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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임칙서의 사위 고르기

작자: 화한(華翰)

【정견망 2009년 7월 19일】 임칙서(林則徐)는 중국 근대에 외국 침략자들에 대항해 아편을 소각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20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가경(嘉慶) 16년(1811년) 진사가 되어 한림원 편수를 지냈다. 가경 25년부터 절강, 강서, 호북, 하남, 산동 등에서 관리로 지냈으며 군정, 세금, 소금, 하천공사, 수리 등등의 일을 맡았다. 그는 실제조사를 중시했으며 노련하여 공적이 있었고 나중에 순무(巡撫 역주: 청나라 때 한 성을 책임진 지방장관)로 승진했다.

도광 17년 (1837년) 임칙서가 호광(湖廣)총독으로 부임했을 당시 영국 아편이 이미 많이 들어와 있었는데 이에 임칙서는 아편을 엄금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 다음 해 도광황제는 그를 흠차(欽差)대신으로 임명했고 광동으로 가서 아편을 조사해 금지시키라고 했다.

그는 양광(兩廣) 총독 등정정(鄧廷楨)과 힘을 합해 아편을 엄금했으며 아편을 밀수하는 상인과 뇌물을 받는 공무원을 처벌했다. 또 영국, 미국의 상인들을 다그쳐 아편 237만 여근을 바치게 한 후 강어귀에서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웠다. 또 해안방어를 엄밀히 해 영국 제국주의의 무장침입을 억제했다. 나중에 조정의 투항파의 배척과 모함을 받아 신강에 유배되었고 아편 금지는 실패로 돌아간다.

임칙서는 일생동안 청렴했으며 식구들에게도 이렇게 하기를 요구했다. 그는 일을 하기를 좋아했고 고생을 기꺼이 하는 사람이었다. 사위를 고르는 가정 대사에서도 그의 이런 특징이 충분히 반영되었다. 복건 출신의 관료 후보 중에 심보정(沈葆楨)이 있었는데 자는 한우(翰宇) 또는 유단(幼丹)이라고 했다.

도광 연간에 임칙서가 강소(江蘇)에서 순무를 지낼 때 심보정은 아직 서생이었다. 그는 임칙서의 관아에 있으면서 글 쓰는 서기를 맡고 있었다. 당시 임칙서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어느 날 섣달 그믐에 관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설을 쇠러 집으로 갔는데 심보정만이 혼자 남아 공문을 쓰고 있었다. 임칙서는 마침 공교롭게 심보정의 서실 입구를 지나다가 어떤 사람이 혼자 방에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오늘은 섣달 그믐이다.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 모임을 가지는데 자네는 왜 혼자 여기 남아 있는가?” 심보정이 공경하게 대답했다. “아직 일을 다 마치지 못하여 돌아갈 수 없습니다.”

임칙서가 심보정을 한참 보더니 말했다. “나한데 상주문이 하나 있는데 오늘 밤에 써서 보내야 한다. 자네가 내 대신 써 주게나.” 그 상주문은 무려 만자에 달하는 것이었지만 심보정은 두말 없이 촛불을 밝히더니 베껴 쓰기 시작했다.

삼경이 되어서야 겨우 상주문을 다 베껴 썼다. 심보정은 또 진지하게 상주문을 한번 다 보고 잘못 베끼거나 혹 빠진 글자가 없는지 확인한 후에야 임칙서에게 바쳤다.

심보정은 직무가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임칙서는 상주문을 대충 한번 보더니 말했다. “필적이 너무 거칠군, 다시 쓰게나!”

심보정은 임칙서의 말을 듣고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상주문을 들고 나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베껴 쓰기 시작했다. 그가 진지하게 다 썼을 때 밖은 이미 하늘이 훤히 밝아왔다. 심보정이 다시 쓴 상주문을 바치자 임칙서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세배하는 식구, 손님들이 다 모였다. 임칙서는 매우 기뻐하며 대중들에게 말했다. “오늘 신년을 축하하는 마당에 마땅히 내가 좋은 사위감을 얻은 것을 축하해야 하오.”

사람들은 갑작스런 말을 듣고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임칙서는 심보정을 앞으로 불러 사람들에게 소개하고는 예를 올리게 했다. “그 사람이 바로 내 사위요!” 하면서 그가 어떻게 상주문을 쓰게 하는 방법으로 심보정의 성품을 시험했는지 설명했다.

임칙서가 심보정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부지런히 힘써 일하는 것과 갑작스런 일을 당해도 조급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일을 대하는 품격이었다. 임칙서 자신의 본래 성격이 비교적 급하고 쉽게 화를 내는 편이었다.

그는 한때 일부러 “제노(制怒 역주: 노여움을 억제한다는 뜻)”라는 두 글자를 써서 편액으로 만들어 방에 걸어놓아 수시로 자기를 깨우치며 조급함과 쉽게 화를 내는 버릇을 범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마 바로 이런 원인 때문에 특히 심보정의 급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 품덕을 칭찬했을 것이다.

심보정은 도광 27년(1847년) 진사에 합격했으며 조정에 들어가 관리가 되었다. 나중에 관직이 강서(江西) 순무, 양강(兩江) 총독에 이르렀다.

(『청사(淸史)』기록에 근거함)

발표시간 : 2009년 7월 19일
정견문장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9/7/19/6059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