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라인(羅忍)
【정견망】
유곤(庾袞)은 자가 적보(叔褒)로 서진(西晉) 초기 사람이다. 가정적인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근검하고 공부를 좋아했다. 그는 부귀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명목황후(明穆)의 백부다. 그의 백부, 숙부는 모두 높은 벼슬에 올랐다. 오직 유곤의 부친만 지조가 있어서 청빈을 감내하고 평소에 아들에게 농사를 지어서 스스로 노동으로 먹고 살라고 가르쳤다.
부친의 엄한 교육 덕분에 유곤은 아주 부지런했고 예의를 잘 알았다. 부친 살아생전에 유곤은 부친과 함께 노동을 하며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여전히 스스로 노동을 하고 직물을 짜거나 광주리를 만들어 팔아 모친을 부양했다. 유곤의 모친은 아들이 너무 힘들게 일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말했다. “나는 맛난 거 안 먹어도 되니 간소하게 먹으면 된다.” 유곤은 모친에게 “어머님이 잘 드시지 못하면 제가 어찌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모친은 아들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진(晉) 함녕 연간(275-279)에 역병이 유행해 죽는 사람이 즐비했다. 유곤의 두 형은 다 병으로 죽었고 둘째형 유비는 병에 걸려 온몸에 병이 들었다. 이때 유곤의 부친이 아직 살아있을 때였다. 역병을 피하기 위해 유곤의 가족들은 모두 밖에 나가 거주했다. 유독 유곤만이 피하지 않았고 집에 남아 형을 돌보기를 원했다. 당시에는 이 병을 고칠 수 없었기에 부친과 형들은 유비의 병이 심한 것을 보고 나을 가능성이 없다며 빨리 피하라고 했다. 그러나 유곤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주야로 형 곁을 떠나지 않으며 시중을 들었다. 이렇게 몇 개월을 유지 했다. 역병이 물러간 후 식구들이 돌아와보니 두 형제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유곤은 감염되지 않고 유비는 건강을 회복해 있었다.
유곤은 가난함을 감수했고 성품이 고상했다. 그 영향을 받아 그의 전처 순씨, 후처 낙씨는 비록 귀족 출신으로 부귀한 삶을 살았었지만 유곤에게 시집 온 후 화려한 옷과 천금의 재산을 포기하고 남편과 함께 고생을 겪으며 서로 존경하며 살았다. 이런 것은 모두 유곤이 그녀들에게 준 영향과 교육 덕분이다.
유곤은 가정에서의 모범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 질서를 지켰을 뿐 아니라 후배들의 교육에도 힘쓰고 예절을 알며 노동으로 매우 고생스러웠다. 사서에서는 그를 칭찬하기를 “여러 고아와 과부를 인의로 돌보고 두텁게 대했으며 아랫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가르쳤다. 성인은 그런 행동을 체득하게 했고 어린이는 외로움을 잊었다.”
큰 돌림병이 돈 후 그는 인자한 마음에서 일가친척 중 여러 고아를 거두어 키웠다. 때문에 사서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유곤의 외조카 중에 곽수(郭秀)라는 고아가 있었다. 유곤이 그를 거두었고 매우 잘 대했는데 옷을 입혀주고 먹여주는데 늘 그를 우선했다.
또 형님이 일찍 죽었기에 유곤은 형의 딸인 유방(庾芳)도 맡아 길렀다. 유방이 자라서 출가할 때가 되어 유곤은 혼사를 준비했다. 조카딸을 위해 많은 옷가지 등을 준비했는데 특히 싸리나무를 잘라 직접 삼태기 빗자루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조카들을 전부 불러 모아 순서대로 서게 하고는 질녀 유방에게 훈계했다. “너는 어려서부터 고아였기에 평소 집에서 게으르건 욕심을 부리건 숙부인 나로서는 야단조차 치지 않았다. 이제 네가 곧 출가해서 시어머니를 모셔야 할 것이며 집안을 쓸고 닦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것이 본분이니 내가 너에게 특별히 삼태기와 빗자루를 만들었다. 물론 별로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나는 네가 온순하고 겸손한 좋은 며느리가 되기를 희망하며 늘 부지런히 일하고 게으르지 말기를 당부한다.”
유곤은 바로 이렇게 독특한 방식으로 조카딸을 교육했고 다른 조카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교육했다. 특히 모든 조카들을 불러 모아 그 자리에서 유방에 대한 가르침을 듣도록 했는데 한꺼번에 교육시킨 것이었다.
물론 유곤의 교육은 후배들에게 설득력이 있어서 자기의 말뿐 아니라 자기에게서 나오는 행위였다. 유곤은 비록 빈곤했지만 늘 수신양성을 잊지 않았다. 조정에서 누차 관직을 하사했지만 그는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 응답하지 않고 시종 숭고한 지조를 유지했다.
그는 평소 자신에게 잘못이 있으면 관용을 베푼 적이 없다. 한번은 그가 술을 마셔 취했는데 나중 매우 후회했다. 부친의 묘소 앞에 가서 스스로에게 곤장 30대를 때려 징계했다. 이 정도로 그는 자신에 대한 요구가 아주 엄격했다.
(출처: 《진서(晉書)․유곤전(庾袞傳)》)
문장위치: http://www.zhengjian.org/2016/05/12/15278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