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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조조(12): 대업 이뤘으나 제위는 사양

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7. 대업 이루고 제위는 사양해 천고에 명성 떨쳐

한 무제 시대 이후 유가사상과 외유내도(外儒內道)의 참위(讖緯)학설이 양한(兩漢, 전한과 후한)에서 유행했다. 이후 한나라 때는 경전에 통달하고 어질고 효순함이 인재선발의 근거가 되었다. 영제, 헌제 시기가 되어 한나라 말기에 이르자 사회도덕이 날로 추락해 부패한 유가와 세속적인 도가 세간에 널리 퍼졌다.

“수재로 추천받은 자가 글을 모르고 효렴으로 천거된 자가 부모와 별거하며 청백리가 진흙처럼 탁하고 용맹한 장수가 닭처럼 겁이 많다.”(《포박자외편》권15) 이는 혼탁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풍자한 것이다. 조조는 3차례에 걸쳐 구현령(求賢令, 현명한 사람을 구하는 명령)을 발표해 품행에 구애받지 말고 오직 재능만 있으면 천거하게 하여 천하의 영웅호걸들을 기용해 도로 다스렸다.

구현령(求賢令, 건안 15년, 210년)

예부터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우거나 다시 일으킨 군주가 일찍이 현인과 군자를 얻어 함께 천하를 다스리지 않은 자가 어디 있었는가? 현명한 사람을 얻으려고 하면서 마을 골목을 벗어나지 않았으니 어찌 요행으로 만날 수 있겠는가? 위에 있는 사람이 구하여 등용할 뿐이다. 지금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현자를 구하는 급박한 시기이다. 춘추시대 노나라의 대부 맹공작(孟公綽)은 ‘조(趙)나라나 위(魏)나라와 같은 큰 나라의 가신이 되면 여유로울 수 있지만 등이나 설과 같은 작은 나라의 대부를 이길 수는 없다.’고 말했다. 만약 반드시 청렴한 선비라야만 등용할 수 있다면 제환공이 어찌 천하를 제패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천하에 강태공(姜太公)처럼 뛰어난 재주를 품었음에도 남루한 옷을 입고 위수 물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또 진평(陳平)처럼 형수와 사통하고 뇌물을 받았다는 누명을 썼으나 위무지와 같은 이의 추천을 받지 못한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여러분은 나를 도와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추천하되 오직 재능만 있다면 추천(唯才是舉)하도록 하라, 내 그를 기용할 것이다.

단점이 있어도 인재를 등용하라는 명령(敕有司取士勿廢偏短令, 건안 19년 214년)

무릇 덕행이 뛰어난 선비라고 해서 반드시 진취적인 것은 아니며 진취적인 선비라고 해서 반드시 덕행이 뛰어난 것은 아니다. 진평에게 무슨 돈독한 덕행이 있었고 소진(蘇秦)이 언제 신용을 지켰는가? 하지만 진평은 한나라의 제업을 이뤘고 소진은 약소한 연나라를 구했다. 이를 통해 보건대 인재에게 단점이 있다고 해서 어찌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담당관이 이를 잘 생각한다면 인재가 버려지지 않을 것이요 관리도 일을 그르치지 않을 것이다.

현명한 사람을 추천함에 품행에 구애받지 말라는 명령(舉賢勿拘品行令, 건안 22년 217년)

옛날 이윤(伊尹)과 부열(傅說)은 천민이었고 관중은 환공의 적이었지만 모두 등용되어 나라를 일으켰다. 소하, 조참은 작은 고을의 아전이었고 한신, 진평은 오명과 비웃음을 안고 있었지만 마침내 왕업을 이루게 하여 만고에 이름을 남겼다. 오기(吳起)는 탐욕스런 장수로 아내를 죽여 믿음을 구하고 돈을 뿌려 벼슬을 구했으며 모친이 죽어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위나라에 있을 때 진나라 사람들이 감히 동쪽을 넘보지 못했고 초나라에 있을 때는 삼진(三晉, 조, 위, 한 세 나라)이 감히 남쪽을 넘보지 못했다. 지금 천하에 지극한 덕을 갖고 민간에 묻혀 있거나 과감하고 용감해서 적과 맞설 수 있는 그런 인물을 얻을 수는 없겠는가? 만약 학문이 얕은 아전이라도 재주와 자질이 남다르다면 혹 장수의 소임을 맡을 수 있을 것이며 오명과 비웃음을 당하거나 혹 어질지 못하고 불효한 자라 하더라도 나라를 다스리고 군사를 이끄는 능력이 있을 수 있다. 그대들 각자 아는 대로 천거해 하나도 버려지는 이가 없게 하라.

사서에는 조조에 대해 “사람을 잘 파악하여 거짓으로 미혹하기 어려웠다. 우금과 악진은 사졸에서 발탁했고 장료와 서황은 적의 포로를 등용해 모두 큰 공을 세우게 하고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고 평가했다.

건안 24년(219년) 위왕 조조가 표문을 올려 손권을 표기장군으로 삼고 가절(假節)을 주어 형주목의 업무를 관장하게 했으며 남창후(南昌侯)에 봉했다. 손권이 교위(校尉) 양우(梁寓)를 보내 조공하게 하고 전에 포로로 잡았던 주광(硃光) 등을 돌려보냈다. 또 상서를 올려 조조에게 신하를 자칭하면서 천명(天命)을 들먹였다. 조조가 손권의 편지를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이 아이가 나를 화로 위에 앉혀 태우려 하는구나.”라고 말했다.

시중 진군(陳郡)과 상서 환계(桓階) 등이 조조에게 이 기회를 이용해 한나라의 운세가 다하고 황가(黃家)가 일어날 것이니 사양하지 말고 마땅히 천하를 차지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들은 “한나라는 안제(安帝) 이래 정치가 황실을 떠나고 국통(國統, 적장자 승계)이 여러 번 끊어졌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직 이름만 남아 있고 아주 작은 땅과 백성뿐이니 모두 한나라의 것이 아닙니다. 오래되어 이미 운수가 다했으니 오늘날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환제와 영제 때 도참에 정통한 자들이 모두 ‘한나라의 운세가 다하고 황가가 마땅히 흥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전하께서 시대의 요구에 응해 천하의 10분의 9를 차지하고도 한실(漢室)을 섬기시니 모든 사람들이 이를 바라보며 멀거나 가깝거나 원망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에 손권이 먼 곳에서 신하를 칭한 것이니 이는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응해 서로 다른 기가 같은 소리를 낸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이 생각하건대 순임금과 우임금도 천하를 사양하지 않으셨고 은나라와 주나라도 천자를 주살하거나 추방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늘을 두려워하고 천명을 알았기 때문에 사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장 하후돈(夏侯惇)이 말했다.

“천하는 모두 한나라의 복이 이미 다했고 새로운 조대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자고로 백성들의 고통을 없애 민심이 귀부하는 자가 바로 백성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30여 년 동안 전장을 누비시며 백성들 사이에서 공덕이 드러나 천하가 귀의했습니다. 이는 하늘에 순응하고 민심에 따르는 것으로 더 이상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하지만 조조는 끝내 이에 따르지 않았다. 대신 “공자께서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한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 역시 정치’라고 하셨다. 만약 내게 천명이 있다면 나는 주문왕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조조는 이처럼 삼가며 신하의 자리를 지켰고 한 황실을 지켰다.

조조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평생 전쟁터를 누볐으니 그야말로 ‘무력으로 천하를 정벌하고 왕자가 나라를 다스리는(兵征天下,王者治國)’ 규칙을 완벽하게 풀어냈고 대업을 크게 이뤘다. 하지만 조조는 삼가 천명에 따르고 제위에 오르길 거절했다. 천하를 삼분해 같은 시기 다른 영웅인물들과 함께 ‘의(義)’의 내포를 지극히 풀어내내 후세에 천고에 남을 아름다운 장면을 남겨주었다.

건안 25년(220년) 정월 조조가 낙양에 도착했다. 경자일 낙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6세였다.

이에 앞서 조조는 이미 자신의 뒷일을 당부하는 명령을 내렸다.

“옛날의 장례는 반드시 척박한 땅에 묻었다. 서문표(西門豹)의 사당 서쪽 언덕 위에 수릉을 만들되 언덕 높이 그대로 무덤을 만들고 봉분을 올리거나 나무를 심지 마라. 《주례(周禮)》에 따르면 총인(塚人, 묘지기)이 국가의 무덤을 관리하고 능묘 좌우 앞에는 제후들의 무덤을 배치하고 경대부들은 뒤쪽에 무덤을 배치했다. 한나라에서도 이를 배릉(陪陵)이라 했다. 공경, 대신, 큰 공을 세운 장수들은 마땅히 수릉에 함께 무덤을 쓰고 묘역을 넓게 만들어 모두 받아들일 수 있게 하라.”

또 “내가 군중에서 법을 지킨 것은 옳았다. 그러나 다소 화를 내거나 크게 잘못한 일은 마땅히 본받지 말아야 한다.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옛 규정을 따를 수 없다. 매장이 끝나면 모두 상복을 벗도록 하라. 병사를 통솔해 수비지에 주둔한 자는 모두 수비지역을 떠나서는 안 되며 담당 관리들은 각자 자신의 직무를 다하라. 시신을 염할 때는 평상복으로 하고 업성 서쪽의 서문표 사당 근처에 묻어라. 황금이나 옥 진귀한 보물은 넣지 마라.”라고 했다.

조조와 변씨(卞氏) 소생의 큰아들 조비(曹丕)가 왕위를 이어받고 조조에게 무왕(武王)이란 시호를 내렸다. 2월 정묘일에 조조의 명령에 따라 고릉(高陵)에 장사지냈다.

유비는 표문을 써서 “저 유비는 조공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염(韓冉)에게 조서를 받들어 보냈습니다.” “아울러 비단과 베를 바칩니다.”라고 했다.

11월 계유일 조비가 헌제를 산양공(山陽公)으로 강등해 한나라의 정삭(正朔)을 행하며 천자의 예악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또 조조를 무황제(武皇帝)로 추존하고 묘호를 태조(太祖)라 했다.

후세인들은 천고영웅 조조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정사 《삼국지》 저자 진수: “한나라 말기에는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영웅호걸들이 도처에서 일어났다. 원소는 4주를 근거지로 삼아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는데 매우 강성해서 대적할 자가 없었다. 태조(太祖 조조)는 책략을 이용한 계책을 세워 천하를 평정했다. 신불해와 상앙의 법술을 받아들이고 한신과 백기의 기발한 책략을 사용해 재능 있는 자에게 관직을 주고 사람마다 가진 재능을 살려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고 냉정한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옛날의 악행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마침내 국가 대사를 완전히 장악하고 홍대한 사업을 완성시킬 수 있었으니 오직 그의 명석한 책략이 가장 우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범한 인물이며 세상을 뛰어넘은 영걸이라 할 수 있다.”

《삼국연의》 저자 나관중: “위대하도다! 위 태조여, 천하의 어지러운 연기를 소탕했다. 움직이고 멈춤에 모두 지혜로웠고 높거나 낮거나 현명한 인재를 잘 썼다. 오랫동안 백만 대군을 지휘하고 직접 13편의 주(손자병법을 말함)를 달았다. 호걸이 동시에 일어났으나 누가 감히 채찍을 더할 수 있으리오?”

이찬(李瓚): 《후한서 당고열전(黨錮列傳)》

“시대가 장차 혼란해질 것인데 천하영웅 누구도 조조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양무(涼茂): (《삼국지‧위서‧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涼國田王邴管傳)》)

“조공(曺公 조조)은 국가의 위기와 패망을 근심하고 백성들의 고통과 원한을 위로해 주었으며 의병을 이끌고 천하를 위해 잔적들을 주살했으니 공이 높고 덕이 넓어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손초(孫楚): 《진서(晉書)‧열전》

“태조는 운을 이어 제때에 신묘한 무용을 발휘해 사나운 폭란을 토벌하고 화하를 평안히 하셨다. 하늘의 명령에 협조해 천명을 모으셨으니 마침내 넓은 터를 다지고 위나라의 영역이 있게 하셨다.”

육기(陸機) 《조위무제문(吊魏武帝文)》

한나라 황실의 마지막 단서를 이어받으니왕도의 길 많이 이그러졌네.깊은 못 속에 잠겨 잠룡을 길러상서로운 구름 어루만지며 하늘 멀리 날으셨네.신도(神道)를 운행해 덕을 싣고 신령한 바람 타고 위엄을 떨치셨네.번개처럼 숱한 영웅 거꾸러뜨리고강적을 제거함이 물건 줍듯 하셨네.원대한 책략으로 천하를 지향해 모든 폭란 다스린 후에야 편안해졌네.천지인(天地人) 삼재의 부족한 법을 다스려 천지의 금문을 열으셨네.끊어졌던 기강 다시 세우고흩어졌던 예악을 회복하셨네.흉악한 무리 소탕해 청렴하고 공정하게 만드니도처의 다양한 인재들 다투어 귀부했네.크고 빛나는 덕 세상을 덮으시니일월과 함께 그 빛을 발하는구나.구주에 큰 공을 세우셨으니 진실로 온 세상이 추숭할 만하도다.

接皇漢之末緒(접황한지말서) 值王途之多違(치왕도지다위)佇重淵以育鱗(저중연이육린) 撫慶雲而遐飛(무경운이하비)運神道以載德(운신도이재덕) 乘靈風而扇威(승영풍이선위)摧群雄而電擊(최군웅이전격) 舉勍敵其如遺(거경적기여유) 指八極以遠略(지팔극이원략) 必翦焉而後綏(필전언이후수)釐三才之缺典(이삼재지결전) 啟天地之禁闈(계천지지금위)舉修網之絕紀(거수망지절기) 紐大音之解徽(유대음지해휘) 掃雲物以貞觀(소운물이정관) 要萬途而來歸(요만도이래귀) 丕大德以宏覆(비대덕이굉복) 援日月而齊輝(원일월이제휘) 濟元功於九有(제원공어구유) 固舉世之所推(고거세지소추)

반악(潘嶽) 《서정부(西征賦)》:

“위무제가 벼락처럼 화를 내고 정의로운 언사를 받들어 반란을 토벌하니 적들이 수가 많다한들 어찌 하겠는가 끝내 위무제의 신묘한 계책에 패하고 말았구나.”

왕도(王導) 《진서‧열전》:

“옛날에 위무제는 정치에 통달한 군주였고 순욱은 최고의 공신이었다.”

배송지 《삼국지‧위지‧무제기》 주:

“위 태조는 임기응변에 뛰어났고 불세출의 책략이 있었다.”

왕발(王勃) 《삼국론(三國論)》:

“위무제의 용병술은 손자나 오기와 흡사해서 적을 만나면 기발한 책략을 사용해 패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동쪽으로 교활한 여포를 사로잡고 북으로는 강적 원소를 몰아냈으며 수장(壽張)에서 황건적을 격파하고 사견(射犬)에서 휴고(眭固)의 목을 베었다. 또 북벌에 나서 답돈(蹋頓)선우를 베고 남쪽으로 진격해서는 유종(劉琮)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장열(張說) 《업도인(鄴都引)》:

그대는 위무제가 처음 기틀을 다지고 제위를 다투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많은 영웅들 서로 미워하며 다퉜었지낮에는 용사들을 이끌고 적진을 깨뜨렸고 밤이면 화려한 궁실에서 시를 읊조렸네.업성은 서산 남쪽을 휘감고 장하(漳河) 강가에는 무성한 나무숲웅장했던 성곽은 폐허로 변하고 서원(西園)에는 밝은 달만 남았구나!과거의 고관대작과 춤추던 미녀들은 모두 무덤의 재가 되고시험 삼아 춤추던 동작대에 올라보니 서늘한 가을바람만 남아있네!

君不見魏武草創爭天祿(군불견위무초창쟁천록)群雄睚眥相馳逐(군웅애자상치축)晝攜壯士破堅陣(주휴장사파견진) 夜接詞人賦華屋(야접사인부화옥)都邑繚繞西山陽(도읍요요서산양) 桑榆汗漫漳河曲(상유한만장하곡)城郭爲墟人代改(성곽위허인대개) 但有西園明月在(단유서원명월재)鄴傍高塚多貴臣(업방고총다귀신) 娥眉曼睩共灰塵(아미만록공회진)試上銅台歌舞處(시상동대가무처) 唯有秋風愁殺人(유유추풍수살인)

송나라 때 무학(武學)박사로 무경7서를 교정한 하거비(何去非):

“말로 하는 전투는 손무(孫武)만한 이가 없지만 실제 용병에서는 한신, 조조만한 사람이 없다. 무학은 비록 책으로 쓸 수는 있지만 스스로 사용하는 것을 보기란 쉽지 않다. 한신은 스스로 책을 내지 않았고 조조는 비록 책을 내긴 했지만 후세에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학문은 모두 무(武)에서 나온 것으로 이 때문에 용병이 신묘하면서도 막힘이 없었다. 만약 무경 13편을 전부 암송해서 그 쓰임을 모두 알게 한다면 천하에 누가 한신이나 조조가 될 수 없겠는가? 한신과 조조는 후대에 계승자가 없었기 때문에 무릇 무서를 얻어 읽은 자라 할지라도 모두 전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魏)나라가 망하고 진(晉) 왕조가 시작되면서 조조를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동잡어(異同雜語)》를 저술한 손성(孫盛)은 조조에 대한 허소의 평가를 ‘난세의 영웅’에서 ‘난세의 간웅(奸雄)’으로 바꿨다. 또 조조가 여백사(呂伯奢) 일가를 죽이고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겠다(寧我負人,毋人負我)!”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는 《삼국연의》의 각색을 거치면서 허구로 만들어낸 이야기가 많았음에도 조조의 진정한 영웅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천하에서 가장 부정적이고 나쁜 간웅으로 만들어버렸다. 예를 들면 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공격한 것에 대해 손성은 “도겸의 죄로 말미암아 그 속부(屬部)를 잔인하게 죽인 것은 과오다.”라는 등이다.

동진(東晉)의 습착치(習鑿齒)는 《한진춘추(漢晉春秋)》에서 최초로 조조의 찬역설을 주장했다. “삼국시대에 촉은 한나라의 종실로 정통성을 지녔다. 위무제의 위나라는 비록 한나라의 선양을 받아 진나라에 선양했으나 그 본질은 찬역이었다.” 심지어 실질적인 진(晉)나라 창업자인 사마의(司馬懿)야말로 한나라에 공을 세웠다면서 역사를 왜곡시켰다.

손성, 습착치 등의 영향으로 남북조 시기 및 당송(唐宋)이후 전문적으로 조조의 이미지를 폄훼하는 이야기들이 많아졌고 진정한 영웅의 이미지는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세설신어(世說新語)》를 지은 남조(南朝) 송나라의 유의경(劉義慶)은 조조에 관련된 내용을 전부 ‘가휼(假譎, 거짓과 속임수라는 의미)’편에 집어넣었다.

오대십국 이후 남당(南唐)과 남송(南宋) 등 남방을 대표하는 정권들은 삼국시기 오나라와 촉나라를 중시하는 소위 ‘남조정통론(南朝正統論)’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되자 자연히 북방의 여러 정권들은 모두 사이비 조정의 도적이 되었다. 게다가 남송시대에 성리학이 유행하면서 군신간의 도리와 예의를 특별히 강조할 필요성이 커지면서 조조의 형상은 점점 더 나쁘게 변했다.

송나라 때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司馬光)조차 《후한서 허소전》의 ‘난세의 영웅’ 대신 손성이 개작한 ‘난세의 간웅’을 사용했다.

남송에 들어와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조조를 원수처럼 여겼다. 주희(朱熹)는 《통감강목(通鑒綱目)》을 지어 차라리 수개월을 없앨지언정 위나라의 황초(黃初) 기년을 삭제하고 유비의 장무(章武) 기년을 사용해야 하며 조조를 ‘(정권을) 찬탈한 도적’이라 칭하며 비하했다.

원명(元明) 시기에는 희곡 무대에 삼국시대를 소재로 한 잡극(雜劇) 제목만 60여 종에 달했다. 이들 작품의 대부분은 촉한(蜀漢)을 중심으로 해서 유비를 높이고 조조를 폄하했다. 이렇게 원(元), 명(明), 청(淸) 시기 조조의 형상은 ‘간웅’으로 고정화되었고 조조의 장점은 전부 배제시켰다.

《삼국지‧촉지‧제갈량전》에는 후대에 《융중대(隆中對)》로 불리는 제갈량의 유비에 대한 제안이 나온다. 그중에서 제갈량은 “조조가 원소에 비해 명성은 미약하고 군사는 적었음에도 마침내 원소를 이겨 약자에서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천시(天時) 만이 아니라 또한 인모(人謀 사람의 꾀)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조는 백만 군사를 거느린 채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호령하므로(挾天子而令諸侯) 진실로 그와 다툴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다.

제갈량은 유비의 군사(軍師)이자 천상(天象)을 알고 대의(大義)에 밝은 인물이다. 때문에 촉이 천자를 끼지 않고 출정할 경우 ‘의’를 잃게 되고 또 조조가 적이었기 때문에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한다”고 한 것이다. 그럼에도 조조에게 천시뿐만 아니라 인모를 두루 갖추고 있다고 칭찬했으니 이는 사실상 ‘적’의 입장에서 조조를 존경한 것이다.

한편 《삼국지‧위서‧모개전》에서 모개는 조조에게 “무릇 전쟁이란 정의로운 자가 승리하는 법이며,…… 마땅히 천자를 받들고 신하답지 못한 신하들을 호령(奉天子以令不臣)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 조조가 이 말을 받아들였다.

가우(賈詡) 역시 “천자를 받들고 천하를 호령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편 《삼국지‧위서‧원소전》을 보면 원소의 모사 저수(沮授)가 원소에게 “천자를 끼고 제후들에게 호령하고(挾天子而令諸侯), 군사와 말을 길러 조정에 불복하는 자들을 토벌”하라고 제안한다. 여기서 ‘협(挾)’이란 으르고 협박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반면 ‘봉(奉)’은 존중하고 가르침을 받든다는 뜻이다. 불과 한 글자 차이지만 뜻은 전혀 다르다.

나관중은 《삼국연의》에서 의도적으로 조조가 말한 ‘봉천자(奉天子)’를 원소전에 나오는 ‘협천자(挾天子)’로 바꿔치기했다. 때문에 위인에 대한 더러운 오명이 대대손손 내려가며 퍼지게 된 것이다. 《삼국연의》는 이런 식으로 조조를 추악하고 간사한 영웅으로 만들었으며 그가 살인을 좋아하고 잔인하며 또 음험하고 속임수에 능한 찬탈의 화신으로 과장해 후세인들을 심각하게 오도시켰다. 이는 역사 속의 진실한 조조가 아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