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석방행(石方行)
【정견망】
인류사회의 발전 과정으로부터 보자면 4대 문명 중 오직 중화문명만이 끊김 없이 계승되어 내려왔다. 다른 문명(고대 이집트, 고대 바빌로니아, 고인도 등)은 모두 발전 과정 중에 각종 원인으로 중단 되었다.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이들 문명이 중단된 원인에 대해 많은 학설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들이 생각하지 못한 일부 문제들이 있다. 바로 다른 고대 국가의 문명이 중단된 것이 중화문명의 가치를 두드러지게 한 것이 아닌가? 더욱이 중화문명은 수천 년의 역사발전 과정 중에 너무나 많은 곡절과 고난을 겪었음에도 어쨌거나 문명의 불씨는 줄곧 지속되어 오늘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중화문명은 자연히 다른 지역 사람들이 추구하고 앙모하는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도 많은 단절이 생겼다. 예컨대 서방은 실증을 중시하는 사회라 19세기까지 중국에 상나라(商朝)가 존재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중에 상나라 시대의 은허(殷墟) 유적이 발견되고 갑골문의 내용을 통해 상나라가 실제로 존재했음을 고증해냈다. 하지만 역시 하(夏)왕조와 더 오랜 시기의 문명은 인정하지 않는다. 사학계에서는 중국의 ‘역사 시대’는 상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겼다. 상나라 이전은 ‘전설시대’ 또는 ‘사전(史前)시대’(역사 기록이 존재하기 전의 시대)로 여겼다. 중국 사학계에서도 비록 하나라를 하나의 왕조로 보긴 하지만 줄곧 실물 증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왕왕 간단히 묘사하기만 하고 상세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하나라에 이전의 역사에 관해서는 《사기》나 《상서》 등의 역사서에 조금씩 보인다. 하지만 이런 기록들의 일부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 그래서 수천 년 후의 사람들은 좀 믿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문화가 단절된 원인이다.
역시 오천년에도 없는 기회와 인연을 우리는 만났다. 필자는 본 시리즈를 여러 차례 수정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정견망과 각종 매체상의 보도를 보게 되었고 큰 감동을 받았다. 바로 《역사를 고쳐쓰다! 중국에서 4천 년 전 거대 피라미드를 발견하다》는 것이다.
영국의 데일리 메일에 따르면 중국에서 4천년 역사를 지닌 고성(古城) 유적지에서 70미터 높이의 피라미드와 인류 두개골이 가득 차 있는 매장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고고학적으로 실증한 시간은 4300년 전에 석묘 고성(石峁古城)이 건립되었다. 이는 중국이 단순히 5천 년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그 5천 년이 문명의 역사였음을 증명한다. 석묘고성은 좀 더 자세한 고증이 필요한데 앞으로 더 놀라운 발견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고대문자나 5천 년 전의 중화문명사 등의 소식이 발표되기를 기대한다.
나중에 나는 또 인터넷에서 이 고성과 관련된 자료를 조사해봤는데 1976년에 정식으로 고고학 범위에 들어갔음을 알았다.
자료의 기록에 따르면 갑골문은 1899년 금석학자 왕의영(王懿榮)이 가치를 알아보고 고가에 매수해 수장하기 시작했다. 1928년부터 중앙연구원 역사 연구소 고고학 연구팀이 계획적으로 은허에 대한 발굴을 진행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간이 매우 의미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상나라 왕조의 실물과 문자는 3천 년간 감춰져 있다가 중국이 가장 혼란한 시기에 두각을 드러냈다. 실물 고증을 통해 이 왕조는 점복을 좋아하고 귀신을 매우 믿었음이 명백히 입증되었다. 이는 또한 고서의 기록이 옳다는 점도 증명했다. 한편 20세기 전반기는 서양에서 건너 온 공산유령의 중국침입이 완성하는 단계였다. 당시 중화민국 정부는 비록 내외우환에 처해 있었지만 역사연구(북경 주구점 원인 유적지 발굴 등)에 대해서는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중국인의 세계관(무신론이던 유신론이던)에 일깨움과 경고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1976년은 공산유령이 이미 대륙을 점거해 온갖 잔학한 짓을 저지르며 철저하게 전통문화를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한차례 운동으로 사람과 신의 연계를 갈라놓았고 네 가지 낡은 것의 타파(破四舊)와 무신론의 대 세뇌를 거쳐 소위 개혁개방의 물욕이 횡행하는 시기로 막 진입하려는 시기였다. 상나라에 비해 더 오래된 역사 유적의 출현은 수십 년의 발굴과 서양 고고학계의 고증을 거쳐 적어도 4300년이 넘었음이 인정되었다. 이것은 실물로부터 상고시기 문헌 기록의 정확성을 증명한 것으로 사람들에게 고대의 기록은 결코 전설이 아니라 사실이며 신은 정말로 존재하며 자비롭게 우리 문명과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공산주의가 백년을 지나자 대륙에서 몰락의 처지에 있어 겉으로는 강해보이지만 속은 이미 비었다. 그것들이 저지른 짓을 통해서 세인들은 서양에서 온 이 유령의 진실한 면목을 더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이미 퇴장할 때가 되었다. 4천 년간 묻혀 있었던 유적지가 출토됨에 따라 더욱 오랜 문명 유적지가 잇달아 오늘날 사람들에게 진실한 면목을 보여줄 것을 예견할 수 있다. 역사의 진상은 점점 세인들의 눈앞에 드러날 것이다.
중화문명은 초기부터 지금까지 남겨 내려온 전설과 사서 중에서 도처에 신적(神跡, 신의 자취)이 가득하다. 이는 중화문명이 신이 개창하고 돌봐주는 곳임을 설명한다. 중화를 예부터 ‘신주(神州)’라 부르는 것도 이 점을 설명한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자연히 ‘신의 자손’이 되었다.
우리 후인들은 고대문헌(예를 들어 《상서尚書》 등)을 연구할 때 그중의 내용이 실증 과학 각도에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의 전설이라고만 말하며 결코 발생한 일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매우 큰 틀과 제한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점점 고고학 등을 통해 사람들이 인식하게 되고 있다. 참으로 이런 신적을 인식하려면 우선 우리의 관념을 돌려야 하며 무신론 실증과학의 틀에 제한되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종으로 보면 중화 신전문명의 횃불은 이미 수천 년부터 전승되어왔다. 이 수천 년간 신의 자손은 신의 이끌음과 보호 하에 많은 왕조를 거치는 중에 너무나 많은 기복, 변화, 일편단심의 피 흘린 연극을 겪어왔다. 소위 말하는 이런 것이다: 문도무략의 다스림(文韜武略-천지만물의 정보로 규율하고 가장 정묘하게 다루는 것은 문무쌍전한 대지대용이다), 재자가인의 시가, 무명소졸의 헌신, 각종 직업의 휘황한 발전, 면벽수행자의 은거, 도사 승려의 종소리(도관이나 사원에서 운유하는 수행방식), 궁정에서의 대연극이 끝나면, 시장에서의(민간의 분쟁) 다툼이 나타나는 등 ….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해서인가? 설마 그저 한 사회의 발전의 필요 때문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또 다른 깊은 뜻이 있는가?
이것이 바로 이 시리즈에서 필자가 여러분과 탐구하려는 주제다.
본 시리즈에서 필자는 정사(正史)를 위주로 별사(別史)나 혹은 전설 내지는 필자가 알고 있는 일부 일들을 보조로 삼을 것이다. 상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중화고국의 역사에서 신이 어떻게 우리를 보호하며 한걸음씩 오늘에 이르게 했는지 써보고자 한다. 그래서 시리즈 제목을 “천우중화(天佑中華 하늘이 중화를 돕는다)”라 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무신론, 진화론 내지 현대 과학의 영향이 상당히 심하기 때문에 필자는 본 시리즈 중에 이 방면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주기 위해 주로 정사 및 국내외에서 정식 출판된 서적을 근거로 한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신과 윤회를 믿고 자기와 우주를 진정으로 인식하고 생명 회귀의 수련법을 찾는데 좋은 바탕이 되기 위함이다. 본문은 또 수많은 유신론자들에 대해서도 역시 시야를 넓혀주는 작용을 할 것이다.
이것을 서문으로 한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46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