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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요‧순‧우(3): 대홍수의 겁난

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3장 대홍수의 겁난

1. 홍수가 처음 나타나다

요임금 만년에 천하에 대홍수가 발생했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대홍수가 발생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당시 천하는 기주(冀), 예주(豫), 연주(兗), 청주(青), 서주(徐), 양주(揚), 형주(荊), 양주(梁), 옹주(雍) 등 구주로 나뉘어 있었다. 구주 밖을 팔황(八荒)이라 했는데 바로 사해 밖이 팔황(八荒)이다. 《설원(說苑)‧변물(辯物)》에서는 고대 중국은 “팔황 안에 사해가 있고 사해 안에 구주가 있는 섬”이라 칭했다.

여기서 기주는 왕기(王畿)의 주로 기(冀)는 기(畿)와 통한다. 다시 말해 임금의 수도가 있는 곳으로 중국(中國)과 천하(天下)를 대표한다. 때문에 《노사(路史)》에서는 “구주에서 오직 기주만은 이르지 않는 곳이 없는데 나머지 8주를 열거하면 경계가 자연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수도가 구별되면서도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고 했다.

지금의 몽골지역은 당시 끝없이 펼쳐진 한해(翰海)였는데 북해(北海)라고도 했다. 기주와 예주 서쪽이 바로 옹주인데 지금의 섬서, 영하 및 감숙성 동부지역이다. 옹주에서 서쪽 종남산 북쪽이 바로 고대의 산해(山海)다. 양산(梁山)에서 나온 계곡물이 끊이지 않고 도도히 흘러 산해로 들어갔다. 산해 서쪽이 바로 서해(西海)인데 지금의 감숙, 청해, 신강, 서장 등 광활한 지역이다. 산해 동쪽이 바로 종극연(從極淵)으로 양우대택(陽紆大澤)인데 황하(黃河, 당시에는 대하(大河)라 했다) 상류에 위치한다. 당시의 동해(지금의 황해 또는 발해)해안선은 지금 상해의 조경(漕涇)과 도경(徐涇), 소북(蘇北)의 동대(東台), 연수(漣水), 연운항(連雲港) 일대, 천진의 묘장(苗莊), 소천장(小王莊)일대였다. 절강과 복건의 구민(甌閩) 일대는 큰 바다였다.

홍수가 발발하자 서해, 산해의 바닷물이 출로를 잃었고 모두 양우대택으로 밀려들었다. 양우대택의 물은 또 하란산(賀蘭山), 음산(陰山)에 막혀 한해(瀚海)로 들어갈 수 없었고 다만 맹문산(孟門山 황하의 호구폭포 근처)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여량산(呂梁山)에서 남과 북으로 갈라져 떨어져 내려왔다. 이는 수많은 농경지와 주택을 물에 잠기게 해 많은 사람들이 물고기 밥이 되었다. 특히 옹주는 높은 산에 가로 막혀 물에 잠겨버렸다.

요임금은 누가 이 물난리를 다스릴 수 있을 지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구했다. 그러자 환두가 공공 공임을 추천했다. 요는 “공공 이 사람은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지만 속으로는 딴마음을 품고 있소. 겉모습은 공순하지만 하늘의 규칙을 위배하고 천신(天神)을 소홀히 여기니 치수에 쓰기는 불가하오.”라고 했다. 그러자 대사농(大司農) 직(稷) 역시 현재로서는 적당한 사람이 없으니 일단 시험 삼아 공임에게 맡겨보라고 권했다. 요는 어쩔 수 없이 공공에게 치수를 맡겼다.

요는 직을 곤륜산에 보내 서왕모를 만나게 했다. 서왕모는 직에게 “이번 홍수는 하늘의 뜻이니 정해진 수가 있다. 치수할 인물과 치수시기를 포함해 모두 정해진 수가 있으니 앞으로 20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때 비로소 신이 우를 파견해 물을 다스리게 하고 수재가 완전히 끝날 것이며 나(서왕모) 역시 그때가 되어야 치수를 도와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천지에는 깊은 이치가 있으니 겁수는 하늘이 정한 것이다.

2. 삼묘를 토벌하다

천하에 홍수가 나자 남방의 삼묘(三苗)가 이 기회를 이용해 반란을 일으켰다. 삼묘란 구리(九黎) 치우(蚩尤)의 후예로 당시에는 주로 동정호와 팽려호(彭蠡湖, 지금의 파양호) 사이 즉 장강 중류 남부에 분포했다. 이들은 세력이 상당히 강했는데 환두 부자의 봉국이었다. 환두 부자는 잔인하고 어질지 못해 전통을 파괴했다.

환두 부자는 오래전부터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않았고 반란을 꾀해 여러 차례 난을 일으킨 바 있다. 마침 천하에 대홍수가 나자 사방을 공격해 약소국가들을 집어삼켰다. 요임금이 직에게 삼묘를 토벌할 것을 명하자 단수(丹水)에서 전투를 벌여 삼묘를 굴복시켰다. 직은 삼묘에게 각종 학정과 가혹한 형법을 없애고 성인의 도를 존중하며 기존에 병탄한 여러 나라의 땅을 되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환두를 숭산에서 석방했다.

3. 대홍수에 관한 기록과 전설

《상서‧요전(堯典)》에는 요임금이 “물이 넘쳐 넘실거리는 것이 사방에 해를 끼치고, 거세게 쏟아지는 물이 산을 삼키고 언덕을 넘어서 하늘까지 닿을 듯하다(湯湯洪水方割,蕩蕩懷山襄陵,浩浩滔天)”고 탄식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족(彝族)의 역사시 《홍수기(洪水記)》에는 신이 천지와 사람을 만든 이야기가 나오는데 인류가 점차 부패하고 타락하자 신이 대홍수로 훼멸시키고 좋은 사람을 하나 남겨 새롭게 인류문명을 창조한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홍수의 규모와 범위를 말해 보자면 요임금 시기의 대홍수는 거의 전 세계적인 것으로 북반구 전체가 홍수에 잠겼다. 이 대홍수에 대해 세계 254개 민족의 문자기록이나 또는 구두전설이 남아 있는데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다.

《성경‧창세기》에는 “이 일이 2월 17일 발생했다. 그날 하늘의 창들이 크게 열려 큰비가 40일 밤낮 쏟아졌다.” “천하의 높은 산이 모두 잠겼다.”는 기록이 있다. 노아와 그의 처자식이 방주에 타고 표류한 지 40여 일 후 높은 산에 좌초했고 150일째 되던 날 홍수가 완전히 물러갔다.

한편 중국의 여러 민족 중 유일하게 홍수에 관한 전설이 없는 민족이 있는데 바로 낙파족(珞巴族)이다. 이들은 주로 해발고도가 평균 3천 미터가 넘는 지금의 티베트지역에 살았기 때문이다. 대홍수도 이 높이까지 도달하진 못했음을 알 수 있다.

4. 대홍수의 높이

대우(大禹, 훗날의 우임금)가 물을 다스릴 때 형산(衡山) 구루봉(岣嶁峰) 천연 바위 위에 비석을 세웠다. 전설에 따르면 이 비석이 세워진 위치가 바로 당시 수면의 높이였다고 한다.

《수경주(水經注)》에는 “강물이 협동(峽東)을 지나 의창현(宜昌縣) 삽조(插灶)아래를 지나는데 강의 좌측 언덕은 수백 장에 달하는 절벽이라 나는 새조차 살 수 없다. 그런데 절벽 중간에 수척에 달하는 불에 탄 흔적이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옛날에 홍수가 났을 때 사람들이 절벽에 다가갔을 때 남은 불을 꽂아놓은 것이 지금까지 존재해 이를 삽조라 부른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예문류취(藝文類聚)》에는 “의도(宜都) 이릉현(夷陵縣) 서쪽 80리에 고광산(高筐山)이 있다. 오래 전부터 요임금 때 홍수가 났을 때 이 산은 잠기지 않고 마치 광주리 같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의도는 지금의 호북성 의창(宜昌) 부근의 지성(枝城)이다.

대만 고산족의 전설에 따르면 홍수의 높이는 2천 미터 정도에 달했다고 한다.

조선족 전설 중에는 한 남매가 백두산(장백산) 정상에 표류해 다행히 난을 벗어났다고 한다. 백두산은 장군봉을 주봉으로 하며 인근에 2천 미터 이상의 높은 산봉우리들을 거느리고 있다. 다시 말해 당시 홍수의 높이는 2천 미터 아래였다는 뜻이다.

필리핀 전설에는 대홍수로 위간(Wigan)과 부간(Bugan) 남매만 남겨놓았다고 하는데 2천 미터 이하의 고산은 물에 잠겼다.

그리스 신화에는 데우칼리온(Deucalion)과 피라(Pyrrha)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2천 미터 이하의 고산이 모두 물에 잠겼다고 한다.

5. 신기한 요산(堯山)

《태평어람(太平禦覽)》 769권 〈군국지(郡國志)〉에는 “제주(濟州)에 부산(浮山)이 있다.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요임금 때 큰 비가 내렸을 때 이 산이 물 위에 떠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암석 사이를 배를 타고 유람했는데 지금도 끊어진 쇠사슬이 남아 있다.”고 한다.

산서(山西) 부산현(浮山縣)은 태악산의 남쪽기슭 임분 분지의 동쪽 경계에 있는데 해발 평균이 1200미터 이상이다.

민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은하수가 기울어지면서 큰 비가 쏟아졌고 오랫동안 그치지 않았으며 여량의 맹문산(孟門山) 꼭대기에서도 물이 나왔다. 강과 하천이 범람해 큰 바다처럼 되었다. 유독 물의 높이에 따라 떠오르는 산이 있어 이를 부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요임금이 이곳에서 비를 피했기 때문에 요산이라고도 한다.

중국 여러 곳에 ‘부산(浮山)’이란 지명이 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물에 뜬 것이 해당 산위의 개별적인 바위인 반면 부산현의 부산은 의미가 좀 다르다. 즉 산 전체가 홍수에 의해 위로 떠올랐다. 당시 대지가 혼란해 산 주변이 홍수에 포위되었는데 기이한 것은 이 산에 거주하는 민중들은 해치지 않았다. 원인은 이 산 자체가 사방에서 떨어지는 맹렬한 물과 함께 오르내려 마치 배처럼 물과 함께 자유자재로 오르고 내렸기 때문이다. 이 기이한 이야기는 청나라 《가경일통지(嘉慶一統志)》에 기재되어 있다. 어떤 이는 부산 지하에 풍부한 석탄이 매장되어 있는데 석탄의 비중이 돌보다 가볍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물에 뜰 수 있다고 본다. 어쨌든 석탄의 비중은 그래도 물보다는 크다. 그러므로 산 전체가 물위에 떠서 오르내렸다는 이야기는 기적이자 신적(神跡)이라 할 수 있다.

부산현의 이 특수한 ‘부산’은 평정현(平定縣)의 동부산(東浮山)과 서로 비교해 어떤 책에는 서부산(西浮山)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고조 무덕(武德) 2년(619년)에 최초로 ‘부산’이라 칭했다. 이듬해 어떤 사람이 이 현(縣)에 있던 양각산(羊角山) 아래에서 신인(神人)을 봤기 때문에 ‘신산현’(神山縣)으로 고쳤다. 금나라 대정(大定) 7년(1167년)에 다시 원래 명칭을 회복해 ‘부산현’이 되었다.

사실 현지의 민간 전설에 따르면 ‘신산(神山)’은 요임금 시기부터 이미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라, 산 전체가 물에 떠서 수면에 따라 오르내렸는데 주민들이 편안했다는 것은 일찍이 ‘신기(神氣)’를 충분히 펼쳐 보인 것이니 만약 이 산에 ‘신’의 보호가 없었다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6. 대홍수의 내원

그렇다면 이렇게 일망무제하고 전 지구를 덮어버린 거대한 대홍수는 또 어디에서 온 것일까?

성경에는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고 했다.

그리스 신화에는 제우스가 인류가 갈수록 잔인무도해지며 정의와 예절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홍수로 인류를 없애라고 결정했다.

마야인들의 《포폴 부흐》라는 기록에는 신이 천지를 창조한 후 처음 인류를 만들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조물주의 존재를 망각하고 신에게 불경하자 한 차례 홍수를 일으켜 인류를 말살시켰다고 한다.

이처럼 각 민족의 기록이나 전설 중에는 인류의 도덕이 보편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신이 대홍수를 내려 인류를 징벌하고 오직 극소수의 선량한 사람만 살아남게 했다.

당시의 대홍수는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고 해일이 생겨 초래된 거대한 재난이었다. 《산해경》의 기록에 따르면 대홍수 이후 많은 지역에서는 초목조차 자라지 못했다고 한다.

이 대홍수는 이 시기 인류의 거의 모든 문명을 훼멸시켰다. 서양문명은 거의 완전히 훼멸되어 사라져버렸고 중화문명 역시 새로 개창되긴 했지만 일부 문명은 보존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 지역 사람들이 깊고 두터운 문화적 내포를 지니게 된 배경이다. 어떤 사람은 요임금 시대의 대홍수를 두 문명의 경계선으로 보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현재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적의 하나인 《상서》는 요임금 이후부터 역사적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중화민족의 진정한 체계적 기술은 바로 요, 순, 우의 시대 다시 말해 대홍수시대로부터 시작된다.

(계속)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