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라선(羅善)
【정견망】
비굉(費宏)은 자(字)가 자충(子充), 호(號)는 아호(鵝湖)로 연산(鉛山 지금의 강서성 연산현 동남쪽) 출신이다.
명나라 성화(成化) 23년(1487년) 과거에 장원급제해 한림원 편수가 되었고 나중에 예부상서(역주: 조선의 예조판서에 해당)까지 이르렀다. 영왕(寧王 역주: 명태조 주원장의 후손으로 나중에 반란을 일으킴) 주신호가 딴 마음을 품고 비굉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비굉은 영왕을 따르지 않았다. 때문에 모함을 받아 관직을 그만두었다. 나중에 주신호의 반란이 실패하자 다시 중용되었다. 비굉은 조정에 들어와 정치를 보좌하며 세종(世宗)에게 지난날의 폐단을 혁파할 것을 권했다. 나중에 그는 재상이 되었다. 가정(嘉靖) 6년(1527) 그는 조정 내부의 알력으로 가택에 연금되었다. 가정 14년에 다시 회복되어 조정에 들어왔다. 그는 평생 세 차례에 걸쳐 입조했다. 그는 위인됨이 평이하며 정책을 느슨하게 유지하고 후진을 발탁하기 좋아했다. 때문에 조정 대신들의 존경을 받았다.
비굉(費宏)이 장원급제해 입조하고 재상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부친 비요(費瑤)의 엄격한 교육이 있었다. 비요가 아들에게 얼마나 엄했는지 다음 일화로 알 수 있다.
한번 비굉이 한가할 때 함께 시험에 붙은 친구와 바둑을 두다가 싸움을 하게 되었다. 바둑을 두다가 언쟁이 일어나 매우 불쾌하게 되어버렸다. 비굉이 잠시 흥분하여 발끈한 김에 친구의 따귀를 때렸다. 친구는 뺨을 맞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 일이 멀리 있던 부친 비요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비요는 즉시 편지를 한통 써서 대나무 회초리 하나를 함께 부치며 비굉에게 친구를 찾아가 사죄하고 친구더러 죽편으로 때려달라고 부탁하라고 했다. 비굉은 편지를 받자마자 즉시 부친이 시킨 대로 편지와 죽편을 갖고 친구 집에 가서 사죄했다.
원래 친구는 화가 풀리지 않아 비굉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비굉은 부친이 편지에 쓴대로 죽편을 들고 스스로를 때리기 시작했다. 탁탁탁 연달아 세 번 때렸다. 그러자 친구가 집에서 이 소리를 듣고는 뛰어 나와 비굉을 끌어안고 끝없이 통곡했다.
이렇게 되자 비굉이 영문을 몰라 머리를 긁적이며 놀라 물었다. “이는 순전히 내 잘못 때문인데 자네가 왜 그리 슬피 우는가?”
친구는 감동하여 매우 괴로워하며 비굉에게 말했다. “자네에겐 부친의 엄격한 감독과 교육이 있는데 우리 부친은 일찍 세상을 떠나셨네. 나도 자네처럼 시시때때로 부친의 감독과 교육을 받고 싶지만 어찌 가능하겠는가? 이 때문에 특히 상심한 것일세!” 하고는 또 대성통곡을 했다. 이는 정말 특별한 일이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다시 옛날처럼 잘 지냈고 친형제같이 지냈다.
비굉은 바로 부친의 엄격한 교육 하에서 성장했던 것이다.
(출처: 《명사(明史)•비굉전(費宏傳)》 《퇴아수필(退庵隨筆)•가계(家誡)》)
http://www.zhengjian.org/2016/04/16/152216.家教珍事:父親費璠寄板打狀元,奇事出奇況.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