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남방 수계를 다스리다
중국 남방에는 수계(水系)가 아주 많은데 주로는 장강(長江 대강이라고도 함), 회하(淮河)와 장강의 수많은 지류들이다.
우는 정해진 계획에 따라 서주(徐州) 일대를 다스렸는데 서주, 양주(揚州), 예주(豫州)의 일부를 포함했다. 서주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회하 북쪽, 북쪽으로는 태산에 이른다. 이곳 하천에는 황하, 회하 및 기수(沂水)가 있고 산으로는 몽산(蒙山), 우산(羽山)이 있다. 동쪽으로 사수(泗水), 기몽수(沂蒙水)를 다스리고 남쪽으로 회수를 다스렸으며 동백산(桐柏山)부터 회하를 소통시켰다. 동으로 사수, 기수와 합해져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렇게 되자 기몽산, 우산 지역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도산에서 아내를 얻다
우는 나이 서른에 아내를 얻었다. 우는 “내가 만약 아내를 얻는다면 반드시 기이한 징조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우 일행이 회하로 가던 도중 꼬리가 아홉 달린 흰 여우가 우를 찾아와 말했다. “우리 집은 남쪽 도산 옆의 도산국(塗山國)에 있습니다. 도산국 임금에게 딸이 둘 있는데 몹시 아름답고 재주와 덕을 겸비해 숭백(崇伯 우를 가리킴)에게 시집보내려 합니다.” 하지만 우는 사람이 아니라서 이상하게 여겨 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구미호가 말했다. “지금 내가 꼬리 아홉 달린 흰여우로 당신에게 나타난 이유는 전에 당신이 만약 내가 아내를 얻는다면 반드시 기이한 징조가 있을 거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기이한 징조를 보여주려는 것이자 상서로움을 주려고 온 것입니다. 사람 몸으로 나타나길 원한다면 그 역시 뭐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몸을 한번 흔들자 눈 깜짝할 사이에 백발이 성성한 선풍도골에 비범한 기개를 지닌 노인으로 변했다.
대우가 노인을 보니 비범하고 또 상당한 내력이 있었다. 그는 ‘흰 것은 내가 입는 옷의 색이요 꼬리가 아홉인 것은 양수이자 임금의 증거다.’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우는 혼사에 응하기로 하고 도산국에 가서 군주의 두 딸인 여교(女嬌)와 여수(女攸)를 아내로 맞이했다.
혼인 나흘 째 되는 날 대우는 여교, 여수와 작별하고 영하(潁河)와 회하(淮河)를 다스리러 길을 떠나야 했다. 역사에서는 “우가 도산씨를 아내로 맞이했으나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공적인 일에 피해를 주지 않았다. 신(辛)일에서 갑(甲)일까지 4일 후 다시 치수하러 갔다.”고 한다. 나중에 구강(九江)에서 당도(當塗) 및 강회(江淮)지역에 이르기까지 신(辛), 임(壬), 계(癸), 갑(甲) 일에 아내를 맞이하는 풍속이 생겼다.
무지기를 굴복시키다
당시 회하 동백산 일대에는 무지기(巫支祁)라는 신통력이 뛰어난 물의 요괴가 있었다. 《고악독경(古嶽瀆經)》에 따르면 “그 모습이 원숭이처럼 생겼는데 황금색 눈에 흰 이빨을 가졌고 날렵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대우가 회수를 다스릴 때 무지기가 악행을 저지르고 치수를 교란하다 우에게 제압당해 회정(淮井)에 갇혔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우왕쇄교(禹王鎖蛟)’의 일화다.
전설에 따르면 몇 천 년 후 당나라 때 초주(楚州)의 한 어부가 회수에서 낚시를 하다가 아주 긴 쇠줄을 하나 낚았는데 길이가 아주 길었다고 한다. 초주자사 이양(李陽)이 이 소식을 들은 후 사람들을 불러 이 쇠줄을 당기게 했다. 한참을 당겨보니 갑자기 한 마리 푸른색 원숭이가 뛰쳐나왔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는데 이 푸른 원숭이는 쇠줄을 갖고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집 앞을 세 번 지나다
우는 이어 회하를 다스렸다. 첫 번째는 회수 하류에 물길을 내고 두 번째로 도산(塗山)과 형산(荊山)을 뚫는 일이었다. 두 산은 원래 서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물길을 낸 후 회수가 두 산 가운데로 흐르게 되었다. 세 번째로 협석산(硤石山)을 뚫어 회수가 두 산 사이를 흘러가게 했다. 네 번째는 지류를 다스리는 일이었다.
첫날 대우는 회수를 따라 올라가면서 각 지역의 상황을 살펴보았고 도산과 형산 굴착지까지 갔다. 당시 도산국에는 이미 강남에서 원래 있던 곳으로 이주한 상태였다. 갑자기 대우가 방문하자 온 국민이 그를 환영했다. 대우는 한차례 응답하고는 집에 들러볼 여유도 없이 곧장 공사현장으로 돌아갔다. 그 후 회수 상류까지 갔다.
대우는 다시 서쪽으로 가서 영수(潁水)와 여수(汝水)를 다스렸고 뒤이어 기수(沂水)를 다스렸다.
이렇게 되자 서주와 예주의 수재는 대부분 해결되었다. 수재를 다스린 후 이 지역은 물산이 풍부한 땅으로 변했다.
어느 날 대우가 양주를 가는 길에 도산을 지났다. 가는 길에 집문 앞을 지나가는데 집 안에서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대우는 전처럼 집에 들어가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또 한 번은 도산에서 사람이 찾아와 대우에게 알렸다. “숭백께서 치수하다 집 앞을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은 부인께서 곧 뵐 수 있으리라 여겨 아주 기뻐하시면서 아드님을 안고 문 앞 큰 바위 위에서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는 끝내 따로 시간을 내어 아내와 아들을 보러 가지 않았다. 도산의 동쪽 끝에 유명한 망부석이 있는데 여교가 일찍이 이 바위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대우가 집문 앞을 세 번이나 지나갔으면서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환원애도(轘轅隘道)를 열다
예주의 태실산(太室山)과 소실산(少室山) 사이에 아주 좁은 길이 하나 있는데 이를 환원(轘轅)이라 한다. 만약 환원애도(轘轅隘道 환원의 좁은 길)를 열게 되면 홍수로 범람한 물을 빼낼 수 있었다. 이렇게 물이 빠지면 도성에서 숭산까지 이르는 지름길이 생긴다. 이에 우는 이 길을 내기로 결정했다.
환원애도를 뚫을 때 암석이 너무 단단해서 굴착이 몹시 어려웠다. 대우는 “내가 뚫으러 왔다!”고 외치고는 직접 도끼와 북을 들고 나섰다.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산을 뚫을 때 누구도 산에 올라와서 나를 교란하지 못하게 하라. 공사가 끝날 때 내가 북을 칠 터이니 그때는 올라와도 좋다.”라고 분부했다.
대우가 말을 마친 후 산에 오르려하는데 갑자기 도산에서 두 부인이 찾아왔다. 대우는 아주 이상하게 여겼다. “어째서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내가 막 산에 오르려는 때에 왔을까? 나와 같이 공사현장에 가려는 것일까?” 당시 여수는 이미 임신한 몸으로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두 부인을 만난 대우는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그는 두 손을 흔들며 “시간이 없소, 지금 산에 올라가야 하니 당신들은 산 아래에서 내가 공사를 끝내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오.”라고 했다.
두 부인이 “공사가 언제쯤 끝나나요?”라고 묻자
대우는 손에 든 북을 가리키며 “내가 북을 치는 소리가 들리면 공사가 끝난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북과 도끼를 들고 총총히 산을 올라갔다.
두 부인은 어쩔 수 없이 산 아래서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정오가 지났을 때 문득 산에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공사가 끝났으니 우리 올라가서 그분을 뵙자.”라고 하면서 여교가 여수를 부축해 산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산위에서 그들이 본 것은 우가 아니라 단지 한 마리 황룡이 도끼를 들고 전력을 다해 산을 파는 모습이었다. 뒤에 북이 놓여 있었는데 작업도중 꼬리로 북을 건드려 둥둥 소리가 울렸던 것이다. 여수가 이 모습을 보고는 여교를 끌고 급히 산 아래로 도망갔다.
우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들킨 것을 알고 다시 사람모습으로 돌아왔다. 황급히 산을 내려가 두 부인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여수는 이미 길가의 큰돌로 변해버렸다. 우는 돌에게 “당신이 돌로 변했으니 나를 보고 싶지 않다면 내 아들만은 돌려주시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돌이 갈라지더니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 우는 이 아이가 돌을 가르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계(啟)라고 지었다.
다른 자료에서는 우가 누런 곰[黃熊]으로 변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사실 우가 여기서 변화한 것은 황웅(黃熊)이 아니라 황룡(黃能)이었다. 여기서 룡(能 아래 점 3개)는 용을 뜻한다. 용문을 뚫을 때도 우가 황룡으로 변화했다는 전설이 있다.
환원의 길이 뚫리자 하락(河洛)에서 숭산에 이르는 길이 크게 단축되었고 이후 남북을 잇는 큰 길이 되었다.
양주와 형주 다스리기
양주(揚州)는 회하 남쪽에서 남으로 바다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곳은 지대가 낮고 습한 곳이다. 홍택호(洪澤湖), 고우호(高郵湖), 태호(太湖 震澤이라고도 함), 팽려호(彭蠡湖)와 항주만(杭州灣)이 다 포함된다. 하천으로는 송강(松江), 전당강(錢塘江), 포양강(浦陽江) 등이 있다. 우가 이곳의 수계를 황해로 이끌자 진택(震澤)지역 역시 편안해졌다.
우는 이어서 형주를 다스렸다. 호북의 형산(荊山)에서 호남의 형산(衡山) 남쪽이 형주에 속하는데 이곳에도 수계가 아주 많았다. 우는 팽려호 서쪽으로 동정호 및 그 지류들을 다스렸다. 원(沅), 점(漸), 원(元), 진(辰), 서(敘), 유(酉), 예(澧), 자(資), 상(湘) 등 아홉 하천을 동정호에 모이게 했다. 장강 북쪽에서는 형산에서 시작해 저수(沮水)와 장수(漳水)를 소통시켰다. 종상(鍾祥)과 형문(荊門) 사이에서 방산(方山)으로 이끌고 잠수(潛水)와 한수(漢水)를 연결했고 한수는 장강으로 이끌었다.
또 동백산에서 안륙(安陸)의 배미산(陪尾山)까지 운몽택을 다스렸다. 계공산(雞公山)에서 대별산(大別山)까지 환수(澴水), 섭수(灄水), 거수(舉水), 파수(巴水), 희수(浠水)를 소통시켰다. 이렇게 되자 장강의 많은 지류들은 대부분 고정된 물길을 갖게 되었다. 운택과 몽택 역시 다스려져서 이곳의 토지를 경작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우는 형주를 다스린 후 다시 북쪽 예주로 들어가 한수(漢水) 중류를 다스렸다. 동백산 북쪽으로 외방산과 웅이산(熊耳山) 및 두 산 사이를 흐르는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다스렸다. 웅이산에서 낙수를 이끌어 북동쪽으로 가서 동수(洞水)와 만나게 한 후 다시 동쪽으로 언사(偃師)에 이르러 이수에서 합류하고 동쪽으로 흘러 공의(鞏義)에서 황하로 들어간다.
삼협을 가르다
이어서 우는 양주(梁州)를 다스렸다. 양주는 동쪽으로는 형주와 접하고 북서쪽으로 옹주와 접하는데 지금의 사천성 전역과 호북성 서부 및 섬서성과 감숙성 남부를 포함해 면적이 148만km2에 달한다. 양주는 장강 상류에 위치해 수계가 몹시 복잡한데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물길이 펼쳐지지 못하고 내부에 갇혀 있었다. 이곳에서 주로 다스린 대상은 민강(泯江), 흑수(黑水)였고 타강(沱江)을 뚫고 삼협(三峽)을 개통시켰다.
대우는 황우협(黃牛峽), 파산협(巴山峽)을 뚫어 민강의 물을 장강으로 들어가게 했다. 민강은 수량이 아주 많았다. 때문에 민강의 물의 힘을 나누기 위해 대우는 민강 동쪽으로 수로를 하나 만들어 타강이라 불렀다. 이렇게 되자 민강의 물이 순조롭게 장강으로 흘러들어갔다.
삼협의 개통은 양주 치수에서 아주 중요한 공정이었다. 무산(巫山) 삼협은 장장 7백리에 걸쳐 이어지는데 산고 산이 연결되고 봉우리가 끊이지 않는데다 암석이 특이할 정도로 단단했다. 대우가 운화부인에게 도움을 청하자 운화부인은 신통을 펼쳐 천둥과 번개를 사용했다. 그러자 단단한 바위가 점차 부드럽게 변했고 사람들이 무산삼협을 쉽게 뚫을 수 있게 되었다. 홍수로 범람했던 물도 파촉(巴蜀) 경내에서 흘러나와 결국 바다로 흐르게 되었다.
장강의 주류는 대우가 물을 다스리기 전에는 원래 지금의 삼협이 아니라 잠수(涔水)로 흘렀다. 청나라 지리학자 호위(胡謂)는 《우공수지(禹貢錘指)》에서 “대우가 치수하며 삼협을 뚫기 전 사천 어복강(魚腹江)의 이수(夷水)는 봉절(奉節)에서 장양(長陽)을 거쳐 의도(宜都)를 지나 대강(大江)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바로 고대 장강의 주된 물길이었다.”라고 했다.
《수경주소(水經注疏)》에는 “장강의 물은 우가 강남을 단절하고 협곡 북쪽에 칠곡촌이 있었는데 두 산 중간의 물이 깊고 푸르러 흐르지 않았다. 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옛날에 대강(大江)은 우가 치수하면서 수량이 적어 물을 빼기에 부족하자 지금의 협구(峽口)를 열어 수량을 풍부하게 했다. 이에 대강은 마침내 끊어졌고 지금은 이를 단강(斷江)이라 한다.”
즉 우가 단절시킨 강이 과거 장강의 주류였는데 대우가 치수할 때 남강(南江)이 협소해 물을 충분히 빼내기 못하자 대우가 지금의 수로를 만든 것이다. 때문에 남강의 물은 흐름이 끊겨 우단강(禹斷江 우가 단절시킨 강이란 의미)이라 한다. 《동호현지(東湖縣志)》에서는 단강협(斷江峽) 혹은 단강산(斷江山)이라고도 한다.
대우가 무산(巫山)에 물길을 내자 장강의 물이 동쪽으로 흘러 최종적으로 장강 오호(五湖 장강 중하류의 5 호수로 동정호, 파양호, 태호, 홍택호, 소호)로 흘러들어갔다. 삼협의 물이 북쪽으로 원활히 흐르자 장강의 주류가 지금의 물길(즉 북강北江)로 변해 순조롭게 흐르게 되었다.
지질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장강 서릉협(西陵峽) 횡단절면이 황릉배사(黃陵)에서 아치형으로 솟아오른 핵심 축 부위가 삼협에 물길이 생기기 전에 존재했다는 점이다. 즉 융기된 높은 산이 강물이 동쪽으로 흐르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대우가 삼협을 개척할 때 신우(神牛)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아직 삼협에 물길이 없었고 다만 남쪽에 지금 ‘단강’이라 불리는 작은 물길이 있었을 뿐이다. 이것만으로는 큰물을 빼낼 수 없었기에 우는 삼협을 뚫기로 했다. 무산신녀(巫山神女)가 토성(土星)에게 도와달라고 청하자 토성이 한 마리 큰 황소로 변해 우가 삼협을 여는 것을 도왔다. 황소가 우의 삼협 개척을 도와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은 황소바위 아래 황우묘(黃牛廟)를 세웠다. 삼국시대 촉나라의 제갈공명이 황우묘를 중수하고 비석을 세운 후 《황우묘기(黃牛廟記)》라는 비문을 새겼다. 북송시기에 구양수(歐陽修)가 이릉현(夷陵縣) 현령으로 있을 때 ‘황우묘’를 ‘황릉묘(黃陵廟)’라 개명했다.
구루봉에 비를 세우다
어느 날 대우 일행이 형산(衡山)으로 가는 길에 산 정상에 올라가 희생을 준비해 공경하게 제사를 올렸다. 이때는 전체 치수(治水) 공정의 7~8할이 이미 완성 되어 성공이 가까워졌다. 이에 비석을 세워 치수를 기념하기로 했는데 최종적으로 구루봉(岣嶁峰)에 비석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역대로 이 비석을 ‘구루비(岣嶁碑)’또는 우왕비(禹王碑)라 불렀다.
구루봉은 형산 72봉우리의 하나로 구루비는 천연 암석 위에 세워졌다. 전설에 따르면 이 비가 세워진 자리가 당시 수면의 높이였다고 한다. 비석은 높이 7척, 넓이 5척, 두께 1척으로 77자가 새겨져 있다. 글자의 모양이 올챙이를 닮았는데 또는 조전(鳥篆 중국 고대의 전서체)이라고도 한다. 이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에 해당한다.
대우는 이곳에서 누조(嫘祖 황제의 비)가 남긴 금간옥첩(金簡玉牒)을 얻었는데 완위산(宛委山)에서 얻은 황제(黃帝)의 소장품과 양식이 같았다. 우는 치수에 성공한 후 이곳에 책을 감췄다. 《상중기(湘中記)》의 기록에 따르면 “구루산에 옥첩이 있는데 우가 그 글에 따라 물을 다스렸다.”고 한다. 《오월춘추(吳越春秋)》에서는 “우가 형산에 올라 꿈에 창수사자(蒼水使者)가 금간옥자(金簡玉字)로 된 책을 주어 치수의 핵심을 얻었고 돌산 높은 곳에 새겨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대학자 마허산(馬賀山)선생은 12년 넘게 하나라 문자를 깊이 연구한 끝에 구루비의 비문을 다음과 같이 풀어냈다.
承帝塚然,翼輔雍衛。災降矢發,沮洹往行。三河飛湧。北過冀而奠,似若忘鳥。宿嶽麓庭,昶溢酉祈,水廬弗長,往求永定。華嶽泰衡。崇楚事裒,勞餘神禋,鬯曼吉徙。南瀆衍昌,衣則食備,萬邦皆寧,疆無漾漭。
이를 현대어로 풀이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임금님의 명령과 총재의 허락을 받아 순임금을 도와 옹수(雝水)와 위수(衛水)를 다스렸다. 물난리가 닥쳐 맹세하고 출발하니 저수(沮水)와 항수(恒水) 사이에서 바삐 움직였다. 세 하천에 홍수가 범람하니 북으로 기주(冀州)를 지나 조상과 신령께 제사를 지냈는데 치수에 바빠 마치 고향을 잊은 것 같았다. 높은 산이나 산기슭에서 자면서 술로 천지에 제사를 올리며 강물이 더는 범람하지 않고 영원히 평정되기를 기도했다. 화악(華岳)에서 항산(恒山)에 이르기까지 또 태산(泰山)과 형산에 이르기까지 인재를 크게 존중하며 하천을 소통시켜 수재를 감소하려 했다. 평소 치수하는 틈틈이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고 좋은 술을 신께 올리자 신령이 천도하면 크게 길하다고 알려주셨다. 남방의 물길이 이미 다스려지자 초목이 풍성하고 의식이 풍부해져 온 나라가 다 편안해졌으니 앞으로는 변경에서 중원에 이르기까지 홍수의 범람이 없을 것이다.”
‘구루비’는 대우가 순임금의 명령을 받아 기주에서부터 사방을 다니며 산을 만나면 나무를 깎고 물을 만나면 강으로 이끌며 13년간 세 차례나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고 마침내 홍수를 다스릴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구루비의 내용은 《우공(禹貢)》의 기록과 대체로 일치하면 《사기》 〈하본기〉에서 대우와 관련된 역사적 내용들과도 잘 부합한다.
한무제 원삭(元朔) 2년(기원전 127년) 이곳에 우왕전(禹王殿)을 세웠고 이후 역대로 계속 수리했다. 청나라 동치(同治) 9년(1878년) 새로 중수하면서 묘(廟)를 만들었는데 면적이 천 평방미터가 넘는다.
한편 구루비 문장에서 천지신령에 대한 제사를 많이 언급한 것을 보면 대우가 물을 다스리기 위해 어느 지역에 가면 매번 그 지역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또 산신마다 각기 다른 방식의 제수품을 마련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산해경(山海經)》에 상세한 기록이 있다.
흑수에 기둥을 세우다
이어서 우는 흑수(黑水)를 다스렸다. 흑수는 민강 상류에서 가장 큰 지류로 수량이 아주 크고 물속에 교룡(蛟龍)이 많은데다 파도가 세차게 일었다. 원래 물밑에 큰 혈(穴)이 하나 있어서 남해로 직통했다. 교룡 및 각종 큰 동물들이 이곳으로 드나들었다. 때문에 밀물과 썰물의 흐름에 따라 흑수가 같이 움직여 재앙을 더 가중시켰다. 대우는 사람을 시켜 동혈(洞穴)에서 교룡 등을 남해로 쫓아내게 했다. 또 교룡이 철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해 백만 근의 철로 거대한 쇠기둥을 만들어 흑수 아래 동혈이 있던 곳에 세워 교룡 등이 왕래하는 길을 막아버렸다. 쇠기둥이 세워진 후 흑수는 비로소 평온해졌다.
양주(梁州) 전체가 다스려지자 민산과 파총산(嶓塚山) 지역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 채산(蔡山)과 몽산(蒙山)에 이르는 길도 잘 닦였다.
이에 이르러 치수공정은 기본적으로 완성되었고 최종적으로 물길이 모두 바다로 향하게 되었다.
대우는 또 해외 여러 나라의 상황을 시찰하고 수많은 기이한 경험을 했다. 일부 사람을 해치는 괴수들을 제거했는데 북방에서는 여발(女魃)을 제거했다. 이렇게 되자 국내외에서 모든 공정이 완료되었다. 백익은 대우를 따라 치수할 때 경험한 산천지리, 초목과 조수, 기이한 풍속,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산해경》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초백서(楚帛書)’에 따르면 대우는 산천과 사해 음양의 기운을 이용해 산을 뚫고 물길을 내서 망망한 홍수 중에 땅을 만들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질서 있는 대지를 창조해냈다.
구주를 나누고 무질서한 대지의 혼란상을 바로잡았다. 이에 산천과 사해에 명을 내려 수재가 다스려지자 천하 백성들이 모두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다.
《시경(詩經)》에서는 “천지가 홍수로 망망할 때 대우께서 천하를 다스리셨네(洪水茫茫,禹敷下土方)”라고 찬미했다.
《좌전(左傳)》에서는 “위대하구나 대우의 공덕이여! 밝은 덕이 멀리까지 전해졌구나. 대우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물고기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사기》에서는 “대우가 물과 땅을 다스렸으니 그 공이 천지와 나란하다.”고 했다.
우가 치수에 공을 세우자 하남(河南)에 봉해졌고 국호를 하(夏)라고 했으며 사(姒)씨 성을 하사받았다.
치수에 성공한 우는 요와 순에게 보고했다. 우는 “천하의 명산은 모두 5370개가 있으며 각각의 길을 직선으로 이은 거리는 6만 4천 56리에 달합니다. 이들 명산들은 동서남북과 중(中) 5구역에 분포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조사하고 기록한 것을 정리해 《오장산경(五臧山經)》이라 했습니다.”
대지(지금의 유라시아 대륙)는 동서로 2만 8천리 남북으로는 2만 6천리이며 계곡물이 나오는 산이 8천리, 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8천리입니다. 또 구리광산이 있는 산이 467개 철광산이 있는 산이 3690개입니다.
이는 천하대지를 강토로 나누고 경작하고 국가를 세우는 기초이자 다툼이 생기고 전쟁이 발생하는 원인이 됩니다. 때문에 능력이 있는 사람은 부유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가난하고 부족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대홍수가 발생하기 전에 천하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있었고 인구밀도가 상당히 높았다. 경작지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각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침략전쟁을 벌이거나 다른 사람의 영토와 자원을 약탈했음을 알 수 있다.
우는 13년을 밖에서 거처하면서 3차례나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어가지 않았다. 직접 숱한 고생을 겪었는데 손에 도구를 들고 솔선수범하며 온갖 역경을 이겨냈다. 심지어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외모마저 초췌해졌고 허벅지는 살이 빠져 가늘어졌으며 종아리 털마저 마모되어 사라질 정도였다. 또 장기간 물속에서 작업한 까닭에 발톱이 전부 빠져버렸다. 요임금은 크게 감동해 그에게 요금(瑤琴 옥으로 만든 거문고)과 보검(寶劍)을 하사했다.
대우의 치수는 “9산을 쪼개고 9택을 소통시키고 9하를 연결해 9주를 정했으니” 그 광활한 면적과 거대한 공정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서쪽에서는 흑수에서 동쪽으로는 장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까지, 북으로는 하북, 산동에서 남으로는 장강 중하류 유역까지 거의 중국전역을 포함했다. 흑수에서 장강어귀까지는 직선거리로도 2600킬로미터나 되며 그냥 맨몸으로 일주해도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당시 각종 요괴와 괴수의 방해는 말하지 않더라도 신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치수하는 과정에서 우는 많은 신들의 도움을 받았으니 한마디로 성스런 천자는 온갖 신령이 돕는다고 할만하다. 13년의 노력을 거쳐 “풍수를 동으로 흐르게 해(豐水東注)” 바다로 들어가게 했으니 그 공정의 웅장하고 위대함은 고금을 진동시킨다.
대홍수가 인류에게 초래한 재난은 아주 두려운 것이었지만 요・순・우 세 성군(聖君)이 신기원을 열어 만국이 따로 움직이던 느슨한 연맹체에서 만국(萬國)과 만방(萬邦)이 하나로 통일되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결국 구주로 통일된 천하를 확립시켰다.
온세상이 모두 경축하다
치수에 성공하자 대우는 직접 곤륜산에 가서 천제(天帝)께 보고를 드리고 아울러 서왕모를 찾아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했다. 이때 서왕모가 사자를 보내 대우를 맞이했다. 서왕모는 곤륜산에서 천제의 명을 받들어 대우와 뭇신들을 연회에 초청했다. 뭇신들은 다수가 대우의 치수에 참여하거나 협조한 적이 있었으니 수많은 신선이 한자리에 모여 공동으로 치수의 성공을 경축했다. 서왕모는 치수가 크게 성공한 것은 천제의 뜻이며 자신 역시 천제의 뜻을 받들고 천제의 큰 힘에 의지했노라고 했다. 이때부터 하늘은 맑고 땅은 편안해졌으며 우주 상하가 모두 태평한 복을 누렸다.
대우가 치수한 공을 널리 알리기 위해 요임금은 우에게 검은색 규(圭)를 하사했고 천하에 치수의 성공을 선포하게 했다. 《상서‧우공》에는 “우임금이 검은 규를 올려 그 공을 알리게 했다(禹賜元圭,告厥成功)”고 한다. 그 소(疎)에는 “치수의 공은 사해를 덮는데 우의 공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요임금이 원색(元色)의 규를 하사해 큰 공을 세운 것을 고하게 했다. 원(元)은 하늘의 색인데 하늘을 원이라 한다. 그러므로 원색의 규로 이를 드러낸 것이다. 천하는 이때부터 태평하고 평안해졌다.”라고 풀이했다.
‘신주(神州)’는 단순히 한 지역의 호칭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그 내재적인 요소에는 다른 지방과는 다른 사상 문화 도덕체계 등 심후한 내포가 있다. 이곳은 신의 고향으로 불리며 신이 사람에게 창립해준 것이다. 이곳은 신이 전한 문화를 드러내고, 신이 사람에게 다져준 행동과 도덕규범을 드러낸다. 이곳을 세계의 중심이란 뜻으로 ‘중국(中國)’이라 한 것 역시 신의 배치를 체현하는 것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