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2. 장수를 정벌하고 원소와 여포를 토벌
사방이 강적으로 둘러싸인 조조는 먼저 허도에서 가까운 완성(宛城, 지금의 하남성 남양)의 장수(張繡)를 정벌하기로 결심한다. 건안 2년(197년) 정월 조조가 장수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육수(淯水)로 가자 장수가 싸우기도 전에 군사를 이끌고 투항했다. 나중에 서로 불화가 생겨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조조의 군영을 기습 공격했다. 이때 조조의 큰아들 조앙(曹昂)과 조카 조안민(曹安民)이 죽었다. 조조도 날아온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다행히 조조를 호위하던 용맹한 교위(校尉) 전위(典韋)가 장수와 힘을 다해 싸웠지만 주위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당해 거의 없어졌고 전위도 수십 곳에 상처를 입었다. 장수가 병력을 이끌고 그를 포박하려고 달려오자 전위가 두 사람을 잡아 부딪쳐서 죽인 후 눈을 부릅뜨고 크게 욕설을 퍼붓다 죽었다.
조조는 흩어진 병력을 수습해 무음(舞陰, 지금의 하남성 필양현)에 주둔했다. 장수가 기병을 이끌고 추격해왔으나 조조군에 격파당했다. 장수는 양(穰, 하남성 등주시)땅으로 물러나 유표의 군사와 합세했다. 조조는 여러 장수들에게 “우리가 장수 등의 항복을 받을 때 인질을 잡아 두지 않는 실수를 저질러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패배의 원인을 알고 있고 여러분도 보았을 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군사를 이끌고 허도로 돌아온 후 전위를 추모하며 제사를 지내고 그의 아들 전만(典滿)을 중랑으로 삼아 부중에서 길렀다.
같은 해 11월 겨울, 조조는 다시 장수에 대한 공격에 나서 호양(湖陽)을 빼앗고 유표의 장수 등제(鄧濟)를 포로로 잡았다. 또 무음을 공략했다.
건안 3년(198년) 정월, 조조가 다시 허도로 돌아왔다. 3월, 조조는 다시 장수 토벌에 나섰다. 행군 도중 보리가 이미 익었지만 전란으로 농민들이 도망가 감히 보리를 베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조조는 사람을 시켜 인근의 마을 원로들과 각 지역 관리들을 불러 모아 “여러 장수들은 보리밭을 지날 때 보리를 밟는 자가 있으면 모두 목을 베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조조가 탄 말이 놀라 무의식중에 보리밭을 밟았다. 조조는 주부(主簿)를 불러 보리밭을 밟은 자신의 죄를 따지게 했다. 그리고는 “내가 스스로 법을 만들고 스스로 법을 어겼으니 어찌 여러 사람들이 따르겠는가?”라고 하면서 머리카락을 잘라 자신을 징벌하는 방식으로 법령을 엄하게 지켰다. ‘머리카락을 목 대신 자른’ 조조의 이런 행동은 “삼군을 두려워하게 만들어 감히 군령을 어길 생각을 품지 못하게 했다.” 조조의 대군이 양(穰)에서 장수를 포위하고 성을 공격하려던 때 원소의 책사 전풍(田豐)이 “서둘러 허도를 습격해 천자를 끼고 제후들을 호령한다면 천하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건의한 것을 알게 되었다. 조조는 부득이 장수에 대한 포위를 풀고 회군했다.
5월 유표가 장수에게 구원병력을 보냈다. 조조는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안중(安眾)에 도착하면 장수를 반드시 격파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안중에 도착하자 유표와 장수가 추격해왔다. 조조가 책략을 써서 적을 속인 후 기병과 보병을 협공해 적을 대파했다. 나중에 순욱이 “지난번에 반드시 적을 격파하신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조조는 “적이 퇴로를 차단해 우리를 사지에 몰아넣었기 때문에 승리함을 알 수 있었소.”라고 대답했다. 병법에서 말하는 “사지(死地)에 들어가게 한 후에 살 수 있다”는 이치에 따라 승리했다는 의미이다.
조조가 장수를 토벌할 때 마침 한여름이라 날이 몹시 더웠다. 도중에 물이 떨어져 병사들이 전부 목말라했다. 조조는 이때 꾀를 내어 손으로 가리키면서 “앞에 매화나무 숲이 있다.”고 말했다. 병사들이 이 말을 듣자 입에서 침이 나와 더는 갈증이 나지 않고 사라졌다. 이것이 나중에 ‘망매지갈(望梅止渴, 매실을 생각하며 갈증을 풀다)’이란 고사성어가 생긴 유래다.
건안 2년(197년) 봄 원술이 수춘(壽春)에서 황제를 참칭하고 스스로 ‘중가(仲家)’라 칭했다. 의복이나 제도도 모두 천자의 제도를 따랐다. 사람들이 빨리 제위에 올라 천하에 보여주라고 권하자 원술은 “조공(曹公, 조조)이 있으니 아직은 안 된다”고 대답했다.
이때 패상(沛相) 진규(陳珪)는 원술과 어릴 때부터 교류가 있었던 친구였다. 원술은 편지를 써서 “만약 대사를 이루게 된다면 그대는 나의 심복이 될 것이오.”라며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진규는 원술에게 “지금이 비록 말세라고는 하나 진(秦)나라 때와 같은 폭정은 없었소. 조 장군(조조)께서 신무(神武)로 제때 응해 법제도와 형벌을 다시 일으켜 장차 흉악하고 간특한 자들을 제거하고 천하를 평정하려 하니 믿을 만합니다. 족하께서도 한마음으로 한실(漢室, 한나라 황실)을 바로잡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불궤(不軌, 궤도에서 어긋난 행동)한 짓을 음모하면서 일신에 재앙을 초래하고 있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나더러 사리를 쫓아 족하에게 붙기를 바라지만 설령 죽을지언정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신했다. 진규는 한마음으로 조조를 향하고 원술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이해 9월 가을 사공 조조가 동쪽으로 원술을 정벌하러 나섰다. 원술은 조조가 직접 온다는 말을 듣고는 놀라서 군사를 버리고 서둘러 도망쳤다. 남아 있던 원술의 장수 교유(橋蕤) 등이 기양(蘄陽)에서 조조에게 맞섰다. 조조는 교유 등을 격파하고 모두 목을 베었다. 뒤이어 수춘을 공격했다. 조조가 직접 성 아래까지 이르러 여러 장수들을 격려해 흙과 돌을 나르게 한 후 해자를 메우고 참호를 파게 했다. 성위에서 화살과 돌이 비 오듯 쏟아져 두 명의 비장(裨將)이 두려워하며 돌아오자 조조가 칼을 들고 성 아래에서 목을 벴다. 또한 직접 말에서 내려 흙을 날라 구덩이를 메웠다. 이렇게 하자 장수와 병사들이 전진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기가 크게 올랐다.
성 위에 있던 원술의 군사들이 감당하지 못하자 조조군이 성에 올라가 관문을 깨고 성문을 열었다. 대부대가 성에 진입해 원술이 만든 궁실과 전각을 불태웠다. 원술이 회수를 건너 도주했다. 하지만 계속된 가뭄으로 병사들과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였고 원술의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
조조는 원래 원술의 수하였던 하기(何夔)를 불러 연리(掾吏, 관청에 소속된 관원)로 삼고 원술이 쇠퇴한 원인에 대해 물었다. 하기는 “하늘이 돕는 자는 순조롭고 사람이 돕는 자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원술은 믿음과 순조로움의 실제가 없으면서 하늘과 사람의 도움을 바랐으니 어찌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조조는 “나라를 다스림에 현자를 잃으면 망하는 법인데 그대가 원술에게 쓰이지 못했으니 망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했다.
건안 3년(198년) 9월, 조조가 여포(呂布)를 공격하려 하자 여러 장수들이 “유표, 장수가 뒤에 있는데 멀리 여포를 공격하면 반드시 위태롭게 됩니다.”라며 반대했다.
이때 순유가 말했다. “유표와 장수는 얼마 전 패한 일이 있어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여포는 용맹할 뿐만 아니라 원술에게 기대고 있는 만큼 만약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사이를 멋대로 휘젓는다면 호걸들이 분명 그에게 호응할 것입니다. 지금은 여포가 배반한 초기라 사람들의 마음이 통일되지 않았으니 공격하면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조조는 “훌륭하다”고 하면서 팽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진궁(陳宮)이 여포에게 “마땅히 맞서 공격해야 합니다. 충분히 쉰 군사들로 피로에 지친 적을 공격하면 이기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여포는 “적이 공격하기를 기다렸다가 사수에서 해치우는 편이 낫다.”며 거절했다.
이해 겨울 10월에 조조가 팽성을 공격해서 이겼다. 광릉 태수(廣陵太守) 진등(陳登)이 군의 병력을 이끌고 조조의 선구가 되어 하비(下邳, 강소성 비현)로 진격했다.
여포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와 여러 차례 조조와 싸웠으나 모두 패했다. 이에 하비성으로 들어가 감히 출전하지 못했다. 조조가 여포에게 편지를 보내 화(禍)와 복(福)을 설명하면서 항복할 것을 설득했다. 여포가 두려워하며 투항하고자 했으나 진궁이 저지했다. 여포는 할 수 없이 원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여포는 전에 자신이 딸을 원술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기로 한 후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원술이 지원병을 보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급해진 여포가 딸을 천으로 감싼 후 말에 태워 야밤에 원술에게 보내려 했으나 조조의 수비병들에게 가로막혀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조조가 참호를 파고 하비를 포위공격한 지 오래도록 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군사들이 지치자 철군을 생각했다. 하지만 순유와 곽가가 말리면서 “여포는 용맹하긴 하지만 지략이 모자라고 지금까지 세 차례 전투에서 모두 패해 날카로움도 무뎌졌습니다. 삼군은 장수가 중심인데 주장이 약해지면 군사들도 싸울 의지가 사라집니다. 진궁은 지략은 있지만 행동이 더딥니다. 지금 여포가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고 진궁이 계책을 정하지 않은 때 서둘러 공격하면 여포를 뽑을 수 있습니다.”라고 권했다.
조조는 이에 기수(沂水)와 사수(泗水)의 물줄기를 하비성으로 끌어 들였다. 한 달쯤 지나자 여포는 더욱 곤경에 처해 성위에 올라가 조조의 군사들에게 “경들은 서로 나를 곤란하게 하지 말라. 내가 명공(明公, 조조)께 자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포가 항복할 의사를 표명했지만 진궁이 나서 극력 저지했다.
이때 여포의 부장 후성(侯成)이 여포의 명마를 잃었다 다시 찾은 일이 있었다. 여러 장수들이 후성에게 예를 올리며 축하하자 후성은 고기와 술을 마련해 여포에게 먼저 바쳤다. 하지만 자신의 허락도 없이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여포에게 욕만 먹었다. 이에 분노와 두려움을 품은 후성이 12월 송헌(宋憲), 위속(魏續) 등 여러 장수들과 모의해 진궁, 고순(高順)을 붙잡아 조조에게 투항했다. 여포는 수하들과 하비성 남문인 백문루(白門樓)에 올라가 있었다. 포위가 심해지자 여포는 옆에 선 부하들에게 자신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바치라고 했다. 부하들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자 여포가 스스로 성을 내려와 항복했다.
여포는 조조를 보고 “오늘 이후로 천하는 평정될 것이오.”라고 말했다.
조조가 그 이유를 묻자 여포가 말했다. “명공이 우려하는 것은 나 여포뿐인데 지금 이미 항복했습니다. 만약 저 여포에게 기병을 이끌게 하고 명공께서 보병을 통솔하신다면 천하는 평정할 거리도 안 됩니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유비를 향해 “현덕(玄德) 그대는 상객의 자리에 있고 나는 투항한 포로요. 배가 밧줄에 꽁꽁 묶여 있는데 어찌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 것이오?”라고 했다. 조조가 웃으면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꽁꽁 묶지 않을 수 없소.”라고 하면서 풀어주려 했다. 그러자 유비가 “안 됩니다. 명공께서는 여포가 정건양(丁建陽, 정원)과 동태사(董太師, 동탁)에게 한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말했다. 여포는 전에 정원과 동탁의 휘하에서 부장으로 있었으나 둘 다 여포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자 여포가 두 눈을 부릅뜨며 유비에게 “이 귀 큰 놈아! 가장 믿지 못할 놈이로구나.”하며 욕을 했다.
한편 진궁은 조조를 만난 후 죽음으로 자신의 뜻을 분명히 하려 했다. 조조가 모친과 처자식은 어떻게 할 것인지 묻자 진궁이 대답했다. “제가 듣건대 효로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은 남의 양친을 해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천하에 인정을 베푸는 사람은 남의 후사를 끊지 않는다고 합니다. 노모와 처자의 생사는 제가 아니라 명공께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서 형장으로 가기 위해 스스로 문밖으로 걸아 나갔다. 조조가 울면서 그를 배웅했으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진궁이 죽은 후 조조는 그 가족들을 불러 후하게 대했는데 원래 진궁이 조조를 따를 때보다 더했다.
조조는 여포와 고순 진궁을 죽인 후 목을 잘라 허도의 저잣거리로 보냈다. 여포의 부장 장료(張遼)가 부하들을 이끌고 투항하자 중랑장으로 삼았다.
한편 원술은 앞서 여포에게 격파된 후 나중에 또 조조에게 패했다. 건안 4년(199년) 여름 원술은 부하인 뇌부(雷薄)와 진란(陳蘭)에 의지해 재기하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더욱 곤경에 처해 식량마저 끊겨 부하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원술은 울분에 휩싸였다. 현실을 받아들인 원술이 원소에게 황제의 칭호를 돌려주고 청주로 가서 조카인 원담에게 의탁하려 했다. 도중에 길이 막힌 원술은 6월 강정(江亭)에서 죽고 말았다.
손책이 정의교위(正議校尉) 장굉(張紘)을 파견해 공물을 바치자 조조가 이를 받아들여 손책을 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추천하고 오후(吳侯)에 봉했다. 또 자신의 조카딸을 손책의 아우 손광(孫匡)에게 시집보내고 또 손분의 딸을 아들 조창(曹彰)의 며느리로 삼았다. 또 손권의 아우 손권(孫權)과 손익(孫翊)을 예를 갖춰 맞아들이고 장굉(張紘)을 시어사(侍禦史)로 삼았다.
이때 이르러 조조는 장강 이북의 양주(揚州), 서주, 연주, 예주 4주를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