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3. 원소를 멸하고 오환을 정벌하다
건안 4년(199년) 원소는 공손찬을 겸병하고 황하 이북의 유주, 기주, 청주, 병주를 차지했다. 또 오환(烏桓)을 봉해 북쪽의 근심을 없앴다. 원소는 큰아들 원담과 둘째 아들 원희(袁熙) 및 외조카 고간(高幹)에게 각기 청주, 유주, 병주를 맡기고 자신은 10만 정병과 1만 기병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나아가 천하를 쟁패하고자 했다. 이때 조조는 예주와 연주를 차지했지만 병력이 2만에도 이르지 못했다. 북쪽으로는 원소의 대군, 남쪽에는 장수와 유표가 있었고 동쪽에서는 유비가 원소와 연합했고 동남쪽에서는 손책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서쪽에도 관동을 노리는 여러 장수들이 있었다.
장작대장(將作大匠) 공융(孔融)은 원소의 땅이 넓고 병력이 강한데다 전풍과 허유(許攸) 같은 책사가 있고 안량(顏良), 문추(文醜)와 같은 장수가 있어 승리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반면 조조의 책사 순욱과 곽가는 조조를 높이 평가했다. 곽가는 조조가 원소에게 승리할 수밖에 없는 10가지 원인을 말했다.
“첫째는 도승(道勝, 도리의 승리)으로 원소는 번잡한 예의를 좋아하지만 공은 자연스러움에 맡깁니다. 둘째는 의승(義勝 명분의 승리)으로 원소는 역리(逆理)로 움직이지만 공께서는 순리로 천하를 통솔하십니다. 셋째는 치승(治勝, 법제의 승리)으로 한나라 말기에는 정치가 관용을 잃었는데 원소는 관용으로 관용을 다스려 통제가 되지 않지만 공은 이를 엄격하게 바로잡기 때문에 상하로 절제가 있습니다.
넷째는 도승(度勝, 통치 잣대의 승리)으로 원소는 겉으로는 관대하지만 속으로는 거리낌이 있어 사람을 기용해도 믿지 못하고 친인척 자제에게만 중임을 맡기지만 공께서는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않고 오직 재주가 적합한가만 보며 개인적인 관계는 따지지 않습니다. 다섯째는 모승(謀勝, 계책의 승리)으로 원소는 모략은 많지만 결단력이 약해 때를 놓치지만 공께서는 계책이 생기면 바로 실행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히 변통하십니다.
여섯째는 덕승(德勝, 덕성의 승리)으로 원소는 고상한 말과 겸양하는 자세로 명예를 낚으려 하니 말을 잘하고 외양을 잘 꾸미는 자들이 많이 의탁하는 반면 공께서는 진심으로 선비들을 대하고 헛된 명성을 좇지 않고 실용을 중시하며 신상필벌이 명확해 충직하고 멀리 내다보며 실력 있는 선비들이 모두 쓰이기를 원합니다. 일곱째는 인승(仁勝, 인자함의 승리)으로 원소는 아녀자의 인정으로 배고픈 사람을 직접 보면 연민의 정이 얼굴에 나타나지만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고려하지 못합니다. 반면 공께서는 작은 일에는 간혹 소홀함이 있지만 천하의 큰일에는 두루 고려해 은혜를 베풀지 않음이 없습니다.,
여덟째는 명승(明勝, 지혜의 승리)으로 원소의 대신들은 권력을 다투고 서로 모함하여 혼란하지만 공께서는 도(道)로 부하를 다스리고 참언이나 모함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홉째는 문승(文勝 문화의 승리)으로 원소는 시비가 불분명하나 공께서는 옳은 것은 예로 대하고 옳지 않은 것은 법으로 다스립니다. 열 번째는 무승(武勝 무력의 승리)으로 원소는 용병의 요체를 모르지만 공께서는 용병술이 신묘해 군사들은 공을 믿고 적은 두려워합니다.”
조조는 모든 준비를 갖춘 후 “원소는 땅이 넓고 식량이 풍부하지만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 준비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당시 원소, 유표 및 조조를 겪어본 어떤 이의 평가에 따르면 원소는 사람을 쓸 줄 모르고 유표는 사람이 있어도 그 쓰임을 모르지만 조조는 천하호걸들을 받아들여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 때문에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다고 했다.
“원소는 병력이 많고 현명한 사람이 있어도 등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뛰어난 인재가 떠나갑니다. 유표는 형초(荊楚)에서 동요됨 없이 시국의 변화를 관망합니다. 동란을 피해 형주로 온 선비들은 모두 천하의 준걸들임에도 그들을 등용할 줄 몰라 나라가 위태로워도 보필할 사람이 없습니다. 명공께서는 기주를 평정한 날 수레에서 내려 군대를 정돈하고 그곳의 호걸들을 받아들이고 기용해 천하를 평정했습니다. 강한(江漢 장강과 한수가 만나는 지역)을 평정한 후에도 그곳의 인재를 끌어들여 적절한 위치에 배치하시니 천하의 인심이 돌아가고 다스림을 받기를 원하게 했습니다. 문인과 무인이 나란히 쓰이고 영웅은 힘을 다하니 이는 요, 순, 우 삼왕(三王)께서 하신 일입니다.”(《삼국지‧위서‧왕찬전(王粲傳)》)
조조는 흉금이 넓고 기개가 몹시 컸다. 조조는 유비를 영웅으로 인정하면서 “천하의 영웅은 오직 그대와 나뿐이오.”라고 했다. 때문에 유비를 아주 존중했고 “나갈 때는 같은 수레를 타고 앉을 때도 같은 자리에 앉았다.” 조조의 모사 정욱(程昱)과 곽가 등이 몇 차례 기회를 노려 유비를 제거하라고 권했으나 조조는 “지금은 영웅을 받아들여야 할 때인데 한 사람을 죽여 천하의 인심을 잃는 것은 불가하다.”(《삼국지‧무제기》)고 말했다.
건안 3년 조조가 연주에서 필심(畢諶)을 등용했는데 나중에 장막이 배반했다. 필심의 모친과 동생 및 처가 위협을 받고 끌려가자 조조는 필심에게 떠나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필심은 자신은 절대 떠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자 조조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 그러나 나중에 몰래 도망갔다. 이후 장막을 토벌하고 필심이 체포되자 모두들 그의 목숨이 온전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조는 부모에게 효성스런 사람이 어찌 임금에게 불충할 수 있겠느냐? 라면서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노상(魯相)에 임명했다.
위종(魏種)은 본래 조조가 효렴으로 추천한 인물이다. 장막이 연주를 공격할 때 조조는 위종만은 자신을 버리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마저 장막에게 투항했다. 나중에 장막을 물리친 후 위종이 끌려오자 조조는 그를 죽이지 않고 “오직 그 재주만 볼 뿐이다.” “밧줄을 풀어주고 기용했다.” 양부(楊阜)가 조조를 가리켜 “뜻밖의 인물을 등용할 수 있다(能用度外之人)”(《삼국지‧양부전》)고 평가했다.
양주(涼州)종사 양부(楊阜)는 양주목 위단(韋端)을 위해 허도로 나와 원소와 대치중이던 조조를 만난 후 양주로 돌아가 관우(關右)의 여러 장수들에게 조조가 가장 뛰어나고 재주가 많아 큰일을 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관우의 여러 장수들이 조조와 원소의 다툼에서 중립을 지켰다. 조조는 위기(衛覬)를 등용해 관중 지역을 위무하고 다스리게 했다.
건안 4년(199년) 8월 조조가 여양(黎陽)으로 진군했다. 동군(東郡)태수 유연(劉延)이 백마(白馬)에 주둔하면서 원소의 군사들과 맞설 준비를 했다. 9월 병력을 나눠 관도를 지켰다. 원소가 양성(穰城)에 사자를 파견해 장수에게 조조를 협공하자고 유세했다. 장수의 모사 가후(賈詡)가 원소는 형제끼리도 서로 화목하지 못하면서 어찌 천하의 인재를 포용할 수 있느냐면서 거절했다. 가후는 또 장수에게 조조에게 귀부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장수는 전에 조조의 아들을 죽인 일이 있어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가후는 조조에게는 패왕의 뜻이 있어 분명 사사로운 원한을 풀고 천하에 밝은 덕을 펼 것으로 보았다. 11월 장수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조조에게 투항하자 조조가 그의 손을 맞잡고 잔치를 열어주었다. 또 자신의 아들 조균과 장수의 딸을 혼인시키고 장수를 양무장군(揚武將軍)에 임명한 후 열후에 봉했다.
건안 5년(200년) 정월 거기장군 동승(董承)이 유비 등과 더불어 조조를 살해할 음모를 꾸몄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조조에게 살해당했다. 미리 허도를 빠져나간 유비는 서주자사(徐州刺史) 차주(車胄)를 살해하고 원소군에 가담했다. 조조가 기습적으로 서주를 공격해 유비를 대파하자 유비는 멀리 달아나 원소에게 투항했다. 조조가 다시 하비를 공략하자 관우(關羽)가 항복했다. 조조는 두터운 예로 관우를 대우했다. 조조가 다시 관도로 군사를 돌렸다.
2월 원소가 조조를 토벌하는 격문을 발표하고 안량(顏良)을 파견해 백마를 포위하게 했다. 원소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여양에 이르렀다. 4월 조조가 순유의 제안에 따라 적의 세력을 분리시키는 계책을 택했다. 조조가 연진(延津)에 이르러 거짓으로 황하를 건너 원소의 후방을 치는 척하자 원소는 정말로 병력을 나눠 연진으로 보냈다. 조조는 가볍게 무장한 경기병을 이끌고 백마를 기습했다. 당황해서 제대로 방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조군의 장료와 관우가 선두에 나서 공격하자 안량은 관우에게 목이 달아났다. 조조가 대군을 몰아 공격하자 원소군이 크게 패했고 백마의 포위도 풀렸다. 조조는 백성들을 아예 황하를 따라 서쪽으로 이주시켰다.
원소가 병력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추격해왔다. 연진 남쪽에 이르자 조조가 기병들에게 안장을 내리고 말을 풀어놓게 해 치중을 버린 것처럼 보이게 했다. 문추가 유비와 함께 5천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다 버려진 치중에 한눈이 팔린 군사들 때문에 대형이 어지러워졌다. 조조가 이 틈을 노리고 5백여 기병으로 기습공격을 가하자 문추가 혼란 속에서 죽었다. 원소의 군사들이 크게 기세가 꺾였고 조조는 관도로 되돌아왔다. 원소가 양무(陽武)로 진군했다.
관우는 이때 세운 공로로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해졌지만 유비가 원소에게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조조에게 고별편지를 쓰고 떠났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관우를 추격할 것을 청했지만 조조는 “그에게 각기 주인이 있으니 추격하지 말라.”고 했다. 조조는 넓은 흉금으로 유비, 관우, 장비 세 영웅이 맺은 결‘의(義)’를 완성시켜 주었고 관우가 천리 먼 길을 단기(單騎)로 돌아가 원소 진영에 있던 유비에게 돌아간 것으로 의를 풀어냈다. 이 과정에서 관우는 그동안 상으로 받은 금을 상자에 봉해 그대로 두었고 하사받은 미인들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아 이익보다는 의리를 중시하고 여색보다 의리를 중시함을 보여주었다. 또 다섯 관문을 돌파하며 6명의 장수를 목 벤 이야기는 천고의 미담으로 남았다. 하지만 만약 조조의 대의(大義)가 없었더라면 후세에 유비, 관우, 장비 세 영웅의 도원결의가 이야기를 어찌 원만하게 풀어낼 수 있었겠는가?
8월 원소의 주력부대가 관도로 접근하는데 연결된 진영이 수십 리에 달했다. 조조군도 즉각 영채를 세워 대치에 나섰다. 원소군은 토산을 만들고 조조진영에 화살을 퍼부었다. 조조군은 이에 벽력거(霹靂車)라는 투석기를 만들어 맞섰다. 원소군이 지하도를 파서 공격하자 조조군은 긴 참호를 파서 대응했다. 이렇게 양군이 대치하는 가운데 조조는 병력이 적고 식량이 떨어져 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조조가 허도에 남겨둔 순욱에게 편지를 써서 허도로 물러날 준비를 하게 했다. 하지만 순욱은 답신에서 “공께선 10분의 1에 불과한 병력으로 경계선을 긋고 이미 반년이나 적의 숨통을 조여 꼼짝 못하게 막았습니다. 정세를 살펴보면 원소 측에 분명 변고가 있을 것입니다. 이때 뛰어난 계책을 쓸 때이니 기회를 놓쳐선 안 됩니다.”(《삼국지‧위서‧순욱전》)라고 했다. 조조는 순욱의 의견을 받아들여 견고히 지키면서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이에 앞서 손책은 원술의 휘하에서 독립해 강동에서 터를 잡은 상태였다.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서 전투를 벌일 때 손책은 병력을 이끌고 몰래 허도를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이 소식을 들은 조조 진영의 인사들은 마음이 흔들렸지만 곽가는 태연자약하게 손책이 반드시 자객의 손에 죽을 것을 알았다. 나중에 손책은 정말 주인을 위해 복수하려던 허공(許貢)의 문객들에게 기습공격을 받아 화살을 맞고 며칠 후 사망했다. 이렇게 해서 허도는 놀라움은 있었지만 위험은 없었다.
10월 원소가 대장 순우경(淳于瓊)에게 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대량의 군량을 수송하게 했다. 식량이 저장된 곳은 원소의 본영에서 북쪽으로 40리 떨어진 오소(烏巢)였다. 이에 앞서 원소의 모사 저수(沮授)는 원소에게 기습공격에 대비해 오소의 수비 병력을 강화할 것을 건의했지만 원소가 따르지 않았다. 또 허유는 비어 있는 조조의 후방 허도를 공격하라는 계책을 내놓았지만 원소가 채택하지 않았다.
이때 허유가 조조에게 투항하자 조조는 “맨발로 달려 나가 허유를 만나 손을 잡고 웃었다.” 조조는 허유의 계책에 따라 5천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직접 오소를 기습해 사방에서 화공을 펼쳤다. 원소는 오소에 구원 병력을 보내야한다는 장함의 권고를 듣지 않고 가볍게 무장한 경기병만 보내고 중무장한 대병력으로 조조의 본진을 치게 했다. 장함(張郃)과 고람(高覽)이 조조의 진영에 맹공을 퍼부었으나 조홍 등의 견고한 수비에 막혀 공략하지 못했다. 한편 순우경의 대군에 맞선 조조는 결사항전으로 군사들을 독려해 순우경을 죽이고 군량을 전부 불태웠다. 오소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원소의 군사들은 투지를 잃었고 장함과 고람도 병력을 이끌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원소는 대군이 무너지자 아들 원담과 함께 불과 8백 명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하북으로 도주했다. 7만에 달하는 대군이 전멸한 것이다. 그러자 기주의 여러 군에서 일제히 성을 들어 조조에게 항복해왔다. 원소와 조조의 관도전투는 약한 세력으로 강자에게 이긴 전투로 청사에 길이 남겨질 것이다.
당시 조조의 처지가 아주 곤란해졌을 때 수하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원소 측에 비밀리에 서신을 보냈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오고간 서신들을 찾아낸 조조는 “원소가 강할 때는 나조차도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었소.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는가!”라고 말하며 서신들을 모두 불태우게 했다. 조조가 서신을 모두 불태우라고 명령한 것은 이전의 잘못은 따지지 않고 나라의 ‘의(義)’를 중히 여긴 것이다. 이런 대의(大義)가 이르는 곳에서 개인적인 은혜나 원한은 따지지 않는 조조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탄복하게 했다.
한편 환제(桓帝) 때 초나라와 송나라의 경계에 황성(黃星)이 출현한 적이 있다. 요동 사람 은규(殷馗)가 천문에 밝았는데 50년 후 진인(眞人)이 양(梁)과 패(沛) 사이에서 출현하며 그 누구도 그의 예봉에 대적하지 못한다고 예언한 바 있다.(《삼국지‧위서》) 조조가 원소를 격파한 이때가 바로 예언에서 말한 50년이 되던 해로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었다.
9월 조조가 허도로 돌아왔다. 원소가 전쟁에서 패하기 전에 유비를 시켜 여남(汝南)을 공격하게 했다. 여남의 산적인 공도(龔都) 등이 유비에게 호응했다. 조조가 채양(蔡揚)을 보내 공격했지만 전세가 불리해졌고 공도에게 패했다. 이에 조조가 직접 유비를 정벌하러 나섰다. 유비는 조조가 직접 온다는 말을 듣고 유표에게 달아났고 공도 등도 뿔뿔이 흩어졌다. 유표는 유비가 온다는 말을 듣고 교외까지 마중을 나와 상빈(上賓)의 예우로 후대하고 병력을 늘려 신야(新野)에 주둔하게 했다.
건안 7년(202년) 봄 정월에 조조가 초현에 군대를 주둔한 후 오랫동안 전란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의 참혹한 상황을 보고는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다.
“내가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천하를 위해 폭란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옛 땅의 백성들이 대부분 사망해 온종일 나라 안을 돌아다녀도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없을 지경이라 비통하고 상심하기 그지없다. 의병을 일으킨 이래 후사가 없이 죽은 병사들은 그의 친척을 찾아 뒤를 잇게 하고 땅을 나눠주며 관에서 농업용 소를 빌려주며 학교를 세워 그 자식들을 교육하게 하라. 후사가 있는 자들을 위해서는 사당을 세워 그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라. 그리하여 죽은 영혼을 위로할 수 있다면 내가 죽은 후에라도 유감이 없을 것이다.”
조조는 이에 준의(浚儀)에 가서 수양거(睢陽渠)를 수리하고 사자를 보내 교현(橋玄)에게 태뢰(太牢 소 양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큰 제사)의 희생으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 교현은 과거 조조가 젊을 때 그 재능을 알아준 적이 있다. 조조는 또 직접 제문을 지었다.
“돌아가신 태위 교현 선생은 밝은 덕을 널리 펴 사람들을 두루 사랑하고 포용하셨습니다. 나라에서는 선생의 밝은 가르침을 기리고 선비들은 선생의 뛰어난 계책을 흠모하고 있습니다. 영혼은 저승에 가고 육체는 묻혔으니 아득히 멀리 가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 공을 뵈었는데 부족한 저를 거두어주셨습니다. 지금 제 영예가 더해지고 견문이 넓어진 것은 모두 격려해주신 덕분입니다. 이는 마치 공자께서 안연(顏淵)만 못하다고 하신 말씀이나 이생(李生)이 가복(賈複 동한 초기의 명장)에게 탄복한 것과 같습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했으니 이 말을 생각하면 선생을 잊을 수 없습니다. 또 ‘내가 죽은 후에 무덤 앞을 지나거든 술 한 말과 닭 한 마리로나마 잔을 올려주시게. 그냥 지나쳤다간 세 발짝도 못가서 배탈이 날 테니 나를 탓하진 마시게.’라고 조용히 약속하셨습니다. 비록 한때의 농담일망정 지극히 친하고 돈독하지 않다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공의 영혼이 화를 내 제게 병이 나게 할까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예전의 우의를 생각하니 처량해서입니다. 천자의 명을 받들어 동쪽으로 원정하는 길에 마침 고향에 주둔하면서 북쪽으로 선생이 계신 곳을 바라보다 묘소에 참배할 생각을 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제수지만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장은 진실하고 간절하면서도 그 가운데 의기(義氣)를 드러냈으니 실로 조조의 또 한편의 명문이라 할 만하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