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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이백(4): 시선(詩仙) 주선(酒仙)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2장 시선(詩仙)의 문필과 검협(劍俠)의 의기

당나라(618~907)는 세계적으로 공인받는 중국 역사상 가장 강성한 시대였다. ‘한 조정의 천자에 한 조정의 신하’(一朝天子一朝臣)라 당나라는 개명한 정책 아래 여러 나라가 조공을 왔다. 날로 강성해지는 국력 아래 모든 것들이 갱신되었으니 문화, 경제, 국정, 외교 등의 방면에서 모두 찬란한 성취를 이뤘다. 대외적으로는 사상과 문화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지니고 온갖 다양함을 포용했기에 복식(服飾), 오락, 문학, 시가, 회화, 음식, 음악 및 무도(舞蹈) 등 다양한 사회생활이나 문화 방면에서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이목을 가장 집중시킨 당나라의 문학적 성취는 바로 당시(唐詩)에 있었다. 진자앙(陳子昂)과 초당사걸(初唐四傑 초당시기를 대표하는 네 시인으로 노조린, 낙빈왕, 왕발, 양형을 지칭)부터 시작해서 저명한 시인들이 잇달아 출현했다. 성당(盛唐)시기에는 하지장(賀知章), 두보(杜甫), 잠참(岑參), 왕유(王維) 등이 있었고 중당(中唐)시기에는 이하(李賀), 한유(韓愈), 백거이(白居易) 만당(晩唐)시기에는 이상은(李商隱), 두목(杜牧) 등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시선 이백으로 그가 이끈 풍소(風騷 시경과 이소를 말하며 우아하고 고상한 시가를 지칭)는 중국시가를 정상으로 밀어 올렸다. 비록 후세 송(宋), 원(元), 명(明), 청(淸) 시기에도 걸출한 시인들이 나타났지만 율시(律詩)와 고시(古詩)의 총체적인 수준은 당시(唐詩)의 높은 수준과는 비교조찰 할 수 없었고 당시는 중국 고시(古詩)에서 그야말로 넘어설 수 없는 봉우리가 되었다.

당나라는 또 도교(道敎)를 국교로 삼아 《노자》 등의 도교경전을 시험과목으로 삼아 인재를 선발했다. 당나라 초기 태종이 유학을 진흥시킬 때 또 불교 역시 크게 진흥시켰다. 고승 현장(玄奘)이 멀리 천축에 가서 경전을 구해오자 당나라는 이를 기회로 대안탑(大雁塔)을 건축해 이들 불경을 보존하게 했다. 불교의 주요 종파는 대부분 이 시기 중국에서 형성되거나 또는 성숙되었다. 때문에 유선(遊仙)이나 불(佛), 도(道), 신(神) 수련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 역시 아주 많았다.

시선의 웅장한 문필

성당시의 흐름은 씩씩하고 장쾌하면서도 기상이 아주 높았다. 이중에서도 가장 이목을 모으고 심금을 울리는 것은 바로 이백의 창작이었다. 이백의 시가는 성당시대의 정신풍모를 가장 충실하고 집중적으로 체현한다. 열정으로 가득 차 있고 뭔가 향상하려는 활기, 적극적이고 낙관적이면서, 개성적인 색채로 신이 전한 문필로 수련의 정수를 표현했다. 이백은 이 모든 것을 품고 중국 천년 시가사와 문학사에서 가장 풍요한 전성기를 만들어냈다. 이후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매 시기마다 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에 이백이 포함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이백은 사람들로부터 “천년에 독보적이며 오직 공 한사람뿐(千載獨步,唯公一人)”(이양빙의 《초당집서(草堂集序)》)인 시선(詩仙)으로 불렸고 그의 문학적 조예 역시 “앞에도 사람이 없었고 뒤로도 사람이 없다(前無古人,後無來者)”고 불렸다.

이백의 시가는 산실된 것이 많아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겨우 990여 수에 불과하다. 이백 시가의 소재는 아주 다양하다. 《촉도난(蜀道難)》, 《몽유천모음유별(夢遊天姥吟留別)》, 《장진주(將進酒)》, 《양보음(梁甫吟)》 등의 칠언고시, 《고풍(古風)》 59수 등 오언고시는 물론이고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 《망천문산(望天門山)》,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 등의 칠언절구는 모두 천고의 명편들이다. 이백의 시집은 정해진 책은 없어도 집집마다 보유할 정도로 중화 시단(詩壇)의 제일인자라 할 수 있다.

이백 시가의 언어풍격은 그 자신의 싯구로 표현하자면 “맑은 물에서 연꽃이 솟으니 자연스러워 꾸밈이 없다(清水出芙蓉,天然去雕飾).” 그는 대량의 악부시(樂府詩)를 썼는데 전체 시가의 4분의 1을 차지하며 당나라 때 악부시를 가장 많이 쓴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칠언가행(七言歌行)에 뛰어났는데 그 근원을 거슬러 가면 악부시에서 유래한다. 이백은 또 당대 악부의 절구(絶句) 역시 자유자재로 운용했다.

그는 평범함을 벗어난 뛰어난 예술천재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위대한 능력을 지녔다. 모든 것이 놀랍고 즐거우면서도 사람을 흥분시키는데 그러면서도 깊이 생각해보게 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 모든 것이 오직 그의 붓끝에서 나왔다. 두보는 “붓을 대면 비바람을 놀라게 하고 시가 완성되면 귀신을 흐느끼게 한다(筆落驚風雨,詩成泣鬼神)”(《기이십이백이십운(寄李十二白二十韻)》))는 찬사를 보냈다.

그는 평생 공명을 떨치지 못했고 오히려 평민의 신분이었음에도 권귀(權貴)들을 우습게 보곤 했다.

수풀 속에서 올곧게 살다 죽을지언정황금 새장에 갇혀 살기는 바라지 않네

乍向草中耿介死不求黃金籠下生

(《설벽사기고취치자반곡사(設辟邪伎鼓吹雉子斑曲辭)》)

어찌 눈썹 낮추고 허리 숙여 권귀(權貴 권세와 부귀)를 섬기느라내 마음과 얼굴을 펴지 못하게 하겠는가?

安能摧眉折腰事權貴使我不得開心顏

(《몽유천모음유별(夢遊天姥吟留別)》)

이백의 시가와 그의 고귀한 인격은 후대에 극히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중당 시기에 한유(韓愈), 맹교(孟郊), 이하(李賀)는 물론이고 송나라 때의 소식(蘇軾 소동파), 육유(陸遊), 신기질(辛棄疾), 명청 시기의 고계(高啟), 양신(楊慎), 공자진(龔自珍) 등 저명한 시인들은 모두 이백의 시가와 인격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이백은 고금에 널리 통했고 삼교와 구류(九流 각종 유파)를 융회관통(融會貫通)시켜 모두 흉금에 품었다. 때문에 다양한 문풍과 시체를 모두 사용할 수 있었으며 붓을 들면 곧 시가 이뤄졌고 형식에 구애받지도 않았다. 마침내 그 특유의 시풍과 문풍을 창립했으며 그 위대한 인격의 길을 따라 천고에 아름다운 이름을 날렸다.

시선, 주선(酒仙) 그리고 취성(醉聖)

시를 말하면 세인들은 늘 ‘당시(唐詩)’를 논하곤 한다. 또 시를 읊조리는 음시(吟詩)을 말하면 사람들은 종종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다(喝酒吟詩)’고 한다. 사실 중국 역대 왕조 중에서 문인이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 풍속이 가장 성했던 것 역시 당조(唐朝)였다. 이백은 시선이자 주선으로 60여년 생애 중에서 술과 떨어져 지낸 시기가 거의 없었다. 그는 일찍이 《증내(贈內)-아내에게》에서 자신이 “일년내내 매일 곤드레만드레(三百六十日,日日醉如泥)”였다고 했다.

이백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장진주(將進酒)》, 《산중여유인대작(山中與幽人對酌)》, 《월하독작(月下獨酌)》 등 수많은 명작들을 창작했고 이 작품들 모두 후인들에게 광범위하게 전해지거나 암송되었다. 그는 또 시를 통해 음주가 주는 즐거움에 대해 묘사하기도 했다. “살아있을 때 한 잔의 술이라도 즐겨야지 어찌 죽은 뒤에 천년의 명성을 바라겠는가(且樂生前一杯酒,何須身後千載名)”(《행로난(行路難) 3수》) “석 잔의 술은 대도와 통화고 한말의 술은 자연과 하나가 된다. 다만 취중의 흥취를 즐길 뿐 깨어있는 자들에겐 전하지 않네(三杯通大道,一斗合自然. 但得醉中趣,勿爲醒者傳)”(《월하독작(月下獨酌)》 2수)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하는 이유는 그가 신선을 찾고 도를 구해 아주 높은 경지까지 수련되었고 수련 중에서 본 선경과 만난 선인(仙人)들을 자신의 시(詩)와 부(賦)에서 많이 묘사했기 때문이다. 다만 수련하지 않거나 신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다. 때문에 속인들은 이백이 술에 취해 쓴 이런 작품들에 대해 흔히 몽상이나 환상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적지 않은 동시대인들은 이백이 본래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그를 가리켜 시선 또는 적선(謫仙)이라 칭했다. 예를 들면 사마승정(司馬承禎)이나 하지장(賀知章)과 같은 사람들이다.

장안에서 공봉한림(供奉翰林)학사로 있던 기간에 이백은 하지장, 최종지(崔宗之), 이적지(李適之), 이진(李璡), 장욱(張旭), 소진(蘇晉), 초수(焦遂) 등의 시인들과 어울렸는데 이들은 이백과 더불어 ‘음중팔선(飲中八仙)’이라 불렸다. 두보는 나중에 《음중팔선가(飲中八仙歌)》를 지어 이 8명의 시인들을 노래했다.

《음중팔선가(飲中八仙歌)》

하지장은 말을 타면 배를 탄 듯 흔들리다눈앞이 어지러워 우물에 떨어져도 물속에서 잠을 잔다.여양왕(이진)은 술 세 말을 마셔야 조정에 나가고길에서 누룩 수레만 만나도 침을 흘리며주천으로 옮겨주지 않음을 한스러워하네.좌상(이적지)은 하루 유흥비로 1만전을 쓰는데큰 고래가 강물을 들이키듯 술을 마시면서술잔을 들 때는 성인(청주)을 좋아하고 현인(탁주)는 피한다 하네.최종지는 말쑥하니 아름다운 청년인데잔 들고 흰 눈으로 푸른 하늘 바라보는데교결함이 옥수(玉樹 옥으로 된 나무)가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듯하다.

知章騎馬似乘船(지장기마사승선) 眼花落井水底眠(안화낙정수저면)汝陽三斗始朝天(여양삼두시조천) 道逢麴車口流涎(도봉국차구류연) 限不移封向酒泉(한불이봉향주천)左相日興費萬錢(좌상일흥비만전) 飮如長鯨吸百川(음여장경흡백천)銜杯樂聖稱避賢(함배락성칭피현)宗之瀟灑美少年(종지숙려미소년)擧觴白眼望靑天(거상백안망청천)皎如玉樹臨風前(교여옥수임풍전)

소진은 불상 앞에서 오래 재계하다가도술 취하면 종종 좌선을 벗어나길 좋아하네.이백은 술 한 말에 시가 백 편인데장안 시장 술집에서 취해 잠을 잔다네.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스스로 술 취한 신선이라 하네.장욱은 석 잔을 마시면 초성(草聖 초서의 성인)이라 전하는데왕공 앞에서도 모자 벗고 정수리를 드러내고붓을 들어 글을 쓰면 구름과 안개 서리는 듯.초수는 닷 말을 마셔야 신명이 나는데고상한 이야기와 웅변으로 사방을 놀래킨다.

蘇晉長薺繡佛前(소진장제수불전) 醉中往往愛逃禪(취중왕왕애도선)李白一斗詩百篇(이백일두시백편) 長安市上酒家眠(장안시상주가면) 天子呼來不上船(천자호래불상선) 自稱臣是酒中仙(자칭신시주중선) 張旭三杯草聖傳(장욱삼배초성전) 脫帽露頂王公前(탈모로정왕공전) 揮毫落紙如雲煙(휘모락지여운연)焦遂五斗方卓然(초수오두방탁연)高談雄辯驚四筵(고담웅변경사연)

이후 이백에게 ‘주선(酒仙)’이란 미명(美名)이 붙었다. 이백은 일생 중에 늘 시우, 도우(道友)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읊었고 또 종종 반쯤 취한 상태에서 지내곤 했다. 하지만 그가 쓴 명시들은 종종 술에서 깨어난 후 일필휘지로 쓴 것이 많았다. 술기운을 빌리면 이백은 더욱 뜻대로 발휘할 수 있었고 속인의 이치에 제한받지 않았다. 또 보다 많은 신이 전한 바른 이치[正理]와 선계(仙界)의 진실한 상황을 써낼 수 있었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이백에 대해 ‘취성(醉聖 술에 취한 성인)’이라 존칭했다. “이백은 술을 좋아해 작은 예절에 얽매임이 없었으며 깊이 취한 상태에서 문장을 썼지만 한 번도 착오가 없었고 취하지 않은 사람들과 의론할 때도 모두 태백의 소견을 넘어서지 못했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취성이라 불렀다.”(《천보유사(天寶遺事)‧취성(醉聖)》)

여기서 《장진주(將進酒)》를 감상해보자.

《장진주(將進酒)–권주가》

그대 모르는가황하의 강물이 하늘에서 내려와바다로 쏟아져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음을. 그대 모르는가고대광실 환한 거울 앞에서 흰 머리 슬퍼함을.아침엔 푸른 실 같더니 저녁에 눈처럼 세었구나!모름지기 인생은 마음껏 즐길지니황금 술통 빈 채로 달을 대하진 말라.하늘이 내게 재주를 내렸으니 필경 쓰임이 있으리니천금을 탕진해도 언젠가는 돌아올 터.양 삶고 소 잡아서 즐겨보세한번 마셨다면 모름지기 삼백잔이라.잠부자(잠징군)단구생(원단구)한 잔 드시오잔일랑 멈추지 말고그대 위해 한곡 읊어보리니그대 내게 귀 기울여 들오보게.온갖 악기 살진 안주 대단할 게 없다네.오로지 원하는 건 오래 취해 안 깨는 것.예로부터 성현들은 모두 흔적 없어도오직 술고래들은 이름을 남겼다네.예전에 진왕(조식)이 평락전에서 잔치할 때한 말에 만 냥 술을 흠뻑 즐겼다네.주인은 어이하여 돈이 적다 말하는가?당장 술 받아다 그대 함께 마셔야지.오화마천금 갖옷아이 불러 내어다 좋은 술과 바꿔그대 함께 만고의 시름 녹여 보세. 君不見(군불견)黃河之水天上來(황하지수천상래)奔流到海不複回(분류도해불부회)君不見(군불견)高堂明鏡悲白發(고당명경비자발)朝如青絲暮成雪(조여청사모성설)人生得意須盡歡(인생득의수진환)莫使金樽空對月(막사금준공대월)天生我材必有用(천생아재필유용)千金散盡還複來(천금산진환부래)烹羊宰牛且爲樂(팽양재우차위락)會須一飲三百杯(회수일음삼백배)岑夫子(잠부자)丹丘生(단구생)將進酒(장진주)杯莫停(배막정)與君歌一曲(여군가일곡)請君爲我傾耳聽(청군위아경이청)鍾鼓饌玉不足貴(종고찬옥부족귀)但願長醉不用醒(단원장취불용성)古來聖賢皆寂寞(고래성현개적막)唯有飲者留其名(유유음자유기명)陳王昔時宴平樂(진왕석시연평락)斗酒十千恣歡謔(두주십천자환학)主人何爲言少錢(주인하위언소전)徑須沽取對君酌(경수고취대군작)五花馬(오화마)千金裘(천금구)呼兒將出換美酒(호아장출환미주)與爾同銷萬古愁(여이동소만고수)

《장진주》는 또 《석준공(惜樽空)–술통이 빔을 아쉬워함》이라고도 한다. 《악부시집(樂府詩集)》 16권의 《고금악록(古今樂錄)》에서는 “한나라 때 고취곡 18곡 중에서 아홉 번째를 장진주라 한다.”고 했다. 내용은 대부분 벗과 잔치를 벌이며 마시고 노래하는 일이다.

이 시의 창작시기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일반적으로는 이백이 천보 연간에 장안을 떠나 양(梁), 송(宋) 지역을 유람하며 벗인 잠훈(岑勳), 원단구(元丹丘)와 만났을 때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잠훈은 숭산(嵩山)에 있었고 원단구는 영양산(穎陽山)에서 손님으로 있었는데 세 사람이 늘 높은 곳에 올라 술자리를 갖곤 했다.

이 시는 드높은 기세와 호탕한 성정으로 이백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이엄설당시(而庵說唐詩)》에서는 “태백의 이 노래는 가장 호방하고 재기(才氣)가 천고에 둘도 없다.”고 했다.

마지막 구절에서 ‘그대와 함께 만고의 시름을 녹여보세(與爾同銷萬古愁)’에서 만고의 시름에는 보다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전편을 감상해보면 정말로 오르내림이 너무 커서 이백과 같은 문필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다.

《장진주(將進酒)》는 글이 길진 않지만 오음(五音)이 다채롭고 기상이 비범해 그야말로 신래지필(神來之筆 신의 도움으로 쓴 글)에 속한다. 그의 붓은 감정이 풍부하고 유창하면서도 말이 극히 호방한데 그러면서도 침착하다. 이 시에는 고금을 진동시키는 기세와 힘이 있다. 《당시별재(唐詩別裁)》에서는 “이백의 시를 읽으면 웅장하고 상쾌한 가운데 심원하고 호탕하면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적선인(謫仙人)의 면모다.”라고 했는데 바로 이 시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월하독작(月下獨酌)》은 이백이 달을 감상하며 술에 취해 쓴 작품으로 또 하나의 천고명편(千古名篇)이다.

《월하독작(月下獨酌) 4수 제1수—달 아래 홀로 술을 마시다》

꽃 사이에 술 한 병 놓고친한 이 없이 홀로 마신다.잔 들어 명월을 청해오고그림자 마주하니 셋이 되었구나.달은 본래 술을 못하고그림자는 그저 나를 따를 뿐.잠시 달과 그림자와 어울려모름지기 봄을 즐겨야 하리.내가 노래하면 달은 서성이고내가 춤추면 그림자 어지러운데,깨어 있을 땐 함께 즐기지만취한 후에는 각기 흩어지네.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귐 길이 맺어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길.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舉杯邀明月(거배요명월)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月既不解飮(월기불해음)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行樂須及春(행락수급춘)我歌月徘徊(아가월배회)我舞影零亂(아무영영란)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醉後各分散(취후각분산)永結無情遊(영결무정유)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이 시는 대략 천보 3년(744년) 만들어졌는데 당시 이백의 나이 43세로 장안에서 한림으로 있을 때였다. 이백에게는 태양을 찬양하거나 달을 노래한 작품이 많다. 이백은 마치 해와 달에 대해 특별한 정취를 지닌 것같다. 예를 들어 허(許)씨 부인 소생의 딸 이름을 평양(平陽)이라 하고 아들의 아명은 명월노(明月奴)라 했다. ‘평양’에서 양(陽)은 태양을 뜻하고 ‘명월노’에는 직접 ‘명월’이란 두 글자를 사용했다. 아들의 이름은 나중에 백금(伯禽 역주: 주공의 아들 이름과 같다)으로 고쳤다.

이백은 달그림자를 벗 삼아 술에 취해 춤추고 노래하는 특이한 장면을 표현했다. 시인은 명월을 자신과 대화하고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벗으로 삼아 함께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도 춘다. 달은 비록 술을 마시지 못하고 그림자는 몸만 따를 뿐이지만 높은 달과 그림자가 서로 어울려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함을 방해하진 못한다.

“취하기 전엔 함께 즐기지만 취한 후에는 각기 흩어지네(醒時相交歡,醉後各分散)”는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와 같지 않은 적이 없으니 태어나면 서로 모이고 죽으면 이별하기 마련이다. 송나라의 대문호 소동파는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단지 몸이 이 산속에 있기 때문(不識廬山真面目,只緣身在此山中)”이라고 했다. 인간관계의 본질을 이처럼 밝게 볼 수 있어야만 비로소 인생에 대해 진실하고 냉정하며 초탈한 인식을 지닐 수 있다.

달은 이백 시에서 가장 흔히 나타나는 이미지다.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달과 관련된 그의 시만 3백여 수에 달한다. 달은 자고로 성결(聖潔)과 이상(理想), 정신 및 선계(仙界)를 대표한다. 시선은 달을 교묘히 이용해 세인들에게 숭고함을 동경해 세속에 찌든 때를 벗겨내고 최종적으로 반본귀진(返本歸真)하도록 인도한다. 그의 붓끝에서 달은 다양한 자태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밝은 달 천산 위로 떠올라 운해 사이에서 푸르게 빛난다”(明月出天山,蒼茫雲海間)(《관산월(關山月)》)

“취해 일어나 달 비친 계곡을 걷노라니 새도 돌아가고 인적조차 드물구나”(醉起步溪月,鳥還人亦稀)(《자견(自遣)》)

“산은 밝고 달빛에 이슬 빛나는데 밤이 조용하니 솔바람도 그쳤네”(山明月露白,夜靜松風歇)(《유태산(遊泰山) 6수》)

“녹라산의 가을 달은 오늘 밤 누구를 비추나”(秋山綠蘿中,今夕爲誰明)(《추야독좌회고산(秋夜獨坐懷故山)》)

달에 대한 그의 사랑은 가히 천하에 둘도 없다고 할 만하다.

《파주문월(把酒問月)–술잔 잡고 달에 묻다》

푸른 하늘에 달 있은 지 얼마나 되는가? 나 이제 술잔 멈추고 한번 묻노라.사람은 밝은 달에 오를 수 없지만달은 도리어 사람을 따라 움직이누나.나는 거울이 단궐(丹闕)에 임한 듯 환히 밝은데 푸른 안개 다 걷히니 밝은 빛 뿜어내네.단지 밤에 바다 위로 솟아나는 것만 보았으니새벽에 구름 사이로 잠기는 걸 어찌 알랴!흰 토끼는 사철 약 방아 찧는데 항아는 외로이 살며 누구와 이웃 하나?지금 사람은 옛날 달 못 보았겠지만지금 달은 일찍이 옛 사람들 비췄으리.옛 사람 지금 사람 흐르는 물과 같은데 밝은 달 보며 느끼기는 모두 이와 같으리라!유일한 바람이라면 술 마시고 노래할 때달빛이여 술항아리 속까지 오래 비추어다오.

靑天有月來幾時(청천유월래기시) 我今停杯一問之(아금정배일문지) 人攀明月不可得(인반명월불가득) 月行却與人相隨(월행각여인상수)皎如飛鏡臨丹闕(교여비경임단궐)綠煙滅盡淸輝發(녹연멸진청휘발) 但見宵從海上來(단견소종해상래) 寧知曉向雲間沒(영지효향운간몰)白兎擣藥秋復春(백토도약추부춘)姮娥孤棲與誰隣(항아고서여수린) 今人不見古時月(금인불견고시월) 今月曾經照古人(금월증경조고인)古人今人若流水(고인금인약유수) 共看明月皆如此(공간명월개여차) 唯願當歌對酒時(유원당가대주시) 月光長照金樽裏(월광장조금준리)

인생은 짧디 짧지만 밝은 달은 오래 존재한다. 예부터 지금까지 사람의 일은 쉽게 가버리지만 월궁의 옥토끼와 항아 등의 신선은 여전히 존재하는구나. 술잔을 잡고 시를 읊으면서 시인은 밝은 달과 함께 모습 오래 간직하리.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43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