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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요‧순‧우(6): 대우가 황하를 다스리다

4. 황하치수

황하라는 단어는 《한서(漢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 전에는 그냥 하(河) 또는 대하(大河)라 했다.

아주 오래 전 황하는 상류와 하류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 약 1백만 년 쯤 전에 ‘황하운동(黃河運動)’으로 황하 상류의 적석협(積石峽)이 절개되면서 협곡의 물이 임하(臨夏 난주 분지)로 들어가 하류로 관통되었다. 또 약 15만 년 전 ‘공화운동(共和運動)’으로 황하 상류가 용양협(龍羊峽)위로 침식해 들어갔고 하류에서는 삼문협(三門峽)이 절개되면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유입되었다.

바다로 물을 이끌다

황하는 옹주, 예주, 기주에서 홍수를 빼는 주요 하천이었다. 다시 말해 치수의 주요공정에 해당한다.

계획에 따라 치수는 기주부터 시작되었다. 대우 시기의 기주는 지금의 산서성 전체와 하남성 황하 이북 및 하북성 서쪽과 내몽골 음산(陰山) 남부에 해당하고 동쪽으로는 요녕성 요하 서쪽지역까지 포함한다. 이곳이 바로 《우공(禹貢)》에서 왕기(王畿)라 지칭한 곳으로 천자가 직접 관리하는 지방이다.

당시 동해에 두 괴물이 있었는데 하나는 천오(天吳) 또 하나는 망상(罔象)이었다. 이 두 괴물이 치수를 방해하고 치수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을 해쳤다. 우는 동해신 우괵(禺虢)에게 이 두 괴물을 항복시키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우괵은 자신의 수하인 응룡(應龍)을 파견해 우의 치수를 돕게 했다. 응룡은 일찍이 황제가 치우를 격파할 때 황제를 도와 큰 공을 세운 적이 있다. 그는 수맥과 지맥을 손바닥 보듯이 잘 알아서 아주 쉽게 굴을 파고 도로를 내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한편 청주와 연주(兗州) 일대에서 우는 왕옥산(王屋山)에서 제수(濟水)의 물을 뚫어 황하로 들어가게 했고 동쪽으로는 하택(荷澤)으로 향하게 했다. 옹수(雍水)는 하택과 저수(沮水 지금의 청수하清水河)에 이른 후 합수가 되어 뇌하택(雷夏澤)으로 들어간다. 또 동북으로 나아가 문수(汶水)와 만나는데 북으로 흐른 후 방향을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우는 응룡의 도움을 받아 황하 하류인 연주, 청주와 기주 지역에서 9개의 수로를 파 동해로 물을 배출했다. 여기서 우는 갈석산(碣石山)을 뚫었고 산 서쪽에 쌓여 있던 물을 바다로 빠지게 했다.

석성산(析城山)과 왕옥산(王屋山) 일대에서는 지행술(地行術 땅속을 다닐 수 있는 술법)을 할 줄 아는 7명이 해악을 끼쳤다. 서성왕군(西城王君)이란 선인(仙人)이 운화부인의 부탁을 받아 이들 일곱 지장(地將)을 굴복시켰다. 운화부인이 우에게 보낸 일곱 천장(天將)과 함께 천지 14장(將)이 되었고 이후 치수과정에서 우를 돕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서성왕군은 왕옥산의 어느 동굴(도가 36동천의 하나)의 천연 석갑(石匣) 안에서 한 부의 수련서를 꺼내 우에게 주었다. 그러면서 “만약 이 책에서 말하는 대로 부지런히 수련한다면 속세를 벗어나 성인이 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만약 수련 성취해 도를 얻게 되면 이 책을 원래 위치에 다시 놓아달라고 당부했다.

지주산을 뚫다

《수경주(水經注)》에는 “지주(砥柱)는 산 이름이다. 옛날 우가 홍수를 다스릴 때 물을 막는 산언덕을 뚫어서 소통시켜야 했는데 산을 깨뜨려 물이 통하게 했다. 하수(河水)가 갈라져 산을 감싸고 지나는데 물속에 보이는 산이 마치 기둥과 같다고 해서 지주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중류지주(中流砥柱)’라는 사자성어가 여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때부터 중류지주란 말은 중화민족에게 일종의 정신적인 상징으로 전해져 온다.

거령이 화산을 가르다

아주 오랜 옛날 황하 동쪽의 수양산(首陽山 지금 산서성의 중조산中條山)과 서쪽의 태화산(太華山)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황하의 물이 이곳에 이르러 산에 가로막히자 화음(華陰), 동관(潼關), 조읍(朝邑) 등의 지역이 거대한 호수로 변했다. 이곳의 물을 밖으로 빼내려면 반드시 두 산을 갈라야 했다. 이는 분명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를 위해 운화부인은 거령신(巨靈神) 진공해(秦洪海)에게 화산을 갈라달라고 요청했다. 아울러 뭇신들이 모임을 가졌는데 서왕모가 직접 참가했다. 한마디로 많은 신선들의 큰모임이었다.

한편 거령신 진공해는 몸이 점점 크게 변하더니 나중에는 키가 얼마나 큰 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거대한 두 손을 뻗어 화산 남쪽의 산봉우리를 단단히 움켜잡고 발은 북쪽 중조산 뿌리에 디디고 힘을 가하자 두 산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황하의 물이 그가 발로 디딘 틈을 통해 동쪽으로 솟구쳐 올랐다. 거령신의 왼손바닥 자국이 화산에 남았기 때문에 이를 ‘선장(仙掌 신선의 손바닥)’이라 한다. 힘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화산이 두 개로 쪼개졌는데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았다. 더 높은 곳이 바로 지금의 화산이 되었고 태화산이라고도 한다. 더 낮은 곳이 바로 지금의 소화산이다. 이태백은 “거령이 포효하며 두 산을 갈라놓으니 큰 물이 뿜어대며 동해로 쏟아지네(巨靈咆哮劈兩山,洪波噴流射東海)”라고 노래했는데 바로 이 이야기를 표현한 것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한무제가 화산에 올랐을 때 거령신의 공덕에 감탄하며 화산 아래에 거령신동(巨靈神洞)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편 당나라의 시인 왕유(王維)는 ‘화악(華嶽)’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옛적 건곤이 닫히고조화로 거령을 낳으니오른발 한 번 밟고왼손 한 번 밀자천지가 홀연히 터지고큰물이 동해로 흘러갔다이윽고 서치악(西峙岳)이 되었으니위세가 진경(秦京 진나라 수도)을 누르는구나

昔聞乾坤閉(석문건곤폐)造化生巨靈(조화생거령)右足踏方止(방족답방지)左用推削成(좌용추삭성)天地忽開坼(천지홀개탁)大河注東溟(대하주동명)遂爲西峙嶽(수위서치악)雄雄鎮秦京(웅웅진진경)

우가 용문을 열다

용문(龍門)을 뚫는 것은 황하 치수에서 핵심적인 공정이자 가장 중요한 공정이었다. 이 공정은 호구(壺口), 맹문(孟門)과 용문을 포괄하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여기서 황하는 여량산(呂梁山)에 가로막혀 큰물이 막혀버렸다. 여량산에는 고개가 하나 있는데 모양이 마치 병목과 같아서 호구(壺口)라 했다. 만약 이곳을 뚫어 넓힌다면 큰물을 뺄 수 있었다. 이에 우는 호구를 뚫기 시작했다. 《수경주(水經注)》에서는 “우의 치수는 호구에서 시작했다.”고 했다.

호구에서 하류로 약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구하지등(九河之蹬)’이라 불리는 맹문산(孟門山)이 있다. 황하의 물이 이곳에서 두 길로 나뉘어 거대한 바위 양쪽으로 빠르게 지나간 후 맹문산에서 다시 하나로 합류한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의 작은 섬산 2개는 원래 하나였는데 물을 가로막아 사방에 홍수를 일으켰다. 대우가 이 산을 두 개로 쪼개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황하의 물은 맹문을 지난 후 아래로 달려 내려가 직접 용문에 도달한다.

용문산은 원래 하나의 큰 산으로 여량산의 산맥과 서로 연결되어 황하의 갈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황하는 이곳에서 흐름이 중단되었고 되돌아 상류로 향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상류의 맹문산이 물에 잠기곤 했다. 우는 용문산을 두 개로 쪼갰는데 마치 양쪽 대문처럼 황하의 물이 가파른 절벽에서 아래로 쏟아져 내려가게 했다.

후세 사람들은 대우가 치수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를 우문(禹門)이라 했다. 민간의 전설에서는 대우가 산을 뚫을 때 한참을 파도 뚫리지 않자 용으로 변신해 산을 뚫고 바위를 열었기 때문에 ‘용문’이라고 한다.

한편 용문 부근에 이어간(鯉魚澗)이란 시내가 있는데 이곳에서 잉어가 용문상류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이곳을 도약해 올라가면 용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잉어가 용문을 도약 한다”고 한다.

용문에서 하류로 백리를 가면 저 유명한 삼문협(三門峽)이다. 우는 물의 흐름을 막는 산을 여러 개로 쪼개 황하의 물이 여러 지류로 흘러가게 했다. 마치 세 갈래로 산을 감싸는 것이 3개의 문처럼 생겨 삼문(三門)이란 하는데 각각 귀문(鬼門), 신문(神門), 인문(人門)이다.

우가 용문을 뚫은 공덕은 천고에 드리워졌다. 청나라의 고염무(顧炎武)는 ‘용문(龍門)’이란 시에서 우가 용문을 뚫은 불후의 공적을 다음과 같이 기렸다.

연면히 이어온 땅에서 황하가 나오니천지개벽이래 이 한 문이어라대우의 공적에 의지한 천년곤륜에서 나온 황하 만 리를 흐르네

亘地黃河出(긍지황하출)開天此一門(개천차일문)千秋憑大禹(천추빙대우)萬里下昆侖(만리하곤륜)

우는 용문을 뚫을 때의 일이다. 어느 동굴에 이르러 한 신(神)을 뵈었다. 우가 말을 하려 하자 신은 우에게 팔괘 그림을 보여주고 황금판위에 펼쳐놓았다. 또 팔신(八神)이 시립해 있었다. 우는 “화서(華胥)가 성인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데 당신이 아니십니까?”라고 물었다. 신은 “화서는 구하신녀(九河神女)로 나를 낳으셨다.”고 대답했다. 이어 옥간을 꺼내 우에게 주었는데 길이가 1척 2촌으로 12시와 일치했고 천지를 측량할 수 있었다. 우는 이 책을 지니고 다니며 물을 다스렸다. 뱀의 몸을 한 이 신이 바로 희황(羲皇 복희)이었다.(《습유기(拾遺記)》) 이 설에 따르면 당시 우는 희황을 만났고 복희가 옥간을 주어 대지와 산천하류를 측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우는 또 양산(梁山) 및 그 지맥을 다스렸다. 태악산(太嶽山) 남쪽까지 태원(太原)지역도 다스렸고 또 계속해서 형수(衡水)와 장수(漳水)를 다스렸다.

거령이 태화를 가르고 신력으로 용문을 뚫고 9개 수로를 통하게 하자 기주의 수재가 해결되었다. 이에 기주, 연주, 청주의 수재도 기본적으로 해결되었다.

상류를 제거하다

공임은 원래 직위에서 해임된 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쁘게 변해 조정에 저항하고 수하인 상류(相柳)를 이용해 포악한 짓을 저질렀다. 공임의 봉국은 옹주 서쪽에 있었는데 공임은 상류와 한패가 되어 생령을 해치고 백성들에게 학정을 일삼았다. 또 지리적인 험난함을 믿고 조정에 대항하며 치수를 방해했다. 이에 우는 상류를 죽이고 공임을 체포해 수도로 압송했다.

순은 요임금에게 공공을 멀리 유주(幽州)로 귀양 보내자고 건의했다.

옹주를 다스리다

공임과 상류를 해결한 후 우는 계속해서 옹주의 수재를 다스렸다. 동한 시기의 응소(應劭)는 “옹(雍)은 막혀있다는 뜻이다. 사방이 산으로 가로막혀 굳세고 음기가 막혀 있다.”고 풀었다. 즉 옹주 서쪽은 황하의 발원지로 호구와 용문이 뚫린 후 이곳에 막혀 있던 많은 물이 배출되었다. 하지만 적석산(積石山)에 가로막혀 그 상류의 많은 물은 여전히 막혀 있었다.

《상서‧우공》에는 대우가 “황하를 적석산에서 용문산까지 이끌어 창해(滄海)에 들어가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적석산은 청해성 동남부에 위치한 곤륜산맥의 지맥으로 티베트어로는 아니마칭(阿尼馬卿)산이라고 하는데 의미는 황하의 조상이란 뜻이다. 해발 6282m다.

황하는 ‘발해(渤海)’에서 발원하는데 고대의 발해는 자링호수(紮陵湖)를 포함한 아주 광활한 지역이었다. 즉 황하는 잡일곡(卡日曲)과 약고종렬곡(約古宗列曲)에서 발원해 파안랑마산(巴顏郎瑪山)과 착이타칙산(錯爾朵則山)에 가로막혀 황하 최초의 거대한 호수인 자링호수가 된다. 황하는 자링호수를 지난 후 호수 동남쪽으로 흘러나오는데 중간에 길이 약 20km 폭 300여 미터에 달하는 황하협곡을 지난다. 9개의 지류로 갈라진 후 다시 두 번째 호수인 악릉호(鄂陵湖 어링호)로 들어가고 적석산으로 향한다.

황하는 적석산을 휘감고 동남쪽으로 흘러 청해를 나와 사천으로 들어간다. 민산(岷山)에서 가로막혀 흐름이 바뀐 후 북서쪽으로 거세게 흘러가는데 적석산과 서경산(西傾山) 사이의 감숙성 마곡현(瑪曲縣)을 지나 청해로 되돌아오면서 큰 굽이를 만든다. 이 부분이 바로 ‘구곡황하(九曲黃河)’의 첫 번째 굽이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대우는 황하의 수원을 다스렸고 적석산을 뚫어 옹주에 쌓인 물을 배출시켰다. 우는 또 서경산과 주어산(朱圉山)을 뚫었다. 이렇게 되자 옹주의 수재가 해결되었다.

주어산 암벽에는 원래 대우가 치수할 때 유적인 ‘우전주어(禹奠朱圉 우가 주어산에서 제사를 지낸 곳)’라는 절벽이 있다.

우는 적석산을 뚫은 후 현옥(玄玉 검은 옥)을 하나 얻었다. 《상서‧선기검(璿璣鈐)》에는 “우가 용문을 뚫어 적석산으로 이끌자 현규(玄圭)가 나타났는데 ‘延喜玉,受德天賜佩’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대우가 적석산에서 치수를 시작할 때” 적석협은 아주 중요한 공정이었다. 적석협은 순화(循化) 사라족(撒拉族) 자치현과 민화(民和) 회족(回族)토족(土族) 자치현의 경계로 협곡의 길이가 총 25km에 달한다. 양안에 큰 산이 우뚝 솟아있고 계곡 속으로 황하가 서쪽에서 아래로 도도히 흐른다. 물소리가 소용돌이치는 것이 마치 천둥처럼 크게 울린다.

《수경주》에서는 적석협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하북에 층진 산이 있는데 산세가 아주 빼어나다. 산봉우리 위에 수백 장 길이의 입석이 우뚝 솟아있다. 그 아래층에는 암석이 들려 있고 벽에는 계단이 없다. 공중 벼랑 속에는 많은 암실이 있다.” 적섭협에는 협곡 속에 또 협곡이 있다. 그중 한 곳은 남북으로 폭이 불과 6m에 불과해 호도협구(狐跳峽口)라 불린다.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도도하게 흐르는 황하 앞에 서면 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적석협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는 여러 곳에 대우가 치수할 때 도끼와 칼로 깎은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중 가장 유명한 곳이 부흔애(斧痕崖 도끼자국이 난 벼랑이란 의미)로 푸르고 흰 벼랑에 도끼로 판 자국이 곳곳에 있다.

이어서 우는 또 위수(渭水) 상류의 조서동혈산(鳥鼠同穴山)을 팠고 견산(岍山), 기산(岐山), 형산(荊山)을 뚫어 관중의 강물이 위하(渭河)로 들어가 동쪽으로 흐르게 했다. 위하부터는 아무런 저항 없이 직접 황하로 들어간다. 경수(涇水), 칠수(漆水), 저수(沮水), 낙수(洛水)는 북쪽에서 위수로 흘러들고 풍수(灃水)는 남쪽에서 위수로 들어간다. 남쪽으로 흐르던 황하는 화산 북쪽의 동관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기산(岐山)에서 천수(天水) 사이의 평지에서 물이 빠졌고 약수에서 서쪽으로 흘러 삼위산(三危山) 지역 역시 사람이 살 수 있게 되었다.

우는 계속해서 분수(汾水)를 다스려 태원 및 곽태산(霍太山) 일대에 범람한 물을 분수로 들어가게 했다. 이에 평양(平陽) 서부와 북부의 홍수위협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렇게 우는 적석산을 뚫어 물이 호구로 들어가게 했고 뇌수산(雷首山)—중조산(中條山)—삼문협(三門峽)—지주산(底柱山)—석성산(析城山)—왕옥산(王屋山)—태행산(太行山)—항산(恒山)—갈석산(碣石山)을 거치며 황하의 물길이 동관에서 동쪽으로 잘 흘러가게 했다. 맹진(孟津)을 거치고 낙수가 황하로 유입하는 곳을 지나 대오(大伍)까지 이른 후, 동쪽으로 향해 공수(共水), 기수(淇水), 탁장수(濁漳水)를 거쳐 황하로 유입된 물은 대륙택(大陸澤)으로 유입된다. 북으로 향한 9개 지류는 모두 황하의 물을 받아 순조롭게 바다로 들어가도록 이끌었다. 이에 황하 전체의 수계와 수토가 다스려졌다.

황하는 대우의 치수를 거친 후 비록 하류에서 몇 차례 물길이 바뀐 적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익을 주었으면 주었지 해를 끼치진 않았다. 이때부터 황하는 진정한 중화민족의 어머니와 같은 강이 되었다.

(계속)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