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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한신(5): 배수진

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4. 위나라를 기습

팽성대첩 이후 항우는 유방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그는 병력을 조정해 제나라, 조나라, 위나라는 물론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와 협력해 남과 북에서 협공해 관중을 직접 공략하려 했다. 바로 이때 원래 유방에 예속해 있던 위나라 왕 표(豹)가 유방의 세력이 약한 것을 보고는 역심을 품고 항우와 손을 잡고 측면에서 유방을 협공하려 했다.

위왕의 영지는 하동(河東 황하 동쪽)에 위치해 서쪽으로 관중을 위협하고 남하하면 관중과 형양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었다. 때문에 유방 입장에서는 항우와 결전을 치르기 전에 반드시 위왕 표를 처리해야 했다. 그는 우선 모사 역이기를 보내 좋은 말로 타일러보았다. 하지만 위왕 표는 평소 유방의 오만불손한 태도를 극히 혐오했기 때문에 사자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역이기는 어쩔 수 없이 아무 공도 없이 되돌아왔다. 부득이한 상황에 처한 유방은 다시 한신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유방은 한신을 좌승상(左丞相) 겸 대장에 임명한 후 조참, 관영 등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위왕은 황하 강변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고 엄밀한 방어벽을 구축했다. 한신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황하를 건널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당시 한나라 군은 겨우 백여 척의 배만 있었는데 억지로 강을 건너자면 피해가 커져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신은 ‘진선포판 목영도군(陳船蒲阪,木罌渡軍)’의 묘책을 사용했다. 즉 병력을 둘로 나눠 겉으로는 포판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처럼 했다. 관영에게 1만의 병력과 백여 척의 배를 동원해 임진관(臨晉關) 건너편에 진을 펼치고 강을 건너는 것처럼 했다. 이에 위왕 표는 한나라 군대가 포판으로 건너올 것으로 여기고 곧장 기존의 배치를 움직여 다른 지역에서 많은 병마를 동원해 엄밀히 방비하게 했다.

한편 한신은 몰래 다른 병력을 움직여 북쪽으로 백리 정도 떨어진 하양(夏陽 지금의 섬서성 한성)으로 갔다. 하양나루는 용문관(龍門關)에서 포진관(蒲津關) 사이에서 가장 좋은 나루터로 물길이 넓고 흐름이 완만해 배를 띄우기 쉬웠다. 또 20리 정도 평지가 있어 군대를 집결하기에도 편리했다. 한신은 하양에 도착한 후 배를 이용하지 않고 강을 건너게 했다. 즉 각종 그릇을 동원하고 나무를 벌목 한 후 나무토막을 항아리에 끼워 끈으로 고정한 뗏목을 만들었다.

물론 이 도하작전은 상대편에 있던 적병이 포판으로 동원된 뒤에 시작되었다. 도하한 후에는 위나라 군을 놀라게 하지 않고 즉시 안읍(安邑)으로 진격해 신속하게 안읍을 점령했다.

안읍은 군사적 요지였기 때문에 위왕은 어쩔 수 없이 병력을 돌려 구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나라 군대가 포판에서 철수하자 한나라 군은 즉각 배를 타고 강을 건넌 후 신속하게 포판을 점령했다. 이렇게 앞뒤로 강을 건넌 한나라 군은 위왕의 대군을 포판과 안읍 양쪽에서 협공했다. 안읍성 아래에서 위나라 군이 대패한 후 도망가자 조참이 추격에 나섰다. 위나라 군이 동원(東垣)까지 도망가자 조참 역시 따라갔다. 위나라의 잔병이 전부 소멸된 후 위왕 표 역시 생포되었다. 이어서 한신은 또 북쪽을 공략해 평양(平陽)을 차지해 단번에 위나라 전역을 평정했다.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강력했던 위나라가 소멸되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하양고도(夏陽古渡)를 가리켜 ‘목앵도(木罌渡, 목앵이란 나무통으로 황하를 건넜다는 의미)’ 또는 ‘회음도’라 불렀다.

‘목앵도하(木罌渡河)’는 전쟁사에서 경전의 반열에 오른 작전으로 단지 강을 건넌 방식이 특이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전략은 더욱 기묘했다. 우선 ‘성동격서(聲東擊西)’로 동쪽을 공격하는 척 하다 서쪽을 공격한 후 다시 동쪽을 공격해 적군을 완전히 수세에 처하게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계획이 성공한 후에는 많이 이들이 그를 경계로 삼는다. 때문에 같은 수법을 반복하는 것은 어려움이 아주 크다. 그러나 군사기재 한신은 두 번이나 ‘암도진창(暗渡陳倉, 몰래 진창을 건너다)’ 전술을 사용했으니 가히 독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신은 위나라를 평정해 측면에서의 위협을 없애고 관중의 후방을 더 공고히 다지는 한편 항우의 우익이 공격할 수 없게 만들어 형양에 대한 압력도 줄여주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신의 작전은 줄곧 병력을 깨뜨리는 것 위주이며 적의 주력을 소멸시키고 단순하게 성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때문에 그가 얻은 지역은 일반적으로 아주 공고했고 다시 땅을 잃는 상황이 나타나지 않았다.

위나라가 멸망하자 유방은 즉각 사람을 파견해 포로로 잡은 모든 위나라 정병과 획득한 대량의 물자를 전부 가져갔다. 명분은 형양전투를 지원한다는 것인데 더 중요한 원인은 한신의 실력을 억제하기 위함이다.

5. 지략으로 조와 연을 취하다

한신이 위나라를 멸망시켜 한나라 군 배후의 우환을 뿌리째 제거하자 황하 북쪽의 대나라, 조나라, 연나라, 제나라 등 제후국들이 연합해 한나라에 저항했다. 한나라 군은 마침 전세가 불리해져 형양을 두 차례나 지키지 못했다. 간고한 대치는 유방에게 형양을 포기할 생각마저 갖게 했다.

한신은 객관적으로 형세를 분석한 후 스스로 3만 병력을 이끌고 북상해 연나라, 조나라, 대나라, 제나라를 공격해 이들과 초나라 사이의 식량 운반통로를 끊겠노라고 했다. 만약 이들 제후들이 항복하게 되면 한나라는 양쪽에서 초나라를 협공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중국 전쟁사상 최초로 정면적인 지구전과 측면 공격을 결합한 전략이었다. 이 뛰어난 전략에 대해 유방은 일시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반대할 이유도 없어 한신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는 위나라를 하동군(河東郡)에 편입하는 한편 장이를 한신의 조수로 파견해 행동을 감시하게 했다.

한고조 2년 윤9월 한신은 병력을 이끌고 북상했다. 그가 공격할 첫 번째 목표는 진여가 왕으로 있는 대(代)나라였다. 1년 전 유방이 조나라에 병력을 파견해 항우를 공격하라고 했을 때 진여는 장이를 죽이는 조건으로 출병하겠다고 제안했다. 유방은 장이와 외모가 비슷한 사람을 찾아내 대신 죽인 후 진여를 속여 출전하게 했다. 나중에 유방에게 속은 것을 안 진여는 곧 유방을 배반했다. 당시 대나라 왕 진여는 조나라의 상국(相國 재상)으로 있으면서 국정을 돕고 있었다. 대신 대나라 정사는 상국인 하열(夏說)이 대신했다. 대나라는 군사력이 약해 한신의 일격을 감당하지 못했다. 한신은 먼 거리를 이동해 대나라 군을 직접 공격했고 하열을 포로로 잡고 대나라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조나라와 대나라는 사실상 하나였고 진짜 실력은 조나라에 있었다. 때문에 한신의 입장에서 완전히 승리하려면 반드시 조나라를 멸망시켜야 했다. 바로 이때 형양에서 곤경에 처해 있던 유방이 또 사람을 보내 한신의 군대를 접수해 형양 전장을 보충하게 했다. 이번에는 단순히 포로들만 데려간 게 아니라 대장 조참과 그의 부대까지 형양으로 불러들였다.

갑작스런 병력축소에도 불구하고 한신은 중도에 공격을 중단하고 싶지 않았다. 이에 현지에서 군대를 조달해 계속해서 조나라를 공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유방도 이 제안까지 거절하기는 어려워 약간의 병력을 한신에게 주었다. 그러나 한신이 군대를 새로 조직했을 때는 이미 가장 좋은 전투기회를 잃어버렸고 조나라 군은 이미 방어병력을 배치하고 진영을 튼튼하게 구축한 상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더욱이 조나라는 지형적으로 수비하기는 쉽지만 공격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곳이었다. 높고 험준한 태항산맥(太行山脈)이 천연의 장벽처럼 가로막고 있어 조나라로 진입하는 유일한 길은 태항산 8대 애구(隘口 좁은 입구)의 하나인 정형구(井陘口)였다. 이곳은 큰 협곡으로 길 양쪽에 험준한 산을 끼고 있어 길이 협소했다. 수레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가거나 기병이 대열을 지어 갈 수조차 없었다. 만약 이 협곡을 통과하려면 군대가 반드시 일렬로 길게 늘어서서 앞과 뒤가 서로 도와줄 수 없었다. 만약 조나라에서 반대쪽 좁은 출구에 약간의 병력만 배치해 수비한다면 외적이 조나라를 침입하기란 아주 어려웠다. 아울러 정형구는 출구에 또 급류가 흘러 만약 조나라에 진입한 후 정형구를 통해 퇴각하기도 아주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여는 한신의 병력을 단번에 일망타진하기 위해 애구를 통제할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애구 동쪽의 비교적 넓은 땅에 20만 대군을 배치했다. 즉 한신의 군대가 정형구를 다 빠져나오면 그때 절대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이용해 한나라 군을 섬멸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계획이 한 사람의 고수에게 문제점이 간파당했다. 그는 바로 진여 수하에 있던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 전국시대 조나라의 재상이자 명장이었던 이목의 손자)였다.

이좌거는 한신의 군대가 줄곧 승세를 탔기 때문에 그 예봉을 꺾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반면 “천리 먼 곳에서 군량을 보내려면 수송이 어려워 병사들이 주린 빛이 돌 것이고 땔나무를 하고 풀을 베어야만 밥을 지을 수 있다면 배불리 먹을 수 없습니다. 한나라 군의 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정형구는 통로가 좁아 군량을 뒤에서 공급해야만 합니다. 만약 미리 병력을 배치해 좁은 길에서 군량미 수송을 차단한 후 한나라 군이 정형을 다 통과하길 기다렸다가 다시 병력을 파견해 입구를 막아버리면 퇴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즉 한나라 군은 조나라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뒤로 물러나지도 못할 진퇴양란의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열흘도 되지 않아 한나라 군은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사기‧회음후열전》)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진여는 유자(儒者)라서 “정의로운 군대는 속임수나 기이한 계책을 쓰지 않는다(義兵不用,詐謀奇計)”는 말로 이좌거의 건의를 묵살했다.

첩자를 통해 이 이야기를 들은 한신은 속으로 아주 기뻐하면서 곧장 행동에 나섰다. 한밤에 2천의 경무장한 한나라 기병들에게 붉은 깃발을 들고 샛길로 조나라 진영 근처에 숨어 있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병사들에게 출발하기 전에 식사를 나눠주면서 오늘 조나라 군사를 무찌른 뒤 다 같이 모여서 아침밥을 실컷 먹자고 명령했다.

대장군의 이 명령을 들은 병사들은 망연자실했다. 당시 한나라 군은 겨우 3만에 불과한데 어떻게 20만이 넘는 조나라 대군을 무찌른단 말인가? 게다가 적을 무찌른 후 다시 아침을 먹자고 하니 믿을 수 없어하면서 대장군이 분명 꿈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한신은 여러 장수들이 반신반의하는 눈빛을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1만의 병력을 지휘해 먼저 정형 어귀로 나가 물을 등지고 진을 치게 했다. 그는 진여의 계략이 한나라 군을 일거에 섬멸하려는 것이라 한나라 군이 전부 나타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것임을 간파했다. 상황은 과연 한신의 짐작대로였고 일만의 병력은 순조롭게 자리를 잡았다.

날이 밝은 후 한신은 대장 깃발과 진격의 북을 울리며 정형 어귀로 나가 강을 등지고 배수진을 쳤다. 진여는 한나라 군의 병력이 적은 데다 자신들은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우세한 입지에 있는 것을 보고 정예부대를 이끌고 격렬하게 공격해왔다. 양군이 격렬하게 싸우던 도중 한신이 패배를 가장하고 북과 깃발마저 버리면서 강기슭의 진지로 달아났다. 이를 본 진여는 승기를 잡았다고 여겨 곧장 전군에 출격명령을 내리고 한신을 생포하라고 했다. 이때 미리 조나라 진영 근처에 매복하고 있던 2천명의 한나라 병사들이 조나라 성벽 안으로 들어가 조나라 기를 뽑고 전부 한나라 군의 붉은 깃발로 바꿔 꽂았다.

이때 한신은 배수진을 친 일만 군사들과 함께 추격해 온 조나라 군대와 싸웠다. 뒤로 물러날 곳이 없었기 때문에 한나라 군사들은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맹렬히 싸웠다. 쌍방이 반나절을 격렬히 싸웠음에도 여전히 승부가 나지 않았다. 조나라 군은 오래 싸워도 승산이 없자 병력을 물려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보니 군영에 나부끼는 깃발은 전부 한나라군의 깃발이었다. 조나라 군사들은 한나라 군이 이미 자기 군영을 차지했다고 생각하자 순식간에 군심이 어지러워졌고 사방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때 강가로 물러났던 한나라의 주력부대가 승기를 타고 반격에 나서면서 2천의 병력과 협공하자 조나라 군이 대패했다. 이 싸움에서 진여는 전사했고 조왕 헐과 이좌거는 포로로 잡혔다. 이로써 조나라 땅은 한나라 군의 차지가 되었다.

전투가 끝난 후 장수들이 한신에게 물었다. “병서에 따르면 ‘산과 언덕은 오른쪽으로 등지고 물과 못은 앞으로 하여 왼쪽에 두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당연히 산이나 언덕을 뒤에 두고 물을 앞에 두라는 것인데 장군께선 반대로 물을 등지고 진을 치게 하셨으니 이것은 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한신이 웃으며 대답했다. “병서에 이르길 ‘사지에 빠뜨린 뒤에야 살 수 있고 망할 곳에 둔 후에야 생존할 수 있다(陷之死地而後生,置之亡地而後存)’는 말이 있다. 이번 병사들은 새로 급조한 신병들이라 반드시 먼저 사지에 빠뜨리게 한 후에야 저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싸우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다 달아나서 부대를 이루지도 못하고 궤멸되었을 것이다.” 모두들 비로소 한신이 정공과 기습공격을 함께 쓰는(奇正並用) 신묘한 용병술을 지닌 고수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배수일전(背水一戰)’이란 고사성어가 나온 유래다.

한편 한신은 광무군 이좌거의 식견에 탄복해 군영에 묶여 온 이좌거를 보자 직접 포승을 풀어주며 사죄를 구했다. 그리고는 마치 학생이 스승을 대하듯이 그를 동쪽에 앉게 하고 자신은 서쪽에 앉아 연나라와 제나라를 토벌할 책략에 대해 가르침을 청했다. 이좌거는 겸손하게 “‘싸움에서 진 장수는 무용을 말할 수 없고 멸망한 나라의 대부는 존속을 말할 수 없다(敗軍之將不可以言勇 亡國之大夫不可以圖存)’고 했습니다. 지금 저는 싸움에 지고 나라를 망하게 한 포로에 불과한데 제가 무슨 자격으로 당신과 나라의 큰일에 대해 토론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사양했다.

한신이 곧장 대답했다.

“춘추시기의 백리해(百里奚)는 원래 우(虞)나라에서 관리로 있었는데 나중에 우나라가 멸망한 후 진목공(秦穆公)이 양가죽 5장과 바꿔 데려온 후 진나라의 대부로 삼았습니다. 그는 진목공이 여러 제후들을 제패하는 웅대한 계획을 실현하는데 일조했습니다. 백리해가 우나라에 있을 때는 어리석다가 진나라에 와서야 재능 있는 사람이 된 게 아니며, 그가 우나라를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다가 진나라에 와서야 진심을 더 기울인 것도 아닙니다. 우나라 군주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진목공은 그의 좋은 책략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진여가 선생의 계책에 따랐더라면 계단 아래에 묶인 포로는 바로 나 한신이었을 겁니다. 바로 그가 당신의 계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제게 패한 것이고 비로소 당신께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이좌거는 한신이 이렇게까지 자신의 심정을 깊이 이해해주자 큰 감동을 받았고 당면한 정세에 대해 진지하게 분석해주었다.

“제가 듣기에 ‘지혜로운 사람도 천에 한 번은 반드시 실수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에 한 번은 반드시 얻음이 있다.(智者千慮,必有一失;愚者千慮,必有一得)’고 합니다. 성안군 진여는 오랫동안 전투를 치러왔고 또 이번에 완벽한 대책이 있었지만 단 한 번의 실수로 군대가 패배하고 목숨도 잃었습니다. 장군께서는 위왕 표를 포로로 잡고 대나라 재상 하열을 생포했으며 단 한 번 전투로 정형을 내려와 하루아침에 조나라의 20만 정예를 무너뜨려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 위세가 진동하고 있습니다. 이는 장군의 우세한 점입니다. 하지만 장군의 사졸들은 이미 지쳐서 연속으로 작전을 펼치기 어려우니 이는 장군의 약점입니다. 만약 지친 사졸들을 몰아 갑자기 수비가 튼튼한 연나라를 공격하신다면 속전속결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시일을 끌고도 승리할 수 없다면 반드시 사기가 꺾일 것이며 군량미 공급에도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연약한 연나라마저 공략하지 못한다면 연나라보다 강력한 제나라는 더 항복하지 않을 겁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싸움을 멈추고 쉬면서 먼저 조나라를 어루만지시고 군사들을 잘 먹여 조나라를 안정시킨 이후 다시 군사를 이끌고 북상해 연나라로 향하시는 겁니다. 대군이 국경에 도착할 즈음 말 잘하는 변사를 보내 항복을 권하게 하고 이해관계를 분명히 밝히되 장군의 혁혁한 명성을 알리신다면 연나라는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런 후에 다시 제나라를 설득한다면 제나라 역시 반드시 바람에 휩쓸리 듯 복종할 것입니다.”

한신은 그의 말을 듣고 좋은 생각이라며 크게 감탄하고 곧장 연왕에게 주는 편지를 써서 연나라에 사자를 파견해 항복을 권고했다. 한신의 위명에 놀란 연나라 왕은 정말로 항복을 받아들여 초나라를 배반하고 한나라로 귀부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척서항연(尺書降燕, 편지로 연나라를 항복하게 한다는 의미)이란 고사성어가 되었다.

6. 새벽에 장수의 인을 빼앗기다

한신이 북방에서 연속으로 승리를 거둔 후 천하의 전반적인 형세가 한나라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항우는 크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주 군사를 파견해 연나라와 조나라 국경에서 소요를 일으켰다. 한신은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초나라 군을 물리치고 백성들을 편안히 하는 동시에 병력을 훈련하고 신병을 모집해 유방을 지원했다. 이와 함께 조나라와 대나라 등에서도 수시로 작은 전투가 발생하자 이 지역을 관리하는 방편으로 유방에게 장이를 조나라 왕으로 삼도록 천거했다. 사실 한신의 공로를 감안하면 자신을 왕으로 삼아달라고 청하는 것도 당연했다. 장이는 원래 유방과 교분이 두텁고 신뢰도 깊은 데다 유방이 항우에게 눌려 고전하던 상황이라 유방은 흔쾌히 한신의 요청을 수락했다.

한신이 대나라와 조나라를 격파할 때 항우는 유방에 대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유방은 당연히 항우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초나라 군은 순조롭게 형양 동쪽 한나라 군의 거점을 전부 차지한 후 형양으로 가는 군량미를 끊어버렸고 형양을 단단히 포위해 물샐 틈조차 없도록 끊어버렸다. 이런 포위상태가 1년을 넘겼다.

유방은 전투 자체에는 능하지 못했지만 목숨을 부지하는 데는 오히려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우선 항우의 심복 영포(英布)를 모반하게 했고 진평에게 4만금을 주어 항우와 초나라 대장 종리매(鍾離昩), 용저(龍且) 등의 관계를 이간질시켰다. 또 항우가 가장 신임하던 모사 범증 역시 화가 나서 진영을 떠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형양의 포위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유방은 결국 거짓으로 항복하는 척하면서 장군 기신(紀信)을 자신으로 가장하게 한 후 혼란을 틈타 형양성을 탈출했다.

항우는 형양을 탈환한 후 승세를 타고 추격에 나서 군사적 요충지인 성고(成皐)마저 수복했다. 유방은 무관(武關) 남쪽으로 움츠러들어 수비만 할 뿐 전투에 나서지 못했다. 동시에 잇달아 팽월에게 항우의 후방을 교란해달라고 요청했다. 팽월이 줄곧 팽성 인근을 공격하며 직접적으로 초나라 수도를 위협했다. 이에 항우는 팽월을 공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병력을 천리나 후퇴시켰다. 유방은 압력이 줄어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고와 형양을 되찾았다. 항우는 팽월을 물리친 후 다시 형양으로 군사를 돌려 유방을 공격했고 한 달도 못되어 연속으로 형양과 성고를 되찾았다. 성고성을 빼앗기기 직전 유방은 하후영과 둘이 달아났다.

세력이 잔뜩 위축되고 항우에게 겁먹은 유방은 대체 어디로 도망가야 안전할 수 있을까? 그는 수무(修武 하남성 획가현)에 군사를 주둔시킨 한신을 떠올렸다.

당시 한신은 연나라를 수복한 후 제나라로 밀고 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유방이 정면전에서 계속 패배하자 한신은 병사들을 훈련시켜 유방을 지원하기 위해 위나라 최남단의 수무(修武)를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곳은 유방의 전장과 비교적 가까운 곳이었다.

한신을 떠올린 유방의 심사는 아주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한신에게 지탱해 위태로운 국면에서 기사회생할 수 있어 다행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신은 겨우 3만의 병력으로 북방의 제후들을 제압했지만 자신은 왕의 신분으로 연전연패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지금 한신은 이미 10만이 넘는 병력을 가졌지만 유방은 겨우 수레 한 대와 하후영밖에 남지 않았다. 구원병을 데려오고 싶지만 그렇다고 한신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에 고심 끝에 생각해낸 계책이 바로 ‘새벽에 장수의 인을 탈취(晨奪將印)’한 것이다.

한고조 4년(기원전 203년) 6월 성고에서 패주하던 유방과 하후영은 풍찬노숙을 하며 한신의 주둔지인 수무로 도피했다. 하지만 의심 많은 유방은 바로 한신의 진영으로 찾아가 한신과 장이를 만나지 않고 몰래 역참으로 잠입했다. 이튿날 새벽 한신과 장이가 잠든 사이에 한왕의 사자를 가장해 한신의 장막에 몰래 들어가 두 사람의 인부(印符)를 훔쳐 병권을 빼앗았다. 그리고 다른 여러 장수들을 소집해 부서를 새로 배치한 후에야 겨우 마음을 놓고 한신과 장이 두 사람을 깨우게 했다.

한신과 장이가 황급히 의관을 차려 입고 알현하러 오자 유방은 한신을 상국으로 삼고 조나라의 청년들을 징집해 새로 훈련시켜 제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또 장이에게는 조나라와 대나라 땅을 다스리게 한 후 자신은 한신이 이끌던 대군을 거느리고 전장의 위기를 구하러 나섰다. 한신의 대군과 팽월의 협조에 힘입어 유방은 마침내 형양과 성고를 다시 탈환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