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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이야기: 불괴의 육신을 남긴 가운진

글/중국 수련생

【정견망】 청나라 복건성 복주 상원촌에 이름이 가운진(柯雲塵)이라는 시골 사람이 있었는데가보모(柯普謀)라고도 불렀다. 가운진은 도광 4년(1824년)에 태어나13세 때 반드시 불법(佛法)을 수련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하지만 세속의 일이 많아 결국 출가해 승려가 되지 못했고 그저 집에서 부처를 믿고 불법을 닦을 뿐이었다. 그는 남는 시간을 이용해 늘 연화산에 가서 면벽 수련을 했다. 자란 후 가운진은 우산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았으며 기술자가 됐다.

그가 만든 우산은 푸른 대나무로 뼈대를 만들었는데 매우 정교해 오래 사용할 수 있었기에고객들이 모두 칭찬했다. 우산 가게 사장이 그를 매우 신임해 그에게 공임을 특히 높게 쳐주었으나 그는 늘 검소하게 살고 아껴서 남은 돈을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데 사용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선량하고 이타적인 모습에 감동해 어떤 사람은 그를 살아있는 보살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광서 22년(1896년) 음력 9월 15일, 그는 집에서 갑자기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더니 그들에게 “나는 장차 서쪽으로 돌아갈 겁니다”하고는 앉은 채 서거했다. 그때 나이가 73세였다. 당시 사람들의 종교 관념 중에 “서쪽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불국세계로 간다는 뜻이었다. 또한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상서로운 오색구름이 그가 사는 곳을 감돌아 사람들이 감탄해마지 않았다. 규칙대로 관습에 따라 서거 후 수일 내에 입관 매장해야 했지만 그의 은혜를 입은 많은 사람들이 달려와 절을 하고 작별을 고하려 했기에 즉시 입관하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이상한 일을 발견했다. 가운진이 세상을 떠난 후 며칠이 되고 어떤 특수한 처리를 하지 않았는데 여전히 얼굴색이 살아있는 듯 했으며 조금도 부패하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가운진의 유체가 부패하지 않은 기적으로 사람들은 그가 이미 정과를 얻었다고 여기고 그의 부패하지 않은 육신을 모셨으며 그가 생전 살던 곳을 수리해 사원으로 만들었다. 한때 상서로운 오색구름이 감돌았기에 ‘서운사(瑞雲寺)’라고 불렀다. 가운진의 유물을 수습하니 전서로 ‘가문(柯文)’이라는 도장을 발견했는데 사람들은 그를 ‘가문불’이라고 존칭했다.

서운사는 만들어진 후 유명해졌고 원근에서 향을 올리러 오는 사람들이 성시를 이루었고 복건성의 유명한 절이 됐다. 가운진의 유체도 줄곧 보존되어 부패하지 않았다. 민국 35년(1946년) 중화민국의 해군 원로인 해군 상장 살진빙이 특별히 ‘불법무변(佛法無邊)’이라는 편액을 보내줬다.

나중에 중국공산당이 문화혁명을 발동해 70년을 보존해오던 육신이 훼손됐다. 2013년 12월 백년 고찰 서운사는승려들의 동의를 얻지 않고 보상도 해주지 않은 채 강제로 철거됐다. 중국공산당 관련 기관에서 줄곧 개발 상인의 편을 들어 절을 부수고 승려를쫓아내 이 일이 당시 많은 언론에 보도됐다.

가운진은 비록 출가하지 않았지만 유체는 부패하지 않았으니 그가 진정한 수행인임을 알 수 있다. 수련은 출가의 형식을 갖추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불괴의 육신과 서운사의 경우로부터 중국공산당이 수십 년간 종교를 존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줄곧 파괴하고 신앙을 모독했음을 알 수 있다. 전기에는 끊임없이 각종 운동을 발동해 파괴했고 후기에는 사람의 신앙, 선념을 이용해 사원과 도관을 관광 여행지로 삼아 돈벌이 도구로 만들었다. 더 큰 이익이 있으면 상권을 개발한다는 등 이유로 강제로 철거하는 파괴를 서슴지 않았다.

중국공산당의 죄는 하늘을 노하게 하여 사람과 신이 공분해 최종적으로 업보를 받는 그 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수한 중국인은 중국의 공산당, 단, 대에 조직에 가입할 때 무지 중에 어쩔 수 없이 그를 위해 일체를 바친다는 독한 맹세를 했는데 이 맹세를 없애버리지 않는다면 중국공산당이 업보를 받을 때 반드시 연루될 것이다. 그 때 평안을 보위하려면 오직 중국공산당의 일체 조직을 탈퇴한다는 성명을 발표해야 한다(가명도 됨).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475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