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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한신(3): 유암화명(柳暗花明)

작자/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4. 초나라를 떠나 한나라로

홍문연 이후 항우는 제후들을 이끌고 함양에 들어갔다. 진왕 자영은 패국의 임금이었지만 그래도 왕의 신분이었다. 하지만 항우는 그에게 응분의 예우를 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영과 진나라의 모든 왕족, 종친 및 대신들을 살해했고 또 함양궁과 진시황릉에 불을 질러 대화재가 3개월이 넘도록 꺼지지 않았다. 이 대화재는 중국문화를 크게 파괴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각고의 노력 끝에 건립한 모든 자료와 선진(先秦) 이래 수많은 문화전적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다. 진나라 이전 화하(華夏)문명의 수천 년 기록이 거의 모두 불태워졌다.

또 하나 항우의 큰 잘못은 이미 통일된 중국을 제후들이 할거하는 국면으로 다시 후퇴시켰다는 점이다. 당시 많은 인사들이 항우에게 함양에 도읍을 정하고 황제를 칭하라고 간언했다. 왜냐하면 관중은 험한 산과 강을 끼고 있어 수비하기는 쉽지만 공격하긴 어려운데다 토지가 비옥해 패왕의 도읍으로는 이상적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우는 홀로 고집을 피워 동쪽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의 생각은 “부귀하게 된 후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마치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다니는 것과 같다.(富貴不歸鄉, 如錦衣夜行)”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고집대로 천하를 분봉했다. 즉 중앙집권적인 진나라의 관리제도를 전부 폐기하고 18명의 제후왕을 세웠으며 자신은 초패왕(楚霸王)이라 칭해 황제와 같은 권력을 가졌다. 여기서 패(覇)는 고대에 ‘백(伯)’과 통했으니 백부와 숙부를 나눌 때 백을 가리킨다. 즉 여러 왕 중에서도 맏이이자 왕 중의 왕이란 뜻이다. 이때가 항우의 전성기였다.

한편 항우의 호위무사로 있던 한신은 여러 차례 항우에게 자신의 의견과 계책을 제안해보았다. 하지만 항우는 자부심이 너무 강해 세상에 적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일개 호위무사의 건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함양을 불 지르고 천하를 분봉한 두 사건은 그의 시야가 짧고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했음을 잘 보여준다. 한신은 항우를 따라가서는 자신의 원대한 이상을 실현시킬 수 없음을 알고 18제후들을 분석해본 후 최종적으로 한중왕(漢中王) 유방에게 주목했다.

한고조 원년(기원전 206년) 4월 영토를 나눠받은 제후들이 병력을 거두고 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항우 역시 금의환향했고 기쁘게 팽성(彭城)으로 돌아와 서초패왕이 되었다. 항우도 물론 유방에 대해서는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 때문에 땅을 나눠줄 때 원래 약조대로 관중왕(關中王)에 봉하는 대신 사방이 꽉 막힌 파촉(巴蜀)지방의 한중왕(漢中王)에 봉해 발전을 제한하고자 했다.

진나라 때 파촉 지역은 아직 개발되기 전이라 첩첩산중에 물마저 부족해 가난하고 거친 땅이었다. “모두 진나라에서 이주한 사람(죄수)들이 거주했다”(《자치통감 권9》)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시피 죄수들이 유배 가던 곳이다. 물론 이곳도 관중의 일부이긴 하지만 유방을 이런 낙후한 지역의 제후로 봉한 것은 원래 약속을 어긴 것이다. 반면 관중의 비옥한 땅은 셋으로 나눠 투항한 진나라 장수 장함, 사마흔(司馬欣)과 동전(董翦)을 각각 왕으로 세워 이들이 유방을 포위해 중원으로 나가는 통로를 막도록 했다.

유방은 이에 대해 크게 분개했지만 그렇다고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항우는 또 그에게 3만의 병력만을 거느리게 했고 수하의 대신 중에서는 오직 소하만 나라를 인정했다. 모사 장량은 본래 한(韓)나라 사람이라 새로 제후가 된 한왕 성(成)을 보좌하기 위해 떠나야 했다. 이외 조참(曹參), 주발(周勃), 번쾌, 하후영(夏侯嬰), 관영(灌嬰) 등의 무장들은 모두 출중한 인물들이 아니라서 근본적으로 항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만약 이들과 함께 항우에게 대항한다면 분명 백전백패였을 것이다. 이에 유방은 어쩔 수 없이 분노를 삼키고 군사를 이끌고 한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신은 바로 이때 조용히 항우를 떠나 유방의 대오를 따라 한중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유방, 항우 두 역사 인물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고 역사 발전의 방향도 개변되었다.

5. 유암화명

관중에서 한중으로 가자면 반드시 진령잔도(秦嶺棧道)를 거쳐야 한다. 장량은 유방을 떠나기 전에 유방의 처지가 불리한 것을 감안해 가는 길에 모든 잔도를 불태우게 했다. 한편으로는 장함 등 다른 제후의 한중 공격을 방어하려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항우에게 유방은 천하를 탈취하려는 야심이 전혀 없음을 믿게 하려던 것이다. 하지만 또 달리 보자면 유방 자신을 촉 땅에 가두어놓는 셈이라 만약 기묘한 계략이 없다면 한중에서 늙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유방은 다른 선택이 없어 일단 평화를 지키며 훗날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한나라 진영에 왔을 때 한신은 첫째, 특별히 쌓은 업적이 없었고 둘째, 세력도 없었기 때문에 단지 ‘연오(連敖)’라는 말단 관직을 받았다. 이는 너무나 하찮은 직위라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 사서에 뚜렷한 기록조차 없을 정도다. 이런 미관말직에서 어떻게 자신의 원대한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랴! 마침 한신의 불만이 폭발할 무렵 군법을 어겨 사형처벌을 받게 되었다. 같은 사건으로 연루된 13명이 모두 참수된 후 이제 한신의 차례가 되었다. 한신이 고개를 들어 보니 마침 하우영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큰소리로 “임금님께선 천하를 얻을 생각이 없으신 것입니까? 어찌하여 장사(壯士)를 참하려 하십니까?”(《사기‧회음후(淮陰侯)열전》)라고 말했다.

하후영은 어려서부터 유방과 어울린 최측근의 하나로 역전의 용사이자 유방에 대한 충성심이 아주 높았다. 홍문연에서 유방을 따라 나선 4무사 중 한명이기도 하다. 그는 한신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유방이 천하를 얻으려는 것은 비밀 중의 비밀인데 이런 하급 군사가 어찌 훤히 안단 말인가? 이에 한신을 가만히 살펴보니 그의 외모가 용맹하고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이에 한신을 풀어준 후 함께 자세한 대화를 나눴다. 한신과 대화한 후 그는 한신의 재주와 지혜 및 견해에 탄복해 곧장 유방에게 추천했다.

유방은 한중에 들어온 후 줄곧 울적하고 즐거운 일이 없었기에 하우영의 천거에 대해서도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다. 유방은 한신을 바로 만나는 대신 하후영의 체면을 봐서 식량을 관리하는 치속도위(治栗都尉)로 승진시켰다. 치속도위를 매개로 한신은 소하와 직접 만날 기회를 얻는다. 소하는 당시 한나라의 재상이었다. 그는 한신이야말로 뛰어난 식견과 출중한 지혜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병법에도 능한 것을 보고 그야말로 한나라 군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장군재목임을 발견했다. 소하는 급히 유방을 찾아가 그를 추천했다.

소하는 유방과 고향이 같았고 미천한 신분일 때부터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소하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유방은 한신을 중시하지 않았다. 한동안 기다렸던 한신은 이에 실망해 다른 출로를 찾으려 했다.

원래 한나라 군사들은 모두 관동사람들로 가족들도 모두 고향에 있었다. 이는 유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유방이 하루 빨리 고향을 되찾아 가족들과 함께 살기를 원했건만 유방은 오히려 잔도에 불을 지른 후 관중 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는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자 고향에 대한 향수와 실망이 한나라 진영에 가득 찼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수많은 병사들이 인내심을 버리고 앞을 다퉈 탈영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장수들도 몇십 명이나 도망쳤다. 그러던 어느 날 한신 역시 몰래 한나라 군영을 떠났다.

한신의 도주는 소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소하의 눈에 한신의 능력은 한나라 진영의 모든 대장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유방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급히 한신을 쫓아갔다. 당시 날이 이미 저물었고 달도 밝지 않았다. 소하가 한신을 쫓기 위해 채찍을 휘두르며 어둠 속으로 말을 달린 이야기는 ‘달밤에 소하가 한신을 쫓다(蕭何月下追韓信)’는 아름다운 일화로 남았다.

한편 유방은 소하마저 탈영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치 넋이 빠지고 좌불안석이라 마치 수족을 잃은 것 같았다. 당시 소하의 다급함 역시 유방에 못지않았다. 한신이야말로 한나라 군의 유일한 희망인데 한신을 잃는다면 한나라 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만약 한신이 다른 진영에 가담해 한나라의 적수가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한편 한신은 딱히 어느 곳으로 가려는 생각이 없었고 마음도 울적해서 발걸음이 빠르지 않았다. 야심한 시각이 되어서야 한계(寒溪) 강변에 도착했다. 당시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소하는 줄곧 소리를 따라 한신을 추격해왔다. 저 멀리 달빛아래 한계 강변에서 한필의 말과 사람이 강을 건너려는 것이 보였는데 바로 한신이었다.

며칠 후 소하가 한신을 데리고 한나라 진영에 돌아왔을 때 유방은 여전히 소하가 떠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소하를 다시 보니 마치 꿈속인 듯 놀랍고 기쁘고 또 고민스러웠다. 그는 소하에게 왜 도망을 쳤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소하가 한신을 추격하기 위해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났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매일 수십에서 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탈영하고 있었고 심지어 장군도 수십 명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도망쳐도 쫓아가지 않던 소하가 왜 유독 한신만 추격했단 말인가?

이에 대해 소하는 “다른 사람은 평범한 무리에 불과하니 많아도 그만이고 적어도 그만이라 도망을 쳐도 그뿐입니다. 하지만 한신은 다릅니다. 천하에 둘도 없는 기재(奇才)니 만약 왕께서 평생 한중왕으로 만족하신다면 모르겠지만 만약 제업(帝業)을 이루려 하신다면 한신의 보좌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라고 했다.

소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유방은 한신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을 생각에 잠긴 후 유방은 한신을 장군으로 발탁하자고 했다. 하지만 소하는 장군의 직위로는 한신의 재능을 펼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유방은 어쩔 수 없이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을테니 한신을 데려오게 했다. 하지만 소하는 대장군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존중이 부족한 것이니 길일을 택해 목욕재계한 후 단을 쌓아 정식으로 명령을 내려 성의를 보여주자고 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