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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조조(7): 원소의 아들을 토벌하고 오환을 정벌

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원소에게는 원담(袁譚), 원희(袁熙), 원상(袁尚) 세 아들이 있었다. 원소는 후처인 유씨(劉氏) 소생의 원상을 총애해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큰아들 원담을 청주(靑州)로 내보냈다. 저수가 간언했지만 원소는 “아들들에게 한 주(州)씩 맡겨 그 능력을 보려고 함이다.”라면서 듣지 않았다. 또 둘째 아들 원희는 유주(幽州)자사, 외조카 고간은 병주(幷州)자사에 임명했다. 건안 7년 가을 9월에 조조가 황하를 건너 원담을 공격해오자 원담은 동생 원상에게 소식을 알렸다. 원상은 심배에게 업성을 지키게 하고 직접 나서 원담과 함께 조조에 맞섰다. 하지만 전투에서 잇따라 패배한 후 퇴각하며 물러나 지키기만 했다.

건안 8년(203년) 2월 조조가 여양(黎陽)을 공격하자 원담과 원상이 성아래 전투에서 패해 업성으로 달아났다. 4월 조조가 업성까지 추격해 성 주변의 보리를 모두 베었다. 이때 여러 장수들이 승기를 타서 빨리 공격할 것을 주장했지만 곽가가 만류했다.

“원소가 이 두 아들을 사랑했으나 후사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들의 권력이 비등해 각기 추종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상황이 위급하면 서로 보호하겠지만 느슨해지면 다툼이 생길 것입니다. 남쪽 형주로 가서 유표를 공격한다고 한 후 변화를 기다렸다가 변화가 생긴 후 공격하면 단번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조조가 이 말을 쫓았다. 5월 조조가 허도로 돌아가면서 가신(賈信)을 남겨 여양을 지키게 했다. 원담과 원상 형제가 서로 싸우게 하려는 계책이었다.

8월 조조가 유표 정벌에 나서 서평(西平 지금의 하남성 서평현)에 주둔했다. 이때 원 씨 형제간에 내분이 발생했다. 원담이 먼저 공격에 나섰다가 원상에게 크게 패했다. 원담이 평원(平原, 산동성 평원현)으로 달아나 성을 지키면서 나오지 않았다. 원상이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 성을 포위하자 다급해진 원담이 신비(辛毗)를 조조에게 보내 투항할 테니 구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조조 진영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저의를 의심하며 대부분 유표는 강하고 원씨 형제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면서 유표를 먼저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순유는 “천하가 혼란한 와중에도 유표는 장강과 한수 일대를 지키고 앉아 있으니 그가 사방을 도모할 뜻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원씨는 네 주(州)를 차지하고 거느린 병력만도 수십 만에 달하며 원소가 관대해 인심을 얻었습니다. 두 아들이 화목하게 부친의 업적을 지킨다면 천하는 안정될 것입니다. 지금 형제간에 미워해 두 세력이 온전하지 못합니다. 만약 둘이 합해 전력을 다한다면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혼란한 틈을 타서 취한다면 천하가 평정될 것이니 이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

조조 역시 하북을 먼저 공략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 “내가 여포를 공격했을 때 유표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고 관도 전투에서도 원소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유표는 자신만 지키는 적이다. 마땅히 나중에 도모해야 한다. 반면 원담, 원상은 교활하지만 마침 혼란한 상태에 있다. 원담이 간사한 생각으로 내게 원상을 물리쳐달라고 하니 그 지역을 차지하면 이익이 클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비 역시 “명공(明公)의 위엄으로 곤궁한 적을 상대하고 피폐한 도적들을 공격하시면 가을 낙엽처럼 신속하게 흔들릴 것입니다. 지금 구원 요청을 따라주시면 이익이 막대할 것입니다. 또 사방의 적중에 하북(河北)보다 큰 적이 없습니다. 하북이 평정되면 육군(六軍)이 강성해지고 천하를 진동시킬 것입니다.”라고 권했다. 조조가 좋다고 하면서 이 제안을 수락했다.

10월 조조가 병력을 이끌고 여양에 이르러 아들인 조정(曹整)에게 원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했다. 원상이 이 소식을 듣고는 평원의 포위를 풀고 업성으로 돌아갔다. 원상은 물러나면서 동평의 여광(呂曠)과 고상(高翔)에게 추격을 저지하게 했으나 둘이 원상을 배반해 무리를 이끌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원담은 포위가 풀리자 장군의 인(印)을 새겨 여광과 고상에게 주었다. 여광이 인을 받은 후 조조에게 보내자 조조가 “나는 원담에게 계략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나로 하여금 원상을 공격하게 하고 그 틈에 무리를 모아 원상이 무너지면 스스로 힘을 키워 나를 무너뜨리려는 것이다. 하지만 원상이 패하고 나면 내가 더 강해질 텐데 어떻게 승기를 타겠는가?”라고 말했다. 조조는 이미 원담의 속임수를 환히 꿰뚫고 있었다.

건안 9년(204년) 전투가 빈번했다. 2월 원상이 원담을 공격하러 가면서 심배와 소유에게 업성을 지키게 했다. 조조가 원수(洹水)까지 진군해 업성을 공격하자 소유는 항복하고 심배가 남아 업성을 지켰다. 조조군이 업성을 공격하기 위해 흙으로 산을 쌓고 지하도를 팠다. 4월에 조홍에게 업성을 계속 공격하게 한 후 조조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배후지역인 한단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5월 다시 업성에 돌아온 조조는 전에 만들었던 흙산과 지하도를 헐고 성주위에 40리에 달하는 수로를 팠다. 처음에는 얕게 파서 쉽게 건널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를 본 심배가 비웃으며 나와서 싸우려하지 않았다. 조조는 하룻밤 사이에 두 장 정도로 깊고 넓은 도랑을 판 후 장수(漳水)의 물을 끌어들였다. 몇 달간 포위가 이어지자 성안의 사람들이 절반 넘게 굶어 죽었다.

7월 원상이 병력을 보내 업성을 구하려 했다. 여러 장수들이 “이는 귀환하는 군사들이라 스스로 싸우려 할 테니 피하는 게 낫습니다.”라고 했다.

조조는 “만약 큰길로 온다면 당연히 피해야 하지만 서쪽 산길로 온다면 사로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원상은 정말 서쪽 산길로 돌아와 업성 근처 부수(滏水)에 군영을 설치했다. 원상이 야음을 틈타 포위를 풀려했으나 오히려 조조군의 반격을 받아 크게 패했고 군영까지 포위당했다. 두려워진 원상이 전 예주자사 음기(陰夔)와 진림(陳琳)을 보내 항복을 청했으나 조조가 허락하지 않고 포위를 더 조였다. 원상이 야음을 틈타 기산(祁山)으로 달아나 굳게 지켰지만 조조가 추격하자 다시 중산(中山)으로 도주했다. 조조군은 원상의 치중(輜重)을 전부 획득하고 원상의 인수와 절월을 얻어 손에 넣었다.

항복한 원상의 장수들을 시켜 성안에 남은 가족들에게 이를 보여주자 성안의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사기가 꺾였다. 하지만 심배만은 끝까지 병사들을 독려하며 버티려 했다. 8월 심배의 조카 심영(審榮)이 밤에 자신이 지키던 동문을 열어 조조군을 맞아들였다. 전투 끝에 심배가 패해 사로잡히자 조조는 그를 참수하고 마침내 업성을 평정했다.

조조는 어린 시절 원소와 교분이 있었고 나중에 같이 동탁을 토벌하고 원술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때는 옛 친구가 이미 사망한 뒤라 조조는 직접 원소의 묘를 찾아가 숙적이자 옛 친구에게 제사를 지내며 눈물을 흘렸다. 또 원소의 아내를 위로하고 그 가족들에게 보물을 돌려주고 갖가지 비단과 솜 및 식량을 주었다. ‘의’란 본래 개인적인 은혜나 원한 때문이 아니며 하늘에 순응해 의를 풀어낸 것이다.

9월 조조는 “하북은 원씨의 난리로 피해를 입었으니 올해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라.”라고 명령했다. 또 세도가들의 토지겸병을 억제하는 법령을 중시해 백성들에게 함부로 세금을 걷지 못하게 하자 백성들이 기뻐했다. 천자가 조조에게 기주목을 겸하게 하자 조조는 대신 연주를 사양해 반납했다. 곽가가 조조에게 청주, 기주, 유주, 병주의 명사들을 관리로 임용해 인심이 돌아오게 하자고 제안하자 조조가 이를 따랐다.

건안 10년(205년) 정월 조조가 남피에 있던 원담을 공격했다. 새벽부터 오후까지 싸워도 이기지 못하자 조조가 직접 북을 치며 격려하자 군사들이 힘을 다해 성을 함락시켰다. 원담과 그 처자를 참수하자 기주가 비로소 평정되었다.

조조는 명령을 내려 “원씨와 함께 나쁜 일을 한 사람일지라도 스스로 잘못을 고치고 새로 시작할 것을 허락한다.”고 했다. 전에 원씨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 개과천선할 기회를 준 것이다. 또 백성들에게 사사로운 복수와 사치스런 장례를 금하게 하고 이를 어기면 모두 법에 따라 다스리게 했다. 이달에 원희의 대장 초촉(焦觸)과 장남(張南) 등이 반란을 일으켜 원희와 원상을 공격하자 두 형제는 삼군(三郡)의 오환(烏丸)에게 도주했다.

건안 11년(206년) 정월 조조가 고간을 정벌하려 하자 고간(高幹)이 소식을 듣고는 별장(別將)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흉노로 들어갔다. 고간은 원소의 외조카로 병주목으로 있었다. 나중에 조조가 업성을 공략할 때 조조에게 투항해 그대로 병주자사로 삼았는데 조조가 오환을 토벌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침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흉노의 선우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으나 선우가 거절했다. 조조가 호관(壺關)을 석 달간 포위해 뽑았다. 당시 정벌과정에 고생이 몹시 심했는데 조조는 《고한행(苦寒行)》이란 시를 지어 당시 상황을 노래했다.

《고한행(苦寒行)》

북으로 태항산을 오르나니어렵기도 하구나 왜 이리 높고 험한굽이굽이 구부러진 양장파(羊腸坡)의 비탈길에수레바퀴마저 부러져 나가네나무는 어찌 그리 쓸쓸한가북풍 소리 정말 슬프구나사나운 곰들 나를 향해 웅크리고호랑이 표범도 길섶에서 울부짖네계곡에는 사람 드문데눈발은 어찌 이리 펄펄 날리는지목을 빼고 길게 탄식하나니원정길에는 생각도 많구나내 맘은 어이 이리 괴로울까그냥 동쪽으로 돌아가고 싶어라물은 깊고 다리는 끊어져가다 말고 서성일 뿐길을 잃어 옛길도 못 찾고어스름 저녁에 머물 곳도 없구나걷고 또 걸어 해는 이미 기울었는데사람도 말도 모두 굶주렸누나배낭 메고 땔감을 모아얼음 깨다 죽을 끓이네서글픈 동산의 시를 생각하니내 마음 한없이 애달프구나

北上太行山(북상태행산) 艱哉何巍巍(간재하외외)羊腸坡詰屈(양장파힐굴) 車輪爲之摧(차륜위지최)樹木何蕭瑟(수목하소슬) 北風聲正悲(북풍성정비)熊羆對我蹲(웅비대아준) 虎豹夾路啼(호표협로제)溪谷少人民(계곡소인민) 雪落何霏霏(설락하비비)延頸長歎息(연경장탄식) 遠行多所懷(원행다소회)我心何怫鬱(아심하불울) 思欲一東歸(사욕일동귀)水深橋梁絕(수심교량절) 中路正徘徊(중로정배회)迷惑失故路(미혹실고로) 薄暮無宿棲(박모무숙서)行行日已遠(행행일이원) 人馬同時饑(인마동시기)擔囊行取薪(담낭행취신) 斧冰持作糜(부빙지작미)悲彼東山詩(비피동산시) 悠悠令我哀(유유영아애)

이 시는 질박하고 화려하진 않지만 구절양장처럼 구불구불 험한 산길에 눈보라가 몰아치고 먹고 쉴 곳조차 없는 곤란한 처지를 잘 묘사했다. 실로 고생스런 원정길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으로 침울한 격조가 자못 처량하다.

건안 12년 봄 2월 조조가 순우현에서 업성으로 돌아와 봉공신령(奉功臣令)을 내렸다.

“내가 의병을 일으켜 포악한 반란군을 정벌한 지 19년이 되었다. 정벌할 때마다 반드시 승리한 것이 어찌 나 한사람의 공로이겠는가? 이는 현명한 사대부들의 공이다. 천하가 아직 완전히 평정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현명한 사대부들과 함께 평정할 것이다. 그 공로의 대가를 나 한 사람이 누린다면 어찌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시급히 의론하여 공로를 정하고 상을 내리게 하라.(吾起義兵誅暴亂,於今十九年,所征必克,豈吾功哉?乃賢士大夫之力也.天下雖未悉定,吾當要與賢士大夫共定之;而專饗其勞,吾何以安焉!其促定功行封.)”

이에 큰 공신 20여 명을 모두 열후에 봉했고 그 밖에 사람들도 각기 공을 세운 정도에 따라 작위를 받았다. 또 전사자의 자식은 부역을 면해주었다. 특히 여러 차례 좋은 계책을 냈던 순욱은 따로 표를 올려 만세정후(萬歲亭侯)에 봉하고 3월에는 식읍 천호(千戶)를 추가했다.

조조는 이때 원씨 세력의 뿌리를 뽑아 우환을 없애기 위해 북쪽으로 오환을 정벌할 결심을 내렸다. 여러 장수들이 “원상은 일개 도망자에 불과합니다. 이적(夷狄 오환을 지칭)은 탐욕스럽고 인정이 없으니 어찌 원상에게 이용당하겠습니까? 지금 적진 깊숙이 들어가 그들을 정벌한다면 유비가 반드시 유표를 설득해 허도를 습격할 것입니다. 만에 하나 변란이 생긴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라면서 원정에 반대했다. 오직 곽가만이 유표는 절대 유비를 쓰지 못할 거라고 하면서 조조의 원정을 지지했다.

“공의 위엄이 비록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지만 호인(胡人)들은 멀리 떨어진 것만 믿고 분명 대비가 소홀할 것입니다. 기습공격을 한다면 궤멸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원소는 전에 백성과 이적들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으며 원상 형제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지금 4주의 백성들도 단지 위력이 두려워 귀부하고 있을 뿐 우리의 은덕이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버려둔 채 이곳을 떠나 남정한다면 원상은 분명 오환의 세력을 이용해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신하들을 모을 것입니다. 호인이 일단 움직이면 백성들과 이적이 호응하여 오환의 선우 답돈(蹋頓)에게 야심을 키워줘 분수 밖의 일을 넘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청주와 기주는 우리의 소유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면 유표는 앉아서 말만 하는 자로 자신의 재주로 유비를 통제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중임을 맡기면 통제하지 못할까 두렵고 너무 가볍게 쓰면 유비를 쓸데가 없으니 비록 나라를 비우고 멀리 원정을 가더라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조조가 마침내 곽가의 의견에 따라 오환 원정에 나섰다.

호인(胡人)은 본래 헌원황제(軒轅黃帝)의 후예로 역시 화하(華夏)의 자손이지만 중원을 벗어나 유목민족이 되었다. 중토(中土)와는 긴밀히 관련되어 있으며 다른 주변지역 화하자손들과 마찬가지로 천고영웅인물의 각별한 관심을 받아왔다. 역대 왕조에서 특히 천고영웅인물들은 늘 때로는 전쟁을 통해 그들에게 문화를 주었고 때로는 무역이나 문화교류, 종교의 전파 등 각종 방식으로 늘 잊지 않고 중화 신전문화를 이용해 그들을 교화하려 했다.

중원 북쪽의 호인을 흉노(匈奴)라 하고 흉노 동쪽에 거주하던 민족을 동호(東胡)라 했다. 진나라 말기와 한나라 초기 묵돈(冒頓)선우가 동호를 물리쳤다. 동호인들은 북쪽으로 선비산(鮮卑山)과 오환산(烏桓山)으로 이주해 각기 산의 이름으로 민족의 명칭을 삼았으니 바로 선비족과 오환족이다. 한 무제 원수(元狩) 연간에 대대적인 흉노 정벌에 나서자 오환은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동(遼東), 요서(遼西) 다섯 군으로 이주했다. 오환인들은 기마와 활에 뛰어나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며 거주했는데 파오라는 천막에서 살았다. 병이 나면 쑥뜸이나 소석(燒石)으로 치료했다. 또는 칼로 상처에 피를 낸 후 천지산천의 신에게 기도하기도 했다.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은 구두로 전했으며 언행을 아주 중시해 꺼낸 말은 반드시 실천에 옮겼다.

건안 12년(207년) 5월 조조가 친히 대군을 이끌고 북으로 올라가 무종(無終 지금의 천진 계현)으로 진군했다. 역수(易水)에 이르자 곽가가 진언했다. “군사를 쓸 때는 신속이 중요합니다. 지금 천리를 왔는데 치중이 너무 많아서 승기를 잡기가 어렵습니다. 저들이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방비를 할 것입니다. 치중을 가볍게 하여 경병으로 노정을 줄여 기습적으로 적을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조조가 그의 의견에 따랐다.

7월이 되자 홍수가 나서 해안가의 길이 다 막혀버렸다. 이때 수현 현령으로 있던 전주(田疇)가 길잡이를 자청하자 조조가 그를 기용했다.

원래 전주가 무종(無終)에 있을 때 원소가 여러 차례 부르며 장군의 인을 수여했지만 전주는 이를 거절한 바 있다. 당시 그는 오환이 여러 차례 군의 관리들을 죽인 것을 미워해 오환을 토벌하고자 했으나 힘이 없었다. 때문에 오환 원정에 나선 조조가 사람을 보내자 전주는 조조가 보낸 관리를 잘 대접했다. 그의 문인이 “전에 원공(袁公 원소)이 당신을 사모해 예물과 명령을 다섯 차례나 보내왔어도 의리를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조공(曹公 조조)의 사자가 겨우 한번 왔는데도 조조에게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데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물었다. 전주는 웃으면서 “이는 그대들이 알 바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장마 때문에 길이 막혀 군사가 나아가지 못해 다급해진 조조가 전주에게 대책을 물었다.

전주는 “이 길은 매년 여름과 가을에 항상 물로 가득합니다. 얕아도 수레와 말이 지날 수 없고 깊어도 배를 띄울 수 없어 오랫동안 곤란합니다. 옛날 북평군(北平郡)의 치소가 있던 평강(平岡, 지금의 요녕성 몽골족 자치현)은 노룡(盧龍)에서 유성(柳城, 지금의 요녕성 조양 남쪽)까지 길이 있었습니다. 광무제 건무(建武) 이후 길이 무너져 끊긴 이래 200년간 버려졌지만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 있습니다. 지금 오환의 장수는 대군(大軍)이 무종에서 진격하지 못하고 곧 물러날 것이라 여겨 느슨해져서 아무런 대비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군사를 돌려 노룡 어귀에서 험한 백단(白檀)을 넘어 들어가 무방비 상태의 적을 공격한다면 답돈 선우도 싸우지 않고 포로로 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훌륭한 계책이라고 여겨 군사를 돌리고 길가에 큰 말뚝을 박고 “지금은 한여름이라 길이 막혔으니 가을까지 기다려 다시 진군한다.”고 적어놓게 했다. 오환의 정찰병이 이를 보고는 조조의 대군이 확실히 퇴각했다고 판단했다.

한편 전주는 군사를 인도해 노룡에서 나와 백단과 평강을 거쳐 유성(柳城)으로 진격했다. 조조의 대군이 유성에서 200리쯤 떨어진 곳까지 진격해서야 오환에게 발견되었다. 원상, 원희는 답돈 선우 및 요서의 선우 누반(樓班), 우북평의 선우 능신저지(能臣抵之) 등과 수만의 기병을 이끌고 조조군에 맞섰다.

8월 조조가 백랑산(白狼山 지금의 요녕성 능원 동남쪽)에 올라가 오환의 군사를 살피는데 갑자기 적군을 만났다. 당시 오환은 군사가 많고 강성했다. 조조는 치중을 후방에 남겨 두어 거느린 군사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들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조조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 적이 진영을 갖추지 못한 것을 보고 곧바로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했다. 장료(張遼)가 선봉에 서자 오환의 군사들이 크게 무너졌다. 답돈 선우와 명왕(名王, 오환 귀족)들의 목을 베자 오랑캐와 한인(漢人) 20여 만 명이 투항했다.

그러자 원상, 원희 형제는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요동태수 공손강(公孫康)에게 달아났다. 조조가 오환을 깨뜨리자 주변 장수들은 승기를 타고 요동까지 원정에 나서 원상 형제를 사로잡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조조는 생각이 달랐다. “나는 바야흐로 공손강이 원상과 원희를 잡아 그 수급을 바치게 할 것이다. 굳이 출병할 필요가 없다.” 9월 조조가 유성에서 철군하자 공손강이 곧 원상, 원희의 수급을 보내왔다. 여러 장수들이 깜짝 놀라 조조에게 물었다. “공이 돌아오시자 공손강이 원상과 원희 등을 죽였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조조는 “그는 평소 원상 등을 두려워했다. 내가 급히 몰아세웠다면 그들이 힘을 합쳤을 것이나 느슨히 풀어주면 서로 해치게 되어 있으니 형세가 그러했다.”고 대답했다. 과연 조조의 예측이 신묘하고 확신을 갖고 지휘하자 제장들이 감동함은 물론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유성에서 돌아온 후 38세였던 곽가의 병이 악화되었다. 조조가 계속 사람을 보내 그의 상태를 파악하게 했다. 나중에 사망하자 조조가 직접 장례에 참석해 슬퍼하며 순유 등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 나와 같은 연배지만 오직 봉효(奉孝)만이 가장 어렸소. 천하의 큰일을 마치면 후사를 부탁하려 했는데 중년에 요절하다니 이는 운명인 듯하오!” 조조는 지음(知音)을 잃은 것을 애통해하며 슬픈 감정을 드러냈다. “하물며 봉효는 나를 알았는데 천하에 서로 알아주는 이가 드무니 이 때문에 더욱 아프고 애석하구나. 이를 어이할꼬 어이할꼬!” “슬프구나 봉효야 아프구나 봉효야 애석하구나 봉효야!”

원정에서 돌아온 후 조조는 오환 정벌을 반대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조사하게 했다.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조조는 그들을 찾아내 후한 상을 내리면서 “내가 지난번 행군에서 곤경에 처하고도 다행히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도운 것이다. 따라서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는 없다. 그대들의 간언은 계책을 완전하게 하려던 것이니 이에 상을 내린다. 앞으로도 의견을 내는데 주저하지 말라.”라고 했다.

조조는 또 논공행상을 단행해 전주에게 500호의 식읍을 내리고 정후(亭侯)에 봉했다. 하지만 전주는 “저는 본래 원래 모시던 유공(劉公, 전 유주목 유우(劉虞)를 말하며 공손찬에게 죽임을 당함)의 원수 때문에 무리를 이끌고 산으로 달아났습니다. 뜻을 세우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이용하게 되었으니 본래 제가 뜻하던 바가 아닙니다.”라면서 극구 사양했다. 조조가 여러 번 상을 주려 했으나 그의 마음이 진심임을 알고는 이를 허락했다.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개선했다. 11월 역수에 이르자 대군(代郡)의 오환선우 보부로(普富盧)와 상군(上郡)의 오환선우 나루(那樓)가 찾아와 귀순을 청했다. 이에 3군의 오환을 모두 내지로 이주하게 했다. 조조는 유명한 《구수수(龜雖壽)》란 시에서 이를 노래했다.

《구수수(龜雖壽)》

신령한 거북 비록 오래 산다지만언젠가는 죽을 때 있고안개를 타고 다니는 등사(騰蛇)도끝내는 흙먼지로 변하누나늙은 준마 마구간에 매여서도마음은 천리를 달리며열사는 노년이 되어도큰 포부 사라지지 않네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게하늘에 달린 것만은 아니니수양을 잘하면오래 살 수 있노라아 지극한 행운이여마음껏 뜻한 바를 노래해보세

神龜雖壽(신구수수) 猷有竟時(유유경시)騰蛇乘霧(등사승무) 終爲土灰(종위토회)老驥伏櫪(노기복력) 志在千里(지재천리)烈士暮年(열사모년) 壯心不已(장심불이)盈縮之期(영축지기) 不但在天(부단재천)養怡之福(양이지복) 可得永年(가득영년)幸甚至哉(행심지재) 歌以詠志(가이영지)

이 시는 나이 들어도 웅장한 포부를 노래한 것으로 천고의 절창(絶唱)으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신구(神龜, 수명이 3천년이라는 신령한 거북)와 등사(騰蛇,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난다는 신령한 뱀) 노기(老驥, 늙은 천리마)를 연달아 사용한 후 ‘열사는 노년이 되어도 큰 포부 사라지지 않네(烈士暮年,壯心不已)’라는 주제를 드러냈다. 감정이 강개하면서도 진기(真氣)가 호탕하다. 송나라의 오기지(敖器之)는 《시평(詩評)》에서 “위무제(조조)는 마치 유연한 노장처럼 기운이 가라앉으면서도 웅장하다(魏武帝如幽燕老將,氣韻沉雄)”고 평했다.

한편 조조는 회군할 때 동쪽 갈석산(碣石山)에 올라 바다를 보며 옛일을 회상했다. 갈석산은 지금의 하북성 창려(昌黎)현 북쪽에 있는 산으로 발해만과 가까운 곳이다. 전에 진시황이 동쪽을 순행하다 이곳에 이르러 “황제께서 위엄을 떨치시고 덕으로 제후들을 병합하여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셨다(皇帝奮威,德並諸侯,初一泰平)”(《갈석문사(碣石門辭)》)는 글을 남긴 곳이다. 한 무제 역시 일찍이 갈석산에 올라 바다를 본 적이 있다.

다년간의 정벌을 통해 마침내 북방을 완전히 평정한 조조는 감개가 무량했다. 이에 천고의 명편인 《보출하문행(步出夏門行)‧관창해(觀滄海)》를 지었다. 이 시는 비록 글자 수는 많지 않지만 하늘과 바다 해와 달이 혼연일체가 되어 호한한 우주 중에서 찬란히 빛나는 은하수처럼 드러나 우주를 집어삼킬 듯 드넓은 시인의 흉금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관창해(觀滄海)》

동쪽 갈석산에 올라푸른 바다를 바라보니물결이 어찌나 잠잠한지산과 섬 우뚝 마주섰네수목이 빽빽이 자라온갖 풀은 무성한데쓸쓸한 가을바람에큰 파도 용솟음치네해와 달의 운행그곳에서 나오는 듯빛나는 은하수도그곳에서 솟는 듯아 지극한 행복이여마음껏 뜻한 바를 노래해보세

東臨碣石(동림갈석) 以觀滄海(이관창해)水何澹澹(수하담담) 山島竦峙(산도송치)樹木叢生(수목총생) 百草豐茂(백초풍무)秋風蕭瑟(추풍소슬) 洪波湧起(홍파용기)日月之行(일월지행) 若出其中(약출기중)星漢燦爛(성한찬란) 若出其裡(약출기리)幸甚至哉(행심지재) 歌以詠志(가이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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