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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한신(2): 재주가 있어도 인정받지 못하다

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2장 재주가 있어도 인정받지 못하다

전국시대 말기 여러 제후들이 할거해 분열되었던 국면이 진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진시황은 재위 37년 순행을 나갔다 사구(沙丘)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진시황은 유조(遺詔)에서 장자인 부소(扶蘇)를 불러 장례를 주관하게 하고 도성에 들어와 제위에 오르라고 했다. 하지만 조서를 관리하던 조고(趙高)가 승상 이사(李斯)와 결탁해 거짓 조서로 부소를 자살하게 하고 어린 아들 호해(胡亥)를 황제로 옹립하니 그가 바로 진이세(秦二世)다.

진이세가 즉위 후 진시황의 옛 신하들과 황실의 종친들을 멋대로 살해하자 진시황이 고생스레 만들어놓은 제국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이세 원년(기원전 210년)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900명의 수졸(戍卒, 변방에서 수자리 하는 군사)을 인도해 가다 대택향(大澤鄉)에서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斬木爲兵) 장대를 들어 깃발로 삼으며(揭竿爲旗)” 진이세의 통치에 도전했다. 그들은 진(陳) 땅에 정권을 세우고 국호를 ‘초(楚)’ 또는 ‘장초(張楚)’라고 했다. 이를 기화로 각지에서 진나라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앞 다퉈 자신의 역량을 조직하고 순식간에 군웅이 할거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마치 여러 제후들이 각축하던 전국시대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1. 검을 들고 종군하다

당시 일어난 많은 영웅들 중에 항량(項梁)과 항우(項羽)가 있었다. 이들은 숙질사이로 가문이 좋고 정예 강군을 지녀 한신의 주목을 받았다.

항량은 원래 초나라의 명장 항연(項燕)의 아들로 사람을 죽인 후 원수를 피해 오중(吳中)으로 이주했다. 현지에서 위신이 아주 높아 많은 선비와 대부들이 그의 밑이었다. 항량은 자신의 우세한 지위를 이용해 암암리에 병력을 모으고 말을 구입한 후 이들을 훈련시켰다.

진승과 오광이 봉기한 2달 후 항량과 항우는 오중에서 8천의 병력을 모아 강동에서 강을 건너 북상했다. 가는 도중 계속해서 진영(陳嬰), 영포(英布), 여신(呂臣), 포장군(蒲將軍) 등을 받아들여 수하로 삼았고 팽성(彭城) 동쪽 진가군(秦嘉郡)을 점거했다. 유방과 한신 역시 이 과정에서 항량의 대오에 가입했다.

얼마 후 오광이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같은 해 12월 진나라 장수 장함(章邯)이 군사를 이끌고 수도인 진현을 공격했다. 진승은 마부에게 살해당하고 장초는 멸망했다. 항량은 책사 범증(範增)의 건의를 받아들여 초회왕의 손자 웅심(熊心)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무신군(武信君)이 되었다.

장함은 진승의 군대를 격파한 후 병력을 이끌고 위(魏)나라를 공격했다. 다급해진 위나라 왕은 제(齊)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장함이 또 제나라와 초나라 연합군을 대파하고 제나라 장수 전영(田榮)을 추격해 동아(東阿)까지 이르렀다. 이때 항량은 전영이 위급하단 소식을 듣고 즉각 구원 병력을 보내 진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장함이 서쪽으로 패주하자 항량은 추격에 나서 복양(濮陽)에서 다시 장함을 격파하고 나중에 정도(定陶)까지 추격했다. 다른 한편 항우와 유방은 옹구(雍丘)에서 진나라 군대와 싸워 대승을 거두고 진나라 장수 이유(李由)를 참살했다.

진나라 군대가 번번이 패하자 장함은 10만 대군을 요청해서 병력을 보충했다. 항량은 전투에서 승리한 후 교만해져 이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당시 한신은 그의 위험을 예견했지만 지위가 낮아서 간언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항량의 모사 송의(宋義) 역시 잠재적인 위험을 간파해 항량에게 진나라 군사의 기습을 예방하도록 권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기가 크게 오른 진나라 군대가 항량의 방비가 소홀한 틈을 타 기습공격에 나서자 항량의 주력 대부분이 죽고 항량 본인도 사망했다.

2. 항우의 등장

항량이 사망한 후 항우가 남은 군대를 이끌었다. 항우는 키가 8척이 넘는 장신에 큰솥을 들만큼 힘이 강했으며 재기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용맹한 장군으로 불리며 후인들은 “항우의 신묘한 무용은 천고에 둘도 없다(羽之神勇,千古無二)”고 평했다. 항우는 소년시절 진시황의 순행 행렬을 본 적이 있는데 그 규모가 웅장하고 여러 사람들이 공경하는 모습을 보고는 아무런 주저 없이 “저 자리는 빼앗을 만하다”고 항량에게 말한 적이 있다.

항우는 한신이 건장하고 용맹한 것을 보고 시위무관인 집극랑(執戟郎)으로 삼았다. 한신은 이에 근거리에서 항우와 접촉할 기회가 생겼다.

정도대전 이후 초회왕(楚懷王 새로 왕으로 옹립된 웅심)은 초나라 군사의 사기가 떨어진 것을 염려해 항우에게 팽성으로 물러나 근거지를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장함은 일시적으로는 승산이 어렵다고 보고 북방으로 방향을 돌려 조(趙)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 왕이 거록(巨鹿)에서 곤경에 처하자 여러 제후들에게 구원을 청했다. 제나라, 연나라가 모두 지원군을 파병했다. 조나라 대장 진여(陳餘)와 대(代)나라 장오(張敖) 역시 병력을 이끌고 나아가니 거록을 구워나러 온 제후의 군사가 10곳이 넘었지만 누구도 감히 군대를 내보내 진나라 군과 교전하지 못했다.

진이세 3년 겨울 초회왕이 두 갈래로 지원군을 파견했다. 하나는 송의(宋義)를 상장군(上將軍), 항우를 차장(次將)으로 삼아 5만의 병력으로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고 다른 하나는 유방을 장수로 삼아 진나라 수도인 함양으로 진격하게 했다. 그러면서 초회왕은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먼저 관중을 차지하는 자를 왕으로 삼겠노라고 약속했다.

송의는 안양(安陽)에 도착한 후 46일을 지체하며 진나라와 조나라가 서로 싸워 지친 후 어부지리를 얻으려 했다. 하지만 지원군이 없으면 조나라는 분명 장함을 대적하지 못할 것이다. 장함이 조나라를 점령한다면 다음 목표는 바로 초나라가 된다. 당시 안양은 날씨가 쌀쌀하고 큰 비까지 내려 초나라 군의 식량이 떨어져 굶거나 얼어 죽는 병사가 속출했다. 계속해서 시간을 끈다면 반드시 큰 변고가 나타날 것이다. 항우가 여러 차례 북상해서 조나라를 구원하자고 건의했지만 송의는 모두 거절했고 또 군중에서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목을 베라고 했다. 항우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송의를 죽이고 스스로 상장군이 되었다. 초회왕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초나라 군은 병력에서 진나라보다 훨씬 적었고 여러 지원군 역시 진나라 군사들이 두려워 각자 자기 진영만 지키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에 항우가 독자적인 작전에 나섰다. 그는 침착하고 냉정하게 영포에게 2만 병력을 이끌어 장함과 다른 진나라 군대 사이의 연결을 차단하게 했고 직접 나머지 3만 병력을 이끌고 장하를 건넜다. 또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를 깨뜨렸으며 막사를 불사르고 군량을 사흘 분만 지니게 해 병사들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살아 돌아올 마음이 없음을 보였다.”(《사기‧항우본기》) 퇴로가 사라진 병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하니 이것이 바로 파부침주(破釜沉舟)란 고사성어의 유래이다.

거록에 이르자 초나라 군사들은 신속하게 진나라 군을 포위하고 전군이 일당십으로 전투에 나섰다. 항우는 스스로 솔선수범해 분발하며 용맹을 과시했는데 “항우의 호령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전한기(前漢記)》) 초나라 군사들은 전투를 치를수록 용맹해졌고 진나라 군대는 간담이 서늘해져서 아홉 번 싸워 아홉 번을 다 이겼다. 진나라 장수 소각(蘇角)이 전투 중에 죽었고 장군 왕리(王離)는 포로가 되었으며 섭간(涉間)은 투항을 거부하고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 이를 지켜보던 제후군들은 놀라서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들은 진나라 군대가 패배한 후에야 겨우 영채를 나와 전투를 도왔고 거록의 포위를 풀어주었다.

항우가 잇달아 공격을 다그치자 장함은 번번이 패했고 결국 진이세 3년 7월 은허(殷墟)에서 20만 병사들을 이끌고 항우에게 투항했다. 진나라의 주력부대가 사라지자 일찍이 6국을 멸망시키고 흉노를 물리쳤던 강력한 군대가 마치 바람에 날리는 연기처럼 흩어져버렸다.

전쟁이 끝난 후 항우는 제후군의 여러 장수들을 소집했다. 여러 장수들이 무릎으로 걸어왔으며 감히 항우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조왕 역시 찾아와 항우를 알현하고 무릎을 꿇으며 구원해 준 은혜에 감사를 드렸다. 항우는 ‘제후상장군(諸侯上將軍)’으로 옹립되어 제후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항우는 천하 사람들에게 일대 영웅호걸의 불세출의 웅재를 보여주었다. 이는 당시 모든 무장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고 또 중국역사상 한 단락 불후의 신화를 써내려갔다.

3. 먼저 관중에 들어간 유방

항우가 진나라 주력부대를 해결해 ‘제후상장군’이 되었지만 진나라 도성 함양(咸陽)을 먼저 차지한 것은 오히려 유방이었다.

유방은 패군(沛郡) 풍읍(豐邑) 중양리 사람으로 평민출신이다. 48세에 패현에서 군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패공(沛公)이라 불렸다. 젊을 때는 하루 종일 놀면서 생산적인 직업에는 종사하지 않았다. 유유상종이라 주변에 늘 비슷한 패거리들이 있었는데 유방은 씀씀이가 대범해 사람들의 마음을 잘 휘어잡았다. 나중에 사수정장(泗水亭長, 정장은 요역이나 세금을 관리하는 말단 지방관)이 되었다.

유방은 애초 책을 좋아하지 않았고 뼛속에서부터 독서인을 우습게보았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관을 쓴 서생이 찾아와 만나길 청하면 그 모자를 벗겨 소변을 갈기곤 했으며 사람들과 어울릴 때도 입만 열면 욕을 해댔다. 한번은 역이기(酈食其)가 알현을 청한 적이 있다. 문지기가 유방에 독서인이 왔다고 하자 유방은 만나지 않으려했다. 나중에 역이기가 자칭 고양(高陽)의 술꾼이라고 말하자 바로 불러들여 만났고 그와의 만남을 아주 즐거워했다. 그는 농담과 권모술수에 뛰어났고 꾀가 많아 임기응변에 능했다. 또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부하들을 통제하는 방법을 잘 알았기 때문에 수하 중에 유능하고 어진 선비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또 남의 성과를 몰래 훔치는 것에도 뛰어났다.

유방은 항우가 진나라 군대와 격렬한 전투를 치를 때 가장 위험한 전장을 피해 관중(關中)에 들어갔다. 당시 조고(趙高)가 이미 진이세를 시해해 제위가 공백 상태였는데 나중에 공자 자영(子嬰)이 조고를 살해했다. 자영은 스스로 제위에 오르는 대신 단지 진왕(秦王)이라 칭했다. 유방이 함양으로 진격하자 저항할 힘이 없었던 자영은 흰 수레에 흰말을 타고 항복의 깃발을 건 후 직접 황제의 옥새와 부절을 들고 유방을 찾아와 투항했다. 진나라는 이렇게 멸망했다.

함양성에 들어온 유방은 웅장하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궁궐을 보았고 또 황제 전용 휘장과 장막, 전용 말, 금은보화 및 미녀가 너무 많아 눈이 휘둥그레져 손에서 내려놓기를 아쉬워했다. 이에 밖의 혼란한 정세와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적수들이 있음을 완전히 망각하고 궁전에 머물며 황궁에 머물고자 했다. 그러나 번쾌(樊噲)와 장량(張良) 등이 번갈아 쓴소리를 하며 권하자 결국 황궁과 재화창고를 봉해놓고 패상(灞上)으로 물러나 진영을 차렸다. 또 소하(蕭何)의 건의에 따라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물건을 훔치면 죄에 따라 다스리는 동시에 기존 진나라의 법령을 전부 폐기한 것이다. 나머지 다른 방면에서는 모든 것을 평소와 같이 하게 했다. 그러자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며 앞을 다퉈 소나 양 술과 음식을 들고 와 군사들을 대접하려 했다.”(《사기‧고조본기》)

죽음을 무릅쓰고 정면 전투를 벌인 것은 항우였지만 승리의 가장 큰 열매를 차지한 것은 오히려 유방이었다. 이에 화가 잔뜩 난 항우는 거록대전이 끝난 후 곧장 40만 대군을 이끌고 관중을 향해 진격해 함양성 밖 홍문(鴻門)에 주둔했다. 모사 범증은 유방이 관동에 있을 때부터 재물과 여색을 좋아했는데 이번에는 재물을 탐하거나 미녀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뜻이 작지 않으니 하루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이때 유방의 좌사마 조무상(曹無傷)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 유방에게 왕을 칭하려는 마음이 있다고 알려왔다. 항우는 곧 명령을 내려 다음날 아침 공세에 나서기로 했다.

당시 유방의 전체 병력은 겨우 10만에 불과했고 전투력도 초나라 군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만약 양군이 대적할 경우 그 결과는 자명했다. 항우의 숙부 중에 항백(項伯)이 있었는데 전에 장량이 그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다. 이에 은혜를 갚을 생각에 한밤중에 말을 달려 패상의 장량을 찾아갔다. 그는 장량에게 정보를 알려주고 빨리 달아나라고 권했다. 장량은 혼자 달아나는 대신 즉각 유방을 찾아가 이 소식을 알렸다.

유방이 듣고는 깜짝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렇게 힘의 차이가 현격하게 큰 경우 자신의 약함을 보이고 살려달라고 하는 외에 다른 좋은 대책은 없었다. 이에 유방은 장량과 간단히 상의한 후 곧장 항백을 군막으로 불러 공경하게 술을 대접하며 인사를 나눈 후 환심을 샀다. 또 자신의 딸을 항백의 아들에게 주어 혼사를 맺기로 약속했다.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유방은 기회를 보아 자신은 왕이 되려는 생각은 전혀 없으며 다만 관중에 들어가 항우가 들어올 때를 위해 준비한 것뿐이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항백은 항우 앞에서 유방을 대신해 사정을 잘 설명해보겠노라고 대답하면서 내일 자신과 함께 항우를 찾아가자고 당부했다.

이때 대군을 장악한 항우는 천하를 우습게보고 있었다. 본래 유방은 안중에도 없던 데다 항백이 뛰어난 말재주로 설득에 나서자 두세 마디에 마음이 흔들려 패상으로 진격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이튿날 유방은 장량과 번쾌를 대동해 직접 홍문을 찾아갔다. 자신은 단지 함양을 잘 지키면서 항우가 오기를 기다리기만 했을 뿐 왕을 칭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항우는 유방의 말을 믿고 유방을 연회에 초대했다. 당시 항우가 ‘아부(亞父)’라며 존중하던 범증은 시종 유방이 큰문제가 될 것을 알고 항우에게 연회에서 죽여 후환을 없애버리자고 고집했다. 이처럼 도처에 살기가 잠복된 이 연회가 역사적으로 유명한 ‘홍문연(鴻門宴)’이다.

연회에서 항우의 옆에 앉은 범증은 몇 차례나 유방을 죽이라고 암시했지만 항우는 못 본 척했다. 다급해진 범증은 대장 항장(項莊)을 불러 칼춤으로 연회의 흥을 돕는 척하다가 기회를 보아 유방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들의 의도를 눈치 챈 항백이 칼을 뽑아들고 같이 춤을 추면서 자신의 몸으로 유방을 보호하니 항장이 손을 쓸 수 없었다. 장량은 상황이 긴급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가 번쾌를 불러들였다.

번쾌는 일찍이 개를 도살하던 인물로 유방 휘하에서는 가장 용맹했다. 그는 유방이 위험에 처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방패와 칼을 들고 직접 장막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호위하던 병사들이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번쾌가 방패를 한번 휘두르자 땅바닥에 쓰러졌다. 번쾌는 장막을 열어젖히고 두 눈을 부릅뜨며 항우를 노려보고는 “유방은 함양을 공략한 후 땅을 차지하거나 왕을 칭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패상으로 물러나 대왕께서 오시기만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공을 세운 사람에게 상을 주시진 못할망정 소인들의 말을 듣고 자신의 형제를 죽이려 하십니까!”라고 책망했다.

항우가 이 말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 기회를 탄 유방이 측간에 가는 척하면서 빠져나와 몇 사람만 데리고 패상의 군영으로 달아났다. 모사 범증은 항우가 우유부단해 유방을 놓치는 모습을 보고 화를 내면서 “아! 어린 아이(항우를 지칭)와는 함께 도모할 수 없구나. 항왕의 천하를 빼앗는 자는 반드시 패공일 것이다. 우리는 이후 그의 포로가 될 것이다!”(《사기‧항우본기》)라며 탄식했다.

유방은 군영으로 돌아오자마자 즉각 배신자 조무상을 죽여 버렸다. ‘홍문연’은 이후 ‘다른 의도를 가진 연회’의 대명사가 되었다. 또 여기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바로 ‘항장이 칼춤을 추는 의도는 패공을 해치려는 것이다(項莊舞劍,意在沛公)’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