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4장 공이 너무 커서 임금을 두렵게 하다 억울한 죽임 당해
1. 초왕 한신 운몽의 계략에 빠지다
초한전쟁에서 승리한 유방은 한신 등 제후왕들의 천거로 황제의 지위에 오르니 역사에서는 그를 한고조(漢高祖)라 한다. 한편 한신의 처지는 무섭과 괴철의 예언대로 갈수록 더 나빠졌다.
해하전투가 끝난 후 한나라 군은 북상해서 정도(定陶)로 환군했다. 유방은 갑자기 한신의 군영을 기습해 그의 병권을 박탈했고 뒤이어 한신의 봉지를 비옥한 제나라에서 초나라고 변경시켰다. 제(齊), 조(趙), 연(燕) 등 한신의 직접 기반을 다진 지역에서 멀리 떨어지게 한 것이다.
하지만 한신은 마음이 담담했다. 무정하고 의리 없는 유방에 대해 아무런 원망도 품지 않고 평온하게 자신의 옛 고향인 초나라로 돌아갔다.
고향에 돌아온 후 그는 가장 먼저 옛 은인인 표모(漂母)를 찾아 천금(千金)을 사례로 주었다. 그 후 또 남창정장을 찾아 백전을 주며 과거에 빚진 것을 갚았다. 한신은 정장에게 “그대가 한 좋은 일은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었으니 인정과 대의(大義)에 통하지 않은 소인이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가랑이 밑을 기어나가는 모욕을 준 청년을 찾아갔다. 그는 새로 부임한 초왕이 자신이 전에 모욕을 주었던 한신이란 말을 듣고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한신은 그를 곤란하게 하는 대신 장사(壯士)라고 칭찬하며 ‘중위(中尉)’에 임명했다. 중위는 수도의 치안을 관장하는 직책이다.
이렇게 개인적인 일을 처리한 후 한신은 곧바로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초나라 각 지역을 순시하면서 전후 시급히 해결해야 할 민생문제들을 처리했다. 또 봉지를 지키는 군대를 건립해 강력하고 번영한 초나라로 만들 계획이었다.
하지만 유방은 한신에게 왕의 지위를 남겨놓고 싶지 않았다. 한신은 개국공신이라 그의 왕위를 박탈하기 위해 유방은 한신에게 ‘모반’죄를 덮어쒸웠다.
한고조 6년(기원전 201년) 12월 유방은 갑자기 수하 장수들을 불러 “어떤 사람이 한신이 모반했다고 고발했는데 이를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그곳에 모인 장수들은 모두 용맹하긴 하지만 지모가 떨어지는 무리들이라 일제히 “빨리 군사를 일으켜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유방 자신도 군사를 일으키기엔 명분이 부족함을 알기에 한참을 침묵하다 마지막으로 진평에게 계책을 물었다.
진평은 모략에 장점이 있지만 재주에 비해 덕은 없었다. 유방이 이 말을 꺼내자마자 그는 사실 한신이 모반하지 않았음을 곧 알았다. 그는 자신의 의심을 확인한 후 유방에게 말했다. “폐하의 군사는 한신의 정예만 못하고 장수들 역시 한신을 뛰어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 이 상태로 출병해 한신을 핍박해 결전을 치르신다면 폐하께 위험한 일입니다.” 그는 유방에게 거짓으로 순행하는 척 하면서 운몽(雲夢)에서 사냥한다는 구실로 제후들을 하남의 진(陳)에 모이게 해 황제를 알현하도록 시켰다. 진은 초나라 국경 근처라 한신이 오게 되면 쉽게 사로잡을 수 있었다.
유방은 흔쾌히 진평의 이 계책을 채택하고는 한신에게 사자를 파견해 진 땅에 와서 자신을 알현하라고 했다. 한신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직접 마중을 나갔다. 하지만 황제를 만나자마자 유방은 호위무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한신을 체포하게 했다. 한신은 깜짝 놀랐지만 이미 속무무책으로 체포되었다.
이렇게 목적을 달성한 유방은 운몽으로 사냥하러 가지 않고 곧바로 도성으로 돌아갔다. 한신은 그제야 이번에 유방이 나온 목적이 전적으로 자신을 겨냥한 것임을 알았다. 그는 크게 분노해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람들이 ‘날랜 토끼가 죽으면 훌륭한 사냥개를 삶아 죽이고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좋은 활은 치워 버리며 적을 깨뜨리고 나면 지모 있는 신하는 죽는다(狡兔死,良狗烹;高鳥盡,良弓藏;敵國破,謀臣亡)’고 하더니 과연 정말이구나.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내가 삶겨 죽는 것도 당연하단 말인가!”
유방이 이 말을 듣고는 얼굴과 귀까지 벌개져서 반나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비로소 “그대가 모반했다고 밀고한 사람이 있었소.”라고 얼버무렸다.
유방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개국공신을 체포하면 반드시 여러 사람들이 수긍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낙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천하에 대사면을 단행했다. 또 이를 이용해 한신을 석방했다. 하지만 초나라로 돌려보내는 대신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켜 도성에 머물며 봉지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또 군대를 거느리는 것도 허락하지 않아 사실상 연금상태로 만들었다.
2. 종리매의 죽음
항우가 사망한 후 초나라 장수 종리매는 체포를 면하기 위해 도처로 다니며 몸을 숨겼다. 유방은 종리매에게 여러 차례 패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몹시 미워해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신도 한때 항우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마천은 《사기‧회음후열전》에서 종리매가 한신과 연계가 있었고 도망하던 중에 한신에게 귀부했다고 했다. 유방이 종리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지만 한신이 황제의 뜻을 어기고 따르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또 유방이 운몽에서 사냥을 구실로 제후들과 만날 때 한신이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종리매에게 자살하도록 핍박했다고 했다. 종씨의 후손들이 펴낸 《종씨종보(鍾氏宗譜)》에도 이 주장을 채택해 세인들의 오해가 더 깊어지게 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사실은 이와 다름을 알 수 있다.
《사기‧진초지제월표(秦楚之際月表)》에서는 분명히 “5년 9월 왕이 옛날 항우의 장수 종리매를 참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종리매가 한고조 5년 9월에 이미 체포된 상태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반면 한신의 소위 ‘모반’사건은 한고조 6년의 일이다. 그러므로 유방이 운몽에 사냥을 나간다는 계략은 종리매가 사망한 지 1년도 더 지난 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한신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종리매를 핍박해 자살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한신이 종리매를 숨겨주어 자신의 신상에 재앙을 초래한 것은 아닌가? 이에 대한 대답 역시 부정적이다. 두 사람이 비록 동시에 항우의 휘하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한 사람은 높디높은 대장이었고 다른 사람은 미천한 집극랑(執戟郎)이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 교류가 있기란 상상하기 힘들다. 유방이 진평에게 계략을 묻는 대화에서 보자면 그들 자신도 한신이 유방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또 운몽의 계략이 성공하기 위한 전제이기도 했다. 운몽의 계략은 겉으로 보면 아주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사실 누락이 아주 많았다. 운몽이란 지금의 동정호(洞庭湖)를 말하는데 호남에 있다. 한신의 봉지인 초나라는 강소(江蘇)일대다. 유방이 관중에서 운몽까지 남하한 후 초나라로 향하는 것은 순탄한 길이 전혀 아니다. 만약 한신이 이전에 종리매를 숨겨주었다면 유방이 오기 전에 아무런 방비도 없이 영접하러 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신이 “종리매의 목을 잘라 유방을 알현하러 왔다”는 사마천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3. 병서의 체제를 만들다
한신은 문무쌍전(文武雙全)이라 용병술에 신묘했을 뿐만 아니라 저술에도 뛰어났다. 그는 일찍이 소하와 함께 군중의 율법을 수정한 적이 있고 또 장량과 더불어 선진시대에 남겨진 병법서들을 정리한 적이 있다. 반고는 《한서‧고제기(高帝記)》에서 한신이 장량과 함께 “병법의 목차를 만들고 182가를 정리해 35가로 정착시켰다.”고 했다. 여기서 ‘서차(序次)’란 목차를 배치하고 본문을 교감해 정리했다는 뜻이다. 이는 역사상 최초로 고대 병서를 대규모로 정리한 것이다.
한신은 《사마양저병법(司馬法)》에 나오는 병가사상 분류에 따라 병법을 ‘권모(權謀), 형세(形勢), 음양(陰陽), 기교(技巧)’ 4가지로 분류했다. 나중에 한무제 시기 양부(楊仆)가 정리한 ‘기주병록(紀奏兵錄)’과 성제(成帝) 시기 임굉(任宏), 유향(劉向)과 유흠(劉歆) 등이 교정한 병서들 역시 모두 한신이 만들어놓은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분류법은 후세에도 전범(典範)이 되었고 병서 편찬과 병학 이론의 전형적인 모델이 되었다.
한신은 또 가택에 연금된 시기에 한가한 틈을 이용해 《한신병법(韓信兵法)》 세 편을 저술해 선진(先秦) 병학을 총괄하고 집대성했다. 이는 한나라 이전의 병서들이 비교적 완벽하고 대규모로 후세에까지 존재하게 했다. 이 책은 ‘병권모(兵權謀)’ 13가의 하나에 속한다. 반고(班固)는 ‘병권모’의 해석에 대해 “권모(權謀)라는 것은 정규전으로 나라를 지키고 변칙적인 방법으로 용병하는 것으로 먼저 계획을 세운 후에 싸우되 형세를 겸하고 음양을 포함하고 기교를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바로 중국병법의 진정한 정수에 해당한다.
4. 종실(鍾室)에서 억울하게 죽다
황제에 즉위한 후 유방에게는 과거 항우와 쟁패하던 기간에 분봉했던 팽월, 영포, 한신 등의 이성왕(異姓王)들이 뱃속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하루 속히 이들을 제거해야만 유방의 속이 편해질 터였다. 이들 이성왕 중에서도 특히 한신은 재능과 성망이 가장 커서 유방의 질투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때문에 더욱 마음을 놓지 못했다.
한신은 연금된 후 유방이 자신이 세운 공로를 어렵게 여기고 꺼리는 것을 알아 늘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고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조용히 지냈다. 병법을 정리할 때 유방이 불시에 그를 만나러왔다.
한번은 유방이 한신에게 물었다. “나는 얼마나 되는 군대를 이끌 수 있는가?”
한신은 “많아야 10만 명입니다.”라고 솔직히 대답했다.
유방이 또 물었다. “그럼 그대는 어떠한가?”
한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多多益善)”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바로 고사성어 다다익선의 유래다. 유방은 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면서 어째서 나의 신하가 되었는가?” 한신은 평온하게 “폐하께서는 비록 군대를 잘 이끌진 못하시지만 장수를 잘 거느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폐하의 신하가 된 이유입니다. 폐하의 지위는 하늘이 부여한 것이니 사람의 힘으로는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한신의 이 대답은 비록 자신의 재능이 유방보다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해 반역할 뜻을 품고 황위를 노릴 생각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누가 황제의 지위에 오르는가는 하늘에서 정하는 것으로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방은 여전히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한신의 공이 세상을 덮고 행실이 반듯한데도 경솔하게 처리하면 여러 신하들이 실망하고 천하의 불만을 사는 것이었다. 하물며 애초 한신의 전공이 탁월했기 때문에 유방 스스로 “삼불살(三不殺)”을 약속한 적이 있다. 여기서 삼불살이란 “하늘을 보고 죽이지 않고 땅을 보고 죽이지 않으며 쇠를 보고 죽이지 않는다(見天不殺,見地不殺,見鐵不殺)”는 뜻이다. 유방은 이미 한신을 죽일 생각이 있었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신의를 저버렸다”는 악명을 듣고 싶진 않았다.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이때 여후(呂后)가 남편인 유방의 속내를 간파하고 주제넘은 참견에 나섰다.
여후는 본명이 여치(呂雉)로 사람됨이 강퍅하고 음험하면서도 악랄했다. 젊을 때 온가족이 원수의 보복을 피해 패현으로 숨어 들어왔다. 부친인 여공(呂公)이 유방의 관상이 비범한 것을 보고는 여치를 아내로 주었다. 유방이 팽성에서 항우에게 크게 패했을 때는 난리 통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다. 당시 여치와 유방의 부친 태공은 항우의 포로가 되어 인질로 잡혀 있었다. 나중에 한신이 제나라 땅을 점령하고 초나라 군의 식량을 공격한 후에야 항우는 어쩔 수 없이 강화에 나서 유방의 가족들을 석방해주었다. 이 때문에 여후는 2년이 넘는 인질생활에서 비로소 벗어나 유방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신은 여후의 은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런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얼마 후 개국공신 진희(陳豨)가 대왕(代王)을 자칭하고 한왕(韓王) 신(信, 한신과 동명이인), 연왕(燕王) 관(綰)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자 유방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여후와 소하는 장안에 남아 수도를 지키게 했다. 여후는 시기가 무르익은 것을 보고 한신의 시종 난열(欒說, 악열이라고도 한다)을 매수해 한신을 ‘모반’죄로 무고하면 나중에 신양후(慎陽侯)로 삼기로 했다. 그 후 소하를 위협해 유방이 반란을 평정하고 승전했으며 여러 제후와 신하들을 불러 축하잔치를 열기로 했다는 거짓말을 시켰다. 평소 잘 나오지 않던 한신을 속여 궁으로 불러들이려는 속셈이었다. 총명한 소하였기에 여후가 내민 증거가 그리 믿을만하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수단이 악랄한 것을 두려워해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했다.
사실 소하는 과거 전력을 다해 한신을 대장군으로 추천해 삼군을 통솔하게 했으니 한신에게는 지음(知音)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한신은 줄곧 소하를 존경해왔고 그를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비록 속으로는 이번 모임에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소하의 청을 고려해 장락궁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한신이 궁에 들어서자 미리 매복해있던 무사들이 둘러싸고 포위했다. 한신이 속은 것을 알고 다급히 소하를 찾았지만 소하는 현장에 없었다. 대전에 앉은 여후는 엄한 목소리로 한신이 자신과 태자를 해치려했다고 비난하면서 한신에게 변호할 기회도 전혀 주지 않고 장락궁 종실(鍾室)에 데려가 죽이게 했다. 일대의 명장이 이렇게 여후에게 계획적으로 살해된 것이다.
여후는 한신을 죽인 후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명을 내려 한신의 삼족(三族 부가 모가 처가 3가문의 일족)을 멸하게 했다. 마침 정월 한겨울이라 큰 눈이 내려 하늘을 가리는 가운데 수천에 달하는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장안을 물들였다. 이들의 울음소리가 싸늘한 북풍소리와 함께 장안 상공에 메아리쳤다. 장안 도성 사람들은 한탄하고 비통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모두들 말하길, 회음후는 천금으로 밥을 먹여준 표모의 은혜에 보답했는데 전에 자신이 입던 옷과 음식을 나눠주던 황제는 어찌 된 일인가? 만약 정말로 모반할 마음을 품었다면 어찌 소하의 몇 마디 말에 경솔하게 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만약 한신이 황제를 배반한 것이 아니라 황제가 모진 마음으로 한신의 충성심을 저버린 것이라면 그럼 한신의 죽음은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진희의 반란을 평정한 후 돌아와 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방은 여후에게 왜 한신을 죽였는지 묻지 않았다. 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처치했는지 추궁하지도 않았다. 단지 한신이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남겼는지만 물었다. 사서에 기록된 그의 반응은 “기뻐하면서도 가엾게 여겼다”고 한다. 즉 한편으로는 마음속의 우환이 사라져서 기쁘기도 하고 다른 한편 한신이 너무 가련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신을 살해한 후 이들은 같은 수법으로 팽월을 상대했다. 팽월은 창읍(昌邑) 사람으로 원래 초야의 강도출신이었다. 유방이 초회왕의 명령을 받들어 관중에 진입할 때 팽월이 이끌던 부대가 도움을 주었다. 초한전쟁 중에도 팽월은 줄곧 초나라의 후방에서 항우를 견제하며 유방에 대한 압력을 상당히 완화시켜 주었다. 유방이 아주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그는 한나라 군에 많은 식량을 보내준 적이 있다. 항우와의 결전에 앞서 유방은 한신, 팽월에게 초나라를 이긴 후 셋이 천하를 나누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나중에 팽월에게 양(梁)나라 땅만을 주어 양왕으로 삼았지만 팽월도 이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팽월은 나이가 유방과 비슷한데다 성격이나 개성도 서로 비슷해서 개국공신들 중에는 유방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일처리가 신중했는데 특히 한신이 회음후로 폐위된 후에는 마치 살얼음을 밟듯이 더욱 조심스러워 했다.
진희가 반란을 했을 때 유방은 각 제후들에게 병력을 이끌고 함께 토벌하자고 했다. 당시 팽월은 나이가 이미 많았고 또 마침 병에 걸려 부하장수에게 병력을 주어 대신 파견했다. 유방은 이에 큰 불만을 품었다. 낙양에 돌아온 후 그에게 반역죄를 씌워 왕위를 폐하고 서인으로 만들고는 촉나라 청의현(青衣縣)으로 유배를 보냈다.
유배지로 떠나는 길에 우연히 여후를 만난 팽월은 그녀를 구세주로 여기고 울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신은 이미 늙었으니 다른 것은 바라지 않고 단지 고향인 창읍에서 여생을 보내게만 해달라고 간청했다. 여후는 팽월을 부축하고 위로하면서 “양왕은 상심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질 테니 나를 따라 낙양으로 돌아갑시다. 가서 황상을 뵈면 내가 대신 말해보겠소.”라고 했다.
하지만 낙양에 돌아간 여후는 호랑이를 산으로 되돌려 보내면 안된다며 유방을 책망하고 마땅히 뿌리를 잘라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팽월에게 죄를 씌우기 위해 그의 몇몇 수하들을 매수해 팽월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무고하게 했다. 이런 수단은 한신을 대할 때와 똑같았다. 결국 운이 없던 팽월은 목숨을 잃고 삼족이 멸한 것뿐만 아니었다. 여후는 그의 시신으로 젓갈로 만들어 각지의 제후들에게 보내 맛을 보게 했다.
유방과 여후가 근심으로 한신을 살해한 이 일은 후인들의 비난을 받았다. 즉 없는 죄를 만들고 증거를 조작해 한신에게 ‘모반’죄를 덮어씌웠을 뿐만 아니라 역이기와 종리매의 죽음 역시 그에게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만들어 한신의 명성과 지조를 더럽혔다. 아울러 이런 내용을 관방의 문서와 사서에 기록함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은폐시켰다.
《사기》에도 한신과 진희가 모반을 의론한 것처럼 일이 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만약 한신에게 모반하려는 마음이 확실히 있었다면 왜 제왕으로 임명되어 유방, 항우와 더불어 천하를 삼분할 실력이 있을 때 하지 않고 도리어 아무런 병력도 없는 상황에서 반란을 꾀했겠는가? 《사기》 등 여러 사서에서 한신의 ‘모반’과 관련된 기록을 분석해보면 많은 모순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유방의 승부가 나지 않았을 때에도 한신은 괴철의 유세를 거절했다. 그런데 유방이 공명을 이룬 때에 도리어 다른 뜻을 품었다는 것은 병법에 통달한 장수인 그가 이렇게 비상식적인 일을 했을 리가 없다.
둘째, 한신은 두 차례나 유방에게 병권을 박탈당한 적이 있고 게다가 괴철의 분석을 통해 자신에 대한 유방의 시기와 두려움을 몰랐을 까닭이 없다. 하지만 유방이 고릉에서 항우에게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모반하지 않았고 초나라 왕으로 있을 때에도 모반하지 않았으며 진 땅으로 유방을 마중 나갔을 때에도 모반하지 않았는데 왜 아무런 권한과 병력도 없이 장안에 칩거했을 때 모반을 꾀했겠는가?
셋째, 한신의 뛰어난 지혜로 감시받는 상황에서 진희와 “좌우를 물리치고 밀실에 들어가” 모반을 꾀하는 실책을 저지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정말 이런 일이 있었다면 한신과 진희는 제3자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모의했을 텐데 외부 사람이 어찌 대화내용을 알 수 있겠는가? 또 사마천의 기록이 어찌 그리 상세할 수 있겠는가?
넷째, 진희는 유방의 심복으로 한신과는 특별한 사이가 아니다. 모반은 자신은 물론 가족의 생사가 달린 중대한 일인데 한신이 경솔하게 황제의 심복에게 이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진희는 거록에 부임한 후 수년간 한신과 서신왕래조차 없었는데 그가 한신과 모반을 꾀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반대로 여후와 유방의 행동을 보면 소위 한신 ‘모반’사건의 진실을 알 수 있다. 바로 여후가 유도해 살해한 것이다. 조정에서 제일가는 공신이 피살되었음에도 유방이 여후를 책망하지 않고 심지어 조사조차 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미리 음모를 꾸몄음을 설명할 뿐이다.
한신이 해를 입은 일에 대해 후인들은 다양한 견해를 발표했다. 어떤 이는 한신이 이미 단에 올라가 대장군으로 임명되었을 때부터 유방 등의 시기를 받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한신의 스스로 공로가 있다고 오만한 것이 재앙을 불러왔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한신이 비록 뛰어난 장수로 천하를 도모함에는 뛰어났지만 처세의 지혜가 부족해 자신을 도모하기에는 서툴렀다고 말한다. 사실 유방의 개성과 심리에서 보자면 한신, 팽월, 영포 등의 이성왕은 반란을 했건 하지 않았건 액운을 면하기 어려웠다.
한신과 팽월이 피살된 후 초한 전쟁에서 큰 역할을 했던 여러 이성 왕들은 모두 각종 구실로 살해되었고 오직 장사왕 오예(吳芮)만이 일찍 사망해 무사히 생을 마칠 수 있었다. 나중에 유방은 또 여러 대신들과 백마(白馬)를 죽여 맹세하기를 “유씨가 아닌 사람이 왕이 되면 천하가 함께 공격한다”(《사기‧여태후본기》)고 한 것을 보면 이성 왕을 제거하는 것은 유방의 확고한 정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한신이 피살된 진정한 원인이다.
한편 회남왕 영포가 두려움으로 군사를 일으켜 반란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방은 늙어 병든 몸을 이끌고 친정에 나서 숱한 고생 끝에 겨우 영포의 난을 평정했지만 전투 중에 날아온 화살에 부상을 당했다.
또 유방이 가장 신임했던 벗인 연왕(燕王) 노관(盧綰)도 살아남기 위해 흉노와 연락한 사실이 발각되자 흉노로 도망갔다.
오래지 않아 병이 심해진 일대효웅(一代梟雄) 유방은 여러 사람들이 배신하거나 떠나는 가운데 사망했다.
맺음말
한신은 한실(漢室) 천하를 세웠지만 전쟁의 과실은 오히려 간사하고 후안무치한 유방이 누렸다. 그러나 유방은 늠름하게 일세를 풍미한 전신(戰神)에게 ‘모반’이란 죄명을 씌워 장락궁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하게 만들어 천고에 한을 남겼다.
군사가로서 한신이 지휘한 모든 전투는 소수로 다수를 이기거나 많은 병력으로 소수를 공격하거나 약한 병력으로 강한 병력을 이긴 것 모두 지혜로 승리한 것이다. 가령 겉으론 잔도를 수리하며 몰래 진창을 건너고, 임진에서 황하를 건널 것처럼 위장하고 하양에서 몰래 강을 건넌 것, 목앵을 이용해 도하하고 배수진을 친 것, 적의 깃발을 뽑고 아군의 깃발로 바꾼 것, 편지를 전해 평정한 것, 모래주머니로 물을 막아 적이 절반 건넜을 때 격퇴한 것, 사면초가, 십면매복(十面埋伏) 등이다. 이처럼 매 차례 전투가 모두 신묘했기 때문에 후인들이 높이 우러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또 전략가로서 대장군이 되었을 때 한신이 한 말은 초한전쟁 승리의 근본적인 전략이 되었다. 총사령관으로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서 군사를 이끌고 진창(陳倉)으로 나가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위왕을 사로잡고 대나라를 깨뜨리며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연나라를 항복시켰으며 제나라를 정벌하고 해하에서 초나라 군을 섬멸하기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천하의 그 누구도 함께 다투지 못했으니 4백여 년 한나라의 기초를 세우는데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또 군사이론가로서 한신은 장량과 함께 병서를 정리하고 병법 3편을 저술했다.
동서고금의 군사가 중에서 혹은 유막 안에서 책략에 능하거나 혹은 성(城)을 공격하거나 적장을 베는데 능하거나 혹은 병법을 저술하는데 능했다면 한신은 이런 장점들을 두루 겸비했다. 단순히 종횡으로 누비며 무위를 떨쳤을 뿐만 아니라 이전 다양한 파들의 병법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그의 탁월한 군사전략과 용병의 지혜는 후세 병가들의 추앙과 존경을 받았다.
한신의 지혜와 품성, 전장에서 창조한 위대한 업적은 또 일찍부터 인구에 회자되어 수많은 고사성어와 전고를 남겼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창정여식(昌亭旅食 남창정장의 집에서 기식),
과하지욕(胯下之辱 남의 사타구니 밑으로 기어가는 치욕),
추진출신(推陳出新 낡은 것을 몰아내야 새로운 것이 나온다),
한계야창(寒溪夜漲 한신이 유방에게 실망해 한밤중에 말을 타고 달아나다 찬 계곡물이 불어 소하를 만나 돌아온 것),
국사무쌍(國士無雙 나라에 둘도 없는 인재, 한신에 대한 소하의 평가),
등단고대(登壇高對 높은 단과 대를 쌓아 한신을 대장군에 제수한 것),
필부지용 부인지인(匹夫之勇 婦人之仁 필부의 용기와 아녀자의 인정 한신이 항우의 인물됨을 평가한 말),
통입골수(痛入骨髓 고통이 골수까지 들어갔다. 진나라 장수로 있다가 부하들을 모두 죽이고 홀로 왕이 된 장함에 대한 진나라 백성들의 원한을 표현한 말),
추호무범(秋毫無犯 추호도 범하지 않다. 초한전쟁 과정에 한나라 군의 기율이 엄해 백성들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지 않은 것을 표현),
행반기도(行反其道 정반대로 행하다),
전격이정(傳檄而定 격문을 전달해 평정하다),
암도진창(暗渡陳倉 몰래 진창을 건너다),
기탄산하(氣吞山河 산하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
목앵투도(木罌偷渡 목앵을 이용해 몰래 황하를 건너다),
독당일면(獨當一面 장량이 한신을 평가한 말로 혼자 중요한 일을 책임지고 감당할 만큼 재능이 있다는 의미),
발기역치(拔旗易幟 한신이 조나라와 싸울 때 적진의 깃발을 바꿔 적의 사기를 떨어뜨린 것),
천려일실천려일득(千慮一失千慮一得 지혜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은 실수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번은 얻음이 있다),
안갑휴병(按甲休兵 갑옷을 풀고 병사를 쉬게 하다),
침사결수(沉沙決水 모래주머니로 강물을 막았다 터뜨리다),
반도이격(半渡而擊 강을 중간쯤 건넜을 때 공격하다),
간뇌도지(肝腦塗地 간장과 뇌수가 땅에 쏟아지다 비참하고 참혹한 죽음이나 희생),
불가승수(不可勝數 셀 수 없이 많다),
기불가실실부재래(機不可失失不再來 기회는 놓칠 수 없고 놓치면 다시 오지 않는다),
추심치복(推心置腹 진솔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다),
인심난측(人心難測 사람의 마음은 예측하기 어렵다),
삼족정립(三足鼎立 솥의 세 발처럼 천하를 삼분해서 자립한다),
용략진주공개천하(勇略震主功蓋天下 용기와 지략이 임금을 두려게 하고 공이 천하를 덮다),
해의추식수사불반(解衣推食雖死不反 남의 옷과 음식을 나눠먹은 사람은 죽어도 그를 배신할 수 없다),
승인지거재인지환 의인지의회인지우 식인지식사인지사(乘人之車載人之患 衣人之衣懷人之憂 食人之食死人之事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남의 근심을 제 몸에 싣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남의 걱정을 제 마음에 품으며, 남의 밥을 먹는 자는 남의 일을 위해서 죽는다),
십면매복(十面埋伏 곳곳에 군사를 매복해 적이 도피할 수 없게 하다),
사면초가(四面楚歌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를 불러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다),
공무불극 전무불승(攻無不克 戰無不勝 공격하면 이기지 않음이 없고 싸우면 승리하지 않음이 없다),
일반천금(一飯千金 밥을 얻어먹은 은혜를 천금으로 갚다),
이덕보원(以德報怨 원수를 덕으로 보답하다),
조진궁장 토사구팽 국파신망(鳥盡弓藏 兔死狗烹 國破臣亡 높이 나는 새가 없어지면 활을 치워버리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훌륭한 사냥개가 삶아지며, 적을 깨뜨리면 지모가 있는 신하가 망한다),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능굴능신(能屈能伸 굽히기도 하고 펼치기도 잘해 유연하게 처신하다),
벌공긍능(伐功矜能 스스로 공을 자랑하고 능력을 자부하다),
성패소하(成敗蕭何 성공과 실패가 모두 소하에게 달렸다. 한신의 등용과 죽음은 모두 소하로부터 시작되었다),
공고무이략불세출(功高無二 略不世出 둘도 없이 높은 공과 불세출의 전략),
군웅축록첩족선등(群雄逐鹿 捷足先登 여러 영웅이 사슴을 쫓으니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
병선신수(兵仙神帥 병법의 신선 신처럼 뛰어난 장수) 등이다.
주요참고문헌
司馬遷,《史記‧淮陰侯列傳》,漢
王鳴盛,《十七史商榷》,清
李廷機,《鑒略‧秦記》,明
司馬遷,《史記‧陳涉世家》,漢
司馬遷,《史記‧高祖本紀》,漢
荀悅,《前漢紀》,本名《漢紀》,東漢末年
司馬光,《資治通鑒‧漢紀四》,北宋
班固,《漢書‧蕭何曹參傳》,漢
司馬遷,《史記‧樊酈滕灌列傳》,漢
司馬遷,《史記‧項羽本紀》,漢
司馬遷,《史記‧酈生陸賈列傳》,漢
班固,《漢書‧高帝紀》,漢
司馬遷,《史記‧留侯世家》,漢
司馬遷,《史記‧陳丞相世家》,漢
司馬遷,《史記‧呂太後本紀》,漢
班固,《漢書‧韓信傳》,漢
班固,《漢書‧外戚列傳》,漢
班固,《漢書‧外戚恩澤侯表》,漢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