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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유유 : 황제의 두 은인의 기상

작자/ 묵안(默安)

【정견망】

1. 어려서 고생한 한선제의 애민정신

한나라 소제(昭帝) 유불능(劉弗陵)은 8살에 한무제(漢武帝)를 계승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불과 23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면 누가 대통을 이었는가? 결국 위태자 유거(劉據)의 손자인 유순(劉詢)이 황제가 되니 그가 바로 한선제(漢宣帝)다.

유순은 어려서부터 고생을 겪으며 자랐다. 원래 위태자는 억울하게 ‘역모’의 누명을 쓰고 목을 매 자살했다. 그의 부인인 사량제와 두 아들 역시 동시에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어린 손자는 태어난 지 불과 보름밖에 안되어 감옥에 갇혔다. 원래 이름을 유병이(劉病已)라 했고 나중에 유순이라 불렀다. 이 아이에게 복이 있었던지 마음씨 좋은 감옥장 병길(丙吉)을 만난다. 그는 아이를 불쌍히 여겨 여자 죄수들 중 두 명을 뽑아 젖을 먹이게 했다. 얼마 안가 그들을 비교적 좋은 지방의 감옥으로 옮겨 모두 살아남게 했다.

나중에 방사들이 한무제(漢武帝)를 선동해 장안 감옥 안에 천자의 기운이 있으니 유씨의 강산이 불안하다고 했다. 이에 무제는 명을 내려 감옥의 죄인들을 전부 죽이게 했다. 다행히 유순은 이미 지방 감옥으로 옮겨간 후였다. 조정 관리가 와서 조사하자 병길은 엄숙하게 거절했다. “폐하의 증손자가 여기 갇혀 있소, 일반적인 백성들도 억울함을 당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이 아이는 절대 안되오!” 문을 가로막으며 관리를 쫓아냈다.

관리는 조정에 돌아가서 병길의 언행을 한무제에게 보고했다. 무제는 측은함을 느껴 즉시 대 사면령을 내렸다. 나중에 아이의 외조모와 외숙부가 나서 유순을 감옥에서 구출해냈다.

무제 사후 제위를 이어받은 소제는 아이에게 작은 할아버지에 해당했다. 소제가 아이를 받아들여 궁궐에서 키웠다. 당시 액정장관(掖庭長官)이 장하(張賀)였는데 위태자의 옛부하라 아이를 잘 대해주었다. 또 자비로 아이를 가르쳤다. 소제가 사망할 때 아이는 이미 18세 청년이 되었다.

당시 곽광(霍光)이 실권을 쥐고 황위 계승자를 찾는 일을 책임지고 있었다. 병길이 이 기회를 잡아 곽광을 만나 유순의 정황을 알려주었다. 또 그가 간난의 세월을 보냈고 지식과 예의를 알며 쓸만한 사람이니 그를 황제로 삼자고 했다.

선제가 처음 즉위했을 때 백성들의 질고를 걱정하며 늘 말했다. “백성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탐관오리와 가혹한 관리다. 탐오하지 않고 억울한 일만 없으면 아주 좋겠다.” 그는 특별히 태수와 현령 선발을 중시하여 뇌물을 받거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시키는 일은 조금도 용서치 않았다.

매년 가을에 죄수를 처단할 때면 직접 대전에 나아가 사건을 친히 심문했으며 억울함이 없도록 노력했다. 때문에 한나라에 청빈하며 남에게 죄를 씌우지 않고 겸허하고 부지런하여 백성들을 위해 생각하는 관원이 많았다. 많은 청빈 관리는 한나라 선제 때에 나왔다.

2. 황제의 두 은인의 기풍

병길은 한선제를 보호하고 추천했던 사람이다. 그는 어사대부(御使大夫)가 된 후 과거의 일을 절대 말하지 않아 조정의 대신들도 황제의 숨은 뒷일을 알지 못했다. 한때 옥중에서 젖을 먹여 키웠던 여죄수 측씨가 자기의 공로를 알아달라고 상소하여 병길에게 증인이 되어 달라고 함에 비로소 이 일이 알려지게 되었다.

선제가 이 일을 알고는 매우 감동해 자신이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상을 내렸다. 병길은 특별히 박양후(博陽侯)에 봉했다. 그러나 병길은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조금도 공이 없는데 이렇게 두터운 상을 받겠습니까?”

선제는 “내가 그대를 제후에 봉한 것은 덕에 대한 보답이니라. 내가 은혜를 알고도 보은하지 않으면 무정하고 의리 없는 사람이 된다.”

병길은 비록 작위를 받았지만 여전히 예전처럼 겸허하게 근신했으며 절대 자기 공을 내세우거나 교만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승상이 되었다.

그는 특히 다른 사람의 작은 과실에 용서할 줄 알았다. 예컨대 승상부의 마차대장이 술을 좋아했다. 한번은 병길을 모시고 나갔는데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수레에 크게 토하여 수레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사람들은 그를 쫓아내려고 했으나 병길은 동의하지 않았다. “취했다고 쫓아내면 그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얼굴을 들겠소? 그를 용서하고 더럽혀진 수레를 좀 치우고 씻으면 그만 아니겠소?” 이 술꾼은 변방에 대한 상황을 매우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나중에 큰 공을 세웠다.

하루는 병길이 길을 가는데 마침 황제가 출행하려는 때라 길에 경계가 삼엄했다. 한무리의 무뢰한들이 큰 길 한쪽에서 칼을 들고 싸워 사람이 죽고 피가 낭자했다. 하지만 아무도 상관하는 사람이 없었다. 병길도 못본 채 했다. 갑자기 한 마리 누런 황소가 옆에서 뛰어들더니 씩씩거리며 혀를 밖으로 내밀었으며 흰거품을 물었다. 알고보니 목동이 그 녀석을 추적하고 있었다.

병길은 얼른 수레서 내려 목동을 가로막으며 왜 그렇게 멀리 쫓아가느냐고 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쫓아가는지 매우 관심있게 물었다.

부하가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승상께선 죽어라 싸우는 사람을 돌보지 않고 헐떡이는 소에 관심을 가지니 어찐 일입니까?”

병길이 말했다. “칼로 싸우는 사람은 장안을 맡은 경조윤(역주: 수도인 장안을 책임지는 관리)의 책임이니 체포할 사람을 체포하고 죽어야 할 사람은 죽일 것이다. 그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재상이 어디 그런 작은 일에 관여하겠는가? 지금은 중춘(仲春 음력 2월)이니 날이 그리 덥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소가 헐떡거리는 것은 만일 멀리 달려왔다면 피로한 것은 정상적이다. 많은 길을 달리지 않았는데 그리 열이 난다면 지기가 상승하는 것이다. 그러니 마땅히 파종을 해야 한다. 재상이 관여하는 일은 바로 이런 큰일이다.”

부하들이 듣고 탄복했다.

한 선제의 또 다른 은인은 장하다. 그는 사비를 들여 유순을 가르쳤다. 유순이 황제가 되었을 때 장하는 이미 죽었다. 그의 형 장안세 역시 겸허한 군자였다. 선제는 장하에게 보답하기 위해 그를 후작에 봉하고 200인을 시켜 묘를 지키게 했다. 장하는 아들이 없어 장안세의 작은 아들 장팽조를 양자로 삼았다. 어렸을 때 선제와 함께 서당에서 공부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선제는 장팽조를 관내후에 봉했다. 장안세는 줄곧 사양했다. 선제는 “이 모든 것은 자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전부 장하를 위한 것일세.” 장안세는 비로소 더 말하지 않았다.

장안세 부자는 모두 후작이 되어 권세가 막강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근신했으며 봉록을 더 올려도 받지 않았다. 장안세는 매번 조정에 참여하여 정치 토론을 하고 결정을 한 후에는 병을 핑계로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물으면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알고 있었다. 때로는 변복을 하여 승상부에 가서 엿듣기도 했는데 마치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은 모두 처음 듣는 소식인 듯 했다. 이렇게 하여 다른 사람은 그가 정부의 일에 참여자라는 것을 몰랐다.

그가 한번은 어떤 사람을 추천했는데 그가 과연 관직에 올랐다. 그가 감사하려고 왔는데 그는 눈을 부릅뜨고 야단을 쳤다. “인재를 추천하는 것은 국가를 위한 일로 나의 책임이다. 이는 공사인데 어찌 사인의 감정으로 하느냐? 이래서는 안 된다!” 이때부터 이 사람과 왕래하지 않았다.

어떤 관리가 큰 공을 세웠는데 오랫동안 승진이 되지 않아 장안세에게 찾아와 하소연 했다. 장안세는 “당신이 공로가 있음을 조정에서는 계산이 있을 것이요. 신하로서 일하도록 노력해야지 어찌 자기가 뛰어 다니며 자랑하겠소?” 하고는 손을 휘저으며 나가버렸다. 얼마 후 이 관리는 승진이 되었는데 그는 장안세가 추천한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한선제 때는 장안세나 병길 같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무엇 때문인가? 윗사람이 본을 잘 보인 것으로 당연히 좋은 기풍이 형성된 것이다.

(자료출처: 《자치통감(資治通鑒)》 및 《통감기사본말(通鑒記事本末)》)

원문위치

: http://www.zhengjian.org/2016/09/05/154505.html

고풍유유 : 황제의 두 은인의 기상

작자/ 묵안(默安)

【정견망】

1. 어려서 고생한 한선제의 애민정신

한나라 소제(昭帝) 유불능(劉弗陵)은 8살에 한무제(漢武帝)를 계승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불과 23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면 누가 대통을 이었는가? 결국 위태자 유거(劉據)의 손자인 유순(劉詢)이 황제가 되니 그가 바로 한선제(漢宣帝)다.

유순은 어려서부터 고생을 겪으며 자랐다. 원래 위태자는 억울하게 ‘역모’의 누명을 쓰고 목을 매 자살했다. 그의 부인인 사량제와 두 아들 역시 동시에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어린 손자는 태어난 지 불과 보름밖에 안되어 감옥에 갇혔다. 원래 이름을 유병이(劉病已)라 했고 나중에 유순이라 불렀다. 이 아이에게 복이 있었던지 마음씨 좋은 감옥장 병길(丙吉)을 만난다. 그는 아이를 불쌍히 여겨 여자 죄수들 중 두 명을 뽑아 젖을 먹이게 했다. 얼마 안가 그들을 비교적 좋은 지방의 감옥으로 옮겨 모두 살아남게 했다.

나중에 방사들이 한무제(漢武帝)를 선동해 장안 감옥 안에 천자의 기운이 있으니 유씨의 강산이 불안하다고 했다. 이에 무제는 명을 내려 감옥의 죄인들을 전부 죽이게 했다. 다행히 유순은 이미 지방 감옥으로 옮겨간 후였다. 조정 관리가 와서 조사하자 병길은 엄숙하게 거절했다. “폐하의 증손자가 여기 갇혀 있소, 일반적인 백성들도 억울함을 당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이 아이는 절대 안되오!” 문을 가로막으며 관리를 쫓아냈다.

관리는 조정에 돌아가서 병길의 언행을 한무제에게 보고했다. 무제는 측은함을 느껴 즉시 대 사면령을 내렸다. 나중에 아이의 외조모와 외숙부가 나서 유순을 감옥에서 구출해냈다.

무제 사후 제위를 이어받은 소제는 아이에게 작은 할아버지에 해당했다. 소제가 아이를 받아들여 궁궐에서 키웠다. 당시 액정장관(掖庭長官)이 장하(張賀)였는데 위태자의 옛부하라 아이를 잘 대해주었다. 또 자비로 아이를 가르쳤다. 소제가 사망할 때 아이는 이미 18세 청년이 되었다.

당시 곽광(霍光)이 실권을 쥐고 황위 계승자를 찾는 일을 책임지고 있었다. 병길이 이 기회를 잡아 곽광을 만나 유순의 정황을 알려주었다. 또 그가 간난의 세월을 보냈고 지식과 예의를 알며 쓸만한 사람이니 그를 황제로 삼자고 했다.

선제가 처음 즉위했을 때 백성들의 질고를 걱정하며 늘 말했다. “백성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탐관오리와 가혹한 관리다. 탐오하지 않고 억울한 일만 없으면 아주 좋겠다.” 그는 특별히 태수와 현령 선발을 중시하여 뇌물을 받거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시키는 일은 조금도 용서치 않았다.

매년 가을에 죄수를 처단할 때면 직접 대전에 나아가 사건을 친히 심문했으며 억울함이 없도록 노력했다. 때문에 한나라에 청빈하며 남에게 죄를 씌우지 않고 겸허하고 부지런하여 백성들을 위해 생각하는 관원이 많았다. 많은 청빈 관리는 한나라 선제 때에 나왔다.

2. 황제의 두 은인의 기풍

병길은 한선제를 보호하고 추천했던 사람이다. 그는 어사대부(御使大夫)가 된 후 과거의 일을 절대 말하지 않아 조정의 대신들도 황제의 숨은 뒷일을 알지 못했다. 한때 옥중에서 젖을 먹여 키웠던 여죄수 측씨가 자기의 공로를 알아달라고 상소하여 병길에게 증인이 되어 달라고 함에 비로소 이 일이 알려지게 되었다.

선제가 이 일을 알고는 매우 감동해 자신이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상을 내렸다. 병길은 특별히 박양후(博陽侯)에 봉했다. 그러나 병길은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조금도 공이 없는데 이렇게 두터운 상을 받겠습니까?”

선제는 “내가 그대를 제후에 봉한 것은 덕에 대한 보답이니라. 내가 은혜를 알고도 보은하지 않으면 무정하고 의리 없는 사람이 된다.”

병길은 비록 작위를 받았지만 여전히 예전처럼 겸허하게 근신했으며 절대 자기 공을 내세우거나 교만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승상이 되었다.

그는 특히 다른 사람의 작은 과실에 용서할 줄 알았다. 예컨대 승상부의 마차대장이 술을 좋아했다. 한번은 병길을 모시고 나갔는데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수레에 크게 토하여 수레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사람들은 그를 쫓아내려고 했으나 병길은 동의하지 않았다. “취했다고 쫓아내면 그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얼굴을 들겠소? 그를 용서하고 더럽혀진 수레를 좀 치우고 씻으면 그만 아니겠소?” 이 술꾼은 변방에 대한 상황을 매우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나중에 큰 공을 세웠다.

하루는 병길이 길을 가는데 마침 황제가 출행하려는 때라 길에 경계가 삼엄했다. 한무리의 무뢰한들이 큰 길 한쪽에서 칼을 들고 싸워 사람이 죽고 피가 낭자했다. 하지만 아무도 상관하는 사람이 없었다. 병길도 못본 채 했다. 갑자기 한 마리 누런 황소가 옆에서 뛰어들더니 씩씩거리며 혀를 밖으로 내밀었으며 흰거품을 물었다. 알고보니 목동이 그 녀석을 추적하고 있었다.

병길은 얼른 수레서 내려 목동을 가로막으며 왜 그렇게 멀리 쫓아가느냐고 했다. 왜 그렇게 열심히 쫓아가는지 매우 관심있게 물었다.

부하가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승상께선 죽어라 싸우는 사람을 돌보지 않고 헐떡이는 소에 관심을 가지니 어찐 일입니까?”

병길이 말했다. “칼로 싸우는 사람은 장안을 맡은 경조윤(역주: 수도인 장안을 책임지는 관리)의 책임이니 체포할 사람을 체포하고 죽어야 할 사람은 죽일 것이다. 그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재상이 어디 그런 작은 일에 관여하겠는가? 지금은 중춘(仲春 음력 2월)이니 날이 그리 덥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소가 헐떡거리는 것은 만일 멀리 달려왔다면 피로한 것은 정상적이다. 많은 길을 달리지 않았는데 그리 열이 난다면 지기가 상승하는 것이다. 그러니 마땅히 파종을 해야 한다. 재상이 관여하는 일은 바로 이런 큰일이다.”

부하들이 듣고 탄복했다.

한 선제의 또 다른 은인은 장하다. 그는 사비를 들여 유순을 가르쳤다. 유순이 황제가 되었을 때 장하는 이미 죽었다. 그의 형 장안세 역시 겸허한 군자였다. 선제는 장하에게 보답하기 위해 그를 후작에 봉하고 200인을 시켜 묘를 지키게 했다. 장하는 아들이 없어 장안세의 작은 아들 장팽조를 양자로 삼았다. 어렸을 때 선제와 함께 서당에서 공부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선제는 장팽조를 관내후에 봉했다. 장안세는 줄곧 사양했다. 선제는 “이 모든 것은 자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전부 장하를 위한 것일세.” 장안세는 비로소 더 말하지 않았다.

장안세 부자는 모두 후작이 되어 권세가 막강했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근신했으며 봉록을 더 올려도 받지 않았다. 장안세는 매번 조정에 참여하여 정치 토론을 하고 결정을 한 후에는 병을 핑계로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물으면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알고 있었다. 때로는 변복을 하여 승상부에 가서 엿듣기도 했는데 마치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은 모두 처음 듣는 소식인 듯 했다. 이렇게 하여 다른 사람은 그가 정부의 일에 참여자라는 것을 몰랐다.

그가 한번은 어떤 사람을 추천했는데 그가 과연 관직에 올랐다. 그가 감사하려고 왔는데 그는 눈을 부릅뜨고 야단을 쳤다. “인재를 추천하는 것은 국가를 위한 일로 나의 책임이다. 이는 공사인데 어찌 사인의 감정으로 하느냐? 이래서는 안 된다!” 이때부터 이 사람과 왕래하지 않았다.

어떤 관리가 큰 공을 세웠는데 오랫동안 승진이 되지 않아 장안세에게 찾아와 하소연 했다. 장안세는 “당신이 공로가 있음을 조정에서는 계산이 있을 것이요. 신하로서 일하도록 노력해야지 어찌 자기가 뛰어 다니며 자랑하겠소?” 하고는 손을 휘저으며 나가버렸다. 얼마 후 이 관리는 승진이 되었는데 그는 장안세가 추천한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한선제 때는 장안세나 병길 같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무엇 때문인가? 윗사람이 본을 잘 보인 것으로 당연히 좋은 기풍이 형성된 것이다.

(자료출처: 《자치통감(資治通鑒)》 및 《통감기사본말(通鑒記事本末)》)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2016/09/05/15450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