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청성대첩(青城大捷)
전에 수양제(隋煬帝)가 정권을 잡은 이후 동도(東都) 낙양은 전국의 중심이 되었다. 낙양이 중원에 위치해 있고 대운하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 낙양은 이미 왕세충(王世充 역주: 원래 수나라 장수로 낙양을 구원하기 위해 들어와 월왕(越王) 동(侗)을 모시다가 스스로 자립함)이 차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장안을 차지한 대당이 천하를 통일하자면 반드시 낙양을 취해야 했다.
이연이 장안을 얻을 때 왕세충은 마침 와강군(瓦崗軍 이밀의 군대)과 교전 중이었다. 와강군은 수나라 말기 반란군 중에서 용맹하기로 이름이 났지만 무덕 원년(618년) 9월 수십만 대군이 모두 왕세충의 수하에게 패배했다. 왕세충은 와강군 이밀을 물리치고 이밀의 수하에 있던 일부 장수 및 주현(州縣)들을 얻었다. 같은 해 10월 이밀은 당나라에 투항해 장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얼마 후 반란을 꾀하다 발각되어 피살당했다.
이때 왕세충은 낙양을 굳게 지키면서 당나라의 하남(河南) 지역 일부를 탈취했다.
무덕 2년(619년) 4월 왕세충이 공제(恭帝) 양동(楊侗 수양제의 손자)을 폐위시키고 황제를 칭하며 국호를 정(鄭)이라 했는데 기세가 아주 방자했다.
무덕 3년(620년) 5월 이세민이 유무주를 제거한 후 산서에서 장안으로 돌아왔다. 한 달 넘게 휴식을 취한 후 7월 고조의 명령을 받들어 군대를 이끌고 낙양의 왕세충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다. 이세민은 군대를 곡주(穀州 지금의 하남성 의마시)에 주둔했다. 당나라 장군 나사신(羅士信)이 선두부대를 이끌고 자간(慈澗 낙양성 서쪽 주요 거점)을 포위하게 했다. 왕세충도 정예병력 3만을 이끌고 구원하러 나왔다.
이때 이세민이 정찰을 위해 경기병만을 이끌고 적진 가까이 접근했다가 갑자기 왕세충의 부대와 만나 쌍방간에 충돌이 생겼다. 병력 수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는데다 도로가 험해서 왕세충에게 포위당했다. 이세민은 주변 사람들에게 포위를 뚫게 하고 자신이 가장 위험한 후위를 맡았다. 왕세충의 대장 단웅신(單雄信)이 기병을 이끌고 공격해왔는데 공세가 아주 맹렬했다. 이세민이 좌우로 활을 쏘자 쏘는 대로 적이 쓰러졌고 적장 연기(燕頎)를 포로로 잡았다. 기세에 눌린 적군이 드디어 물러났다.
이세민이 군영에 돌아왔을 때 얼굴이 온통 먼지로 뒤덮여 아군 군사들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갑옷을 벗고 말을 한 후에야 진영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튿날 이세민이 보병과 기병 5만을 이끌고 자간으로 진군하니 왕세충은 자간을 지키던 병력을 낙양으로 철수시켰다.
이세민은 행군총관(行軍總管) 사만보(史萬寶)를 파견해 의양(宜陽 지금의 하남성 의양현)에서 남하해 용문(龍門)을 점거하게 했다. 또 장군 유덕위(劉德威)는 태행(太行) 동쪽에서 하내(河內)를 포위하게 했으며, 왕군확(王君廓)은 낙구(洛口)에서 왕세충의 식량운반통로를 끊게 했다. 또 회주총관 황군한(黃君漢)에게 하음에서 나와 회락성(回洛城)을 공략하게 했다. 황군한의 부하 장야차(張夜叉)가 수군을 이끌고 한밤에 회락성을 기습해 성을 함락시켰다.
이렇게 되자 황하 남쪽지역에서 당나라에 따르지 않는 곳이 없었고 잇달아 많은 성들이 투항해왔다. 이세민은 대군을 낙양 북쪽 망산(邙山)에 주둔시키고 낙양을 압박했다. 이렇게 몇 달을 버티자 왕세충의 각 지역 장수들이 앞을 다퉈 당나라에 투항해왔다.
620년 7월 유주(洧州 하남성 부구현) 장사(長史) 장공근(張公謹)이 자사 최추(崔樞)와 함께 유주성과 함께 투항했다. 8월에는 등주(鄧州 하남성 등주시) 토호가 왕세충이 임명한 자사를 잡아와 투항했고 9월에는 현주(顯州 하남성 필양현)총관 전찬(田瓚)이 자신이 다스리던 25개 주를 들고 와서 투항했다. 또 균주(筠州)총관 양경(楊慶)이 투항했고 위주(尉州 하남성 울지현)자사 시덕예(時德睿)가 7개 주를 들고 와서 투항했다.
10월에는 대장 장진주(張鎮周)가 투항해왔고 뒤이어 영주(榮州) 변주(汴州), 유주(洧州), 예주(豫州) 등 9개 주가 잇달아 투항해왔다. 이에 낙양 주변의 군현이 모두 당나라의 수중에 들어와 낙양성만 홀로 남게 되었다.
9월 21일 이세민이 5백의 기병을 이끌고 북위(北魏) 선무제릉(宣武帝陵)을 순시하는데 갑자기 왕세충이 이끄는 일만의 보병과 기병이 나타나 포위했다. 적장 선웅신(單雄信)이 긴 창을 들고 곧장 이세민에게 달려드니 당나라 군사들이 구원하려 해도 구할 수 없었다. 이때 얼마 전에 투항했던 울지경덕(尉遲敬德 역주: 송금강의 수하였다가 당군에 투항함)이 큰 소리를 지르며 말위에 뛰어올라 선웅신을 옆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리자 왕세충의 군대가 뒤로 물러났다. 울지경덕이 이 틈에 이세민을 보호하며 적의 포위를 뚫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왕(秦王) 이세민이 정예 기병 1천여 기를 선발해 모두 검은 옷에 검은 갑옷을 입혀 좌우 두 팀으로 나누고 진숙보(秦叔寶), 정지절(程知節), 울지경덕, 적장손(翟長孫) 등에게 나누어 거느리게 했다. 매번 전투할 때마다 이세민이 직접 검은 갑옷을 입고 선봉이 되어 기회를 타고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깨뜨리지 못하는 곳이 없었고 적들이 두려워했다.”
즉 이세민이 당나라 기병의 장점을 발휘하기 위해 특별히 가장 용맹한 정예기병 1천여 명을 선발해 현갑군(玄甲軍)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무덕 4년(621년) 2월 당나라 군사들이 청성궁(青城宮)에 진을 쳤다. 아직 벽과 보루를 쌓기도 전에 왕세충의 병마 2만 명이 방제문(方諸門 낙양성 서문)으로 나와 곡수(谷水)까지 나와서 진을 펼치자 당나라 군사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이세민이 북망산에 진을 치고는 적의 허점을 파악하기 위해 울지경덕과 함께 정예 기병 수십 명을 이끌고 왕세충의 진영을 이곳저곳 쳐들어가니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이었다. 그러자 당군의 사기가 크게 올라 왕세충 군대를 대파하고 적장 진지략(陳智略)을 포로로 잡고 천여 명의 목을 베고 6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싸움 이후 왕세충은 감히 함부로 출전하지 못했다. 왕세충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예전의 적이었던 하북의 두건덕(竇建德)에게 구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월 초 낙양이 포위된 지 오래되어 식량이 부족해지자 무뢰(武牢)에 주둔한 왕세충의 큰아들 왕현응(王玄應)이 수천 명을 이끌고 낙양으로 식량을 운반하려 했다. 이세민이 이 정보를 알고는 장군 이군선(李君羨)을 보내 저격하게 했다. 왕현응이 당황해 응전에 나섰으나 이군선에게 격퇴되었고 식량은 전부 당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왕현응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낙양으로 달아났다.
이세민은 이제 낙양에 대한 총공세를 발동할 시기가 무르익었음을 알고 우문사급(宇文士及)을 장안에 보내 황제의 명령을 받아오게 했다. 고조가 이 요청을 비준했다. 공격명령을 받은 이세민은 2월 13일 대군을 이끌고 청성궁에 진주했다. 당나라 군사들이 아직 영채를 세우기도 전에 왕세충이 직접 이끄는 2만의 인마가 낙양성에서 나와 공격해왔다.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했다. 이세민은 정예기병에게 북망산 아래에 진을 치게 하고는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북위(北魏) 선무제(宣武帝)의 능에 올라가 적정을 관찰하며 말했다. “적병들은 이미 형세가 궁색해져 있다. 이번에 왕세충이 전 병력을 전장에 투입한 것은 요행으로 한번 싸우려는 것이다. 오늘 격파하면 앞으로는 감히 다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에 굴돌통에게 5천 병력을 주어 곡수를 건너 왕세충을 공격하게 했다. 뒤이어 이세민이 직접 현갑군을 이끌고 적진을 쳐들어갔다.
이세민이 탄 말은 온몸이 자색으로 나는 것처럼 빨리 달린다고 해서 이름이 삽로자(颯露紫)였다. 이세민이 정예 기병 수십을 이끌고 마치 쏜살처럼 적진을 쳐들어가 맨 뒤까지 뚫고 나오자 정나라 군사들의 진영이 단번에 혼란에 빠졌다. 놀라서 두려워 떨다 격살당한 정나라 군사들이 아주 많았다.
이와 동시에 왕세충 역시 신속하게 흩어진 병력을 집결시켜 다시 진영을 짰고 계속해서 당군과 격전을 치렀다. 이 전투는 특히나 아주 참혹했다. 아침 진시(辰時)부터 이어진 전투가 오시(午時)까지 이어졌다. 당 기병에 의해 흩어졌던 정나라 군사들도 왕세충의 필사적인 노력에 의해 여러 차례 재집결했다. 왕세충의 군사들이 전에 없이 완강하게 버텼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결국 적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세민은 병사들을 지휘해 추격에 나서 단번에 포로로 잡거나 목을 벤 것이 모두 8천 명에 달했다.
왕세충은 이후 감히 출전하지 못하고 다만 성을 지키며 두건덕의 지원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당군은 낙양성 아래 호구(壕溝)를 파고 사방을 여러 겹으로 포위해 왕세충이 포위를 뚫지 못하게 막았다. 하지만 낙양성은 워낙 견고하게 쌓은 난공불락의 요새인데다 왕세충의 방어가 아주 엄밀했다. 성에서 날아오는 대포와 큰 화살 공격으로 당나라 군사들이 입은 피해도 상당히 커서 왕세충이 수성(守城)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세민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사방에서 성을 공격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을 했지만 십여 일이 지나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당나라 군사들은 모두들 지쳐서 돌아가고 싶어 했다. 행군총관 유홍기(劉弘基) 등이 이세민에게 군사를 되돌리자고 건의하자 이세민이 말했다.
“지금 대군을 이끌고 왔으니 한번만 수고하면 영원히 편안할 것이오. 동쪽 여러 주들이 이미 풍문을 듣고 마음으로 복종하여 오직 낙양성만이 외롭게 남아 있으니 형세로 보아 오래 갈 수는 없소. 공이 곧 이루어지려 하는데 어찌 이를 버리고 간단 말이오?”
이에 여러 사람들이 더는 철군하잔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편 고조가 이 소식을 듣고는 비밀리에 이세민에게 철군하라는 칙령을 보냈다. 하지만 이세민은 표문(表文)을 올려 반드시 낙양을 깨뜨릴 수 있다고 했고 또 봉덕이(封德彝)를 파견해 황제에게 당면한 형세를 자세히 설명하도록 했다. 봉덕이가 황상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왕세충이 얻은 땅이 비록 많다고는 하지만 모두 억지로 속한 것으로 호령이 시행되는 곳은 오직 낙양성뿐입니다. 적은 지혜도 다하고 힘도 궁색해 승리가 조만간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지금 군사를 돌리시면 적의 형세가 다시 떨쳐 일어나고 서로 연결되어 나중에 도모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자 고조도 이세민의 건의를 받아들여 더는 군사를 돌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