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4. 한의 승상이 되고 적벽에서 패하다
건안 13년(208년) 정월 조조는 업성으로 돌아와 현무지(玄武池)를 만들어 수군을 훈련시켰다.
6월 여름에 관제를 개편해 한나라의 삼공(三公)을 없애고 승상, 어사대부를 설치했다. 조조가 승상에 임명되었다. 조조는 기주의 별가종사 최염(崔琰)을 승상부 서조연(西曹掾), 사공(司空)부 동조연(東曹掾) 모개(毛玠)를 승상부 동조연(東曹掾)으로 삼았다. 또 원성 현령으로 있던 사마랑(司馬朗)을 주부로 삼고 그의 동생 사마의(司馬懿)를 문학연(文學掾)으로 삼았으며 기주부 주부 노육(盧毓)을 법조의령사(法曹議令史)로 삼았다.
이때부터 최염과 모개가 함께 인재선발(選擧)을 맡았는데 이들이 추천해 등용한 인물은 모두 청렴하고 올바른 인사들이었다. 반면 당시에 명성이 있어도 행실이 근본에서 나온 자가 아니면 끝내 등용하지 않았다. 착실한 이들을 발탁하고 화려하게 꾸미거나 거짓말을 하는 자들을 배척했으며 겸손한 이들을 진급시키고 아부하거나 무리를 짓는 자들을 억눌렀다.
이때부터 천하의 선비들이 청렴과 절조에 노력했으며 비록 귀하고 총애 받는 신하들조차 수레와 의복이 지나치게 사치하지 못했다. 또 지방관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도 때 묻은 얼굴과 남루한 옷을 입고 혼자 장식 없는 수레를 탔다. 무관이 관부에 들어올 때는 조복 차림으로 걸어서 다녔다. 관리들이 위에서 청렴해지자 아래에서 백성들의 풍속도 좋아졌다. 조조가 이 소식을 듣고는 감탄하며 “사람을 쓰는 것이 이와 같으니 천하 사람들이 저절로 다스려지는구나. 내가 또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했다. 조조가 어진 사람만을 등용하자 조정이 깨끗해졌고 중원이 잘 다스려졌다.
7월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형주의 유표를 공격했다.
8월 조조의 대군이 형주에 이르기 전에 유표가 병사했다. 장릉(章陵) 태수 괴월(蒯越)과 동조연(東曹掾) 부손(傅巽) 등이 유표의 뒤를 이은 아들 유종(劉琮)에게 조조에게 항복하라고 권했다.
“거역하고 따르는 것에 큰 규범이 있고 강한 것과 약한 것에는 일정한 형세가 있습니다. 신하로서 임금을 거역하면 거스르는 도이고 새로 만든 초(楚)를 가지고 중국(中國, 여기서는 중원을 장악한 조조를 말함)을 막으려 한다면 반드시 위태롭게 됩니다. 유비로 조공에게 대적한다면 당하지 못합니다. 3가지가 모두 부족한데 무엇으로 대적하시겠습니까? 또 장군께서 스스로 생각해보시기에 유비가 어떻습니까? 만약 유비가 조공을 방어하기에 부족하다면 초를 전부 가진다해도 스스로 생존할 수 없습니다. 만약 조공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면 유비는 장군의 아래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유종이 이 말을 따랐다.
9월 조조가 신야(新野, 지금의 하남성 신야현)에 이르자 유종이 주를 들어 투항하고 부절을 가지고 조조를 맞았다. 형주가 평정되자 조조는 유종을 청주(靑州)자사로 옮기고 괴월 등 15인을 모두 열후에 봉했다. 조조는 순욱에게 쓴 편지에서 “형주를 얻어서 기쁜 게 아니라 괴월을 얻은 게 기쁠 뿐이오.”라고 했다.
한편 조조는 군수품이 풍부한 강릉(江陵)을 유비가 차지할까 염려해 치중을 버리고 경무장한 병력을 이끌고 양양(襄陽)으로 갔다. 유비가 이미 지나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정예기병 5천으로 급히 추격하게 했다. 하루 밤낮을 쉬지 않고 3백여 리를 달리니 당양(當陽)의 장판(長阪, 지금의 호북성 당양현 북쪽)에 이르렀다. 유비가 처자까지 버리고 제갈량, 장비 등 수십 기만 이끌고 달아나자 조조가 그의 무리와 치중을 대량으로 획득했다.
조조는 늘 “말 위에서 글을 짓고 종종 창을 들고 시를 읊었기(鞍馬間爲文,往往橫槊賦詩)” 때문에 기세가 웅장하고 고금에 길이 빛나니 후인들에게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다. 소동파(蘇東坡)는 《전적벽부(前赤壁賦)》에서 “술을 걸러 강에 임하고 창을 비껴들고 시를 읊으니 진실로 일세의 영웅(釃酒臨江,橫槊賦詩,固一世之雄也)”이라고 칭했다.
청나라 때의 심덕잠(沈德潛)은 “맹덕(조조)의 시는 여전히 한나라의 가락이다. 자환(조비) 이후는 순수한 위나라의 소리다.(孟德詩猶是漢音. 子桓以下, 純乎魏響.) 나지막하면서도 웅장하고 빼어나게 상쾌하고, 때로는 패자로서의 기상을 드러낸다”라고 평가했다.”(《고시원(古詩源)》권5) 또 “맹덕의 시는 구름을 뚫고 오르는 독수리와 같아서 날개를 떨치고 신속하게 일어난다. 연기를 가르고 하늘을 향해 선회하니 뜻이 곧추 위로 향하는데 잠시라도 내려오려 하지 않고 다시 높이 오르니 오르내리는 기세가 있다.”(청 유희재의 《시개(詩概)》)고 했다.
건안 13년(208년) 11월 15일 날씨가 쾌청하고 바람이 잔잔하고 파도가 고요했다. 조조는 “오늘 밤 큰 배 위에서 술잔치를 열어 여러 장수들을 대접하려 한다.”는 명을 내렸다. 이날 달이 아주 밝아서 장강(長江)이 마치 바람에 날리는 흰 띠처럼 반짝였다. 다시 배 위의 여러 장수들을 보니 하나하나 위풍이 당당했다. 조조는 먼저 장강에 술을 올린 후 잇따라 큰 잔으로 석 잔을 마신 후 창을 비껴들고 제장들에게 알렸다. “나는 이 창을 들고 황건적을 깨뜨리고 여포를 사로잡았으며 원술을 제거하고 원소를 거뒀다. 새북(塞北 만리장성 이북)에 깊이 들어갔고 요동까지 단번에 달려가 천하를 종횡했으니 대장부의 뜻을 자못 저버리지 않았노라.” 그러면서 창을 비껴들고 《단가행(短歌行)》을 지었다.
《단가행(短歌行)》
1수
술을 마주하고 노래하세 우리 인생 얼마나 되리!아침 이슬 같은 인생 지난 세월 고생 많았지탄식하며 슬퍼해도 맺힌 시름 떨치기 어렵구나어찌 시름 풀어볼까? 오직 두강의 술만 있을 뿐푸르른 그대 옷깃 내 마음에 아련한데오직 그대 때문에 지금까지 나직이 읊조리네“우우” 사슴소리 들판의 풀을 뜯는구나귀한 손님 내게 온다면 비파 타고 생황 불리라밝디밝은 저 달은 언제쯤 딸 수 있을까?마음에 솟는 시름 끊을 수가 없구나이리저리 먼 길 지나 황송하게 찾아와준다면오랜만에 만나 잔치를 벌이고 옛정을 간직하리라달은 밝고 별은 희미한데 까치가 남으로 날다가나무주위를 세 바퀴 돌더니 어느 가지에 의탁할까?산은 높다 거절 않고 바다는 깊어도 싫다 않네식사도 멈추고 인재 구한 주공 천하 인심 얻으셨네
對酒當歌(대주당가) 人生幾何(인생기하)譬如朝露(비여조로) 去日苦多(거일고다)慨當以慷(개당이강) 憂思難忘(우사난망)何以解憂(하이해우) 唯有杜康(유유두강)青青子衿(청청자금) 悠悠我心(유유아심)但爲君故(단위군고) 沉吟至今(침음지금)呦呦鹿鳴(유유녹명) 食野之蘋(식야지빈)我有嘉賓(아유가빈) 鼓瑟吹笙(고슬취생)明明如月(명명여월) 何時可掇(하시가철)憂從中來(우종중래) 不可斷絕(불가단절)越陌度阡(월맥도천) 枉用相存(왕용상존)契闊談宴(계활담염) 心念舊恩(심념구은)月明星稀(월명성희) 烏鵲南飛(오작남비)繞樹三匝(요수삼잡) 何枝可依(하지가의)山不厭高(산불염고) 海不厭深(해불염심)周公吐哺(주공토포) 天下歸心(천하귀심)
2수
주나라의 서백창(문왕)은 성스런 덕 품으셨네천하를 셋으로 나눠 그 둘을 가졌어도조공 받들며 신하의 절개 잊지 않았다네숭후의 참언으로 묶이는 몸 되었었지나중에 사면되어 정벌할 수 있는 부월(斧銊) 받아 사방을 정벌하셨다네공자께서 칭찬하셨네 뛰어난 덕행에도은나라를 모셨으니 그 아름다움 길이 남았네
周西伯昌(주서백창) 懷此聖德(회차성덕)三分天下(삼분천하) 而有其二(이유기이)修奉貢獻(수봉공헌) 臣節不墮(신절불타)崇侯讒之(숭후참지) 是以拘系(시이구계)後見赦原(후견사원) 賜之斧鉞(사지부월) 得使征伐(득사정벌)爲仲尼所稱(위중니소칭) 達及德行(달급덕행)猶奉事殷(유봉사은) 論敘其美(논서기미)
제환공의 공덕은 패자 중의 으뜸이라제후들 아홉 번 모아 천하를 바로 잡았다네천하를 바로잡되 무력을 쓰지 않았다네바르고 속이지 않으니 그 덕이 전해졌네공자께서 찬탄하시고 관중도 칭찬하시니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입었다네천자가 제수를 하사하고 절하지 말라 하셨으나환공은 감히 따르지 못하고 천자의 위엄 지척에 대하듯 했네
齊桓之功(제환지공) 爲霸之首(위패지수)九合諸侯(구합제후) 一匡天下(일광천하)一匡天下(일광천하) 不以兵車(불이병거)正而不譎(정이불휼) 其德傳稱(기덕전칭)孔子所歎(공자소탄) 並稱夷吾(병칭이오) 民受其恩(민수기은)賜與廟胙(사여묘조) 命無下拜(명무하배)小白不敢爾(소백불감이) 天威在顏咫尺(천위재안지척)
진문공도 패자 되어 힘껏 천자 섬겼으니제기와 제사용 곡물 술과 활을 하사받고천개의 활에 3백의 호위무사를 받았다네위엄으로 제후들 복종시키고 군사들의 존중 받았다네팔방에 명성 떨쳐 제환공에 버금갔으나하양의 모임에서 주왕을 우롱해 그 명성 어지러워졌네
晉文亦霸(진문역패) 躬奉天王(궁봉천왕)受賜圭瓚(수사규찬) 秬鬯彤弓(거창동궁)盧弓矢千(노궁시천) 虎賁三百人(호분삼백인)威服諸侯(위복제후) 師之所尊(사지소존)八方聞之(팔방문지) 名亞齊桓(명아제환)河陽之會(하양지회) 詐稱周王(사칭주왕) 是其名紛葩(시기명분파)
조조가 《단가행》을 지은 뜻은 천하의 현명한 인재들을 널리 끌어들이는데 있었다. 이 시는 스스로 몸을 낮춰 현명한 이들을 예로 대하고 목이 말라 갈증이 나는 것처럼 인재를 원하며 오직 재주만 있으면 등용한다는 조조의 인재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시는 어귀는 자연스럽지만 감정이 풍부하고 기백이 크고 웅장한 천고의 전창(千古傳唱)이다.
한편 손권은 노숙(魯肅)을 보내 유비를 만나게 했다. 노숙은 일찍이 손권에게 “세 발 솥처럼 강동을 차지하고 천하 형세를 살펴보는” 책략을 제출해 손권의 칭찬을 받은 바 있다. 노숙이 하구(夏口)로 가다 조조가 이미 형주로 떠났다는 말을 듣고는 밤을 달려 남군(南郡, 지금의 호북성 강릉현)에 이르렀다. 하지만 미처 남군에 도착하기도 전에 유종이 조조에게 투항했고 유비는 남쪽으로 달아난 뒤였다. 노숙은 지름길로 유비를 찾아가 당양의 장판에서 만났다. 노숙은 손권의 뜻을 전하고 천하정세를 논하면서 은근한 뜻으로 동오(東吳)와 함께 “한마음 한뜻으로 조조에게 맞서자”고 권했다. 제갈량은 노숙이 동오의 주전파(主戰派)임을 알고 그가 찾아온 기회를 이용해 그를 설득했다. 또 그를 통해 손권에게 서로 연합해 조조에 반대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전하게 했다.
이때 조조는 강릉에서 강의 흐름을 타고 강동(江東)으로 내려왔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말했다. “명을 받들어 손장군(이때 손권의 직책이 토로장군이었다)에게 구원을 요청하러 가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노숙과 함께 손권을 찾아갔다.
제갈량은 쌍방의 형세를 비교한 후 손권을 설득했다.
“유예주(劉豫州, 유비는 전에 예주목을 지냈다)의 군대가 비록 장판에서 패하긴 했지만 지금 돌아온 전사들과 관우가 거느린 정예 수군이 1만 명이고 유기(劉琦)가 강하(江夏, 호북성 마성현)에서 합친 전사 역시 만 명이 넘습니다. 조조의 무리는 먼 곳에서 와서 피폐합니다. 듣건대 예주를 추격한 경기병은 하루 밤낮에 삼백여 리를 갔다고 합니다. 이는 ‘강한 쇠뇌의 마지막 기세는 노나라 명주도 뚫을 수 없다(強弩之末勢不能穿魯縞)’는 상태에 해당합니다. 이는 병법(兵法, 손자병법)에서는 꺼리는 바 ‘반드시 상장군(上將軍)을 거꾸러뜨린다’고 했습니다. 또한 북방 사람들은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형주 백성들 중에서 조조에게 붙은 자들은 힘에 눌린 것이지 진심으로 복종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장군께서 진실로 용맹한 장군에게 명령해 수만의 병력을 통솔하게 하시고 예주와 함께 협력하신다면 반드시 조조의 군대를 깨뜨릴 수 있을 겁니다. 조조의 군대가 패하면 반드시 북으로 돌아갈 것이며 이렇게 되면 형주와 동오 지역의 세력이 강해져 세 발 솥과 같은 형태가 됩니다. 성패의 기회는 오늘에 달려 있습니다.”
손권이 제갈량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부하들과 함께 이 문제를 의론했다.
이때 조조가 손권에게 글을 보내왔다.
“근래에 천자의 말씀을 받들어 죄지은 자들을 처벌하고 깃발이 남쪽을 가리키니 유종이 항복해왔소. 지금 수군 80만을 다스려 바야흐로 장군과 오에서 사냥을 하고자 하오.(오를 정벌한다는 의미)”
손권이 신하들에게 이 글을 보여주자 모두들 깜짝 놀라 얼굴색이 변했다. 장사(長史) 장소(張昭) 등 대부분 조조에게 투항할 것을 주장했지만 노숙만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손권에게 말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살펴보니 오직 장군을 잘못 이끌려는 것으로 함께 큰일을 도모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금 저 노숙의 입장이라면 조조를 영접할 수 있겠지만 장군께서는 불가합니다. 장군께서 조조를 맞이하신다면 어디로 돌아가려 하십니까? 원컨대 하루 빨리 큰 계책을 결정하시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손권이 탄식하면서 “이 사람들이 지닌 생각이 나를 무척 실망하게 했다. 지금 경이 큰 계책을 열었으니 바로 나의 생각과 같다. 이는 하늘이 경을 내게 보내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때 주유(周瑜)는 명령을 받고 파양(鄱陽, 강서성 파양현)에 나가 있었는데 노숙이 손권에게 그를 불러들이게 했다.
주유는 양측의 형세를 분석한 후 손권에게 말했다.
“장군께서는 뛰어난 무용과 웅대한 재능을 지니셨고 또 아버님과 형님의 가업을 이어 사방 수천 리에 달하는 강동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병사들도 날래어 쓸 만하고 영웅들이 자신의 일을 즐겨 하며 천하에 횡행합니다. 반면 조조는 북방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마초(馬超), 한수(韓遂) 등이 아직 관서(關西)에 있어 조조에게 후방의 걱정거리가 됩니다. 게다가 조조는 또 말에서 내려와 수군에 의지해 오월(吳越, 강동지방)과 다투려 합니다. 또한 지금은 아주 추운 계절이라 말에게 먹일 풀이 없습니다. 중원의 병사들을 몰아 멀리 강과 호수를 건너게 하면 풍토가 맞지 않아서 반드시 질병이 생깁니다. 이는 모두 용병에서 걱정거리인데도 조조는 이를 다 무릅쓰고 움직였습니다. 저 주유에게 정예 병사 3만을 주신다면 하구에 주둔했다가 장군을 위해 조조를 격파하겠습니다.”
손권이 크게 기뻐하며 “하늘이 그대를 내게 보냈도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주유와 정보(程普)를 좌우독(左右督)으로 삼고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에 대항하기로 결정했다. 또 노숙을 찬군교위(贊軍校尉)로 삼아 전체적인 계획을 돕게 했다.
주유, 정보, 노숙 등이 수군 3만을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유비와 함께 조조의 군사들을 맞으니 쌍방이 적벽(赤壁)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때 조조진영에서는 전염병이 돌아 사망자가 많았다. 처음 전투에서 조조군이 패하자 장강 북쪽 오림(烏林) 일대까지 물러났고 조유의 전선(戰船)은 남쪽 적벽에 정박했다. 조조의 군사들은 수전에 익숙하지 못해 쇠사슬로 배들을 하나로 묶어 흔들리지 않게 했다.
주유의 부장 황개(黃蓋)가 거짓으로 투항하는 계략을 이용해 화공(火攻)법을 제안했다. 이때는 북풍이 계속 부는 때였지만 간혹 바람의 방향이 변해 동남풍이 세게 불 때가 있었다. 동오의 황개가 10척의 배를 이끌고 선두에서 돛을 올리자 나머지 배들도 나란히 나아갔다. 조조의 군영에서 2리 정도 떨어진 곳에 이르자 동시에 불을 붙이게 했다. 불길이 배에 붙어 맹렬히 타오르자 황개의 군사들은 모두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배는 여전히 쏜살같이 달려가 조조군의 전선(戰船)과 영채에 불이 옮겨 붙었다. 유비와 주유가 수륙 양방향에서 공격에 나서 조조의 군사를 남군(南郡, 허북성 강릉현)까지 추격했다. 이때 조조의 군사들은 굶주림과 전염병이 겹쳐 어쩔 수 없이 남은 배들을 전부 불태웠다. 조조는 정남장군 조인(曹仁)과 횡야장군 서황(徐晃)을 남겨 강릉을 지키게 하고 절충장군 악진(樂進)에게 양양(襄陽)을 지키게 한 후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적벽 전투는 조조 군중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이미 전력의 손상이 큰 상태에서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화염의 기세를 도운 것이니 실로 하늘이 한 것이지 어찌 사람의 일이었겠는가! 조조는 일찍이 손권에게 편지를 보내 “적벽 싸움에 마침 질병이 돌아 나는 배를 불태우고 스스로 물러났소. 그러나 이로 인해 주유에게 헛된 명성만 얻게 했소.”라고 말한 바 있다. 비록 하늘의 장난으로 조조가 강남을 차지하는 걸음을 가로막긴 했지만 큰 영웅이 웃으면서 백만의 용병을 논하고 풍운의 패기를 질타한 것은 후인들이 탄복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조조, 제갈량, 주유, 유비 및 손권 다섯 명의 천고 영웅인물들이 함께 큰 연극을 공연한 적벽전투는 삼국시기의 가장 휘황한 한 페이지를 써내려갔다. 후세의 많은 문인과 묵객(墨客)들은 적벽에서 수많은 감개와 영탄을 남겼다. 시선(詩仙) 이태백(李太白)은 적벽 싸움을 이렇게 묘사했다.
두 용이 전쟁으로 자웅을 겨룰 때적벽(赤壁)의 누선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네맹렬한 불길 하늘에 닿아 구름바다 비추니주유(周瑜)가 이곳에서 조조를 물리쳤네
二龍爭戰決雌雄(이용쟁전결자웅)赤壁樓船掃地空(적벽누선소지공)烈火張天照雲海(열화장천조운해)周瑜於此破曹公(주유어차파조공)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5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