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2. 선가황원(仙家皇院)을 마음대로 다녀
선가의 풍모[仙家風範]
동진(東晉) 이후 산수 유람기 형태의 시문이 관심을 받기 시작해 당나라 때부터 산수유람[遊山水]은 이미 대각(臺閣)이나 명승지, 변새(邊塞) 및 호화로운 대도읍지 유람 등으로 확장되었다. 때문에 당시(唐詩) 중에도 수많은 빼어난 산수시(山水詩)와 변새시(邊塞詩)가 나타났다. 당대(唐代)의 수많은 문인들은 벼슬길에 나서기 전에 장기간 유력(遊歷)을 떠나곤 했다. 이런 유력에는 명산대천을 찾아가 감상하고 견문을 넓히기 위한 필요 외에도 불(佛)・도(道)에 대한 신앙에서 우러나와 신선을 찾고 도인을 방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백은 《여산요기노시어허주(廬山謠寄盧侍禦虛舟)》에서 “오악에서 신선 찾으며 멀다고 마다않고 일생을 명산에 들어가 노닐기를 좋아했네(五嶽尋仙不辭遠,一生好入名山遊)”라고 했다. 그는 유력시인의 전형이자 대표이다.
당대(唐代)는 유(儒)석(釋)도(道)가 발전하고 널리 퍼진 전성기이자 문화가 번영하고 창성했기 때문에 천추의 위대한 시인들이 대량으로 출현했다. 사람들은 신불(神佛)을 믿고 공경했으며 많은 이들이 신선을 찾고 도를 방문하며 불가나 도가를 수련했다. 당대(唐代)는 농후한 신선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아주 널리 퍼져있었고 시가(詩歌)창작에는 더더욱 선풍(仙風)과 도가의 정취로 가득했다. 당대(唐代)에는 유선시도 아주 많았는데 수도인(修道人)이 쓴 것도 있고 문인이 쓴 것도 있다. 일부 수도인들은 그 자신 문장가이자 시인이었다. 예를 들면 도사 사마숭정, 시인 진자앙(陳子昂), 노장용(盧藏用), 송지문(宋之問), 왕적(王適), 필구(畢構),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하지장(賀知章) 등이다. 이들은 이백과 더불어 선종십우(仙宗十友)로 불린다. 이외에도 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 맹교(孟郊) 등 당대(唐代)의 저명한 시인들 역시 모두 유선의 내용을 지닌 많은 시사를 세상에 남겼다.
유선시(遊仙詩)는 중화 문단에서 한 떨기 기이한 꽃으로 깊고 두터운 전통문화가 축적된 것이 다. 옛사람들은 신을 공경하고 부처님을 믿었으며 신선의 인도를 받았다. 유선시를 통해 시공을 초월한 우주의식 및 수련에서 얻은 것과 수련에서 본 것을 천술(闡述)하는 동시에 세인들을 일깨워 속세란 짧고 고생스러우며 헛된 환상에 불과함을 투철히 보여주었다. 또 세간의 명리(名利 명예와 이익)와 물욕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하루 빨리 도를 닦고 선을 향하는 바른 길에 올라가, 천지의 도를 따르고 천지와 상응해야만 비로소 변화를 알고 변화에 응해 최종적으로 반본귀진(返本歸真)하고 진인(眞人)・정각(正覺)으로 수련성취할 수 있다고 일깨워주었다.
위무대제(魏武大帝) 조조(曹操)는 역사상 최초로 유선시를 창작한 시인이다. 현존하는 20여 수의 조조 시사 중에서 7편이 유선시다. 조조는 상서로운 황성(黃星)에 상응해 천운에 따라 태어났으며 진인(眞人)이 세상에 내려온 인물로 수도(修道)하고 양신(養身)했다. 그의 유선시는 자신의 수련, 체험 및 성취를 분명히 기록했고 또 후인들에게 선가의 풍모를 남겨주었다.
당대(唐代)에 이르러 유선시인 중 가장 저명한 시인을 꼽자면 당연히 시선 이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자칭 ‘적선(謫仙)’이라 했는데 이는 그가 선경에서 노니는 것이 마치 고향에 돌아간 것 같았고 신선을 만나는 게 마치 옛 친구를 재회한 것 같았으며 심지어 마치 놀다가 집에 돌아온 것처럼 모든 것이 너무나도 익숙하고 친근했기 때문이다.
《회선가(懷仙歌)–신선을 그리는 노래》
학 한 마리 동으로 날아 창해(滄海)로 건너가마음 놓고 너울너울, 어디인 줄 아느냐.선인들 호탕한 노래로 내가 오길 기다리니응당 옥수(玉樹 신선계의 나무)에 올라 오래 상대하리라.요순(堯舜)의 일이라도 놀랄 게 못되는데나머지 왁자한 소릴랑은 부질없구나.큰 자라야 삼산(三山)을 떠메고 가지 마라내 봉래산 꼭대기에 올라 보련다.
一鶴東飛過滄海(일하동비과창해)放心散漫知何在(방심산만지하재)仙人浩歌望我來(선인호가망아래)應攀玉樹長相待(응반옥수장상대)堯舜之事不足驚(요순지사부족경)自餘囂囂直可輕(자여효효직가경)巨鼇莫戴三山去(거별막대삼산거)我欲蓬萊頂上行(아욕봉래정산행)
이 시에서 “선인들 호탕한 노래로 내가 오길 기다리니 / 응당 옥수(玉樹)에 올라 오래 상대하리라.”는 서로 간절하게 상대방을 생각하고 있음을 표현한다. 이백은 선계에서 자유롭게 노닐 때 신선들이 모두 뜨겁고 각별한 정을 표현한다고 묘사했다.
다음 몇 편의 시에서도 옥녀가 “나를 운대에 오르게 초대해 위숙경에 공손히 읍하네(邀我登雲台,高揖衛叔卿)”라고 했고 또 적송자가 “내게 한 마리 흰 사슴을 빌려갔고(借余一白鹿)” 또 자황은 “흰 토끼가 찧는 약처방을 내렸다(乃賜白兔所搗之藥方)”고 했다. 또한 시인은 선인들의 초청에 대해 “미소 지며 선경으로 솟구쳐 오르니 기꺼이 그를 따르고 싶었네(含笑淩倒影,欣然願相從)”라고 응답했다. 그는 선경 속에서 자유자재 했고 마음대로 시공을 초월했다.
아래에 이백의 작품 몇 편을 감상해보자
《비룡인(飛龍引–용은 날아가고) 2수》
제1수
황제(黃帝)가 형산(荊山)에서 구리 솥을 만들어단사를 구웠네.단사가 황금이 되니용을 잡아타고 태청가(太清家 도가에서 말하는 하늘)에 올랐네.구름 같은 수심, 바다 같은 상념은 한숨만 짓게 할 뿐궁중의 고운 여인 꽃 같은 얼굴로너울너울 손 흔들며 노을 위로 솟아서바람에 몸을 실어 난거(鸞車 천자의 수레)에 올랐네.난거에 올라헌원(軒轅)황제를 모시고푸른 하늘에서 마음껏 노니그 즐거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다네.
黃帝鑄鼎於荊山(황제주정어형산)煉丹砂(연단사)丹砂成黃金(단사성황금) 騎龍飛上太清家(기룡비상태청가)雲愁海思令人嗟(운수해사영인차)宮中彩女顏如花(궁중채녀안여화)飄然揮手淩紫霞(표연휘수능자하)從風縱體登鸞車(종풍종체등난거)登鸞車(등난거) 侍軒轅(시헌원)遨遊青天中(오유청천중) 其樂不可言(기락불가언)
제2수
정호(鼎湖)에 흐르는 물 맑고 한가한데헌원황제 떠나실 때 활과 검을 남기시어옛사람 전한 도(道)가 그 가운데 남아 있네.후궁엔 아리땁고 꽃다운 얼굴 많았는데난새 타고 안개 날리며 돌아오지 않는구나.용을 잡아타고 천관(天關 천상세계)에 이르러천관에 이르러 하늘의 말씀 듣는다.구름 같은 수레에 선녀를 싣고선녀를 싣고자황(紫黃 천제) 옆을 지나노라자황께서 흰 토끼가 찧은 약처방을 내리시니하늘보다 오래 살아 삼광이 빛을 잃는구나.요지를 굽어보며 서왕모를 알현하니눈썹엔 희끗희끗 가을서리 내렸구나.
鼎湖流水清且閑(정호유수청차한)軒轅去時有弓劍(헌원거시유궁검)古人傳道留其間(고인전도류기간)後宮嬋娟多花顏(후구선연다화안)乘鸞飛煙亦不還(승란비연역불환)騎龍攀天造天關(기룡반천조천관)造天關(조천관) 聞天語(문천어) 屯雲河車載玉女(둔운하거재옥녀)載玉女(재옥녀) 過紫皇(과자황)紫皇乃賜白兔所搗之藥方(자황내사백토소도지약방)後天而老凋三光(후천이로조삼광)下視瑤池見王母(하시요지견왕모)蛾眉蕭颯如秋霜(아미소삽여추상)
옛날에 황제는 수산(首山)에서 구리를 채취해 형산(荊山) 아래에서 정(鼎 솥)을 만들었다. 정이 완성되자 용이 턱수염을 늘어뜨리고 황제를 맞이하러 왔다. 여러 신하들과 후궁들 중 70여 명이 황제를 따라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바람을 타고 난거에 올라 헌원황제와 함께 푸른 하늘을 노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즐거움을 노래했으니 얼마나 통쾌했을까!
당시 황제와 여러 신하들 및 후궁들이 정호에서 용을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여전히 일부 관리들이 남아 있었다. 이들이 모두 용의 수염을 붙잡고 놓지 않자 용의 수염이 뽑혀 아래로 떨어졌다. 황제가 사용하던 활도 떨어져 내려왔다. 황제는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가운데 천정(天庭)을 향해 날아올라갔고 남은 관리들은 다만 용수염과 활을 붙잡고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 시인은 하늘 수레를 타고 선녀를 싣고 자황 옆을 지났다. 자황께서는 흰 토끼가 찧은 약 처방을 하사했다. 자황이란 바로 세간에서 전해지는 도가 수련 중 최고(最高)의 신선이다. 때문에 이때의 시인은 자황이 계시는 선경(仙境)의 층차를 뛰어넘어 높은 곳에 거해 아래로 뭇신들을 내려다본다. 여기에는 눈썹이 희끗희끗한 요지의 서왕모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상연화산(西上蓮花山)》(《고풍(古風)》 19)
서쪽 연화산(서악 화산)에 올라 저 멀리 샛별선녀(화산에 사는 선녀)를 본다.하얀 손에 부용을 들고 허공을 걸어가며 태청(太淸)을 즈려밟누나.무지개 옷에 너른 띠 끌며 훨훨 몸을 날려 하늘로 올라가누나.나를 맞이해 운대에 올라서는 위숙경(衛叔卿 신선)에게 공손히 읍하도다.황홀하게 그와 함께 가는데 기러기 앞세워 자명(紫冥 선계)을 솟아보노라.고개 숙여 낙양의 내를 내려다보니 오랑캐 병사들 까마득히 내달리는구나.흐르는 피 들풀을 적시는데 승냥이와 이리들이 죄다 갓을 썼구나.
西上蓮花山(서산연화산) 迢迢見明星(초초견명성)素手把芙蓉(소수파부용) 虛步躡太清(허보섭태청)霓裳曳廣帶(예상예광대) 飄拂升天行(표불승천행)邀我登雲台(요아등운대) 高揖衛叔卿(고읍위숙경)恍恍與之去(황황여지거) 駕鴻淩紫冥(가홍릉자명)俯視洛陽川(부시낙양천) 茫茫走胡兵(망망주호병)流血塗野草(유혈도야초) 豺狼盡冠纓(시랑진관영)
이 시에서는 화산의 샛별선녀[明星]가 시인을 초대해 태청(太淸)선계로 날아오르는 가운데 우연히 신선 위숙경을 만났다. 고개 돌려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니 중원은 안사(安史)의 반란군이 가득하고 백성들이 위난에 처한 것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온다.
[역주: 여기서 위숙경은 《신선전》에 등장하는 신선으로 운모를 먹고 신선이 되어 화산으로 들어갔다. 한 무제 앞에 나타난 적이 있으나 무제가 신선을 몰라보고 무례히 대하자 말없이 사라졌다.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무제가 화산으로 사람을 파견해 그를 찾게 했다.]
《고풍》 20 일부
전에 제(齊)나라 도읍에서 노닐 적에 화부주(華不注) 봉우리에 올랐었네.이 산은 어이 그리 뾰족하던지 짙푸른 모양이 연꽃 같았네.사뿐히 날아온 옛 신선이 알고 보니 바로 적송자였네.내게 흰 사슴 한 마리 빌려주고 자신은 두 마리 청룡을 양편에 거느렸네.미소 지며 도경(倒景 선경)으로 솟구쳐 올라 기꺼이 그를 따르고 싶었네.
昔我遊齊都(석아유제도) 登華不注峰(등화부주봉)茲山何峻秀(자산하준수) 綠翠如芙蓉(녹취여부용)蕭颯古仙人(소삽고선인) 了知是赤松(요지시적송)借余一白鹿(차여일백록) 自挾兩青龍(자협양청룡)含笑淩倒景(함소릉도경) 欣然願相從(흔연원상종)
이 시에서 시인은 제남에 놀러가 화부주봉을 올라갔다 우연히 신선 적송자를 만난다. 적송자는 시인에게 흰 사슴 한 마리를 빌려준다. 시인은 “미소 지며 도경으로 솟구쳐 올라 기꺼이 그를 따르고 싶었네”라고 노래하며 적송자와 함께 선경을 노닐었다.
《몽유천모음유별(夢遊天姥吟留別)–꿈에 천모산을 노닌 것을 읊고 떠나다》
바다 사람들 영주(瀛洲)를 말하지만 안개 낀 파도 아득히 깔려 참으로 찾기 어렵다네.월(越) 사람들 천모산을 말하는데 구름 노을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혹 볼 수 있다네.천모산은 하늘과 맞닿아 하늘가에 비껴있는데 기세는 오악을 뽑고 적성산도 덮는구나.사만팔천장(四萬八千丈)이나 되는 천태산도 이 산을 마주하니 쓰러질 듯 동남으로 기울었네.이에 나는 오월(吳越)을 꿈꾸었으니 어느 밤 달 비치는 경호를 날아갔네.호수 달이 내 그림자 비추더니 나를 섬계(剡溪)로 보내주었네.
海客談瀛洲(해객담영주) 煙濤微茫信難求(연도미망신난구)越人語天姥(월인어천모) 雲霓明滅或可睹(운예명멸혹가도)天姥連天向天橫(천모연천향천횡) 勢拔五嶽掩赤城(세발오악엄적성)天台四萬八千丈(천태사만팔천장) 對此欲倒東南傾(대차욕도동남경)我欲因之夢吳越(아욕인지몽오월) 一夜飛度鏡湖月(일야비도경호월)湖月照我影(호월조아영) 送我至剡溪(송아도섬계)
사령운 머물던 곳 지금도 남아 맑은 물결 넘실대며 원숭이는 맑게 우네.사공(謝公)의 나막신 신고 푸른 구름사다리를 오르나니산허리에는 바다 위로 뜨는 해가 보이고 허공에는 천계(天雞 천상의 닭) 소리 들렸네.천개 바위와 만개 굽이에 정해진 길 없으니 꽃에 홀려 바위에 기대니 문득 이미 어두워졌네.곰이 포효하고 용이 울듯 시끄러운 바위샘 소리깊은 숲을 떨게 하고 겹겹의 봉우리도 놀래키네.구름은 어둑해져 비가 오려는 듯 물결은 출렁이며 물안개 피어나네.하늘이 갈라진 틈으로 번개와 우레 치더니언덕이며 산이 무너지고 꺾여신선 사는 동천 돌문 우르릉 쾅쾅 열렸네.푸른 하늘 넓고 넓어 끝도 보이지 않는데해와 달은 금은대(金銀臺)를 반짝반짝 비췄네.
謝公宿處今尚在(사공숙처금상재) 淥水蕩漾清猿啼(녹수탕양청원제)腳著謝公屐(각착사공극) 身登青雲梯(신등청운제)半壁見海日(반벽견해일) 空中聞天雞(공중문천계)千巖萬轉路不定(천암만전로부정) 迷花倚石忽已暝(미화의석홀이명)熊咆龍吟殷巖泉(웅포용음은암천) 栗深林兮驚層巔(율심림혜경층전)雲青青兮欲雨(운청청혜욕우)水澹澹兮生煙(수담담혜생연)列缺霹靂(열결벽력) 丘巒崩摧(구만붕최)洞天石扉(동천석비) 訇然中開(굉연중개)青冥浩蕩不見底(청명호탕불견저) 日月照耀金銀台(일월조요금은대)
무지개로 옷 해 입고 바람으로 말을 삼아구름위 신들이 어지러이 내려오는데호랑이는 비파를 타고 난새는 수레 끌며신선들이 삼대처럼 늘어섰네.갑자기 혼백이 놀라 요동치니 멍하니 놀라 일어나 길게 탄식하네.꿈에서 깨어나 보니 침상만 남아있고 지금껏 있었던 안개와 노을 사라져버렸네.세간의 즐거움 역시 이와 같으니 예로부터 모든 일은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로다.그대들과 이별하고 떠나가면 언제 돌아올까?장차 푸른 절벽 사이에 흰 사슴 풀어 놓았다가떠날 때 그것 타고 명산을 찾으리라.어찌 눈썹 낮추고 허리 숙여 권귀(權貴 권세와 부귀)를 섬기느라내 마음과 얼굴을 펴지 못하게 하겠는가?
霓爲衣兮風爲馬(예위의혜풍위마) 雲之君兮紛紛而來下(운지군혜분분분이래하)虎鼓瑟兮鸞回車(호고슬혜난회거) 仙之人兮列如麻(선지인혜열여마)忽魂悸以魄動(홀혼계이백동) 恍驚起而長嗟(황경기이장차)惟覺時之枕席(유각시지침석) 失向來之煙霞(실향래지연하)世間行樂亦如此(세간행략역여차) 古來萬事東流水(고래만사동류수)別君去時何時還(별군거시하시환) 且放白鹿青崖間(차방백록청애간)須行即騎訪名山(수행즉기방명산)安能摧眉折腰事權貴(안능최미절요사권귀)使我不得開心顏(사아부득개심안)
이 시는 천보 5년(746년) 작품으로 경지가 웅장하고 변화가 막측하다. 예술적 형상이 다채롭고 표현수법이 참신하면서도 기이해 지금껏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백의 가장 대표적인 시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시의 제목은 《몽유천모산별동로제공(夢遊天姥山別東魯諸公)–꿈에 천모산에서 노닌 것으로 동로의 여러 친구들과 작별하다》라고도 한다. 한림학사로 있던 이백은 천보 3년 당 현종이 하사한 황금을 받고 산으로 돌아온다. 장안을 떠난 후 동로(東魯)의 집에서 한 시기를 보냈다. 나중에 집을 떠나 또 다시 운유의 길에 올랐다. 이 시는 이백이 동로의 여러 친구들과 이별하면서 쓴 것이다.
이 시는 꿈에서 노닌 것을 묘사했지만 그렇다고 거짓은 아니다. 이는 그가 본 선경(仙境)을 꿈속의 경치로 표현한 것이다. 속인들은 이를 허황한 꿈속의 이야기로 여겨 그리 놀라워하지 않는다. 그가 술집에 몸을 감춘 것과 마찬가지로 속인사회의 ‘미혹’을 타파하지 않았다.
“바다 사람들 영주(瀛洲)를 말하지만 안개 낀 파도 아득히 깔려 참으로 찾기 어렵다네. 월(越) 사람들 천모산을 말하는데 구름 노을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혹 볼 수 있다네.”는 고대 전설에 바다 바깥에 영주라는 신선이 사는 곳이 있는데 허무하고 묘연해서 찾기가 아주 어렵다고 한다. 한편 현실 속 천모산은 뜬 구름에 가려 때로는 나타났다 사라지긴 하지만 오히려 볼 수 있다.
천모산은 섬계(剡溪 절강성 소흥의 계곡) 근처에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산에 오르면 천모(天姥)라는 신선이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산의 이름이 천모산이 되었다. 천모산은 천태산과 마주보는데 이백은 한림학사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 차례 놀러간 적이 있다. 그에게는 이곳 산수가 아주 익숙했다. 천모산이 비록 월 땅 동쪽에서 빼어난 곳이기는 하지만 다른 오대 명산인 오악(五嶽)에 비하면 손색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이백은 오히려 시에서 “천모산은 하늘과 맞닿아 하늘가에 비껴있는데 기세는 오악을 뽑고 적성산도 덮는구나.”라고 노래했다. 여기서 적성산(赤城山)은 천태산(天台山)의 다른 이름이다. 천모산이 하늘에 맞닿아 기세가 오악을 뽑을 듯 하니 천하명산 천태산마저 마치 천모산에 예를 올리는 것처럼 기울어졌다는 것이다.
후인들은 이를 이해할 수 없어 왜 이백의 붓끝에서 천모산이 천하의 유명한 오악이나 천태산보다도 높다고 했을까 의아해한다. 때문에 이것을 이백이 평생 경험한 기산준령(奇山峻嶺 기이한 산과 빼어난 고개)의 환영(幻影)으로 보고 현실 속의 천모산이 이백의 붓끝에서 과장된 그림자로 본다. 하지만 수련을 통해 아주 높은 경계에 도달한 후 이백이 이때 본 천모산은 다른 공간에서 드러난 천모산의 모습으로 다시 말해 선계(仙界)의 표현이다. 그러니 인간세상의 오악 등에 비교하자니 자연히 훨씬 높고 커서 비교조차 할 수 없으며 수승한 장관 역시 속인 공간에서 볼 수 있는 천모산이 아니었다.
달밤에 푸른빛이 비추자 이백은 맑은 거울과도 같은 경호를 날아 지나갔다. 밝은 달이 그의 그림자를 경호 위에 비추더니 또 그를 섬계에 떨어뜨렸다. 남북조 시기 위대한 시인이자 수련인이었던 사령운(謝靈運 사공)이 천모산을 노닐 때 일찍이 섬계에서 머문 적이 있다. 때문에 이백은 사령운이 전에 특별히 제작했던 나막신을 신고 일찍이 그가 올랐던 돌길인 청운제(青雲梯 푸른 구름사다리)를 올라간다. 그 후 바다에서 뜨는 해를 보고 굽이굽이 꺾어진 수많은 바위들을 보았다. 그러다 꽃에 취해 바위에 기대니 곰이 포효하고 용이 울부짖는데 구름은 짙어져 비가 올 것만 같고 물결은 출렁이며 물안개가 피어난다.
여기서 이백은 다른 공간에서 본 것을 한걸음 더 나아가 묘사한다. 그곳에서 그는 시공을 초월했고 주위의 일과 사물이 다른 공간에서 하나로 융합되어 나타났다. 다른 공간에서 일체 물체는 전부 생명의 체현이다. 세인들이 보는 봉우리나 깊은 숲, 돌은 마치 아무런 생명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공간에서는 그들 모두 생명의 체현형식이며 시인과도 서로 소통할 수 있다.
계속해서 시인은 “하늘이 갈라진 틈으로 번개와 우레 치더니 언덕이며 산이 무너지고 꺾였다”고 묘사하데 번개와 우레에 “신선 사는 동천 돌문 우르릉 쾅쾅 열렸다.” 갑자기 한 신선세계가 나타나더니 “푸른 하늘 넓고 넓어 끝도 보이지 않는데 해와 달은 금은대(金銀臺)를 반짝반짝 비췄네. 무지개로 옷 해 입고 바람으로 말을 삼아 구름위 신들이 어지러이 내려온다.”고 했다. 이는 분명 신선들의 모임이니 성대하면서도 열렬했다! “신선들이 삼대처럼 늘어섰다.”고 했으니 수많은 신선들이 대열을 지어 시인을 영접하러 온 것이다. 금대(金臺)와 은대(銀臺)는 일월과 더불어 서로 비추니 경치는 장엄하고 화려하며 이채롭기 그지없다!
많은 이들은 이런 것들을 시인의 꿈속 상상이나 낭만 등으로 간주하지만 사실은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이는 바로 이백이 수련에서 성취가 있고 열선(列仙)의 반열에 올라 천모산을 노닐고 여러 신들이 그를 맞이하러 나와 선계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백은 꿈에 노닌 것을 차용해 이런 기이한 경지를 써냈다.
한편 다른 공간의 선경이 홀연히 사라지자 시인은 곧 현실공간으로 되돌아온다. 즉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속인들에게 “예부터 모든 일은 동쪽으로 흐르는 물과 같다”고 일깨워준다. 아득한 만사는 모두 인연이 있으니 마땅히 천기(天璣)를 깨닫는다면 홍진(紅塵)을 간파해낼 수 있다. 물론 시인은 “장차 푸른 절벽 사이에 흰 사슴 풀어 놓았다가 떠날 때 그것 타고 명산을 찾으리라.”라고 했으니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선경을 다시 방문할 수 있다.
본래 이 시의 뜻은 이곳에 와서 거의 다 펼쳐냈지만 마지막에 또 “어찌 눈썹 낮추고 허리 숙여 권귀(權貴 권세와 부귀)를 섬기느라 내 마음과 얼굴을 펴지 못하게 하겠는가?”라는 두 구절을 첨가했다. 이는 이백의 처지가 이와 같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선인들이 그를 수련하라 초대하는데 어찌 인간세상에서 권력과 부귀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이백은 비록 현종의 지우(知遇)와 후한 대접을 받았지만 끝내 간신들의 질투 때문에 황금을 받고 산으로 돌아와야 했다. 물론 그의 사명 역시 황제를 모시고 황궁에서 늙는 것은 아니었다. 이백이 보기에 당시 당나라 조정의 고관대작들이 이것만도 못하니 어찌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힐 수 있겠는가?
이백의 많은 유선시들은 대부분 술에 취한 기운을 빌리거나 또는 꿈속의 장면을 썼다. 때문에 직접적으로 속인사회의 미혹을 타파하지 않았다. 두보는 이백을 생각하면서 “이백 형을 못 본지 꽤나 오래 되었는데 미친 척하며 떠돈다니 안타깝기 짝이 없네. 사람들이 모두 다 그를 죽이려 한다지만 나는 그가 불세출의 인재임을 안다네(不見李生久 佯狂眞可哀 世人皆欲殺 吾意獨憐才).”(《불견(不見)》)라고 했다. 여기서 그는 이백이 ‘미친 척(佯狂)’하면서 술기운을 빌려 진실을 드러내는 고충과 그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또 다음 구절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죽이려 하지만”이라고 분명히 말했으니 이는 단순한 과장법만으로는 볼 수 없다. 당시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백을 미워하고 질투했음에 틀림없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4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