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3장 성황(聖皇)등극과 문치(文治) 진흥
현무문의 변 이후 진왕 이세민이 조정을 장악하자 무덕 9년(626년) 8월 8일 고조 이연이 정식으로 조서를 내려 태자 이세민에게 제위를 선양하려 했다. 하지만 이세민이 굳게 사양하며 《진양선위표(陳讓禪位表)》를 바쳤다. 고조가 수조(手詔 친필 조서)를 내려 거듭 제위를 선양할 뜻을 보이자 태종이 더는 사양하지 못하고 제위를 물려받았다.
제1절 정관의 시작
대사면
태자 이세민이 무덕 9년(626년) 8월 9일 갑자일에 동궁인 현덕전(顯德殿)에서 제위에 올라 이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또 관내 및 포주(蒲州 섬서성 중부), 예주(芮州 산서성 예성현), 우주(虞州), 태주(泰州), 섬주(陝州), 정주(鼎州) 6주에 2년간의 조(調 토지세)와 부(賦 특산물 납부 의무)를 면제해주고 1년간의 역(役 역주: 1년에 20일간 하는 공공 노역)을 면제해주었다.
태종은 《즉위대사조(即位大赦詔)-즉위하며 대사면을 내리는 조칙》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하늘이 칠정(七政 일월과 오성)으로 시간을 기록해 백성들에게 알려주시니 군주는 오로지 하늘을 받들어야만 삼재(三才 천지인)가 만물을 기를 수 있노라. 그러므로 우주를 두루 덮고 건곤(乾坤)을 다스리며 생령(生靈)에게 자비를 베풀고 공업(功業)을 드러내 알릴 수 있도다. 우리 대당(大唐)은 좋은 천운을 받아 탄생했으니 조화롭고 번창할 것이며 용(龍)과 봉(鳳)의 상서로운 기운을 받았도다. 성스럽고 밝은 덕으로 천하를 덮고 사방에 빛을 밝히신 태상황(太上皇 고조)께서는 헌원(軒轅)황제와 소호(少昊)에 필적하고 은나라와 주나라를 뛰어넘는 태평성대를 이루셨도다. 그러나 지극한 덕(德)이 아니면 성공에 머물 수 없기에 제위를 사양하고 이 무거운 임무를 (짐에게) 맡기셨노라. 처음에 짐은 부족하고 어리석어 보위를 사양했으나 허락을 얻지 못해 정식으로 홍대한 임무를 이었노라. 신령(神靈)의 명령이 이르러 보위에 올라 억조창생에 군림하고 선왕의 뒤를 이었노라. 마치 큰 강을 건너는데 건널 곳을 모르는 것과 같으니 어질고 현명한 이에 의지해 함께 통치하고자 하노라. 지금부터 제위를 이어 시작하며 하늘의 아름다운 뜻에 받들어 답하려 하노라. 혜택을 널리 베풀어 일반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고자 하며 이에 천하를 크게 사면하노라.”
나라의 기틀을 다지다
제위에 오른 후 태종은 체제를 규범 짓고 신민(臣民 신하와 백성)의 교화에 착수해 대당(大唐)의 신천(新天)・신지(新地)・신인(新人)・신편장(新篇章 새로운 장)을 열었다. 태종은 가장 먼저 조서를 통해 신민들에게 도덕을 존중하고 독실함을 중시하는 진실(眞實)한 사람이 될 것을 명시했다. 무덕 9년 11월 태종은 《유숭독실조(諭崇篤實詔)–독실을 깨우치고 존숭하는 조서》를 내렸다.
“사람을 세우는 도를 가리켜 인(仁)과 의(義)라 하고 나라를 만드는 기초는 덕(德)이 두터운 곳으로 돌아간다. 수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후 정치는 각박하고 형벌이 번잡해 위로는 의심하는 마음을 품고 아래에서는 뜻을 제대로 펼 수 없었다.…풍속의 퇴폐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덕(德)으로 백성을 교화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짐이 제위에 오른 후 백성들이 의지할 수 있고 만국이 기뻐할 수 있는 지극한 도를 널리 생각해왔노라. 백성과 관료들이 모두 화목하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 감추는 것이 없어야 하며 이전의 과실을 말하도록 특별히 격려함이 마땅하다. 지금부터 내외의 관리들은 모름지기 서로 안부를 물으며 의심 때문에 가로막히지 말아야 한다.…일을 함에 위로하여 정을 잘 펼치게 하고 독실함에 힘쓰면 각자 친밀하고 두터울 수 있다. 조정에서 꺼리는 절차가 없고 교유함에 오래 사귀는 즐거움이 있다면 도를 따라 실행하며 예법을 따르며 어기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위아래가 크게 사귀고 품물(品物)이 두루 형통할 것이니 은혜로운 정치를 더하면 사방에 도달할 것이다. 천하에 널리 알려 짐의 뜻을 모두 알게 하라.”
중생을 선하게 대하다[善待眾生]
무덕 9년 태종이 금원(禁苑)의 매와 사냥개를 풀어주고 사방에서 바치던 공물을 쉬게 하며 백관들에게 정치의 도에 관한 의견을 듣고 정령을 간소하지만 엄숙하게 하자 내외에서 모두 크게 기뻐했다. 이해 8월 《궁녀조(宮女詔)》를 내려 “궁녀들이 많은데다 그윽하고 깊은 곳에 있어 가련하니 마땅히 뽑아서 내보내 각자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돌아가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도록 하라.”(《자치통감》)고 했다.
정관 2년(627년) 태종이 조서를 내려 사망한 병사와 백성들의 유해를 수습해 편안히 안장하게 했다.
《수매해골조(收埋骸骨詔)》–유골을 수습해 매장하라는 조서
“수나라의 운이 다해감에 여러 흉악한 무리들이 솥처럼 일어나 전쟁이 끊이지 않고 기근(饑饉)이 이어져 유혈이 강을 이루고 시신이 들판을 덮었노라. 짐이 일찍이 군대에서 강과 들을 두루 다니며 매번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심려가 컸노라. 겉으로 드러난 유골이 있으면 마땅히 소재지 관청에 알려 수습하고 매장하는 것이 짐의 뜻에 부합함을 알리게 하라.”
태종이 황제로 즉위한 후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바꿨다. 태종은 《개원정관조(改元貞觀詔)-정관으로개원하는 조칙》에서 “새로운 천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니 이제 짐이 몸소 선(善)을 본받아 근본을 바르게 할 때가 되었다. 무덕(武德) 10년을 정관(貞觀) 원년(元年)으로 고친다.”라고 했다.
한무제(漢武帝)가 처음 연호를 사용한 후부터 역대 제왕들은 종종 연호를 통해 ‘하늘에서 명을 받았음’을 드러내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핵심을 펼쳐 보였다. 또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며 강산이 영원하게 하는 등 하늘이 복을 내려 도와주기를 기원했다.
《주역‧계사하전(系辭傳下)》에 “천지의 도를 바르게 본다(天地之道,貞觀者也)”고 했다. 태종이 ‘정관’이란 연호를 사용한 것은 후세를 위해 천지우주의 도(道)를 펼쳐 보여준다는 뜻이다. 그 광명정대하고 드넓은 기상은 과연 천지우주의 도처럼 역대로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니 천지우주의 도가 아니면 명명하기에 부족하다.
정관 초기 위징(魏徵)은 태종에게 제왕(帝王)의 도와 인덕(人德)의 정치를 펼쳐 백성들이 몸을 닦고 덕을 기르는 것을 중시하도록 교화할 것을 건의했다. 반면 봉덕이(封德彝) 등은 법을 중시하는 패도(覇道)로 나라를 관리할 것을 권고했다. 많은 논의 끝에 태종은 결국 위징의 건의를 채택했다. 즉 안으로는 도가 밖으로는 유가[內道外儒]를 써서 하늘의 뜻과 대도(大道)에 순응해 나라를 운영하고 백성들을 전방위적으로 교화했다. 이렇게 하자 대당 신민(臣民)들이 각자의 업종에서 덕을 중시하고 선을 강조하며 독실함을 추구해 수신양성하게 되었고, 각 업종마다 모두 승화되어 좋은 사람이 되었으며 짧디 짧은 불과 몇 년 사이에 대당의 태평성세를 이룩할 수 있었다.
한번은 태종이 여러 신하들과 도적을 막는 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일부 대신들이 법을 엄하게 적용해 도적을 금지시킬 것을 청하자 태종이 웃으면서 말했다.
“백성이 도적이 되는 이유는 세금이 너무 많고 요역(徭役)이 과중하며 관리들이 탐욕스러워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염치(廉恥)를 돌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짐이 마땅히 사치스런 소비를 줄이고 요역과 세금을 가볍게 하며 청렴한 관리를 선발해 백성들이 주식(主食)에 여유가 있게 한다면 도적질은 저절로 그칠 것이다. 어찌 법을 엄하게 적용하겠는가!”
또 늘 좌우 시신들에게 말하곤 했다.
“임금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지한다. 백성을 모질게 해서 임금을 봉양함은 마치 자기 살을 베어 배를 채우는 것과 같아서 배는 부를지언정 몸이 죽고 만다. 임금이 부유해지면 나라가 망한다. 그러므로 임금의 우환은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늘 자신에게서 나온다. 무릇 욕심이 커지면 비용이 늘어나고 비용이 늘면 세금이 과중해지며 세금이 과중해지면 백성들이 근심하고 백성이 근심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지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임금이 죽게 된다. 짐은 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함부로 욕심을 부릴 수 없다.”
휘황찬란한 정관 23년, 태종이 대당황조(大唐皇朝)의 중생을 이끌고 전력을 다해 정치에 힘쓰자 태평성세의 모습이 드러났다. 태종은 요역과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완화했으며 인재를 발탁해 임용했으며 허심탄회하게 간언을 받아들였다. 경사(經史 경학과 사학)에 뜻을 두어 전대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로 삼았으며 소인배들을 물리치고 참소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임금과 신하가 한마음으로 협력해 공동으로 국가를 다스리자 국정(國政)이 투명하고 밝아졌다. 경제는 번영했고 문화가 창성했으며 사회가 안정되자 민생이 부유해져 인구가 늘어났다. 이 모든 것은 대당제국이 문치(文治)방면에서 얻은 자랑할 만한 성취였다.
또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토욕혼을 안정시켰으며 토번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멀리 고창국을 원정해 위엄을 보였고 고구려를 원정했으며 설연타를 물리치자 사방의 여러 이민족들이 귀부해 만국(萬國)이 조공하러 왔다. 이는 온 천하에 대당제국이 무력(武力)방면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음을 알려준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정관의 치’는 후세 제왕들이 나라를 다스리는데 전형적인 모범이 되었고 역대로 성대한 찬사를 받아왔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2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