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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한신(4): 삼진을 다시 평정하다

작자/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3장 한나라의 천하를 다진 한신

1. 한중(漢中)대책

한고조 원년(기원전 206년) 6월 유방은 좋은 날을 택해 단을 설치하고 목욕재계한 후 예를 갖춰 한신을 대장군(大將軍)에 임명했다. 임명식을 마친 후 유방은 한신에게 관중을 되찾을 계책이 있는지 물었다. 한나라 군은 병사는 약하고 장수가 적어서 근본적으로 항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따라서 당시 유방은 큰 목표라 할 게 없었고 가장 큰 소원이 관중왕(關中王)이 되는 것이었다.

한신은 유방에게 우선 동쪽으로 나아가 천하를 다투려면 가장 큰 적이 항우임을 지적하면서 유방에게 용감하고 사납고 어질고 굳센 점에서 또 병력면에서 항우와 비교할 수 있는지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유방은 “내가 항왕만 못하오.”라고 대답했다. 다시 말해 용기는 물론이고 인자함의 측면에서도 자신이 항우만 못함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자 한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유방에게 두 번 절을 올린 후 말했다. “대왕께 축하드립니다. 자신을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대왕께서 항왕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물은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비록 강대하지만 대왕께선 분명 그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항우 성격의 약점을 분석했다. 항우는 비록 남보다 용맹하고 크게 화를 내 소리를 지르면 천군만마를 물리칠 수 있지만 재능이 있는 현명한 사람은 등용할 줄 모르니 이는 필부의 용기(匹夫之勇)에 불과합니다. 비록 평소 사람을 대할 때면 공손하고 자애롭고, 부하가 병에 걸리면 따뜻하게 문안하지만 실제로 벼슬을 주어야 할 때가 되면 인장이 닳아 깨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며 선뜻 내주지 못하니 이는 아녀자의 인(婦人之仁)에 불과합니다.

또한 항우는 패왕이 된 후의 조치도 타당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천하의 패자를 자처하면서 오히려 관중을 포기하고 팽성에 도읍을 정해 지리적 이점(地利)를 잃었습니다. 둘째, 의제(義帝)와의 약속을 어기고 분봉 역시 공평하지 못했습니다. 좋은 땅을 공이 큰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친애하는 사람에게 나눠줘 여러 제후들의 불만을 샀으니 이는 인화(人和)의 이로움을 잃은 것입니다. 셋째, 항우가 의제를 강남으로 내쫓자 제후들이 이를 본받아 자기 땅의 군주를 쫓아내고 자립해 천하가 큰 혼란에 빠졌으니 천시(天時)의 이로움을 잃은 것입니다. 넷째, 항우는 가는 곳마다 학살과 파괴를 일삼아 민심을 잃었습니다.

한신의 분석에 따르면 항왕은 명의상으로는 패주(霸主)였지만 사실상 천하의 민심을 잃었다. 만약 유방이 그 반대로 할 수 있다면, 즉 유능한 장수를 임명해 기율이 엄한 군대로 정의의 깃발을 내걸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장사들의 소원을 따른다면 반드시 초패왕을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당시 한나라가 관중을 회복하는 데 첫 번째 걸림돌은 장함, 사마흔, 동예 3인이었다. 한신은 이 셋을 상대하기란 어렵지 않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본래 진나라의 장수들로 다년간 전투에 나섰고 수하의 수많은 병사들과 함께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이들이 초나라에 투항한 후 항우는 진나라의 20만 병사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 버리고 오직 세 장수만 살려두었다. 때문에 진나라의 부모형제들은 이 세 사람에 대한 원한이 뼛속 깊이 사무쳐 있어 이들이 비록 관중의 왕으로 임명되었지만 관중 백성들의 민심을 잃었다.

반면 유방은 무관(武關)에 들어올 때부터 소하의 건의에 따라 백성들과 약법삼장을 맺고 나머지 일체를 간섭하지 않았다. 때문에 관중 백성들은 이를 고마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모두들 유방이 관중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불평하고 있었다. 만약 유방이 동쪽으로 병력을 움직인다면 격문을 돌리는 것만으로도 삼진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한신의 이 ‘한중대책’은 항우와 천하를 다툰다는 장기 계획을 제출하면서 단기적으로 관중을 탈취할 전략을 분명히 했다. 분석이 투철하면서도 명확하고 견해가 독창적이다. 그는 전쟁의 승패를 단순히 군사력의 강약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민심의 향배와 연관시켰다. 또 쌍방의 장단점을 분석할 때도 미래의 변화와 변화의 조건 및 시기까지 보고 있다. 이는 한신의 비범하면서도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탁월한 식견을 반영한다. 후인들은 한신의 ‘한중대책’을 제갈량의 ‘융중대책(隆中對)’과 함께 거론하며 그 치밀함과 완벽함에 대해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다.

유방은 한신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그 첫 번째 목표는 바로 관중을 공략해 삼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2. 삼진(三秦)을 다시 평정하다

한신의 분석과 마찬가지로 항우가 제후들에게 땅을 나눠준 후 천하의 여러 세력들 사이에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문제가 생긴 곳은 제나라의 전영(田榮)이었다. 전영은 원래 제나라 귀족 중의 군사지도자로 여러 차례 항량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적이 있었다. 때문에 항우는 제후들에게 땅을 나눠줄 때도 그는 왕으로 책봉되지 못했다. 전영은 이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항우가 세운 제왕(齊王)을 몰아내고 스스로 제왕이 되었다. 또 팽월(彭越)을 도와 항우의 영지인 정도(定陶) 공격에 나섰다.

한편 진여(陳餘)는 같이 활동했던 장이(張耳)만 상산왕(常山王)에 봉해졌고 원래 자신이 조나라 왕으로 모셨던 조헐(趙歇)이 자리를 옮겨 대왕(代王)에 봉해졌지만 자신만 왕으로 책봉되지 못하자 크게 불만을 품었다. 그는 전영과 동맹을 맺고 장이와 항우를 공격했다. 장이는 진여와의 전투에서 패하자 유방에게 투항했다. 진여는 또 조헐을 대나라에서 모셔와 조나라 왕으로 삼고 자신이 대왕이 되었다.

또 요동왕(遼東王) 한광(韓廣) 역시 불만을 품고 연왕(燕王)의 영지를 차지하려다 결국 연왕에게 멸망당했다.

중원지역에서 전쟁의 불길이 타오르자 항우의 패주 지위를 흔들었다. 항우는 이 모든 재앙의 가장 큰 원인을 전영으로 보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한신은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보고 한고조 원년(206년) 8월 군사를 이끌고 삼진(三秦, 원래 관중 지역을 항우가 세 나라로 쪼개 분봉했기 때문에 삼진이라 한 것) 평정을 위한 동정(東征)에 나섰다.

관중과 한중은 높고 험한 진령(秦嶺)산맥에 가로막혀 있다. 두 지역은 겨우 몇 갈래 험한 산길로만 연결될 뿐인데 이를 각도(閣道) 또는 잔도(棧道)라 했다. 길의 길이는 각각 수백 리에 달하는데 아주 좁고 험해서 행군도 어렵고 군수물자를 나르기란 더욱 어려웠다. 그중에서도 포사곡(褒斜谷) 잔도와 진창도(陳倉道)가 가장 중요한 두 길이었다. 포사도는 유방이 한중에 들어갈 때 불태워버린 잔도로 길이가 무려 600리가 넘어 길을 수리하자면 하루아침에는 불가능했다.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길은 진창도 뿐인데 그 입구를 중무장한 장함의 부대가 지키고 있어 이곳을 돌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신은 이런 난관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번쾌, 주발에게 병력을 이끌고 전에 불태워버린 포사도로 가서 잔도를 수리하게 했다. 마치 이곳으로 병력을 보낼 것처럼 허장성세(虛張聲勢)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장함은 즉시 포사도 입구에 많은 병력을 파견해 방어하게 했다. 이곳은 “한사람이 관을 가로막으면 누구도 통과할 수 없는” 곳으로 입구만 점령하면 근심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한신은 장함이 계략에 걸려든 것을 보고 병력을 이동시켰다. 서쪽으로 면현(勉縣)을 나와 북쪽으로 방향을 튼 후 옛날 길을 따라 진창으로 진군했다. 이 길을 진창도라 한 이유는 당시에 진창이 식량을 쌓아두고 저장하던 군사요지였기 때문이다. 한나라 군이 진창에 먼저 진입하게 되면 삼진(三秦) 군대의 후면을 포위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당시 장함의 병력은 대부분 함양으로 동원되어 진창에는 남은 병력이 거의 없었다. 한나라 군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가볍게 진창을 차지했다.

장함이 이 소식을 들은 후 급히 군대를 이끌고 달려와 한신과 맞섰다. 한나라 군사들은 이미 쌓인 분노가 오래되었고 초전에 승리를 거둬 자연히 사기가 높았다. 반면 장함 진영에서는 급히 응전하라는 독촉을 받자 군심이 동요되었다. 양군이 서로 진을 치고 대치할 때 번쾌와 주발의 병력까지 합세해 삼면에서 협공을 했다. 결국 전투에 패한 장함은 자살했다. 승산이 사라진 사마흔과 동예 역시 잇따라 투항해왔다. 이렇게 삼진을 다시 평정하는데 겨우 4개월이 소요되었다. 이때부터 관중은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기 위한 기지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한신이 군사를 이끌고 한중에서 관중에 들어간 전략을 ‘겉으로는 잔도를 수리하고 몰래 진창을 건너다(明修棧道,暗渡陳倉)’로 개괄할 수 있다. 이는 한신이 첫 선을 보인 작전이었다. 지금은 이 고사성어가 “상대방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전이시킨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신이 처음 창조한 이 전술은 후대 병가(兵家)에서도 줄곧 중시되었고 나중에 《삼십육계(三十六計)》의 하나로 수록되었다.

한편 항우는 한나라 군의 삼진 회복에 대해 일시적으로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항우 수하의 책사들은 모두 유방이야말로 최대의 적이라고 인정했다. 특히 아부 범증은 한나라를 최우선적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항우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장량이 시의적절 하게 밀서를 보냈다. 편지에서 그는 유방은 관중왕이 되고자 할 뿐이며 영원히 항우에게 복종할 거라고 했다. 또 전영과 팽월이 연합해 초나라에 반기를 들고 천하를 다투려 한다는 서신을 동봉해서 보냈다.

항우는 이 편지를 읽고 나서 즉시 대군을 이끌고 북상했다. 우선 팽월을 공격해 세력을 흩어놓았고 뒤이어 성양(城陽)에서 전영을 크게 물리치고 전가(田假)를 새로운 제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전영의 동생 전횡(田橫)이 항우가 물러난 뒤 전가를 몰아내고 전영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화가 난 항우는 다시 군사를 돌려 전횡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전횡은 항우와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유격전을 펼쳤다. 때문에 항우는 싸우고 싶어도 이기기 어려웠고 그렇다고 물러나자니 참을 수가 없었으니 완전히 제나라의 수렁에 빠져버렸다.

유방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관중에서 착실히 기초를 다지며 세력을 확장시켰다. 이때 각지에서 문신과 무장들이 앞을 다퉈 찾아왔다. 도성도 원래 옹색했던 남정(南鄭)에서 동쪽으로 옮겨 역양(櫟陽)에 자리 잡았고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 서위왕(西魏王) 위표(魏豹) 및 은왕(殷王) 사마평(司馬平) 등의 지역을 수복했다. 또 항우가 임명한 한왕(韓王) 정창(鄭昌)을 폐위시키고 자신을 따르던 한신(韓信, 대장군 한신과 동명이인)을 한왕으로 세웠다. 장이는 진여에게 패한 후 유방에게 투항했고 본래 항우의 막하에 있던 진평(陳平) 역시 유방에게 투항했다.

3. 형양을 구원하다

이제 유방은 영토가 수배로 확장되었고 수하의 군대 역시 3만에서 수십만으로 증가했다. 이에 유방은 한신이 없어도 항우와 대항할 수 있으리라는 자만심과 한신의 명성이 자신보다 높아질까 우려해 한신의 병권을 회수했다. 이때 유방에게 장량이 돌아온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항우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앞둔 전날 밤 유방은 군대를 조정해 소리 소문도 없이 한신의 대장군 직책을 빼앗았다. 대신 소하와 함께 관중을 지키며 잔당을 소탕하고 배후에서 자신을 지원하게 했다. 유방 자신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장량, 진평 등과 함께 동진에 나섰다.

여기서 장량은 자(字)가 자방(子房)으로 한신, 소하와 함께 한나라 초기의 삼걸(三傑)에 속한다. 그는 조부와 부친이 모두 한나라 승상을 지냈다. 진시황이 한나라를 멸망시킨 후 박랑사(博浪沙)에서 자객을 이용해 진시황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이름을 바꾸고 하비(下邳)로 도망갔다. 그곳에서 신비한 노인 황석공(黃石公)을 우연히 만나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전수받은 후 모략가(謀略家)가 되었다. 장량은 모략에서는 비록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지만 한신처럼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진 못했다. 때문에 유방은 그가 자신에게 무슨 위협이 되리라고 걱정하지 않았고 때문에 줄곧 장량을 믿고 의지해왔다.

한고조 2년(기원전 205년) 3월 유방이 대군을 이끌고 낙양에 이르자 장량은 직접 항우에게 살해당한 의제를 위한 장례를 치를 것을 계획했다. 전군이 소복을 입고 3일간 애도했다. 동시에 각 지역 제후들에게 사자를 보내 의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항우 토벌에 나섰음을 천하에 알렸다. 이를 통해 민심을 얻는 동시에 군사를 낼 수밖에 없었던 정당한 이유를 찾았다.

의제의 원수를 갚는다는 기치 하에 유방은 한 달 만에 56만 대군을 모았고 위풍당당하게 초나라 도성 팽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항우와 그의 주력부대는 모두 제나라 전투에 참여해 후방이 비어 있었다. 유방은 단번에 2천 리가 넘는 길을 달려갔고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가볍게 팽성을 얻었다.

승리에 도취된 유방은 팽성 공격으로 천하를 차지했다고 여기고 실력이 여전한 항우에 대해 방심했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성색견마’(聲色犬馬, 가무 여색 개 기르기 말 타기)에 빠져 시간을 낭비했다.

항우는 줄곧 유방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는데 팽성이 한나라 군에게 점령당하자 애초 홍문연의 일이 떠올랐다. 자신의 어진 일념(一念) 때문에 겨우 목숨을 부지한 유방이 뜻밖에 대규모 병력을 끌고 자신의 궁중에 들어와 환락에 빠져있다는 사실에 분노한 항우는 즉시 3만의 정예병력을 이끌고 남하했다. 나머지 병사들은 계속해서 제나라에 남아 전횡과 싸웠다.

어느 날 밤 소현(蕭縣)에 진군한 항우는 한나라 군의 좌익을 궤멸시켰고 이튿날 낮에 팽성을 수복했다. 크게 패한 한나라 군은 곡수(谷水), 사수(泗水)까지 퇴각했다. 이때 초나라 군에 살해당하거나 물에 빠져 죽은 병사가 10만이 넘었다. 나머지 한나라 군사는 남쪽으로 도망쳤지만 휴수(睢水)강가에서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고 추격병에 쫓겨 또 피살되거나 물에 빠져 죽은 인원이 10만이 넘었다. 《사기‧항우본기》에는 “(사망자가 너무 많아서) 휴수가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도 안 되어 유방의 56만 대군은 항우의 3만 정병에게 낙화유수처럼 타격을 받았고 유방 자신도 초나라 군사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었다. 위태롭던 순간 갑자기 한줄기 큰 바람이 불더니 모래와 돌을 날리며 천지가 어두컴컴해졌다. 고목이 부러지고 초가지붕이 날아가는 등 순식간에 초나라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유방이 이 기회를 타서 포위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막상 탈출해보니 겨우 수십 기에 불과했고 유방의 가족마저 뿔뿔이 흩어졌다. 유방의 부친 태공(太公)과 부인 여치(呂雉)가 초나라 군에 잡혀 인질이 되었다.

한편 유방은 도망치는 도중에 아들 유영(劉盈, 훗날의 혜제)과 딸(노원공주)을 만났지만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몇 차례나 수레에서 밀어냈다. 다행히 수레를 몰던 하후영이 그때마다 두 남매를 다시 태워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유방은 이 한차례의 전투로 삼진을 평정한 이후 획득한 거의 전부를 날려버렸고 56만 대군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나라 군이 팽성에서 형양까지 물러나자 유방에게 투항했던 제후와 왕들이 모두 항우에게 투항해 형세가 급전직하했다. 형양 동쪽의 넓은 땅이 초나라 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에서 만약 항우가 공격해온다면 유방은 의지할 만한 방어막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초나라를 견제하던 전횡과 진여마저 항우와 협상에 나서자 항우는 창끝을 유방에게 향했다. 유방은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한신을 다시 기용했다.

한신은 위급한 상태에서 명령을 받고 즉시 초나라에 강력한 반격을 가했고 아주 빠른 시간 내에 형양 동쪽 대부분의 땅을 되찾았다. 전선은 형양에서 점점 동쪽으로 나아갔고 나중에는 형양과 팽성의 중간지점에 도달했다. 한나라 군은 이 지역에 튼튼한 방어막을 설치했고 초한의 대치는 일방적인 열세에서 대치상태로 변했다.

이때 만약 한신이 힘써 막아 나서지 않았다면 한나라 군의 결말은 상상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한신의 전과는 한나라 군을 다시 떨쳐 일어나게 했고 다른 제후들도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했다. 유방은 전화위복이 되었고 항우와 한번 더 자웅을 겨룰 기회를 얻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