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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요‧순‧우(4): 하늘의 뜻에 따라 순에게 선양하다

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4장 하늘의 뜻에 따라 순에게 선양한 요

1. 후계자를 찾는 요임금

요임금은 자신의 아들 단주(丹朱)의 덕과 재능이 제위를 잇기에는 부족함을 잘 알았고 늘 자신을 계승해 제위를 이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여씨춘추》에는 요임금이 자주지보(子州支父)에게 천하를 선양하려 했지만 완곡한 말로 거절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사전(高士傳)》에는 요임금이 허유(許由)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자신은 “심신을 수련하며 세상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요임금이 또 소부(巢父)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소부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임금이 또 포의자(蒲衣子)에게 양위하려 하자 포의자는 “임금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현인이 이미 세상에 내려왔으니 조만간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요임금이 사악(四岳, 사방의 제후를 관장하는 직위)에게 누가 제위를 계승할 수 있는지 묻자 사악은 순(舜)을 추천했다.

2. 가혹했던 순의 어린 시절

옛날 기주(冀州) 평양(平陽)에서 남서쪽으로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요허(姚墟)라는 아주 작은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성이 우(虞)로 전욱(顓頊)의 후예들이다. 순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사기》에 따르면 순의 부친은 고수(瞽叟)이고 모친은 악등(握登)이다.

순은 이름이 ‘중화(重華)’인데 전설에 따르면 눈동자가 2개라서 이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시법(諡法)》에서는 “어질고 성스러우며 성대하게 밝음을 순이라 한다(仁聖盛明曰舜)”고 했다.

고수와 악등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이중 순이 둘째였다. 요허(姚墟)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요를 성으로 삼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항렬이 둘째라서 중화(仲華)로도 불렸다.

《죽서기년》에서는 순의 모친 “악등이 큰 무지개를 보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요허에서 순을 낳았다. 눈동자가 2개라서 중화라고 이름 지었다.”라고 한다.

이외에도 순의 몸에는 또 유독 기이한 점들이 많았다. 가령 손바닥 중심에 ‘포(褒)’자 무늬가 있었고 이마가 두드러졌으며 미릉골이 튀어나왔다. 머리는 크고 둥글었으며 얼굴을 검고 각이 졌고 용안(龍顏, 이마 가운데가 튀어나온 관상)에 입이 커서 주먹이 들어갈 정도였다.

순이 두 살 때 생모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후처를 들였다. 계모가 1남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상(象) 딸은 과수(敤首)라 했다. 자기 소생의 아이를 낳자 계모는 순 형제를 자주 때렸고 또 걸핏하면 남편을 자극해 두 형제에게 벌을 주게 했다. 형제는 늘 굶주려야 했고 순의 형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순이 열 살 무렵 무성자(務成子)라는 도인이 찾아와 순과 다른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무성자는 순이 고생을 끝낸 후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임을 알았다.

순의 계모는 순이 글을 읽지 못하게 하려 했다. 하지만 이웃의 배려로 그 집의 소를 키우면서 무성자와 함께 글을 읽고 쓰면서 사람이 되는 각종 도리는 물론 천문, 지리 및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도리를 배웠다. 이렇게 순은 소를 방목하는 한편 무성자를 따르면서 3년을 배웠다. 나중에 순은 또 윤수자(尹壽子)를 스승으로 모셨다.

2. 어질고 효성스러움의 모범

순은 중국 역사상 효제(孝悌, 효와 공경)의 모범으로 스무 살 때 효로 유명해졌다.

순의 아버지는 완고하고 계모는 거짓말을 잘했으며 동생 상은 교만했다. 사서에서는 순의 부친이 완고하고 용렬해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했으며 고집이 너무 강해 이치를 따지지 않아 두 눈이 실명되었고 이 때문에 고수로 불렸다고 한다. 계모는 어리석고 악독해서 하는 말에 진실이라곤 없었다. 또 아우 상은 교만하고 성격이 거친데다 아주 이기적이었으며 수단이 악랄했다. 이들 셋 모두 순을 죽이려했다.

하지만 순은 너그러움과 효도와 우애를 다해 가족문제를 잘 처리했다. 부모에게는 공경하게 예를 다해서 공순하게 모셨으며 설령 부모님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시종 자식의 도리를 잃지 않았다. 아버지가 작은 몽둥이로 때릴 때는 움직이지 않고 서있었지만 큰 몽둥이로 때리려 하거나 가족이 자신을 해치려할 때는 급히 도망쳤다. 하지만 집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면 늘 부모님 곁을 지켰다.

몸은 비록 역경에 처하긴 했지만 순은 늘 비범한 품행과 덕을 드러냈고 일반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참아냈다. 순이 보여준 고상한 도덕과 효제충신(孝悌忠信)은 중화 전통문화 중에서도 유독 이채를 발한다.

어느 날 적색의 삼족조(三足鳥, 다리가 셋인 새) 한 마리가 순의 뜰에 나타났다. 붉은 새(赤鳥)는 바로 주조(朱鳥)로 태양 속 삼족오(三足烏)의 정화였다. 무릇 사람의 아들이 지극히 효성스러울 때 삼족오가 그 집 뜰에 모인다고 한다. 순이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모셨기 때문에 이 새가 나타난 것이다.

4. 덕으로 많은 이들을 감화시켜

순은 부모와 동생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보고 생계를 위해 외지로 나갔다. 사람됨이 겸손하고 인자해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환영과 존중을 받았다. 그가 어느 지역에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가 사는 곳으로 모여들곤 했다.

순이 역산(曆山)에서 농사를 지을 때의 일이다. 큰 코끼리가 산에서 내려와 코로 쟁기를 끌어 밭을 갈며 순의 일을 거들었다. 보는 사람들이 다 신기하게 여겼다. 또 한 번은 새가 날아와 순이 잡초를 제거하는 일을 돕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우중화(虞重華, 순)가 온갖 마난을 겪었으니 반드시 복이 있을 것이다. 코끼리가 밭을 갈고 새가 김을 매는 것은 바로 비범한 징조다.”라고 했다. 역산에서 때로 토지 문제로 다툼이 생길 때마다 순은 자발적으로 자신이 개척한 비옥한 땅을 노약자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더 척박한 땅을 개간하곤 했다. 순의 영향을 받아 역산 사람들은 예의와 겸양을 중시하고 서로 화목하게 대했다. 이렇게 되자 이곳에 와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졌고 나중에는 큰 마을을 이뤘다.

또 순이 뇌택(雷澤)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에도 사람들이 어장을 두고 다툼이 있곤 했다. 순은 물고기가 많은 어장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남들이 원하지 않는 곳에 가서 물고기를 잡았다. 이처럼 그의 영향 하에 뇌택 사람들은 서로 양보하면서 어장을 두고 남과 다투는 일이 사라졌다.

또 하빈(河濱, 지금의 영제현 북부)에서 도기(陶器, 질그릇)를 구울 때는 하빈 사람들이 만든 도기의 품질이 열악한 것을 보고 정성을 기울여 예쁘고 튼튼한 도기를 만들어냈다. 그러자 다른 도공들이 그를 찾아와 기술을 배웠고 때문에 하빈에서 나는 도기의 품질이 아주 좋아졌다.

이처럼 순은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을 고려하고 관용하고 참아냈으며 덕으로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순의 이름을 듣고 그가 사는 곳으로 옮겨왔다. 그러자 순이 거주하는 지역은 1년이 지나자 촌락을 이뤘고 2년이 지나자 작은 읍이 되었으며 3년이 지나자 많은 인구를 지닌 도시가 되었다.

5. 요의 후계자로 추천받다

순이 30세가 되었을 때 요임금은 천하에 덕이 있고 쓸 만한 인재를 두루 찾았는데 사악이 순을 추천했다.

어느 날 밤 순은 꿈을 꾸었다. 꿈에 자신의 머리카락이 자라나 하늘에 닿았고 눈썹 역시 하늘에 닿았다. 그 의미를 몰라 의아해 하는데 어떤 이가 축하하며 말했다. “머리카락이 하늘에 닿음은 제(帝)를 가리킵니다. 또 한 단계 아래에 있는 눈썹이 하늘에 닿았다는 것은 권력이 제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요임금께서 당신을 등용하실 겁니다!” 순은 “나는 일개 필부에 불과하니 그런 망상은 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그런데 며칠 후 요가 파견한 사람들이 순을 찾아왔고 얼마 후 요임금이 순을 접견했다.

《순자(荀子)‧요문(堯問)》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요가 순을 만나 “내가 천하를 이루고자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순(舜)은 “하나를 가져 실수가 없고, 작은 일을 행함에 게으름이 없으며 충성과 성실함에 싫증내지 않으면 천하가 저절로 올 것입니다. 하나를 가지는 것을 하늘이나 땅처럼 하고 작은 일을 행함을 해나 달처럼 하며 충성과 성실이 안으로 가득하고 밖으로 꾸며지면 그 형체가 온 세상에 나타날 것입니다. 천하는 한 귀퉁이에 있으니 또 무엇을 족히 이루시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순은 이어서 하늘을 받들고 땅을 다스리며 백성들을 돌봐야한다는 자신의 정견을 제출했다.

요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두 딸(아황과 여영)을 시집보내 직접 집안에서의 도덕과 품행을 관찰하게 했다. 또 아홉 명의 아들을 보내 함께 어울리게 하면서 집밖에서의 행동과 능력을 관찰하게 했다. 요는 순에게 갈포로 만든 옷과 거문고를 내려주었고 창고를 지어주고 소와 양을 보냈다.

혼인 후 순은 요의 두 딸을 데리고 규하(媯河) 강변의 집에 살았다. 순은 전처럼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들과 우애를 지켰으며 오히려 전보다 더 삼가고 공손했다. 요임금의 두 딸 역시 오만한 마음이 없었고 부인의 도리를 극진히 지켰다.

하지만 순이 이렇게 번영하는 모습을 본 부모는 또 다시 질투와 번뇌에 빠졌다. 동생 상은 이 재물들을 다 차지하고 싶었다. 이에 세 사람은 순을 더 핍박했다. 한번은 꾀를 내어 순에게 식량창고를 수리하게 한 후 밑에서 불을 질렀다. 이날 순은 삿갓 2개를 지니고 있었는데 불이 나자 두 손에 삿갓을 잡고 창고를 날아 내려와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첫 번째 계략이 실패하자 셋은 다른 계략을 냈다. 이번에는 순에게 우물을 파게 하고는 순이 우물 속으로 깊이 들어가자 흙과 돌로 우물을 메워버렸다. 하지만 두 아내가 미리 순에게 백룡(百龍衣)를 입혔기 때문에 순은 횡으로 구멍을 내어 위기를 탈출할 수 있었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에도 순은 여전히 전처럼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들과 우애 있게 지냈다. 순의 지극한 효심은 마침내 부모를 깨닫게 했고 상 역시 점자 나쁜 습관을 버리고 바른 길로 돌아왔다.

6. 정치적 시험을 거치다

관찰결과 요임금은 순이 집 안과 밖에서 확실히 현자임을 발견했고 이에 사도(司徒)의 직책을 주어 천하대사를 처리하는 능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요임금이 순에게 사도의 직책을 맡기자 가장 먼저 실시한 것은 오전의 교화(五典教化)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오전이란 아버지는 위엄 있고 어머니는 자애로우며 형은 우애 있고 동생은 공손하며 자식은 효도하는 5가지 윤리도덕을 말한다. 순은 오전의 교화에 탁월한 성과를 보였으며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준수하자 천하가 편안해지고 백성들이 화목해졌다.

요임금은 두 번째로 순을 사공(司空)에 임명해 천하의 정무를 총괄하고 백관을 관리하게 했다. 순은 각종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들을 모두 잘 처리했으며 백관이 기꺼이 따르게 했다.

세 번째로 요임금은 순에게 사방의 제후들을 접대하게 했다. 순은 이 일도 아주 장엄하고 엄숙하면서도 예의에 부합되게 잘 처리했다.

네 번째로 순은 각 지역을 순시하며 홍수의 상황을 살펴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일은 깊은 산속과 큰 하천과 연못 속에서 수시로 광풍이나 폭우가 몰아쳐 방향을 잃기 쉬웠다. 또 독사나 맹수에게 습격당할 위험이 도사리는 위험한 임무였다. 어느 날 순 일행이 인적이 드문 숲속에서 이리떼를 만나 많은 이들이 깜짝 놀랐다. 하지만 순이 앞으로 나아가자 이리떼들이 모두 몸을 돌려 숲속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에는 3마리 호랑이가 나타났다. 수컷호랑이가 사람들을 보고는 큰 소리로 포효하자 모두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순이 앞으로 나아가 호랑이에게 말했다. “우리는 천자의 명을 받들어 이 지역의 홍수 상황을 살피고 만백성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다. 뜻밖에 너를 만났으니 너는 빨리 굴로 돌아가 큰 길을 가로막고 행인들을 놀라게 하지 말거라.” 그러자 수컷 호랑이는 암컷과 새끼를 이끌고 몸을 돌려 떠나갔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은 요임금은 “이는 천신(天神)의 가호가 아니면 정성이 만물을 감동시킨 것이다.”라고 했다. 순은 폭풍이나 뇌우 속에서도 몸가짐을 흩뜨리거나 길을 잃지 않았으며 복잡하고 자주 변화하는 상황에서도 늘 침착함을 유지하며 진지하게 모든 문제들을 잘 처리했다.

7. 교육기관을 설립해 후대에 큰 영향

기록에 따르면 요순시대에도 이미 전문적인 교육기관이 있었는데 말하자면 학교의 원형에 해당한다.

《예기‧왕제(王制)》에서는 “요순시기에 상상(上庠)에 조정 신하들 중 노인을 모셨고 하상(下庠)에서는 평민 노인을 모셨다.”고 하고 《예기‧명당위(明堂位)》에는 “미름(米廩)이 요순의 상(庠)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미름은 고대의 식량창고를 말하며 상은 노인을 모시는 곳이다. 즉 요순시대에는 식량창고가 노인을 모시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노인 중에서도 조정의 신하들과 평민의 차이를 두어 조정 신하들은 상상에서 모시고 평민노인은 하상에서 모시게 했다. 이들은 연로하고 경험이 많기 때문에 아이들을 모아 이들의 지식과 경험을 전수하게 했다. 고대의 전문학교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나중에 서주(西周) 시기에 이르기까지 요순시기의 양로와 교육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순은 이처럼 오전의 교화를 통해 ‘구덕(九德)’을 제창했고 교육을 새로 만들어 도덕을 핵심으로 하는 전통문화를 다지게 했다. 사기에서는 “천하의 밝은 덕이 모두 순에게서 시작되었다(天下明德,皆自虞舜始).”고 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천하를 공(公)으로 삼은 순은 중화민족에게 전통도덕의 기념비를 세워주었다.

8. 순의 섭정

각종 단련과 시험을 거친 후 요임금은 순이 인자하고 덕이 있으며 지혜와 재능이 있음을 알고는 그에게 천하를 전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순은 자신의 덕행이 아직 미치지 못한다면서 사양하며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때 요임금의 나이가 이미 고령이라 정무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이에 대사농 등이 순을 임시로 ‘태위(太尉)’로 삼아 섭정을 맡길 것을 제안했다. 여기서 ‘위(尉)’란 위에서부터 아래를 편안히 한다는 뜻으로 순이 만백성을 안정시키길 희망한 것이다.

9. 하도의 출현과 선양 받는 순

《죽서기년》에 따르면 요임금 제위에 있은 지 70년에 뜰에 봉황이 나타나고 주초(硃草, 상서로운 풀)이 나오고 가화(嘉禾, 아름다운 조화)가 빼어나고 감로가 적셔주고 예천(醴泉)이 나오고 일월이 합벽하며 오성(五星)이 나열되었다. 주방에서 고기가 나왔는데 부채처럼 얇아서 흔들면 바람이 일고 음식으로 먹으면 시원하고 냄새가 나지 않아 삽포(箑脯)라 했다. 요임금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순에게 공을 돌리며 천하를 선양하고자 했다. 이에 요는 목욕재계하고 하수와 낙수 사이에 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며 길일을 선택했다. 순 등을 이끌고 수산(首山)에 올라가 신의 개시를 구하기로 했다.

요, 순 등이 수산에 오르자 하락(河洛, 하수와 낙수)의 물가에서 다섯 노인이 노는 것을 보았다. 노인들은 모두 용의 눈썹에 흰 얼굴을 했고 의관이 일반인과는 달랐으며 신태가 비범했다. 그들은 몹시 흥겨워하면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한 노인이 큰 소리로 말했다. “하도가 온다네, 특별히 임금께 기일(期)을 알리러 왔네.” 그러자 두 번째 노인이 이어서 “하도가 온다네, 특별히 임금께 의론(謀)하러 왔네.”라고 했다. 세 번째 노인이 “하도가 온다네, 특별히 임금께 그림(圖)을 알리러 왔네.”라고 했다. 네 번째 노인이 이어서 “하도가 온다네, 특별히 임금께 부적(符)을 알리러 왔네.”라고 했다. 다섯 번째 노인이 이어서 “용마(龍馬)가 거북의 등껍질을 물고 있는데 거북 등에 낙서가 있네, 백옥으로 봉함하고 붉은 흙으로 입구를 막았네.”라고 했다. 또 서로 이르기를 “하도가 온다네, 임금께 기일을 알리러왔네, 나를 아는 사람은 눈동자가 둘인 황요(黃姚, 순을 지칭)로다.”라고 했다.

요임금과 신하들이 깜짝 놀랐다. 요는 순에게 물었다. “이 다섯 노인이 그대가 안다고 하는데 저들은 대체 어떤 신령인가?”

순은 “신이 어젯밤에 별자리를 보았는데 하늘에서 금, 목, 수, 화, 토 오성이 갑자기 사라진 것을 발견해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원래 이곳 속세에 함께 놀러왔던 것입니다. 신이 보기에 이 다섯 노인은 바로 오성(五星)의 정화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요임금은 “그들이 하도가 온다고 했으니 반드시 이곳에서 신기한 일이 발생할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요임금은 여러 신하들을 이끌고 목욕재계하고 태사에게 명령해 길일을 택해 취규(翠媯) 강변에 단을 쌓게 했다. 그리고 2월 신축일 새벽에 예를 거행하게 했다.

신축일 새벽이 되자 수일간 목욕재계를 마친 요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단위에 올라가 장중하고 엄숙하게 예를 행했다. 요임금은 백옥(白玉) 한 덩이를 물에 던져 천지신령에게 예물로 바쳤다. 예가 끝나자 모두들 단 아래에서 잠시 휴식하면서 하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각 하늘은 이미 밝아졌고 저 멀리 바라보니 하수(河水)가 들끓기 시작했다. 해가 높이 떠오른 후 갑자기 강 속에서 눈이 부실 정도로 오색찬란한 빛이 나타났다. 잠시 후 하수에서 한바탕 맑은 기운이 연기나 구름 같고 솜이나 면 같은 것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면서 처음의 찬란한 빛과 서로 엇갈리는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그 기운이 하늘과 땅 사이를 뒤덮었다. 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주변 4개의 산 위에 흰구름이 나타나 하늘로 곧장 솟아 푸른 하늘을 가렸다. 뒤이어 광풍이 크게 일더니 수목이 흔들리고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문득 하수의 물이 용솟음치더니 한 마리 긴 용이 머리를 들고 물 밖으로 나왔다. 모두들 깜짝 놀라 바라보니 원래 한 마리 용마(龍馬)였다.

용마는 입에 푸른색 물건을 물고 강둑에 오르더니 제단으로 올라왔다. 입속에 물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고는 즉시 몸을 돌려 하수로 들어가 버렸다. 삽시간에 바람이 잦아들고 구름도 흩어졌으며 하늘이 다시 푸르고 사방이 밝아졌다. 요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이끌고 다가가 보니 원래 옥으로 만든 궤짝인데 모양이 거북의 등껍질과 같았다. 폭은 9척으로 겉에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푸른 끈으로 묶어놓았다. 요임금이 사람을 시켜 열게 하니 과연 한 폭의 하도(河圖)가 나타났다. 위에는 천상의 일월성신의 방위와 지상의 산천과 강하(江河)의 맥락 및 인간세상에서 제왕의 흥망성쇠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마지막에 “순에게 제위를 물려주리니 우는 마땅히 천명을 받을지어다(闓色授帝舜,虞當受天命).”라고 적혀 있었다.

《상서‧중후악하기(中候握河紀)》에는 “(요임금) 제위 70년 여름 갑(甲)일에 직(稷)의 지방에서 제사를 지냈다. 제물을 물속에 넣자 갑자기 오색의 찬란한 빛이 하수에서 나와 사방으로 휘황하게 빛났다. 흰구름이 바람을 따라 점차 일어나더니 용마가 입에 궤짝을 물고 단상으로 날아올랐다. 궤짝은 거북 등의 모양으로 폭이 9척이었으며 위에 새겨진 글자는 요임금 이후 우, 하(夏), 상(商), 주(周), 진(秦), 한(漢)이 천명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요임금이 이를 기록하고 비밀리에 감추게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2년 2개월 후 요임금은 또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하락에 와서 제단을 설치해 신에게 제를 올리고 좋은 옥[璧]을 낙수에 제물로 바쳤다. 제사가 끝나자 제단에서 내려왔는데 태양이 질 무렵이었다. 갑자기 낙수 속에서 한 가닥 붉은 빛이 나오더니 거대한 검은 거북이 서(書)를 등에 메고 나타나 단에서 멈추고는 몸을 돌려 등에 진 물건을 단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전처럼 낙수로 들어가 사라져버렸다. 원래 거북의 등의 글은 붉은색 글자였는데 순에게 선양하라는 내용이었다.

요임금은 “용이 하도를 물고 거북이 낙서를 지고 나타나 천상을 보여주었으니 천명은 어길 수 없구나!”라고 말했다. 하도와 낙서에 나타난 신의 뜻이 순에게 양위할 것을 분명히 밝힌 이상 요임금도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이에 길일을 택해 순에게 제위를 넘겨주었다.

요임금은 정월 초하루에 문조묘(文祖廟)에서 성대한 선양의식을 거행해 순에게 천자의 정무를 대신하게 했다. 요임금은 순이 권한을 충분히 행사하고 독립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게 했으며 사소한 일은 문의하지 못하게 했다. 이에 편안히 여생을 보내고자 도읍 북쪽의 성양(城陽, 지금의 하남 복양현 동남쪽)에 유궁(遊宮)을 만들어 요임금의 수양지로 삼았다.

순은 제위를 선양받은 후 제사를 지내고 제후들에게 홀을 나누어주고, 동순(東巡), 남순(南巡), 서순(西巡), 북순(北巡)과 돌아와서 문묘에 알리는 7가지 정사를 시행했다.

10. 천상에 밝아 7정을 고르게 하다

《상서‧순전(舜典)》에는 “선기옥형으로 칠정을 고르게 했다(在璿璣玉衡,以齊七政).”고 한다. 이는 순임금이 천상을 관찰해 7가지 정사가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지 확인했다는 뜻이다. 선기와 옥형은 상고시대 천문을 관측하던 기구를 말한다. 상고시대에는 모두 천문과 천상을 관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천상과 일월성신의 운행상황을 관찰해 정치의 득실을 살피고 천도에 부합하는지 파악했다. 오직 천도(天道)로 인사(人事)를 밝게 할 때야만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합하고 사시가 그 순서에 합하게 되어” 자신의 행동이 천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중화 전통문화의 천인합일 이념이다.

11. 태산에서 봉선하다

순임금은 천자의 자리를 선양받은 후 사방을 순시했다. 최우선적으로 한 일은 천지와 일월성신 및 각 지역의 신지(神祇)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이었다. 2월 순임금이 동쪽 순시에 나서 태산에 도착했다. 목욕재계 하 후 태산에서 천지에 제사를 올리는 성대한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여기서 봉(封)이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하고 선(禪)이란 땅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장중하고 성대한 제사의식은 우선 천지에 제를 올려 하늘과 땅에 경건하게 감사를 드리고 창세주(創世主)께 하늘에서 명을 받았음을 보고하고 선양을 받아들인다. 이후 일월성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뒤이어 장작에 불을 피워 천지를 밝히는 동시에 종과 북을 일제히 울린다. 음악에 따라 무용수들이 춤을 추며 천제(天帝)를 찬미하고 하늘의 보우를 구한다. 이런 전체 제사의식은 아주 장중하고 신성했다.

이후 각 지역의 명산과 대천을 찾아가 요제(遙祭)의식을 진행했다.

사실 태산 봉선은 유래가 아주 깊다. 복희, 신농, 황제, 전욱, 제곡, 요, 순, 우, 탕 등은 모두 태산에 올라 봉선의식을 치르고 하늘에 보고하고 “천명을 받은” 은혜에 감사를 드렸다.

그 후 순임금은 동방의 여러 제후들을 접견했다.

순은 천자의 정무를 대행한 이후 각 방면의 제도를 완벽하게 제정했다. 우선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등 5등급의 제후가 천자를 알현할 때 잡는 서옥(瑞玉)과 다른 예물을 규정했다. 즉 공은 환규(桓圭), 후는 신규(信圭), 백은 궁규(躬圭), 자는 곡벽(穀璧), 남은 포벽(蒲璧) 등 5가지 옥으로 만든 부절을 들고 천자를 알현하게 했다. 또 상과 벌을 주는 조치를 제정했고 각 작위에 따른 관복도 규정했다.

5월, 순임금이 남방을 순시했는데 형산(衡山)에 가서 태산과 마찬가지 의례를 행했다.

8월, 순임금이 서방을 순시했는데 화산(華山)에 가서 태산과 마찬가지로 의례를 행했다.

11월, 순임금이 북방을 순시했는데 항산(恒山)에 가서 태산과 마찬가지로 의례를 행했다.

이후 순임금은 5년 간격으로 전국을 한 차례 순시했다. 순시하지 않는 나머지 4년에는 각 제후들을 차례로 수도로 불러 접견하고 조정에 들어와 정치 성적을 보고하게 했다. 또 3년마다 한 번씩 공적을 살피고 5년마다 한 번씩 순시에 나서 조정과 지방 제후들의 종속관계를 명확히 하고 천하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12. 형법을 만들다

순임금은 고요(皋陶)에게 사법을 주관하게 했으며 부득이할 경우 형벌의 도를 사용하게 했다. 근본적인 방법은 우선 교화에 있고 사람마다 선을 행하고 악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형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형벌을 어기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게 하는 것만 못하다.

당시 제정한 형법은 “상이형전(象以典刑),유유오형(流宥五刑),편작관형(鞭作官刑),박작교형(撲作教刑),금작속형(金作贖刑)”이다. 여기서 ‘상이형전’이란 상용하는 형벌을 그림으로 그려 의상이나 기물에 새김으로써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동시에 수치심을 알고 잘못을 고치게 한 것이다. 또 ‘유유오형’이란 오형(코를 베거나 다리를 절단하거나 거세하는 등의 5가지 잔인한 형벌) 대신 유배형을 내려 관대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편작관형’이란 관에서 발생한 범죄에 대해서는 채찍질만 하게 한 것이며 ‘박작교형’은 학교에서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 학생에게 나무로 볼기를 때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금작속형’이란 범죄 동기가 가볍고 과실로 인한 범죄에 대해 국가에 벌금을 내고 속죄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만들어진 형법은 후대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된다.

순임금 때 인사관리 분야에서도 큰 혁신이 있었다. 《문헌통고(文獻通考)‧직관고(職官考)》에서는 “요임금 이전에 관에서 다스린 것은 하늘의 일(天事)이었다. 순임금과 우임금 이후 관에서 다스린 것은 백성의 일(民事)이었다.”고 했다. 순임금은 이처럼 도덕을 근본으로 만민을 교화했고 교육을 창립했으며 형법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사방을 순시했다. 여기서 형법은 국가관리 중에서 강제수단으로 형법의 강화는 이 시기에 국가관리의 직능을 구비했음을 보여준다. 즉 이 시기에 교육과 상벌 등 관리체제가 강화되었다는 뜻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