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천고영웅인물】 한신(6): 한결같은 충성심

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7. 제나라 점령

제나라는 원래 땅이 넓고 인구도 많아 강력한 실력을 지닌 나라였다. 초한이 서로 대치할 때 제나라를 중립을 유지하며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방관해왔다. 그러다 조나라가 망한 후에야 한신의 공격을 막기 위해 국경에 20만 대군을 파견해 엄밀한 방어에 나섰다.

음험하고 교활한 유방이 한신의 병권을 빼앗아가긴 했지만 한나라에 대한 한신의 충성심은 여전했다. 그는 곧장 병사들을 모으고 말을 사들여 새로운 병력을 만들어 제나라 공격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한신은 군사들을 다스리는데 뛰어나 새로 모집한 신병들도 단기간 내에 훈련을 통해 작전능력이 뛰어난 정예병력이 되었다. 유방은 새로 모집한 병력이 제나라 군에 맞서기에 부족할 것을 염려해 조참과 관영을 보내 한신을 돕는 한편 한신을 감시하게 했다.

한신이 제나라 정벌에 나서기 직전 유방의 모사 역이기가 제나라에 투항을 권고하러 나섰다. 그는 제나라 왕 전광과 재상 전횡을 찾아가 한신의 기존 전과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위왕 표, 조왕 헐 및 진여와 하열 등의 교훈과 연나라가 투항한 선례를 들었다. 즉 투항하면 나라와 가문을 보존할 수 있지만 투항하지 않으면 멸망한다고 설득한 것이다.

전횡과 전광은 본래 항우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한신과 싸워서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역이기의 설득에 넘어가 한나라에 투항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역이기를 귀한 손님으로 모셨고 동시에 국경 수비를 느슨히 했다.

한신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군하다가 아직 평원(平原)에서 황하를 건너기도 전에 역이기가 이미 제나라가 투항하도록 설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록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병력을 되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모사 괴철(蒯徹)은 생각이 달랐다.

괴철은 범양(範陽) 사람으로 원래 이름이 철이지만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의 이름을 휘하기 위해 ‘통(通)’으로 대신 적어 대부분의 사서에서 괴통(蒯通)이라 한다. 그는 사람됨이 기민하고 총명하며 달변이었다. 진나라 말년(기원전 209년) 진승이 스스로 왕이 되어 대장 무신(武臣)에게 군사를 주어 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괴철은 이때 무신을 도와 범양령(範陽令)에게 투항을 권고해 조나라 여러 읍에 영향을 끼쳤다. 결과적으로 무신은 단 한사람의 병졸도 잃지 않고 30여개 성을 얻었다. 이 때문에 괴철은 ‘유세가’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괴철은 한신이 중간에 병력을 멈추고 전투를 중단해선 안 된다고 보았다.

“대장군께서 제나라를 공략하는 것은 한왕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한왕이 사자를 파견해 제나라에 투항을 권고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장군께 진군을 멈추라는 통지를 하진 않았습니다. 만약 지금 제나라를 그대로 놓아두고 공격하지 않는다면 이는 한왕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일개 서생에 불과한 역이기가 겨우 3치 혀로 어떻게 저렇게 큰 제나라를 투항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장군의 대군이 국경에서 위력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한신의 그의 말을 들어보니 상당히 이치가 있었다. 제나라는 실력이 막강해 한나라에 대해 진심을 다하지도 전력을 다하지도 않았다. 만약 나중에라도 형세가 변화한다면 반역을 꾀할 가능성이 높았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철저하게 제나라를 해결하는 것만 못했다. 이에 제나라가 방심하고 있을 때 신속하게 병력을 이끌어 황하를 건너 제나라 군의 주력을 섬멸하고 가볍게 역하(曆下)를 차지했다. 또 다른 지역도 신속하게 공격해 차지했다. 한신 자신은 한나라 군의 주력을 이끌고 밤낮으로 진군해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로 향했다.

제왕 전광은 한나라 병사들이 왔다는 말을 듣고 역이기가 자신을 속였다고 여겨 “네가 만일 한나라 군을 멈추게 한다면 살려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를 삶아 죽여버리겠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역이기가 말했다. “큰일을 함에 자질구레한 일에 얽매이지 않으며, 덕이 높은 사람은 남의 비난을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너를 위해서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제왕은 결국 역이기를 삶아 죽였다. (《사기‧역생육가열전》)

역이기를 죽인 후 전광과 전횡은 각기 병력을 이끌고 황급히 달아났다. 한신은 병력을 나눠 남은 적들을 추격하게 했고 각 지역에서 제나라 군을 물리쳤다. 결국 제나라 전역이 아주 신속하게 한신의 수중에 들어왔다. 제나라를 멸망시킨 이 전쟁은 전체 과정이 한 달도 못되어 완성되었다.

후세 학자들은 한신에게 역이기가 사망한 죄가 있다고 보는데 역이기가 자신보다 공로가 더 커지는 것을 질투해 제나라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관점은 근거가 없는데 그 이유는 다음 3가지다.

첫째, 한신은 뜻이 높고 흉금이 커서 결코 명예나 이익을 쫓는 무리가 아니다. 그는 병사들을 이끌고 전투를 시작하면서부터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유방은 상을 주기는커녕 여러 차례 승리의 과실을 자신이 차지해버렸다. 하지만 한신은 이에 대해 아무런 원망의 말도 하지 않았고 여전히 충성을 다해 유방을 위해 생각했고 조금이라도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지 않았다. 조나라를 물리친 후에도 한신은 자신의 공을 과시하며 상을 청하지 않았고 대신 장이를 조나라 왕으로 추천했다. 이런 한신이 공로를 더 얻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둘째, 삼진을 평정한 후 편지로 연나라의 항복을 받아내기까지 한나라에서 한신의 공로는 이미 유방 수하의 모든 장수와 모사들을 뛰어넘었다. 그가 일개 모사와 공로를 다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셋째, 역이기의 사망은 완전히 유방의 음모다. 유방은 형양 전투에서 줄곧 초나라에 비해 열세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하루 빨리 제나라를 공략해 초나라 군의 공격력을 분산시켜 형양을 구원할 절박한 필요가 있었다. 제나라 공략을 위해 유방은 평소 태도와는 정반대로 한신에게 병력을 증원해주었다. 그럼에도 한나라 군의 병력이 제나라에 비해 수적으로 차이가 많이 났다. 이때 역이기가 자발적으로 어려운 임무를 맡아 제나라에 항복을 권하러 간다고 하자 유방이 이를 이용한 것이다. 유방이 이미 역이기를 사절로 보냈음에도 한신에게 진군을 멈추라는 통지를 하지 않은 것이 그 명확한 증거가 된다. 나중에 역이기의 죽음에 대해 유방은 애석해하지 않았다. 원래 유방이란 위인은 자기가 살기 위해 친자식조차 수레에서 여러 번 밀어낸 적이 있다. 자식마저 돌보지 않는 위인이 어찌 하찮은 일개 모사에게 연연하겠는가?

그러므로 역이기를 죽인 허물은 한신이 아닌 유방에게 있다.

이는 유방의 또 다른 계략인데 한신이 전투에서 승리하건 패배하건 모두 좋지 않았다. 만약 한신이 공격하지 않으면 유방의 뜻을 어긴 게 되고 공격한다면 이 역시 유방의 뜻을 어긴 것이다.

당시 제나라 왕은 다만 구두로 유방에게 귀순한다고 동의한 것이지 정식 문서는 없었다. 제나라의 기존 표현을 살펴보면 이런 귀순은 공격부대를 늦추게 하는 계략(緩兵計)으로 사실은 관망하는 것이다. 만약 제나라의 군사력을 철저히 해결하지 못했다면 한신은 마음 편히 남하해 초나라를 공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나라를 멸망시킨 전쟁은 초한의 대치에서 한나라가 뚜렷한 우세를 차지하게 했고 항우에 대한 포위를 완성해 최후의 승리를 보증했다.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제나라를 정벌한 한신의 전투는 모두 전형적으로 병력이 없는 상태에서 소수로 다수를 이긴 것으로 적군을 전부 포로로 잡고 대장을 죽여 나라 전체를 완전히 차지한 것이다. 그것도 불과 몇 개월의 시간에 벌어진 일이다.

8. 유수(濰水)전투

한신이 제나라를 공략할 때 항우는 마침 두 번째로 동쪽으로 군사를 보내 팽월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는 보름 만에 17개 성을 회복하고 양나라 땅을 평정했다. 한신에게 패해 쫓기던 제왕 전광은 어쩔 수 없이 항우에게 도움을 청했다. 항우는 한참을 고민 끝에 대장 용저에게 20만 병력을 주어 제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용저는 신속하게 움직였고 10월에 제왕 전광의 군사와 합쳤다. 당시 형세는 한신에게 아주 불리했다. 서남쪽에는 전횡, 동남쪽에는 전광의 군대가 있었고 동북에는 전기(田既)의 군대가 있어 서로 협공하는 형세였다. 용저는 항우 휘하에서 가장 용맹한 장수로 일찍이 전영과 연합해 동아(東阿)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대파한 적이 있다. 명장 영포조차 그에게 패한 바 있다. 제초(齊楚) 연합군은 20만이 넘는데다 용저 휘하의 군사는 대부분 누번(樓煩, 중국 고대의 유목민족)의 기병으로 심지어 정예였다. 반면 한신의 군사는 10만이 채 못되었고 또 전횡과 전기 등의 공격을 막기 위해 역하와 임치 등에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양군이 전투를 벌이기 전에 용저의 수하에 있던 한 빈객이 이렇게 말했다.

“한나라 군은 멀리서 왔으니 죽을 힘을 다해 싸울 터이니 날카로운 기세를 막기 어렵습니다. 반면 제나라와 초나라는 자기 땅에서 작전하기 때문에 사병들이 패하면 도주하기 쉽습니다. 차라리 성벽을 높이 쌓아 지키면서 제나라 왕이 심복 대신들을 파견해 이미 잃어버린 제나라 성읍들을 돌아오게 하는 게 낫습니다. 이들 성읍에서 자기 임금이 아직 건재하고 초나라 군이 지원하러 왔다는 사실을 안다면 반드시 한나라를 배반할 것입니다. 한나라 군은 2천리나 떨어진 객지에 나와 있으니 만약 제나라의 성읍이 전부 배반한다면 반드시 식량을 얻을 수 없게 되어 싸우지 않고도 항복할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히 한신의 군대를 깨뜨릴 수 있는 아주 좋은 상책이었다. 하지만 용저는 이 의견을 채택하지 않았다. “한신은 전에 표모(漂母, 빨래하는 아낙)에게 밥이나 얻어먹고 시장에서 남의 가랑이 밑을 지나간 위인으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지금 제나라를 구원하러 왔는데 싸우지 않고 한나라 군이 스스로 항복하길 기다린다면 내게 무슨 공이 있겠는가? 지금 싸워서 이긴다면 제나라의 절반이 내게 귀속할 것이다.” 이에 그는 한신과 정면대결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용저의 생각은 만약 지키기만 하고 싸우지 않는다면 제나라 군의 힘이 크게 회복될 것이다. 비록 자신이 한신을 물리친다 해도 제나라를 새로 장악하는 것은 전 씨일 뿐 자신이나 초나라에 유리할 게 없다. 제나라와 초나라는 원래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으로 이번에 지난 은원(恩怨)을 내려놓고 협력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형세 때문이다. 일단 이 위기를 넘기면 협력관계가 곧 와해될 것이다. 그렇다면 용저의 이번 공격도 단지 제나라에게 좋은 일만 해주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용저는 한신과 정면대결 하기로 결정했다.

한고조 3년(기원전 202년) 11월(당시에는 10월이 한해의 첫 달이었다.) 제초 양국 군대가 유수(濰水)를 사이에 두고 진을 펼쳤다. 전광과 용저 연합군은 유수의 동쪽에 있었고 한신은 서쪽에 있었다. 우세한 병력에다 유수의 험한 지세가 더해지자 용저는 필승의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한신은 사람들에게 명령해 밤새 1만여 개의 주머니를 만들어 모래를 가득 채운 후 유수 상류를 막아 일종의 물 창고를 만들게 했다. 그는 병력의 절반을 강가에 매복시킨 후 직접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가 용저를 습격했다. 용저는 속으로 기뻐하면서 비웃었다. “한신은 과연 헛된 이름이었구나. 심지어 절반을 건너 공격하는 이치도 모르다니. 내가 그에게 교훈을 주마.”

그러면서 한나라 군이 절반 정도 강을 건넜을 때 공격을 시작했다. 한신은 거짓으로 패한 척 하면서 뒤돌아 달아났다. 용저는 득의양양해져 한신이 겁쟁이라고 더욱 확신하고 직접 선봉에 서서 공격을 이끌며 대부대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 추격하게 했다. 선두가 막 강을 건너고 주력부대가 절반쯤 건넜을 때 한나라 군이 유수상류에 막아놓았던 모래주머니 제방을 무너뜨렸다. 큰물이 닥치자 강 중간에 있던 병사들은 절반이 넘게 쓸려나갔고 강가에 있던 제초 연합군도 양쪽으로 분리되어 머리와 꼬리가 서로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한나라 군사들은 이 기회를 타고 맹공에 나섰다. 혼전의 와중에 용저는 조참에게 피살되었고 서쪽 강변에 있던 제초 연합군은 한신의 군대에 의해 섬멸되었으며 동쪽 강변에 남아 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되어 사방으로 도주했다.

한신은 추격을 늦추지 않고 패잔병들을 성양까지 쫓아가 제나라 왕 전광(田廣) 등을 포로로 잡고 완승을 거뒀다. 조참은 동쪽으로 진격해 전기(田既)의 군대를 평정했고 관영은 서쪽으로 전횡을 추격했는데 전횡은 양나라까지 패주해 도망가다 결국 팽성으로 귀순했다. 관영은 계속해서 간승(幹乘)까지 진군해 제나라 장수 전흡(田吸)을 공격했다. 제나라 장수 전흡과 전기는 모두 전장에서 사망했다. 한나라 군사들은 제나라 땅을 소탕해 모두 70여 개의 성을 얻었다.

9. 제왕으로 봉해달라고 청하다

한신은 용저의 군대를 대파하고 제나라를 평정한 후 항우와의 결전을 대비했다. 결전에 앞서 가장 관건적인 것은 이미 얻은 성과를 공고히 하는 데 있었다. 제나라 사람들은 역대로 남의 지배를 받으려하지 않는데다 전횡이 아직 살아 있어서 불안정했다. 또 한나라 군이 점령한 제나라 성은 이전에 점령했던 성을 다 합한 것보다 많아서 제나라를 진압하는 것은 상당히 큰 도전이었다.

제나라는 연나라보다 정세가 훨씬 복잡했고 한신 주변에는 장이처럼 국가를 관리해 본 인재가 없었다. 단지 관영이나 조참과 같은 무장들뿐이었다. 한신은 어쩔 수 없이 유방에게 “제나라는 거짓과 속임수가 많고 변절을 잘하며 번복을 잘하는 나라입니다. 남쪽으로 초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가왕(假王, 임시 왕)으로 진정시키지 않으면 정세가 안정되기 어렵습니다. 원컨대 신을 가왕으로 삼아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요청했다. 즉 자신이 제나라의 임시 왕이 되어 제왕의 직무를 대신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유방은 원래 한신을 어렵게 여기고 꺼리는 게 있었다. 다만 한신을 중요해야만 항우에 대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신에게 병권을 준 것이다. 한신이 동쪽에서 제나라를 평정할 때 유방은 광무(廣武)에서 초나라 군과 대치하다가 항우가 쏜 화살에 가슴을 맞았다. 나중에 종리매를 포위하기도 전에 항우의 일격을 받아 쫓기고 있었다. 때문에 유방은 한마음으로 한신이 제나라를 평정한 후 자신을 구원해주길 원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신의 편지를 읽어본 후 자기도 모르게 울컥 화가 나서 사자 앞에서 크게 한신을 욕했다. 옆에 있던 장량이 황급히 유방의 발을 밟고는 사과하는 척하며 일깨워주었다. 지금은 불리한 상황이니 한신을 잘 대해주고 왕으로 삼아 제나라를 지키게 하느니만 못하다. 만약 제나라에 변고라도 생기면 형세가 더욱 불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속셈이 빠른 유방은 곧장 상황을 파악하고는 바로 말을 바꿨다. “하려면 진짜 왕이 될 일이지 하필 가짜 왕을 한단 말이냐?” 그리고는 장량을 특사로 파견해 인수를 갖고 제나라로 가서 한신을 제나라 왕에 봉하게 했다. 장량은 제나라를 떠날 때 한신의 병력 대부분을 형양으로 데려다 항우와 결전을 치르게 했다.

후세인들은 대부분 한신의 비극이 스스로 왕으로 책봉해 달라고 한 행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런 관점을 지닌 사람들은 유방과 한신의 가장 근본적인 성격을 소홀히 하고 단순히 특정 상황에서 표면 현상만 본 것이다. 우선 제왕을 세우는 것은 정세의 필요 때문이었다. 유방은 이 점을 보지 못했거나 아니면 여기까지 생각하려 하지 않았는데 한신의 직언상서(直言上書)는 충신의 행동이었다.

그렇다면 제나라의 국정을 주관할 인물로 누가 가장 적합했을까? 한신은 제나라에서 연전연승을 거둬 성망이 떠오르는 태양처럼 높았기 때문에 한신을 제외하고는 확실히 제나라 정세를 안정시킬만한 인물이 없었다. 다음으로 한신은 유방을 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진짜 논공행상을 하더라도 제왕으로 책봉함이 전혀 지나치지 않다. 셋째, 한신에 대한 유방의 질투와 공격 및 배제는 한신을 제왕으로 책봉한 것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이미 한중을 떠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매번 심한 곤경에 처해서야만 비로소 한신을 기용했고 조금이라도 상황이 호전되면 한신의 병권을 박탈하거나 또는 한신의 발전을 제한했다. 비록 한신이 줄곧 원망대신 덕으로 갚아주고 한실(漢室)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했지만 유방을 감화시키진 못했다.

10. 무섭의 권고

유방은 한신을 왕으로 책봉하는 것마저 원치 않았지만 한신의 공로와 능력은 이미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식견이 있는 많은 인사들은 한신이야말로 대국을 좌우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는 인물임을 간파했다. 만약 한신이 유방에게 향하면 한나라가 승리할 것이고 항우에게 기울면 초나라가 이길 것이며 자립해서 왕이 된다면 천하를 셋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항우는 본래 천하무적을 자신하며 지략이나 병법을 대수롭지 않게 보았다. 하지만 맹장인 용저의 죽음은 그에게도 충격을 주었고 여러 가지를 신중히 생각해본 후 언변에 능한 무섭(武涉)을 보내 한신에게 유세하게 했다.

무섭은 고향이 회음 인근으로 한신과는 같은 고향사람인데 말주변이 좋았다. 무섭이 한신을 알현한 후 유방의 인물됨에 대해 분석했다. “한왕(유방)은 탐욕이 아주 심해 만족을 모릅니다. 또 신뢰를 저버리고 의리를 배신하는 데다 자주 안면을 바꾸고 덕을 원한으로 갚습니다. 이렇게 신의를 모르고 자주 번복하는 사람을 어찌 가까이 하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항왕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항왕이 멸망한다면 다음에는 당신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당신처럼 총명한 분이 설마 한왕에게 진력을 다해 스스로를 위험한 지경에 처하게 하시겠습니까?”

무섭의 유세는 예리하게 정곡을 찔렀지만 한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대신 ‘설령 죽임을 당할지라도 바꿀 수 없는’ 충성심을 표현했다. 그는 무섭에게 항왕에게 감사를 드리게 했다. 무섭은 한신의 태도가 단호한 것을 보고 화를 내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무섭이 떠난 후 한신의 심복인 괴철이 찾아와 비슷한 화제로 대화를 나눴다. 그는 한신이 이익을 경시하고 의리를 중시하며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는 성격임을 잘 알기에 다른 사람을 가탁해서 진언했다. 그는 자칭 고인의 가르침을 받아 관상의 신비를 알게 되었다면서 골상(骨相)과 면상(面相)을 보고 운명을 예측하기만 하면 아주 영험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신은 정말 큰 관심을 보이며 괴철에게 자신의 관상을 봐달라고 했다.

괴철은 한신더러 주변을 물리게 한 후 말했다.

“당신의 면상(面相)을 보니 잘해야 제후로 봉해지는데 지나지 않으며 게다가 또 위험합니다. 하지만 장군의 등(背)을 보니 귀하기가 한이 없습니다.” 여기서 괴철이 말한 ‘등(背)’은 한왕을 배신한다는 뜻이고 ‘면(面)’은 배와 반대로 한왕에게 충성한다는 의미다.

그는 설명을 더 진행했다.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진 초기에 영웅호걸이 떨쳐 일어나 한번 외치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진나라를 전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초나라와 한나라가 서로 다투게 되자 천하의 죄 없는 수많은 이들이 희생당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항왕은 비록 기세가 아주 좋아 위세가 천하를 진동시켰지만 지금은 성고 일대에서 막혀 삼 년째 돌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왕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낙양 일대의 유리한 지형에 의지해 하루에도 여러 번 전투를 치렀지만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했고 여러 차례 패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지혜와 용기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지금 쌍방의 예리한 기가 이미 다했고 재력이 고갈되었으며 백성들 역시 오랜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안정을 바라지만 의지할 힘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현(聖賢)이 아니라면 천하의 환란을 그치게 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두 왕의 운명은 모두 장군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께서 한나라를 도우면 한나라가 승리하고 초나라를 도우면 초나라가 이길 것입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간과 쓸개를 드러내고 속마음을 터놓고 어리석은 계책을 올리려 하는데 채용하지 않으실까 염려됩니다. 저의 계책에 따르신다면 최선은 양쪽 다 돕지 않고 그들과 천하를 셋으로 나눠 솥의 발처럼 서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현명한 재능에 강력한 병력 및 제(齊), 연(燕), 조(趙), 대(代)의 넓은 영토를 더한다면 초나라와 한나라 양쪽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민의에 순응한다면 천하 사람들이 모두 호응해 우리를 도우러 올 것입니다. 또 덕으로 제후들을 품고 예의로 대우한다면 제후들도 반드시 귀순해 천하가 제나라에 귀속할 것입니다. 속담에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고 때가 이르렀는데도 행동하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입는다’(天與弗取,反受其咎;時至不行,反受其秧)’고 했습니다. 청컨대 반드시 이 점을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한신은 이렇게 말했다.

“한왕은 나를 은혜로 대했습니다. 내가 듣건대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남의 우환을 제 몸에 지니고 남의 옷을 입은 자는 남의 근심을 제 마음에 품으며 남의 것을 먹는 자는 그의 일을 위해 죽는다(乘人之車者載人之患,衣人之衣者懷人之憂,食人之食者死人之事)고 했습니다. 그러니 내가 어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의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괴철이 말했다.

“당신께서는 스스로 한왕과 친하다고 생각해 만세의 업적을 세우려 하지만 신이 생각하기에는 잘못된 것입니다. 장이와 진여는 함께 죽고 함께 살며 서로 목을 내놓을 만큼 막역한 사이였지만 거록 전투에서 생긴 작은 오해로 인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우환은 욕심이 많은 데서 생기고 사람의 마음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장군은 한왕과의 사귐이 장이와 진여의 사귐보다 든든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 한왕과의 오해는 그들 사이의 모순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한왕이 당신께 해를 가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 적국이 망하면 모신은 죽는다(野禽盡,走犬烹;敵國破,謀臣亡)’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에 대부 문종(文種)과 범려(范蠡)는 망해가던 월(越)나라를 부흥시키고 구천(句踐, 월나라 왕)을 도와 패주(霸主)의 지위에 이르게 했지만 자신은 도리어 죽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또 듣건대 ‘용기와 지략이 군주를 떨게 하는 자는 자신이 위태롭고 공로가 천하를 덮는 자는 상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당신은 황하를 건너 위나라 왕과 하열을 사로잡았고 병사를 이끌고 정형을 내려와 성안군 진여를 죽이고 조나라를 항복시켰습니다. 연나라를 위협해 항복받고 제나라를 평정했으며 남쪽으로 초나라 병사 20만을 깨뜨리고 용저를 죽여 한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는 바로 천하에 둘도 없는 공로이자 천하에 둘도 없는 지략입니다. 당신이 만약 항우에게 돌아가더라도 그 역시 감히 당신을 믿지 못할 것이며 한나라 왕에게 돌아간다면 한왕 역시 속으로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디로 돌아가려 하십니까? 신하 자리에 있으면서 공로가 그 누구보다 높으니 당신은 매우 위태롭습니다.”

한신이 괴철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선생은 그만 하십시오. 내가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지요.”

며칠이 지난 후 괴철은 한신이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을 본 후 다시 설득했다.

“남의 의견을 잘 듣는 것은 일이 성공하는 조건이며 정확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성공의 관건입니다. 때와 기회는 잃기 쉽고 얻기는 어렵습니다. 청컨대 반드시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한신은 시종 한나라를 배반하려 하지 않았다. 괴철은 이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들의 대화가 누설된다면 자신은 멸문의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에 거짓으로 미친 척 하면서 무당이 되어 타향으로 도망갔다.

한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왕이 되진 않았지만 최후의 결과는 “오늘 항왕이 망하면 다음은 당신 차례”라는 무섭의 예언을 증명하고 만다. 후세인들은 이에 대해 논설이 분분했다. 많은 이들은 “차라리 천하 사람들이 나를 배신할지언정 내가 천하 사람을 배신할 순 없다(寧可天下人負我,不可我負天下人)”는 한신의 넓은 흉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사보다 약속을 중시하는 그의 행동을 ‘어리석다’고 칭한다. 또 어떤 이들은 세상을 뒤덮는 한신의 재능이 다만 군사방면에서만 뛰어날 뿐 정치적으로는 유방의 적수가 되기에 멀다고 본다.

사실 한신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단순히 병력이나 장수가 많아서가 아니었다. 종종 절망적인 상황이나 약세에 처한 가운데에서도 비범한 지혜로 승리를 이끌곤 했다. 이런 지모를 갖추려면 세심한 통찰력과 정확한 정세판단뿐 아니라 일반인을 뛰어넘는 과감한 기백이 필요하다. 이런 지혜를 사용한다면 어느 분야에서건 그 누구라도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한신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이게 바로 역사 속의 한신이다!

노련하지만 의심 많았던 유방의 후안무치(厚顏無恥)한 정도는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필적할 인물이 드물지만 그렇다고 그의 지혜와 용기가 남보다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사실상 초한(楚漢)전쟁의 모든 중대한 성과는 한신이 이룩한 것으로 유방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남의 공로를 모두 자신의 손에 집중시킨 것에 불과하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3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