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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전한 한자의 수수께끼[神傳漢字之謎]

글:우한런(武漢仁)

【정견망 2005년 8月 14日】法輪佛法은 우리에게 眞․善․忍은 최고우주특성이며 가장 근본적인 佛法으로 우주 만사만물이 산생된 근본이 소재하는 곳이며 어떠한 일의 좋고 나쁨 선과 악을 가늠하는 유일한 표준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모든 “천기(天機)” 중에서도 최고의 “천기”이며 모든 비밀(秘密) 중에서 최후의 비밀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므로 眞․善․忍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법보(法寶)이다. 단지 일부 사람들이나 혹은 일부 단체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떠한 개인, 어떠한 단체, 어떠한 종교 교파[불교를 포함하며 불교 중에서는 원래 불(佛)․법(法)․승(僧)을 “삼보(三寶)”라고 부른다.], 어떠한 법문(法輪功을 포함), 어떠한 층차의 생명, 수련자와 대각자에 대해서도 모두 이와 같다.

그렇다면 眞․善․忍이란 한자에 내포된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眞(真,)에 대해 “眞이란 선인(仙人)이 변형(變形)하여 하늘에 오르는 것이다. 從匕(讀bi比,或讀hua化,這裡應讀hua), 從目 從乙(yin隱),八所乘載也.”라고 했다. 眞의 고문(古文)은 인데 이 “眞”은 도가 수련의 중점이다. 도가수련에서는 참말을 하고, 참된 일을 하며 修眞養性을 중시하여 점차적으로 반본귀진(返本歸真)하여 최후에는 眞人으로 수련성취할 것을 요구한다. 도가수련은 丹道功法에 속하며 그들은 안정설로(安鼎設爐), 채약연단(採藥煉丹)을 필요로 한다. 기실 고문의 이란 글자에서 양쪽에 있는 두 개의 부드러운 곡선은 단을 만드는 화로[丹爐]를 표시하며 위에 있는 “匕”는 변화의 의미가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匕,變也。從到人。凡匕之屬皆從匕。”라고 했다. 여기서 到는 倒와 통하므로 즉, 사람(人)을 거꾸로 했다는 뜻이다. 또한 가운데 있는 하나의 횡선(원래 한나라 시대 죽간에서는 口였다.)은 잘 연마된 丹을 의미한다. 道人은 이 丹을 복용함으로써 자신의 번티(本體)를 도체(道體)로 변형(형체에 본질적인 변화가 발생)시킬 수 있으며 이로써 하늘을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곧 바로 眞人(진정한 사람이란 의미로 도가의 진인은 바로 불가의 부처에 해당한다.)으로 될 수 있다.

그는 수련원만하여 하늘에 올라(白日飛昇하여 고층 공간으로 진입) 최후에는 속인의 이 세계를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고문에서 眞자의 본뜻은 다음과 같다. 道人은 장기간의 간고(艱苦)한 수련을 통해 최후에 연단로(煉丹爐) 중의 단을 복용하여 圓滿하고 眞人을 이룬다. 수련의 일은 우주 중에서 가장 중대한 일이지만 그 시대에는 사진기가 없고 촬영용 카메라가 없었기에 그들은 고문의 眞 이라는 글자에 우주 중에서 가장 중대하며 사람마음을 격동시키는 이 역사적 사건의 순간을 기록했던 것이다.

에서 眞이란 글자는 보다 추상화되고 간단하게 변한 것으로 위에 있는 匕는 변화의 의미가 있다. 幾자는 곧 연단(煉丹)하는 화로인데 중간에 있는 한 점은 丹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글자의 본의는 바로 한 “凡”人이 장기간의 간고한 수련을 거쳐 최후에 연단로 중의 그 단을 삼켜 질적인 변화가 발생하여 圓滿하고 “眞”人이 되는 것이다.

眞자의 상부는 바로 직(直)자이다. “直은 바로 보는 것(正見)이다. 從乙、從十、從目。植(「木」字應在「直」字之下,我暫用此字代替),古文直。」(《說文解字》)

직시(直視)란 바로 보는 것(正見)이며 十, 目, 乙이 합하여 直을 이룬다. 또는 十, 目에 一을 합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 直자의 상면은 十으로 하나는 가로선이며 하나는 세로선이다. 이를 잘못 쓴 자전들이 많은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언급하기로 한다. 중간 부분은 目이며 日이 아니다. 十目이란 바로 천목(天目)을 말한다. 천목이 있어야만 사물의 眞象을 바로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佛家에서는 오안(五眼)을 말하는데 우리 인류의 이 육안(肉眼)이 볼 수 있는 사물은 모두 표면적인 가상(假象)과 환상(幻象)에 불과하다.

“꿈, 환상, 거품, 그림자와 같고 이슬이나 번개와 같다(如夢、幻、泡、影,如露亦如電.)”(《금강경(金剛經)》)

천안(天眼)역시 단지 우리 이 물질세계의 眞象만을 볼 수 있으나 혜안(慧眼)과 법안(法眼)은 다른 공간의 진상을 볼 수 있다. 만약 천목의 층차가 더 높아진다면 당연히 본 것도 더 眞에 가깝다. 십(十)이란 많다는 의미이므로 십목(十目)이란 여러 개의 천목이란 뜻이다. 설에 의하면 어떤 대각자가 연마해낸 파리 복안과 같은 천목은 그 안에 많고 많은 작은 천목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그는 한 눈에 모든 공간 층차를 다 꿰뚫어 볼 수 있는데 많으면 많을수록 더 진실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결국 眞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해하기로는 眞이란 바로 수련자가 참말을 하고 참된 일을 해야 하며 거짓(과거에 출가인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다.)을 말하지 않고 기만하지 않으며 설령 잘못을 했을지라도 덮어 감추지 않아야 하는데 이렇게 수진양성을 하여 점차적으로 반본귀진 하고 최후에는 진인으로 수련성취되는 것을 말한다. 당신이 일정한 정도로 眞을 할 수 있으며 자신의 본능(特異功能이라고도 한다)이 다시 나올 수 있으며 천목을 열 수 도 있고 “十目으로 보니 미세한 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처럼 될 수 있는데 당연히 당신이 보는 것은 더욱 眞에 가깝다.

眞의 반대 글자는 가(假), 위(僞), 참(僭) 등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가(假)는 眞이 아니다. 從人,假聲。一曰,至也。《虞書》曰:假於上下。)”라고 씌어 있다. 가는 거짓으로 眞이 아니라는 의미이며 사람 인(人) 변이다. 위(僞)는 속일 사(詐)의 의미로 사람 인변이다. 참(僣)이란 글자도 역시 거짓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 세 글자는 모두 사람 人변에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바로 거짓을 말하는 것이 사람의 특징이자 전리(專利)라는 것이다! 물론 동물도 죽은 시늉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아주 드물다. 사람만이 거짓말을 하고, 거짓 일을 꾸미고, 거짓 소식을 만들고 가짜 상품을 만들며 거짓으로 문서를 꾸미고 ……. 물론 이것은 단지 末法末劫시기에 변이된 인간일 뿐이다.

기실 중국의 古人들은 약속을 천금과 같이 중하게 여겼으며 심지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바꾸지 않았다. 강산이 변해도 인재는 나오며 지금 시기에 유독 賢人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중국 내의 파룬궁 수련생들은 벌금을 물려도 좋고, 직장에서 퇴출시켜도 좋으며, 구타를 하건 감옥에 가두건 상관없이, 심지어 생명을 걸고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거짓 일을 하지 않으며 거짓 보증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眞이란 한 글자를 실천한 것이다. 이런 말법말겁시기에 이 얼마나 고귀하며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어떤 사람은 말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큰일을 이룰 수 없다.” 이 논리에 따른다면 이런 사람이 하는 일이 크면 클수록 피해를 입는 사람도 더 많아지지 않겠는가?

가령 대약진운동에서 무슨 “한 무(畝)당 만근을 산출했다”든가 무슨 “영국과 미국을 추월한다”든가 혹은 “삼년의 자연재해”라든가, “안정은 일체를 압도한다”라든가 “6.4때 천안문 광장에서 한명도 죽이지 않았다”든가, “지금은 중국에서 인권이 가장 좋은 시기라든가” 등등은 모두 中共惡黨(중공에는 중앙선전부라고 하여 전문적으로 거짓선전을 담당하는 부서가 있다.)이 각종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공악당은 바로 이런 거짓말로 평화시기에 8천만 명의 중국인을 죽였는데 이는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총수를 능가하는 것이다! 중공악당은 마찬가지 거짓말로 지금 파룬궁을 탄압하고 있다! 그들은 총칼로 사람을 죽이는 외에 붓으로도 사람을 죽이고 있다.

선(善)은 “선(善)은 길(吉)이다. 從□(即「競」,簡體字為「競」,讀jing),從羊。此與義、美同意。善,篆文善,從言.”(《說文解字》)

여기에서 보듯이 선(善)은 양(羊)+언(言)이다. 그런데 2개의 言은 口를 이루는 까닭에 결국 선자는 羊 과 口에서 나왔다. 전서의 善자는 羊과 言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금 우리가 쓰는 善자도 사실은 羊과 言에서 나왔으나 단지 言자가 약간 변형되었을 뿐이다.

마왕퇴에서 백서《老子》가 나온 전국시기에 이미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쓰기 시작했다.

한편 선을 吉로 푸는 것은 한 사람의 선량(善良)은 길한 일이며 경사스런 일이고 아주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 사람이 惡하고 凶하다면 이는 위험한 일이며 시대에 역행하고 아주 나쁜 일이다.

그렇다면 왜 羊과 言이 善이 되는가?

고인들은 동물 울음소리의 선과 악을 변별하는데 아주 주의를 기울였다. 공자는 “오소리의 소리는 흉악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양은 아주 순한 가축이다. 당신이 때려도 “메 메”하고 울며 욕을 하거나 심지어 죽일지라도 역시 “메 메”하고 울뿐이다. 기독교의《성경》에서도 늘 양을 비유로 들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善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해하기에 선이란 곧 수련자가 수련 중에서 산생해낸 일종의 慈悲心으로 그는 중생이 모두 고생스런 것을 보고는 病者와 가난한 자와 弱者를 동정하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남을 돕기를 즐기면서 시시때때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이해하며 선타후아(先他後我) 무사무아(無私無我)로 명리득실을 따지지 않으며 손해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또 그러므로 중생을 널리 제도하여 철저하게 苦海를 벗어나 저 행복의 피안으로 도달하게 하려는 것이다.

선과 반대되는 글자는 惡이다. 악은 허물이란 의미로 죄악이나 죄과를 의미하는데 마음 심(心)변이다. 악과 가까운 단어에 흉(凶)이 있는데 이 글자는 원래 함정에 빠진 모습을 형상한 것이다. 현재 인류의 흉과 악은 모두 중공악당에 집중되어 있다. 가령 그들은 “당의 이익은 일체보다 높다”는 구호 하에 모든 인민들의 이익과 생명을 희생으로 해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며 사람을 전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악이다. 현재 이런 사악한 사상의 유독이 매우 깊고 넓어서 80%의 사람들이 전쟁 중 부녀와 아동, 포로를 사살할 수 있다는 설문에 찬성하였다! 중국인들이 공산악당의 당문화에 세뇌되어 살심(殺心)을 품은 것이 이렇게 심하다!

《說文解字》에서는 忍을 能(곰을 의미하는 熊의 원래 글자)이라고 풀었다. 왜냐하면 곰은 원래 신체가 건장하고 성격이 강인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忍을 나약하고 무능한 표현으로 여긴다. 《說文解字》의 설명은 아주 분명하게 잘 참을 수 있는 사람을 곰처럼 능력 있는 호걸로 간주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참는가? 忍은 마음 心 부에 있으니 바로 마음속에서 참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능히 참아낼 수 있음[能耐]과 인내(忍耐)는 서로 통하는데 우리가 인내할 수 있다면 곧 아주 잘 참아낼 수 있다.

인내(忍耐), 용인(容忍)은 투쟁이나 폭력과 반대된다. 그러므로 참을 수 있음은 흉금과 도량이 넓고 함양이 있으며 식견이 있다는 표현이며 의지가 견강(堅剛)한 표현으로 참아낼 수 있고 능력이 있다는 표현이지 나약하고 무능한 표현이 아니다. 또 仞이라는 글자도 있는데 이 역시 인(忍)과 통한다.

한편 위에는 刀, 아래는 心인 글자(刀+心)가 있는데 의미는 怒하는 마음이다. 이는 인(忍)과는 단지 한 획의 차이인데 두 글자의 차이는 바로 하나의 丶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인(忍)에는 마음[心]과 칼날[刃]이 있으니 만약 당신이 참지 못한다면, 함부로 화를 내고 사람을 욕하며 폭력을 휘두르고 자칫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유가(儒家)에서는 忍에 대해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색(色)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을 요구하였다.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대장군 한신은 대인지심(大忍之心)이 있어서 어릴 때 남의 사타구니 밑을 기어나가는 수모를 당했다. 예수도 자신의 제자들에게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내밀라고 가르쳤다. 자고이래로 대각자, 성인과 층차가 비교적 높은 사람들은 속인과는 달리 忍에 대하여 일치된 관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忍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해하기로 忍이란 수련자가 고생 중의 고생을 겪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곤란과 굴욕을 당할 때에도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을 먹어도 대꾸하지 않는 것이며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는 것이며 선으로 악을 교화하고 덕으로 원한을 갚는 것이다. 수련과정 중에서 忍은 씬씽(心性)의 중요한 한 방면이며 인은 수련자가 층차를 제고하는 관건의 하나이다. 심지어 眞과 善보다도 더 닦기가 어렵다.

중국에 있는 수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은 감옥, 노교소, 세뇌반, 정신병원 중에서 자신의 명예, 지위, 자유, 재산, 행복, 가족정과 존엄 심지어 생명마저도 아끼지 않고 忍을 실천하고 있다.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렇지만 중국의 파룬궁 수련생들은 의연히 해냈다! 그들의 대선대인(大善大忍)은 진실로 천지를 뒤흔들고 귀신도 감동시켰다. 세상에서 육지보다 넓은 것이 바다라면 바다보다 더 큰 것은 하늘이고 하늘보다 더 큰 것이 있다면 바로 파룬궁 수련생들의 도량이다! 그들의 넓고 큰 흉금은 일체를 포용하고 참아낼 수 있다.

忍과 반대글자는 鬪(=鬥, 鬦)이다. 글자를 살펴보면 두 사람(士)이 무기를 뒤에 두고 싸우고 있는 형상이다. 여기서 士는 원래 하급귀족이나 무사를 뜻하는 단어이며 좌우에서 한 명씩 상호 대립하고 있다. 그렇다면 鬪란 무엇인가? 현대적으로 풀이하자면 바로 투쟁이다.

사악한 공산악당이 선전하는 것이 바로 투쟁의 철학이다. 그들은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보며 천지와 투쟁하고 사람과 투쟁하니 그 즐거움이 끝이 없다고 하면서 투쟁을 통해서만 진보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中共惡黨은 “8억 인구에 투쟁하지 않고 되겠는가?”라고 주장하면서 투쟁 속에서 지금까지 8천만 명 이상을 죽였고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즈는 전 국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00만 명을 학살하였다. 과연 공산악당에 대해 말하자면 즐거움이 끝이 없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인민들에게는 도리어 끝없는 고통이자 끝없는 재앙의 연속이었다.

여러분은 眞․善․忍이야말로 우주의 최고특성임을 알고 있다. 그 아래의 일정한 공간 층차 중에는 두 가지 물질이 分化되는데 위에서 아래에 이르기까지 미시에서 거시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공간을 관통한다. 이렇게 하여 태극과 음양의 이치가 산생되었다. 더 아래로 내려가면 이 두 가지 물질은 더욱 대립되며 차이가 점점더 커지는데 이리하여 相生相剋의 이치가 생겨났다. 眞과 假, 善과 惡, 忍과 鬪는 모두 가장 기본적인 상생상극의 개념과 범주에 속한다.

그렇다면 眞善忍과 정반대되는 범주는 假惡鬥이다. 假惡鬥는 바로 중공악당에게서 집중적으로 체현된다. 당신이 眞善忍을 제기하기만 하면 마치 그들 가문의 조상묘를 파헤친 것처럼 원수로 여긴다. 왜 그런가? 물과 기름은 섞일 수 없듯이 그들은 假惡鬥에서 일어났기에 眞善忍과는 같은 하늘아래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당신이 만약 眞善忍을 한다면 그들은 살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眞善忍이 그들을 자극하지 않아도 그들은 도리어 원한을 품는다.

假惡鬥는 비록 어느 한 시기에 아주 대단한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그러나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며 사실 하나의 眞은 백가지 假를 제어할 수 있으며 하나의 善은 백 가지 惡을 제어할 수 있고 하나의 忍이 백 가지 鬪를 제어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일시적이며 표면적으로 기세등등한 假象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른바 道가 한 자 높아지면 魔는 한 장 높아진다는 말은 완전히 착오적인 것으로 실제는 정반대이다. 마가 한 자 높아지면 도는 한 장 높아지는 것으로 도는 영원히 마보다 높으며 眞善忍은 영원히 假惡鬥보다 높다. 眞善忍은 우주 大穹에서 무적의 法寶이다! 중국의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해 말한다면 만약 당신이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바른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면 흑수(黑手), 썩은 귀신, 사악한 마, 악경, 나쁜 사람 등 요마귀괴(妖魔鬼怪)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佛道神이 철저하게 이런 나쁜 무리들을 수습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종합해서 말한다면 眞善忍이란 한자 중에 내포된 함의는 종종 수련과 관련되며 더욱이 도가수련과 관련이 있는데 어떤 것은 法輪佛法과 관련된다. 진(眞), 가(假), 선(善), 악(惡), 인(忍), 투(鬪)[이외에도 호(好), 괴(壞), 정(正), 사(邪), 도(道), 덕(德), 법(法) 등]은 佛法(혹은 道法)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며 철학, 문학, 역사, 윤리, 언어학, 사회학 등의 기본개념이기도 하다. 이것은 神이 최후 우주의 正法을 위하여, 法輪佛法의 문화적 기초를 목적 있게 다져주기 위하여 우리에게 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왜 神이 전한 漢字라고 말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문장발표 : 2005년 8월 14일
문장분류 : 신전문화(神傳文化)
원문위치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5/8/14/3344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