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5. 동관전투로 위공이 되고 정족을 이루다
동관(潼關 섬서성 동관현)은 중국 십대 명관(名關) 중 제 2위에 해당한다. 조조는 건안 원년(196년) 처음 동관을 건설했고 동시에 함곡관(函谷關)을 폐기했다. 《수경주(水經注)》에 따르면 “황하가 관내에서 남쪽으로 흘러 관산(關山)에 부딪히기 때문에 동관이라 한다.”고 했다. 이곳은 남쪽으로는 진령(秦嶺) 북으로는 황하, 동서로는 여러 하천과 운하로 가로 막힌 천혜의 요새로 “관문에서 9주를 누르면 나는 새도 넘어갈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건안 16년(211년) 봄 조조는 관서(關西)문제의 해결에 나섰다. 관서의 무장세력 중에서 가장 강한 자는 마초(馬超)와 한수(韓遂)였다. 이곳은 병사와 말이 사나운데다 농우(隴右)의 지형이 험하고 지역이 광활해서 쉽게 평정할 수 없었던 곳이다. 3월 조조는 우선 사예교위 종요(鍾繇)를 관중으로 진격하게 했다. 나중에 정서호군(征西護軍) 하후연(夏侯淵)이 하동으로 출격해 종요의 군사와 합하게 했다.
관중을 할거 하던 여러 장수들은 종요가 자신들을 습격한다고 의심해 마초, 한수, 후선(侯選), 양추(楊秋) 등 10개 부대가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마초, 한수를 총두령으로 거느린 병력이 10만에 달했는데 동관을 점거하며 지켰다. 조조는 안서장군(安西將軍) 조인(曹仁)에게 대군을 이끌고 가서 압박하되 “관서의 병사들이 용맹하니 굳게 지키기만 하고 싸우지는 말라”고 지시했다.
7월 조조는 조비, 정욱을 업성에 남아 지키게 하고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서쪽 원정에 나섰다. 조조의 군사가 마초 등과 동관에서 대치하자 여러 사람들이 의견이 분분했다. “관서의 병사들이 강하고 긴 창을 잘 쓰니 정예병을 선봉에 세우지 않으면 당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조조는 “전투란 내게 달린 것이지 적에게 있지 않다. 적이 비록 긴 창을 잘 쓴다고 하지만 나는 그들이 함부로 창을 찌르지 못하게 하겠다. 제군들은 오직 보고만 있으라.”라고 했다.
조조는 겉으로는 동관을 정면공격하는 것처럼 병력을 집중해 적의 후방을 비우게 한 후 서황(徐晃)과 주령(朱靈) 등을 보내 몰래 포판진(蒲阪津, 산서성 영제현 서쪽의 황하나루)을 건너가 황하 서쪽에 교두보를 만들게 했다. 조조의 대군이 위수(渭水)를 건너는데 마초 기병들의 공격으로 영채를 세우지 못했다. 또 땅에 모래가 많아 보루를 쌓는 것도 힘들었다.
은사(隱士) 누자백(婁子伯, 누규)이 한 가지 묘책을 냈다. “오늘 날씨가 추우니 모래로 성을 쌓을 만합니다. 물을 길어 뿌리면 하룻밤이면 완성할 수 있습니다.”
조조가 이 의견에 따라 고운 비단자루를 많이 만들어 물을 담아 운반하고 야밤에 강을 건너가 성을 쌓게 했다. 동틀 무렵이 되자 모래성이 완성되었다. 이에 조조 군이 모두 위수를 건널 수 있었고 복병이 마초의 습격을 물리쳤다.
마초 등이 위수 남쪽에 주둔해 황하 서쪽 땅을 주는 조건으로 강화를 요청했지만 조조는 이를 불허했다. 9월 조조 군이 위수를 건너가서 싸웠다. 조조는 먼저 경병(輕兵)을 보내 적을 도발하게 했다. 전투가 어느 정도 지속되자 날랜 기병(騎兵)을 풀어 좌우에서 협공해 적을 대파했다. 한수와 마초는 양주(涼州)로 달아나고 양추는 안정(安定, 감숙성 진원현)으로 달아나 관중이 평정되었다.
전투가 끝난 후 제장들이 조조에게 물었다. “애초 적들이 동관을 지키고 있어 위수의 북쪽 길은 텅 비어 있었는데 하동에서 풍익(馮翊, 위수 북쪽 지역 섬서성 고능현)을 공격하지 않고 도리어 동관을 지키면서 시간을 끈 후 북쪽으로 건너간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조조가 말했다.
“적들이 동관을 지키는데 내가 만약 하동으로 들어간다면 적들은 반드시 여러 나루들을 지킬 것이니 서쪽으로 황하를 건널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많은 병력을 동관으로 보낸 것이다. 적의 무리들이 전부 남쪽을 지키자 서하(西河)가 텅비어 서황과 주령 두 장군에게 서하를 탈취하게 했다. 그런 후에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강을 건너게 한 것이다. 적들이 우리와 서하를 다툴 수 없었던 것은 두 장군의 부대 때문이다. 또 수레를 연결해 목책을 세우고 용도(甬道, 양쪽에 담을 쌓은 길)를 만들어 남쪽으로 간 것은 이미 이길 수 없다고 한 것으로 적에게 약한 면을 보인 것이다. 위수를 건너 보루를 견고하게 하고 적들이 와도 싸우지 않은 것은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적들은 병영과 보루를 만들지 않고 땅을 나누길 요구한 것이다. 내가 그들의 말을 따르는 척한 이유는 그들이 편안히 여겨 대비하지 않게 한 것이다. 또 이를 이용해 병사들의 힘을 비축해 하루아침에 적을 공격한 것이다. 소위 ‘요란한 천둥소리는 미처 귀에까지 들리지 않는다(疾雷不及掩耳)’는 것이다. 병법의 변화는 실로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게 아니다.”
이때에 이르러 실로 조조의 용병술이 노화순청(爐火純青, 연단할 때 화로의 불이 완전히 청색이 되는 최고의 경지)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전투 초기 관중의 여러 장수들의 부대가 하나씩 도착할 때마다 조조는 희색을 띠곤 했다. 제장들이 그 이유를 묻자 조조는 “관중은 길이 멀어 만약 적들이 각기 험한 지형에 의지한다면 이를 정벌하는데 한두 해만으로는 평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저들이 모두 모여서 왔으니 그 무리가 비록 많다고는 해도 서로 귀속되지 않고 적당한 주군도 없으니 단번에 없앨 수 있다. 공을 세우기가 좀 수월하니 그래서 내가 웃는 것이다.”라고 했다.
건안 17년(212년) 봄 정월 조조가 업성으로 돌아왔다. 천자는 조조에게 조서를 내려 고하거나 절할 때 이름을 부르지 말고 조정에 들어올 때 종종걸음으로 걷지 말며 칼을 차고 전각에 오를 수 있게 했다. 이는 서한 초기의 명재상 소하(蕭何)가 받았던 특별대우와 같은 것이다.
건안 18년(213년) 봄 정월 조조가 유수구(濡須口, 지금의 안휘성 함산현)로 보병과 기병을 합해 40만의 군사를 보내 강서(江西)에 있던 손권의 진영을 깨뜨리고 도독 공손양(公孫陽)을 사로잡았다. 이에 맞선 손권이 7만의 병력을 이끌고 방어에 나서 한달을 넘게 지켰다. 조조가 손권 부대의 선박과 기물 및 군사들의 대오가 정연한 것을 보고는 감탄하며 말했다. “아들을 낳는다면 마땅히 손중모(孫仲謀, 중모는 손권의 자)와 같아야 한다.”
이때 손권이 조조에게 쪽지를 써서 “봄철이라 물이 불어나려 하니 공은 마땅히 속히 떠나는 것이 좋겠소.”라고 권했다. 또 별도의 쪽지에 “족하께서 죽지 않는다면 내가 편안할 수 없소이다.(足下不死,孤不得安)”라고 했다. 조조가 여러 장수들에게 “손권이 나를 속이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영리하고 총명한 두 영웅이 서로 아끼는 마음이 글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조조는 군막에서 두 태양이 장강에서 떠오르는 꿈을 꾸고는 손권 역시 제왕이 될 운명임을 알았다. 그 후 조조는 또 두 차례에 걸쳐 강동 원정에 나섰지만 한번은 전염병 때문에 또 한번은 강화를 맺어 모두 큰 공 없이 돌아왔다. 결국 장강 남쪽으로는 한걸음도 넘어서지 못했다. 한나라 말기에 천하가 세 지역으로 나뉜 것은 실로 하늘의 뜻이지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서를 내려 14개 주를 다시 예전처럼 9주로 복원했다. 4월 조조가 업성에 이르렀다.
5월 천자가 어사대부 치려(郗慮)에게 지절을 주어 조조를 위공(魏公)에 책봉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그대는 천하를 평정한 공로가 있고 밝은 덕을 갖췄고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았으며 널리 풍속을 아름답게 하고 은혜와 교화를 베풀어 형벌이나 재판에 임해서는 인자한 마음으로 신중히 처벌했다. 이에 관리들은 가혹한 정치를 못하게 되었고 백성들은 나쁜 마음을 품지 못하게 되었다. 그대는 종친을 존중해 봉록과 작위가 끊어진 가계를 잇게 해달라고 청했으며 옛날의 덕과 이전의 공에 대해 모두 알맞게 했다. 비록 이윤의 덕이 하늘을 감동시키고 주공의 덕이 사해를 밝게 비췄다 해도 그대와 비교하면 미미할 뿐이다.”
“그대의 공적은 이윤이나 주공보다 높지만 받은 상은 제나라의 태공이나 진나라 문공만 못하니 짐이 심히 부끄럽도다. 짐이 미약한 몸으로 제위에 올라 늘 어렵고 힘들어 깊은 연못을 건너거나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 했다. 그대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짐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 기주의 하동, 하내, 위군, 조국, 중산, 상산, 거록, 안평, 감릉, 평원 총 10개 군을 그대에게 읍지로 하사하고 위공(魏公)에 봉하노라.” “또 그대에게 구석(九錫)을 내리니 삼가 짐의 명령을 따를지어다.”
조조는 이에 대해 “무릇 구석(九錫)을 받은 것은 널리 영토를 개척한 주공(周公)이고, 한나라 때 이성(異姓) 8왕은 고조와 더불어 포의(布衣)에서 함께 일어나 왕업(王業)을 열어 그 공이 지대하니, 내 어찌 이들에 비견되겠습니까?”라면서 3차례나 사양했다.
군사 순유는 물론 열후와 장군 등 30여 명이 일제히 권하자 조조는 바깥사람들을 타이르고 글을 올려 다만 위군(魏郡) 만을 받았다. 하지만 순유 등이 거듭 권하고 나서자 조조는 마침내 명령을 따르기로 하고 상서를 올려 다음과 같이 감사를 표시했다.
“신은 선제(先帝)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지위가 낭서(郎署)에 이르렀으나 천성이 게으르고 원하던 것이 다 충족되었기에 감히 고위직을 희망하거나 현달(顯達)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은총을 더해 재상의 지위 및 작위와 봉록을 내리심이 풍성하고 두터워 평생을 원해도 다 바라지 못할 정도입니다. 속으로 생각하길 앞으로 열후의 지위를 유지해 자손에게 물려주면 다행이니 스스로 영원히 중책을 맡지 않고자 했습니다. 뜻하지 않게 폐하의 성은을 입어 제후국(國)을 열고 구석(九錫)을 갖추어 어리석은 신에게 주셨습니다. 그 봉토는 제(齊), 노(魯)와 비교할 수 있고 번왕(藩王)과 같은 예로 하시니 공적이 없는 신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정성껏 말씀 올렸으나 청이 허락되지 않았고, 엄한 조령이 절박하게 이르니 진실로 신이 마음을 굽혀 따르고자 합니다. 엎드려 돌아보건대, 대신의 반열에 서서 왕실에 매인 목숨이라 제 몸은 저의 소유가 아닌데 어찌 감히 사사로이 하겠습니까?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앞으로 쫓겨나 설사 벼슬하기 전의 신분으로 돌아가더라도, 지금 강토를 받들어 왕실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고자 합니다. 감히 오래도록 이어 후세에 근심을 남기지 않겠습니다. 부자지간에 서로 종신토록 맹세하듯이 몸이 재가 되고 죽음에 이르더라도 두터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폐하의 위엄에 송구한 마음으로 조령을 받겠나이다.”
원문: 臣蒙先帝厚恩,致位郎署,受性疲怠,意望畢足,非敢希望高位,庶幾顯達.……陛下加恩,授以上相,封爵寵祿,豐大弘厚,生平之願,實不望也.口與心計,幸且待罪,保持列侯,遺付子孫,自托聖世,永無憂責.不意陛下乃發盛意,開國備錫,以貺愚臣,地比齊、魯,禮同藩王,非臣無功所宜膺據.歸情上聞,不蒙聽許,嚴詔切至,誠使臣心俯仰逼迫.伏自惟省,列在大臣,命制王室,身非己有,豈敢自私,遂其愚意,亦將黜退,令就初服.今奉疆土,備數藩翰,非敢遠期,慮有後世;至於父子相誓終身,灰軀盡命,報塞厚恩.天威在顏,悚懼受詔.
가을 7월에 위나라의 사직과 종묘를 세웠다.
건안 19년(214년) 3월 천자가 위공 조조의 지위를 제후왕 위에 두고 금새(金璽, 황금 인장), 적불(赤紱, 붉은 실을 수놓은 혁대), 원유관(遠遊冠, 제후왕이 쓰는 모자)으로 바꿔주었다.
헌제의 황후 복(伏)씨가 부친 복완(伏完)에게 밀서를 보내 헌제가 전에 동승(董承, 동황후의 부친)이 주살당한 것 때문에 조조를 미워한다면서 나쁜 말로 몰래 조조를 도모하게 했다. 복완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다 나중에 이 일이 누설되자 조조가 대노했다.
11월 어사대부 치려에게 지절을 가지고 가서 황후의 인새와 인수를 거두게 하고 상서령 화흠(華歆)을 부사로 삼아 병력을 이끌고 궁에 들어가 체포하게 했다. 황후가 문을 닫고 벽장 안으로 몸을 숨겼지만 화흠이 문을 부수고 벽장을 들어내 황후를 끌어냈다. 유폐된 후 사망했다.
같은 해 제갈량이 관우에게 형주를 지키게 하고 장비, 조운과 함께 강을 거슬러 올라 파동(巴東, 사천성 봉절현 동쪽)을 함락하고 강주(江州, 사천성 중경시)에 이르러 파군(巴郡)을 격파했다. 유비가 낙성(雒城, 사천성 광한시)을 포위한 지 1년이 되었을 때 방통(龐統)이 날아온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낙성이 함락되자 유비가 성도(成都, 사천성 성도시)로 진격해 성을 포위했다. 포위한 지 수십 일이 지났을 때 종사중랑(從事中郎) 간옹(簡雍)에게 성에 들어가 유장(劉璋)에게 유세하게 했다. 당시 성안에는 여전히 3만의 정병이 있었고 곡식과 의복은 1년을 지탱할 수 있었으며 관리와 백성들의 결사항전의 의지가 아주 높았다.
유장은 “우리 부자가 익주(益州)에 있은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푼 것이 없었다. 3년 전투에 백성들의 몸뚱이가 들판에 널리게 된 것은 나 유장 때문이니 어찌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마침내 성문을 열고 간옹과 함께 나와 투항했다. 아랫사람들 중에서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많았다. 유비는 유장을 공안(公安, 호북성 공안현)으로 옮기게 하고 그의 재물을 되돌려주고 진위장군(振威將軍)의 인수를 주었다. 진위장군의 직함은 전에 조조가 유장에게 준 것인데 유비가 그대로 차게 한 것이다.
성도에 들어온 유비는 스스로 익주목(益州牧)을 자처하고 군사중랑장 제갈량을 군사장군(軍師將軍)으로 삼았다. 관우에게는 형주의 일을 관장하게 했고 장비는 파서태수(巴西太守)에 임명했다. 익주는 지형이 험하고 물산이 풍부해서 진공하고 수비하는데 여유가 있었다. 유비가 익주를 얻자 위, 촉, 오 삼국의 정족(鼎足)의 국면이 기본적으로 형성되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