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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이야기: 왕칙(王敕)

작자: 감은(感恩)

【정견망】

명나라 한림(翰林)을 지낸 왕칙(王敕)은 자가 운지(雲芝)이며 또는 무륜(懋綸) 혹은 가유(嘉諭라고 했다. 산동성 역성(曆城) 사람이다. 명 헌종(憲宗) 성화(成化) 20년(1484년) 3등(探花)으로 과거에 급제했다. 그가 아직 서생이었을 때 와우산사(臥牛山寺)에서 공부를 하는데 땅에서 불빛이 은은히 비치는 것을 보았다. 왕칙이 호기심으로 땅을 파보자 돌상자가 하나 있었다.

그 속에는 두 권의 책이 있었다. 왕칙이 이때부터 책에 의지해 수련하자 초능력이 생겨났고 미래의 길흉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일생에는 기이한 일이 빈번했다. 한번은 그가 승려 친구와 함께 산에서 구기자를 채취한 적이 있었다. 친구가 먼서 하산해 처소에 돌아와 문을 여니 왕칙은 이미 집안에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

또 한 번은 왕칙이 십여 명과 더불어 나무를 하러 갔는데 각자 따로 길을 가기로 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 십여 명의 사람이 돌아온 후 모두들 왕칙을 보았다고 했다. 왕칙은 하남, 사천에서 한때 독학관(督學官)을 지냈는데 한번은 과거 시험을 볼 때 많은 수험생들은 왕칙이 동시에 각개 시험장에 나타난 것을 보았다.

어느 날 왕칙은 흰 구름을 보고 사람을 시켜 말을 타고 쫓아가게 했다. 과연 얼마 후 그 흰 구름 조각이 땅에 떨어져 돌이 되었는데 눈처럼 희었으며 삶아서 먹어보니 꿀같이 달았다. 왕칙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이 운모다”라고 말했다.

왕칙은 자신이 본 적이 없는 고대 기물(器物)에 대해 보기만 하면 그 상세한 내용을 알았으며 이 물건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난 것인지 알았고 나중에 고증해보면 옳지 않은 것이 없었다.

왕칙이 일찍이 산속에 있을 때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여 기이한 돌을 얻어 백천서원(百泉書院)에 두게 했다. 또 한 번은 고대 유적지를 발굴해 자색 벼루(紫石硯) 두 개를 얻었다. 각자 원앙 한 마리가 새겨져 있는데 자웅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왕칙은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땅에 체 구멍 같은 것이 있어 무릇 기이한 보물이 있으면 다 볼 수 있다.”

왕칙과 함께 구기자를 채취했던 승려가 임종 할 때의 일이다. 왕칙이 내세에 무엇을 하겠느냐고 묻자 승려가 대답했다. “나는 부귀를 겸했으면 좋겠네.”

왕칙이 대답했다. “당신은 번왕(藩王-작은 지역의 왕)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하고는 붉은 붓으로 그의 등에 “촉왕(蜀王)”이라고 썼다. 얼마 후 촉왕에게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아이는 평생 등에 “촉왕(蜀王)”이란 글자가 은은히 새겨 있었다.

왕칙의 친구 한사람이 중한 병에 걸려 사람들은 그가 곧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칙이 방문하자 식구들이 환자의 병이 어떤지 물었다. 왕칙이 말했다. “공은 지금 죽지 않습니다. 어느 날이 되면 한 마리 학이 마당에 내려올 텐데 그때 떠나갈 것입니다.” 나중에 과연 그러했다.

정덕(正德) 2년(1507년) 왕칙은 남경에 가서 관직을 맡았다 정덕 4년(1509년)에 파직되어 돌아왔으며 정덕 6년에 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기 전 죽을 날을 미리 알고 편안히 떠났다. 떠나는 날 네 개의 성문 모두에서 왕칙이 도인 같은 우의(학의 깃털로 만든 옷)를 입고 떠나는 것을 보았다.

당시 고향의 어떤 사람이 장안에 있었는데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 우연히 나팔 부는 사람이 남쪽에서 오는 것을 보았는데 자세히 보니 왕칙이었다. 다가가서 물었다. “공은 파직된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이곳에 오십니까?”

왕칙이 말했다. “조정에서 나를 불렀으니 가야합니다. 하지만 내가 떠나올 때 당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내 궤짝 안에 책이 몇 권 있는데 다른 사람이 보면 안 되니 좀 태워주시기 바랍니다.” 고향 사람이 집에 돌아온 후 비로소 그날은 바로 왕칙이 세상을 떠난 날임을 알았다.

그 외에 언급할만한 것은 왕칙이 관리로 지낼 때 늘 일부 사람의 공격을 받았는데 그의 명예에 결코 좋지 않게 하는 것들이었다. 왕칙은 수련을 하고 정직하므로 명나라 조정 후기에 풍기가 이미 점점 나빠지고 있었으므로 일부 사람들의 비방을 받는 것은 기이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결코 모든 사람이 기편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명나라 중국의 가장 유명한 유학자의 한사람인 왕양명은 평소 그에게 탄복했다. 또 유명한 장학명(張鶴鳴) 상서 역시 일찍이 전을 지어 왕칙을 찬양한 적이 있다. 이런 것들로부터 본다면 왕칙의 일은 허무맹랑한 거짓은 아님에 틀림없다.

(자료출처 <지북우담 池北偶談> 등)

발표시간:2010년 8월 8일
정견문장: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10/8/8/6776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