 명조의 강산이 천추만대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아첨의 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명조 강산이 만력제의 손자인 숭정제에 이르러 끝날 것임을 명확히 예언한 것이다. 여기서 유백온의 지혜를 볼 수 있는데, 천자를 노엽게 하지 않으면서도 천자의 질문에 답하여 미래를 예언했다.
이어 유기는 면사금패를 받은 후 예언을 서술하기 시작했다. 이후 수백 년간의 일을 예언했는데, 여기에는 ‘토목의 변’, ‘환관의 난정’, ‘청군(淸軍)의 입관’, ‘한인의 체발(剃髮 만주족처럼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 ‘강건성세(康乾盛世)’를 거쳐 청말과 그 이후의 일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소병가》의 내용이다.
유기가 은혜에 감사하며 아뢰었다.
“우리 대명은 세계를 통일했으나 ‘남방은 결국 멸하고 북방이 흥할 것’입니다. 비록 태자가 적통 후계자이나 문성(文星)이 높이 솟으니 ‘해(日)는 서쪽을 방비해야’ 합니다.”
황제가 말했다.
“짐이 이제 도성을 굳건히 쌓고 수비를 엄밀히 하였는데 어찌 방비할 것이 있겠소?”
유기가 말했다.
“신이 보기에 도성이 비록 공고하고 방수가 엄밀하여 염려가 없을 듯하나, ‘다만 제비(燕子)가 날아 들어올까 두렵습니다’.” (태조의 넷째 아들 연왕이 찬탈할 것을 가리킴)
이어 노래 세 수를 지어 읊었다.
“이 성에서 어가(禦駕)가 모두 친정(親征)하니
‘한 뜰의 산하가 영원히 즐겁고 평안(永樂平)하리라’.
‘대머리가 문묵원(文墨苑)에 오니’
영웅의 절반이 고향으로 돌아가리.”
此城禦駕盡親征
「一院山河永樂平」 [永享山河樂太平](燕王後號永樂)
「禿頂人來文墨苑」 [豪傑更起文墨輩](指姚廣孝)
「英雄一半盡還鄉」 [英雄奉旨著還卿](千忠會)
주원장은 원나라를 멸하고 남경에 도읍했다. 당시 북방 지역과 동북 지역은 여전히 몽골인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에, 조정에서는 북방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북경으로 천도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주원장이 남방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대신들도 대부분 남방 사람이었으며, 강남이 풍요롭고 천도에 드는 비용이 막대했기에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주원장은 아들들을 북방의 요충지에 보내 지키게 함으로써 절충안을 삼았으나, 이는 도리어 훗날 연왕이 제위를 찬탈하는 복선이 되었다.
태자가 일찍 죽었기에 주원장 사후에는 태자 표(標)의 아들인 손자가 황위를 계승했으니 곧 명 혜제(惠帝)이며 연호는 건문(建文)이다. 유백온이 말한 “비록 태자가 적통 후계자이나 문성이 높이 솟으니 손자를 방비해야 한다”라는 뜻은 다음과 같다. 태자 표가 비록 적출이고 정통 후계자였지만, 문성(즉 건문제)이 황위를 계승하게 되며 또한 주의해야 할 대상은 당신의 손자라는 것이다. 이 구절은 유백온이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 만에 자연스럽게 응험되었다.
건문제 즉위 당시 전국에는 주원장이 봉한 20여 명의 번왕(藩王)이 있었다. 그들은 군대를 보유하고 세력을 키워 조정에 위협이 되었다. 건문제는 대신의 건의를 받아들여 ‘삭번(削藩)’을 단행했고, 여러 왕 중에는 폐위되거나 처형되는 이도 있었다. 당시 실력이 가장 강했던 연왕 주체(朱棣 주원장의 넷째 아들)는 자신도 화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정난(靖難)’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남경으로 쳐들어갔다. 스스로 황제가 되어 연호를 영락으로 고치니 이가 바로 명성조(明成祖)다. “제비가 경성으로 날아든다”와 “한 뜰의 강산이 영락으로 평안하다”는 구절은 이 역사적 사실로 응험되었다.
연왕 주체는 한 은사(隱士)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 사람의 이름은 요광효(姚廣孝)이며, 14세에 출가하여 법명은 도연(道衍)이었다. 이 사람의 역할은 마치 주원장 당시 유백온과 같아서 ‘음양술수(陰陽術數)’에도 정통했다. 주체가 황제가 된 후 미녀와 집을 하사했으나 요광효는 모두 거절하고 여전히 승려로 지냈으며, 나중에 요광효는 유명한 《영락대전》 편찬에 참여했다. 이로써 유기가 말한 “대머리가 문묵원에 온다”는 구절은 완전히 그에게 응험되었다.
북방 오랑캐가 생령을 해치니
어가로 친정하여 태평을 얻는다.
실책한 공신은 감히 간하지 못하고
옛 신령이 가려주어 주군의 혼을 놀라게 한다. (토목의 변으로 명 영종이 포로가 됨)
北方胡虜殘生命
禦駕親徵得太平
失算功「臣不敢諫」
「舊靈」遮掩主驚魂 [揀奮靈][土木之變明 英宗被俘]
나라는 ‘서운(瑞雲)’에 7년 눌리고,
오랑캐는 감히 현량한 이를 해치지 못한다.
금룡을 서로 보내어 옛것을 회복하니
밝은 해와 달이 변방을 떨친다. (영종의 동생 경제가 7년간 재위하는데 경제가 병중일 때 복위한다)
國壓「瑞雲」七載長
胡人不敢害賢良
「相」送金龍復故舊
靈明日月「振」邊疆
명조는 ‘어가친정’을 했던 황제가 여러 명 있었다. 명성조 영락제는 전후 다섯 차례 군사를 이끌고 친정하여 타타르와 오이라트를 격파하고 명나라의 변방을 공고히 했으니, 이것이 ‘어가친정하여 태평을 얻는다’는 구절이 가리키는 바다. 이후 오이라트의 세력이 다시 성해져 영종 주기진(朱祁鎮 제6대 황제) 때에 이르러서는 오이라트의 세력이 이미 변경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당시 명나라의 군정 대권은 이미 환관 왕진의 손에 떨어져 있었다. 서기 1440년 오이라트 왕 에센이 군사를 네 갈래로 나누어 중원으로 쳐들어왔다. 군사에 무지했던 왕진은 50만 대군을 동원해 영종을 협박하여 친정에 나섰으나, 결국 토목보에서 대패하여 거의 전군이 전멸하고 왕진은 난군 속에서 죽었으며 영종은 포로가 되었다. “실책한 공신은 감히 간하지 못하고 생령이 가려주어 주군의 혼을 놀라게 한다”고 예언한 것이 바로 영종의 ‘토목의 변’이다.
영종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온 조정이 경악했고 대신들 사이에 주전론과 주화론이 갈렸다. 결국 병부시랑 우겸(于謙)을 필두로 한 주전파가 영종의 동생 주기옥(朱祁鈺 경태제)을 황제로 옹립하고 왕진의 잔당을 처단하는 한편, 각지의 명군을 불러모아 근왕하게 했다. 에센은 영종을 인질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북경성 아래까지 이르렀다. 영종은 사람을 시켜 성을 나와 화의하자고 했으나 우겸은 이를 거절했다. 이에 오이라트 군은 미친 듯이 성문을 공격했고 우겸은 대중을 이끌고 용맹하게 맞서 싸웠다. 사흘 낮밤을 연이어 싸운 결과 에센은 연패하여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물려 돌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종을 풀어주었다.
영종은 돌아온 후 줄곧 기회를 보아 동생 경태제(景泰帝)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그러나 자신이 동생에 의해 구출된 처지였기에 즉시 일을 도모하지는 못했다. 이후 경태제가 병이 들자 영종은 과거 도망파들의 옹립 속에 동화문(東華門)에 이르러 황제를 칭하며, 경태제가 병으로 국정을 돌볼 수 없으니 영종이 복위하여 국사를 처리한다고 선포했다.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남궁복벽’ 또는 ‘탈문의 변’이다. “나라는 서운에 눌려 7년이 길다”는 것은 경태제가 7년 동안 재위했음을 가리킨다. “오랑캐는 감히 현량한 이를 해치지 못하고 금룡을 서로 보내어 옛것을 회복한다”는 것은 영종이 포로가 되었다가 다시 송환된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역주: 명청대 이후 중국 황제는 원칙적으로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에 따하 한 황제가 하나의 연호만 사용했다. 하지만 영종(英宗) 주기진은 특이하게도 두 번 황제에 올랐기에 연호도 두 개를 사용한다.
1. 정통(正統): 1436년 ~ 1449년(처음 황위에 올랐을 때 사용한 연호)
2. 천순(天順): 1457년 ~ 1464년(정변으로 동생인 경태제를 몰아내고 새로 사용한 연호)
영종은 중간에 퇴위했다가 다시 복위했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두 개의 연호를 가지게 되었다.]
원문위치: http://big5.zhengjian.org/node/424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