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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조조(11): 한중을 잃고 관우를 깨뜨리다

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6. 위왕이 되어 한중을 잃고 관우를 깨다

장로(張魯)는 자(字)가 공기(公祺)로 패국 풍(豐)현 사람이다. 조부 장릉(張陵)이 촉 땅에 들어와 곡명산(皓鳴山)에서 도술을 배웠으며 줄곧 오두미도(五斗米道)를 믿어왔다. 조부와 부친 장형(張衡)이 사망하자 장로가 다시 널리 도를 행했다. 장로는 한중(漢中)을 차지하고 오두미도로 백성들을 가르쳤으며 스스로 ‘사군(師君)’이라 불렀다.

건안 20년 3월(215년) 조조가 대군을 직접 인솔해 장로에 대한 공격에 나서 7월 양평(陽平, 섬서성 면현 서쪽)에 도착했다. 장로는 한중을 들어 항복하고자 했으나 동생 장위(張衛)가 양평관의 험한 지세를 믿고 맞서 싸우자고 주장했다. 조조가 진격에 나서 평정한 후에야 장위가 항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로는 촉으로 들어가 남산(南山)으로 달아났다가 파중(巴中, 사천성 파중)으로 들어갔다.

장로가 달아날 때 주변에서 모두 금은보화와 창고를 다 태워버릴 것을 건의했으나 장로가 만류했다. “본래 국가에 돌려주려던 것인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 예봉을 피해 도망가는 것이니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보화와 창고는 국가 소유다.” 그리고는 창고를 그대로 봉하고 달아났다.

조조가 남정(南鄭)에 들어와서 이를 본 후 장로의 행동에 대해 크게 칭찬했다. 또 장로에게 본래 선의가 있음을 알고 사람을 보내 설득하게 했다. 장로는 결국 ‘차라니 위공의 노예가 되겠노라(寧爲魏公奴)’는 심정으로 ‘황의당왕(黃衣當王)’의 기치를 들고 조조 진영으로 갔다. 장로가 가족과 부하들을 이끌고 투항하자 조조는 장로를 손님의 예로 맞이하고 진남장군(鎮南將軍)으로 삼고 낭중후(閬中侯)에 봉하고 식읍 1만 호를 내렸다. 또 장로의 다섯 아들은 물론 부하인 염포(閻圃) 등도 모두 열후로 삼고 장로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다. 나중에 장로가 사망하자 시호를 원후(原侯)라 했고 아들 장부(張富)로 하여금 부친의 작위를 이어받게 했다.

조조가 뛰어난 계책으로 불과 반년 만에 한중을 얻자 조조군의 기세가 크게 올랐다. 이때 승상주부 사마의(司馬懿)가 조조에게 건의했다. “유비가 거짓과 폭력으로 유장을 포로로 잡았기 때문에 촉(蜀)인들이 아직 귀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유비가 멀리 강릉으로 원정에 나섰으니 이는 놓칠 수 없는 기회입니다. 지금 한중을 치자 익주가 진동하고 있으니 진군하시면 저들의 세력이 반드시 와해될 것입니다. 성인(聖人)께서는 이 기회를 저버리거나 놓치지 마십시오.” 즉 곧바로 촉에 진군해 유비를 격파하자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고 하더니 이미 농(隴, 한중)을 얻었는데 다시 촉(蜀)을 넘본단 말인가!”라고 완곡히 거절했다. 주부(主簿) 유엽(劉曄) 역시 “지금 (촉을) 취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입니다.”라고 권했지만 조조는 따르지 않았다. 또 하후연을 도호장군(都護將軍)으로 삼고 장합, 서황 등을 이끌고 함께 한중을 지키게 했다. 또 승상장사(丞相長史) 두습(杜襲)을 부마도위로 삼고 한중의 일을 감독하게 했다.

12월 조조가 남정에서 돌아오면서 하후연을 한중에 남겨 지키게 했다. 이 원정에 대해 시중 왕찬(王粲)이 오언시를 지어 찬양했다.

종군에는 즐거움과 괴로움 있으니 다만 주장(主將)이 누구인가 물을 뿐신무(神武, 뛰어난 무용)한 주장을 따르니 어찌 오랫동안 군사를 고달프게 하랴상공(相公, 조조)이 한중을 정벌하시니 발끈 노해 하늘같은 위엄 떨치셨네단번에 흉노를 멸하고 뒤이어 강(羌)족을 복종시키니서쪽 변방의 적들 거둠이 허리 굽혀 물건 줍 듯했네베푸신 포상은 산악을 넘고 풍성한 잔치는 강가를 넘었다네군중에 물자가 넘쳐나니 사람도 말도 모두 튼튼하구나걸어서 갔다 두 마리 말을 타고 오고 빈손으로 나갔다 돌아올 땐 여유가 넘치네삼천리 영토 개척 오고감이 나는 듯 빠른데춤추고 노래하며 업성에 들어서니 바라던 모든 것 빠짐없이 얻었구나

從軍有苦樂(종군유고락) 但問所從誰(단문소종수)所從神且武(소종신차무) 安得久勞師(안득구로사)相公征關右(상공정관우) 赫怒振天威(혁노진천위)一舉滅獯虜(일거멸훈로) 再舉服羌夷(재거복강이)西收邊地賊(서수변지적) 忽若俯拾遺(홀약부습유)陳賞越山嶽(진상월산악) 酒肉逾川坻(주육유천지) 軍中多饒飫(군중다요어) 人馬皆溢肥(인마개일비) 徒行兼乘還(도행겸승환) 空出有餘資(공출유어자) 拓土三千裏(척토삼천리) 往反速如飛(왕반속여비)歌舞入鄴城(가무입업성) 所願獲無違(소원회무위)

한편 유비 진영에서는 장로의 무리가 파중에 들어갔을 때 황권(黃權)이 말했다.

“만약 한중을 잃게 되면 삼파(三巴, 파중 파서 파군)가 부진해지니 이는 촉의 팔다리를 자른 것과 같습니다.” 유비는 이에 황권을 호군(護軍)으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장로를 맞으러 가게 했다. 하지만 장로가 그 전에 조조에게 투항해버리자 황권은 파중의 소수민족 추장들로 조조에게 귀순했던 박호(朴胡), 두호(杜濩), 임약(任約)을 공격해 격파시켰다. 조조는 전에 스스로 귀부해온 이들을 받아들이고 박호를 파동 태수 두호를 파서태수 임약을 파군태수로 삼고 모두 열후에 봉한 적이 있다.

조조가 장합에게 군사를 이끌고 삼파를 지키게 했는데 현지 백성들을 한중으로 이주하게 하고 탕거(宕渠)로 진군했다. 유비는 파서태수 장비를 보내 장합과 맞서게 했다. 장비가 공격한 지 오십여 일만에 장비가 장합을 습격해 대파했다. 장합은 달아나 남정으로 돌아갔고 유비 역시 성도로 돌아갔다.

건안 21년(216년) 2월 조조가 업성으로 돌아왔다.

5월 헌제가 조조의 작위를 높여 위왕(魏王)으로 삼았다.

조조가 3차례에 걸쳐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헌제는 조령을 내려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그대가 거듭 짐의 명령을 어기니 진실로 간절히 바라건대 이는 짐의 뜻에도 어긋나고 후세에 교훈을 남기는 것도 아니다. 그 뜻을 누르고 줄여 더는 고사하지 말라.”

이에 조조는 위왕이 되었고 식읍 3만호를 받았으며 지위는 제후왕 위에 있게 되었다. 천자에게 주청할 때 신하를 칭하지 않았고 조서를 받을 때 절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천자의 면류과과 수레와 의복, 깃발, 예악과 천지에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또 출입할 때 천자와 같이 경필(警蹕, 대열 앞에서 미리 소리를 지르는 것)하고 종묘 등의 제도는 모두 한나라 방식을 따르게 했고 도읍은 업성에 두었다. 또 왕자를 모두 열후로 삼았다.

건안 22년(217년) 정월 위왕 조조가 병력을 이끌고 거소(居巢, 안휘성 소호시)로 가자 손권이 유수(濡須, 안휘성 함산현)를 지켰다. 2월에 조조가 공격했다. 10월 헌제가 위왕 조조에게 12류 면류관을 사용하게 하고 여섯 필의 말이 끄는 금근거(金根車, 황금으로 장식한 천자가 타는 수레)를 타고 계절에 따라 5색의 부거(副車 금근거를 뒤따르는 오색 깃발을 단 수레)를 두게 했다.

건안 23년(218년) 4월 대군(代郡, 하북성 울현), 상곡(上谷, 하북성 회래현)의 오환 무신저(無臣氐)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가 아들인 언릉후(鄢陵侯) 조창(曹彰)을 효기장군(驍騎將軍)으로 삼아 이들을 토벌하게 했다. 조창은 어려서부터 활을 잘 쐈고 팔 힘이 아주 강했다. 조조는 아들을 훈계하며 “집에서는 부자지간이지만 일을 맡기면 군신지간이 된다. 움직일 때면 왕법에 따라 일에 종사해야 하니 너는 이를 명심하라.”고 했다.

조창이 대군의 오환부락을 공격하는데 몸소 육박전을 벌여 갑옷에 화살이 여러 개 박혔음에도 사기가 충천했다. 승기를 타고 북쪽으로 추격하다가 상건(桑幹, 하북성 양원현) 북쪽에서 적들을 대파했다. 이때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1천명이었다. 당시 선비족의 대인 가비능(軻比能)이 정세를 관망하다가 조창이 힘껏 싸워 가는 곳마다 격파하는 것을 보고는 항복을 청해왔다. 이에 북방이 모두 평정되었다.

건안 24년(219년) 하후연이 유비와 1년 넘게 싸웠다. 유비가 양평에서 남쪽으로 면수(沔水, 한수의 상류)를 건너 산을 따라 조금씩 나아가 정군산(定軍山)에 군영을 세웠다. 정군산은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굽어보고 동쪽으로 한중을 바라보는 한중의 전략적 요지였다. 하후연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싸웠다. 이때 유비의 책사 법정(法正)이 “공격해도 좋다.”고 하자 유비는 토로장군(討虜將軍) 황충(黃忠)에게 한밤중에 높은 곳에 올라가 북소리와 함성을 울리며 공격하게 했다. 동시에 군사를 보내 하후연의 군영을 둘러싼 녹각(鹿角 사슴뿔처럼 생긴 나무토막으로 적을 막는 장애물)에 불을 지르게 했다. 황충은 하후연의 군사를 크게 깨뜨리고 하후연과 익주자사 조옹(趙顒, 조조가 임명)의 목을 베었다.

이에 앞서 하후연이 몇 차례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위왕 조조가 그를 경계하며 한 말이 있다.

“장수된 자는 마땅히 두려워하고 나약할 때가 있어야 하며 단지 용기만 믿어선 안 된다. 장수란 물론 용기를 근본으로 하지만 실행할 때는 지혜와 계략으로 해야지 용기만 믿고 한다면 한 사람의 필부만 대적할 뿐이다.”

하후연이 정군산 전투에서 패한 후 조조는 특별히 《군책령(軍策令)》을 발표했다.

“이달에 적들이 하후연 영채의 녹각에 불을 질렀다. 녹각은 본영에서 15리 떨어져 있었는데 하후연이 4백의 병사를 이끌고 녹각을 보수하러 갔다. 적들이 산위에서 이를 보고는 계곡 안에서 갑자기 출병하자 하후연이 병사들과 함께 싸웠으나 적들이 길을 돌아 후방을 쳤다. 병사들이 퇴각하는 와중에 하후연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심한 상처를 입었다. 하후연은 본래 용병에 능하지 못해 군중에서는 그를 백지장군(白地將軍)이라 했다. 군을 통수하는 자는 마땅히 직접 나가 싸워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녹각의 보수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장합이 병사들을 이끌고 양평(陽平)으로 돌아왔다. 이때 위나라 군사들은 대장을 잃고 군중이 혼란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독군(督軍) 두습(杜襲)과 사마(司馬) 곽회(郭淮)가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면서 장합을 임시 대장으로 추천했다. 장합이 나서서 군사를 수습하고 진영을 설치하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장합의 지시를 따르자 군심이 곧 평정되었다. 그는 곽회의 계책에 따라 굳게 지키기만 했다. 또 이 상황을 조조에게 보고하자 조조는 격려와 함께 사신을 파견해 장함에게 정식으로 장군의 부절을 주고 곽회를 사마로 삼게 했다.

3월 위왕 조조가 장안에서 야곡(斜谷, 섬서성 미현)으로 나와 한중으로 들어갔다. 승세를 탄 유비는 대담해져서 “비록 조조가 와 본들 별 수 없다. 나는 반드시 한천(漢川)을 지킬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험한 요새에 병력을 집결시킨 채 싸우려 하지 않았다. 조조와 유비 양측의 대치기간이 수개월에 이르렀지만 작은 전투만 몇 차례 있었다. 이 기간에 조조는 유비 측의 익군장군(翊軍將軍) 조운을 우연히 만나 소규모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오월이 되자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한중을 나가 장안으로 돌아갔다. 유비가 마침내 한중을 차지했다.

조조는 유비가 북쪽으로 무도(武都)를 차지해 관중을 압박할까 우려했다. 이에 옹주(雍洲)자사 장기(張既)의 계책을 채택했다. 장기로 하여금 무도에 남아 있던 오만(五萬)의 저(氐)족 부락을 부풍(扶風)과 천수(天水)의 경계로 나가 살게 했다. 또 조진(曹真)을 무도로 보내 조홍(曹洪) 등을 맞아 진창(陳倉)으로 돌아와 유비와 제갈량을 막게 했다.

7월 유비가 한중왕을 자칭하고 관우를 전장군, 장비를 우장군으로 삼았다.

이때 관우는 남군태수(南郡太守) 미방(糜芳)에게 강릉을 지키게 하고 장군 부사인(傅士仁)에게 공안(公安)을 지키게 한 후 자신은 무리를 이끌고 조인이 지키는 번성(樊城)을 공격했다. 조인은 좌장군 우금(于禁)과 입의장군(立義將軍) 방덕(龐德)을 번성 북쪽에 주둔시켰다. 8월 큰 비가 내려 한수가 범람하자 평지에 대여섯 길이나 물에 잠겼다. 우금 등이 이끌던 군사들이 물에 잠겨 고립되었다. 우금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높은 곳으로 올라가 물을 피하려했지만 피할 곳이 없었다. 이때 관우가 큰 배를 타고 와서 공격하니 궁지에 물린 우금이 어쩔 수 없이 투항했다.

하지만 방덕은 둑 위에 갑옷을 입고 서서는 화살을 쏘며 맞섰는데 한발도 빗나가지 않았다. 새벽부터 시작된 싸움이 한낮을 넘어섰다. 관우의 공격이 더 심해지고 화살이 다 떨어지자 방덕은 단검을 쥐고 육박전을 벌였다. 방덕은 싸울수록 기세가 더 높아졌지만 그 사이 물이 더 불어나자 부하들이 모두 투항했다. 방덕은 작은 배를 타고 조인의 진영으로 퇴각하려 했으나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활과 화살을 잃고 결국 관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방덕은 관우를 보고도 똑바로 서서 무릎을 꿇지 않았다. 관우가 “그대의 형(방덕의 사촌 형 방유(龐柔)를 말함)은 한중에 있소. 내 그대를 장수로 삼고자 했는데 왜 빨리 항복하지 않았소!”라고 말했다. 방덕은 “꼬마야, 항복이 웬 말이냐! 위왕(魏王)께서는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천하에 위엄을 떨치신다. 너의 용렬한 유비가 어찌 대적할 수 있겠느냐! 내 차라리 나라를 위한 귀신이 될망정 적의 장수가 되지는 않겠다!”라고 말했다. 이에 관우가 방덕을 죽였다.

아끼던 맹장 우금은 어이없게 관우에게 투항한 반면 마초(유비에게 투항) 휘하에 있다 귀순한 방덕은 오히려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는 한참동안 방덕을 위해 눈물을 흘리다 말했다. “내가 우금을 안 지 30년이 되었다. 하지만 위급한 지경에 처해 오히려 방덕만도 못할 줄이야.” 그리고는 방덕의 두 아들을 열후에 봉했다.

관우가 급히 번성을 공격하는데 성에 물이 차서 곳곳이 붕괴되자 모두들 두려움에 떨었다. 어떤 이가 조인에게 말했다.

“지금의 위기는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관우가 완전히 포위하기 전에 가벼운 배를 타고 밤에 달아나야 합니다.”

하지만 여남(汝南)태수 만총(滿龐)이 만류했다.

“산에서 흘러오는 물은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관우가 보낸 별장이 이미 인근에 주둔해 성 남쪽의 백성들이 두려움에 떤다고 합니다. 관우가 곧바로 진격하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 군대가 배후를 끊을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금 달아난다면 홍하(洪河) 이남의 땅은 더는 우리나라 땅이 아닙니다. 마땅히 버텨야 합니다.”

조인이 이 말에 찬성했다. 이에 백마(白馬)를 잡아 군인들과 한마음으로 굳게 성을 지키기로 맹세했다. 당시 성안에는 수천의 사람과 말이 있었는데 물에 잠기지 않은 곳이 얼마 되지 않았다. 관우는 배를 타고 성으로 다가와 겹겹이 포위하고 성안과 밖의 왕래를 차단했다. 성 남쪽에서는 끊임없이 관우를 대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관우의 명성이 중원 지역에서 크게 떨쳤다.

위협을 느낀 위왕 조조가 관우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허도를 옮기는 문제를 의론하기에 이르렀다. 승상군 사마 사마의와 서조속(西曹屬) 장제(蔣濟)가 말했다.

“우금의 군사는 홍수에 빠진 것이지 싸움에 진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나라의 큰 계획에 손상을 줄 정도는 아닙니다. 유비, 손권은 겉으로는 친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소원합니다. 관우의 뜻대로 되는 것을 손권은 결코 바라지 않을 겁니다. 손권에게 사람을 보내 관우의 배후를 공격하게 하고 장강이남 지역을 손권에게 준다고 하면 번성의 포위는 저절로 풀어질 겁니다.”

조조가 이 말에 따랐다.

한편 관우가 번성을 공격한 틈을 타서 동오의 손권은 육구(陸口, 호북성 가어현 육계진)를 지키던 여몽(呂蒙)을 육손(陸遜)으로 교체했다. 여몽의 병이 심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여몽과 달리 육손은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관우는 그를 어려워하지 않았다. 육손은 이를 이용했다. 그는 육구에 부임하자마자 관우에게 편지를 써서 그의 공적을 칭찬하면서 자신은 아주 겸손하고 낮추고 충심을 다해 스스로를 의탁하고 싶다고 했다. 관우는 아주 편안해하면서 더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후방을 지키던 병사들을 조금씩 빼서 모두 번성으로 보냈다. 관우는 비록 우금 등이 거느리던 수만의 인마(人馬)를 얻긴 했지만 식량이 떨어져서 상관(湘關, 손권의 지역)의 쌀을 멋대로 탈취해갔다. 손권이 이 말을 듣고는 마침내 군사를 파견해 관우를 기습하게 했다.

손권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여몽은 심양(尋陽, 호북성 무혈시)에 도착해 정예 병사들을 모두 큰 배에 타게 하고 상인들이 입는 흰옷을 입고 노를 저어 밤낮으로 나아가게 했다. 관우가 강변에 배치한 둔후(屯候, 주둔지의 척후병)들을 잡아 모두 묶어두었기 때문에 관우는 사전에 이들의 출병사실을 전혀 몰랐다. 한편 관우의 부장 미방과 부사인은 평소 관우가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을 싫어했다. 관우가 출병하면서 두 사람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게 했으나 제때에 미치지 못하자 관우가 “돌아와서 마땅히 다스릴 것이다!”라고 겁을 주었다. 두려움에 떨던 두 사람은 남군(南郡, 호북성 강릉현)의 성문을 열고 여몽에게 투항했다.

관우는 남군이 격파 당하고 가족들이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번성의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관우는 여몽에게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소식을 탐문하게 했다. 여몽은 번번이 관우의 사자를 후대하면서 성안 곳곳을 두루 다니며 집집마다 문안하고 편지를 써서 소식을 전할 수 있게 했다. 사자가 돌아오자 관우의 부하들은 서로 소식을 전해 가족들이 무사할 뿐만 아니라 평소보다 더 대우가 좋아졌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군사들이 싸울 마음이 사라졌다.

손권은 여몽을 남군태수로 삼아 잔능후(孱陵侯)에 봉한 후 황금 5백 근과 1억 전의 돈을 하사했다. 또 육손에게 임시로 의도(宜都, 호북성 지성시)태수 업무를 관장하게 했다.

궁지에 몰린 관우는 서쪽으로 가서 맥성(麥城 호북성 당양시)을 지켰다. 손권이 주연(硃然), 반장(潘璋)을 파견해 지름길을 차단하게 했다. 12월 반장의 사마 마충(馬忠)이 관우와 아들 관평을 장향(章鄉, 호북성 당양시 동북)에서 체포해 목을 베니 마침내 형주가 평정되었다. 손권은 관우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냈고 조조는 관우에게 후한 예로 장례를 치러주었다. 천고에 전해지는 조조와 관우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었다. 조조와 관우는 영웅을 아끼고 영웅을 알아보며 한번 받은 은혜는 몇 배로 크게 갚는다는 용천상보(湧泉相報)의 ‘의(義)’의 인연이라는 한 단락을 매듭지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5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