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견망】
제4장 드넓은 포용력으로 중생을 교화
성스런 황제와 위대한 군주에 대해 말하자면, 단지 자신이 수련하고 도를 얻어 원만하여 ‘무위로 다스림(無爲而治)’에 귀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것이다. 태종은 금륜성왕(金輪聖王)의 신분으로 황실에서 태어나 늘 천하를 마음에 두고 중생을 널리 제도하고자 했다.
“조화로운 음악을 법고(法鼓)와 함께 펼치려 하노라. 아송(雅頌)의 소리가 범음(梵音)을 따라 함께 멀리까지 들리게 하노라(欲使雲和之樂,共法鼓而同宣。雅頌之聲,隨梵音而俱遠。)”
“큰 성인의 가르침이 아득하다고 여겨 관찰하지 않음이 없었노라. 사람들로 하여금 번뇌에서 벗어나게 하고 집안이 인수(人壽)에 오르고 저승의 연이 분명히 응해 모든 생령에 크게 자비롭고자 하노라. 홍범(洪範)에서 오복(五福)을 드러내고 세계에서 세 가지 재난을 끝내고자 하노라.(大聖之規,無幽不察,欲使人免蓋纏,家登仁壽,冥緣顯應,大庇含靈。五福著於洪範,三災終於世界)”
당조(當朝 당시의 조정) 및 후대의 무량한 중생을 이끌고 인류의 사유를 다지고 완성하는 천년 공정에 착수해 인류사회를 운영하는 만대의 표준을 설립했다. 태종은 널리 신성한 인연(聖緣)을 맺고 도가(道家)를 존숭하고 불가(佛家)를 지원하며 유가(儒家)를 발탁하고 서양종교를 받아들였다. 이는 마치 바다가 온갖 강물을 받아들이는 듯한 기개로 온갖 업종이 모두 흥성하게 하여 ‘정관의 치’란 성세(盛世)의 휘황을 창립했다. 성당(盛唐)의 문화는 인류의 휘황을 창건했다.
제1절 유학의 새로운 활용
유학을 발탁하다
황제(黃帝)가 도를 닦고 원만해 용을 타고 승천할 당시에는 아직 ‘유(儒)’가 없었고 불가(佛家)역시 중토에 이르기 전이었다. 당시에는 도가(道家)가 화하(華夏) 신전문화(神傳文化)를 주도했다. 당시에는 사람이 신과 함께 존재했고 도덕이 고상했으며 요, 순, 우 등 성황(聖皇)은 도(道)로 천하를 다스렸다.
그러나 사람들의 도덕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감에 따라 도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주(周)나라에 와서 변화가 생겼다. 주나라는 천국(天國) 자손들에게 한 세트의 나라를 다스리고 교육・신앙에서 심지어 음식(飮食)・기거(起居)・제사(祭祀) 상례와 장례 등 각 방면에서 ‘예(禮)’란 전장(典章)제도와 행동규범을 가져다주었다. 즉 주례(周禮)의 표준으로 각 민족과 각 대(代)의 예악내용을 규범 지었다. 각종 전례에 사용한 음악은 주로 아악(雅樂 주나라의 도읍인 풍호豐鎬와 인근 경기지역의 음악)이었는데 제도형식을 통해 각 사회계층에 널리 보급해 주인(周人 주나라 사람들)의 혈연을 강조하고 종법의 등급 및 질서를 수호하게 했다.
주례에서는 ‘상천(上天)’이 천하를 다스릴 ‘천명(天命)’을 오직 ‘덕(德)’이 있는 사람에게만 준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천자가 일단 ‘덕’을 잃으면 곧 상천의 비호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천하에 군림하는 군왕은 반드시 ‘덕으로 하늘에 배합해야 한다(以德配天 역주: 덕이 하늘만큼 크고 넓어야 한다는 의미).’
이것이 바로 공자(孔子)가 그토록 경앙하던 ‘뛰어난 문채(鬱鬱乎文哉)’의 예악(禮樂)문화였다. 하지만 주 왕실의 도(道)가 쇠퇴하고 기강이 어지러워져 포폄(褒貶 상벌)이 실제와 부합하지 않음에 이르자 마침내 공자가 《역(易)》을 찬술하고 《시(詩)》와 《서(書)》를 산삭(刪削)하고 《춘추》를 저술하고 《아(雅)》 《송(頌)》을 바로잡았다. 이는 역사상 공자의 업적이다. 공자가 창립한 학문은 후인들에게 ‘만세사표(萬世師表)’로 불렸다.
“철인(哲人)이 시든 이래 미언(微言)이 끊어지자 70자(子)가 흩어지면서 대의(大義)와 괴리되었다. 전국(戰國)을 종횡하며 참과 거짓을 가리지 못하자 제자(諸子)의 주장이 어지럽고 혼란해졌다. 성인의 지덕(至德 지극한 덕)이 상실되었고 선왕의 요도(要道 중요하고 핵심적인 도)가 사라졌다.(自哲人萎而微言絕,七十子散而大義乖,戰國縱橫,真偽莫辨,諸子之言,紛然淆亂。聖人之至德喪矣,先王之要道亡矣)”(《수서(隋書)》32권 〈지(志)27〉)
여기서는 공자의 ‘철인(哲人)’ 신분과 선황(先皇)성군(聖君)의 ‘성인의 지덕(至德)과 선왕의 요도(要道)’를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공자는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해 인에 의지하고 예에서 노닌다(志於道,據於德,依於仁,遊於藝)”(《논어‧술이(述而)》)고 했다. 만약 선왕의 요도가 없다면 공자의 학문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의 ‘덕치(爲政以德 덕으로 하는 정치)’는 주대의 ‘덕으로 하늘에 배합함(以德配天)’에 비하면 ‘하늘(天)’에서 ‘사람(人)’으로 떨어져 내려온 것이다.
공자는 주례로부터 중화문화 속에서 기초를 다지는 도(道)의 지위를 실질적으로 배척했다. 주례는 수많은 ‘예’ 조문을 규정했고 이로부터 ‘유(儒)’란 관직이 생겨났다. 유(儒)는 유가(儒家)를 가리키는데 옛날에는 또 독서인을 지칭했다.
《설문해자》에서 “유는 부드러움이니 술사를 가리킨다(儒,柔也,術士之稱).”고 했다.
한나라 때 유(儒)는 사도(司徒)의 관리였고 ‘배우(優), 가수(倡), 광대(侏), 유(儒)’가 나란히 불렸다. 또 “공자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았는데(子不語怪力亂神)”((《논어‧술이》)) 신적(神跡)과 신(神)을 말하지 않는 공자의 유가가 어찌 군주를 도와 음양을 순조롭게 하고 교화(敎化)를 밝힐 수 있겠는가?
태종은 즉위 초에 이렇게 표명했다. “짐이 지금 좋아하는 것은 오직 요순(堯舜)의 도와 주공과 공자의 가르침이다. 이는 마치 새에게 날개가 있고 물고기가 물에 기대는 것과 같으니 이를 잃는다면 반드시 죽게 되며 잠시라도 없어선 안 된다.”(《정관정요‧신소호(慎所好) 제21》)
요순의 도(道)와 주공과 공자의 가르침(敎)은 하나는 도(道)요 하나는 가르침(敎)이니 내실과 외형 및 위아래가 분명하다. 만약 새가 없고 물고기가 없다면 날개와 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요순의 중화문화 도통(道統)을 제외하고 후세의 그 어떤 가(家)도 자신이 도통이라 과장하는 것은 새 없는 날개요 물고기 없는 물이 아닌 게 없으니 형태는 있어도 실제가 없다(有形無實). 선성(先聖) 요순의 도를 공자 유교의 가르침에 집어넣은 것은 실로 역사적으로 천하를 사칭한 큰 죄악으로 우주를 계란 속에 집어넣는 망령된 짓(妄爲)이다.
역사적인 사실에서 보자면 당시의 유학은 널리 문화인의 교육을 가리킨 것으로 협의의 유가 사상 전승자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태종은 즉위 초 정전 좌측에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해 천하의 문유(文儒 문장에 뛰어난 선비)를 정선해 본래 관직을 유지하면서 학사(學士)를 겸하게 했다. 이들에게 오품관직의 음식을 지급하고 교대로 숙직하게 했다. 태종이 집무를 보는 틈을 이용해 이들을 불러 옛 경전에 대해 토론했고 정사에 관해서도 깊이 상담하며 대책을 강구했다. 때로는 밤이 깊어서야 토론이 끝나기도 했다. 또 조서를 내려 국가에 공을 세운 3품 이상 현신(賢臣)의 자손을 홍문관 학생으로 삼도록 명령했다.”(《정관정요‧숭유학 제27》)
태종의 정관의 치는 또 주례에 치중하지 않았다.
“정관 2년 조서를 내려 주공(周公)을 선성(先聖)으로 삼는 관행을 중단시켰다. 대신 공자를 모시는 문묘(文廟)를 도성의 국학(國學) 내에 새로 건립한 후 옛 제도를 본받아 공자를 선성(先聖) 안연(顏淵)을 선사(先師)로 삼았다. 문묘 양쪽에 조두(俎豆)와 간척(干戚) 등 제기를 진열하는 식으로 공자를 존숭하는 예제를 미리 갖췄다. 이 해에 초야에 있는 천하 유사들을 대대적으로 소집했다. 수레와 숙식 등을 제공하면서 장안으로 불러 모은 것이다. 관원으로 발탁된 자들 가운데 중앙 조정의 관직에 배치된 이가 적지 않았다. 학생들 가운데 한 가지 대경(大經) 이상에 정통한 사람은 모두 관직을 겸했다. 국학에 학사(學舍) 400여 칸을 증설했다. 이에 국자학(國子學 역주: 3품 이상 고관 자제들이 입학)과 태학(太學 5품 이상 자제들이 입학)을 비롯해 사문(四門 7품 이상 자제 및 일반 집안 자제들이 입학) 등도 학생을 대거 증원했다.
서법(書法)과 산학(算學)을 가르치는 학교에 박사와 학생을 두고 학과도 두루 갖췄다. 궁정을 수비하는 병영에도 박사(博士)를 배치해 학문을 가르쳤다. 경학에 능통한 자는 일정한 시험을 거쳐 황제에게 천거했다. 토번, 고창, 고려(高麗 고구려), 신라(新羅) 등 이웃나라의 왕과 고관들도 자신의 자제를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 수가 수백 명에 달했다. 국학 안에서 독서하며 강학하는 자가 거의 1만 명에 이르렀다. 전에 유학이 이렇게 흥성했던 적이 없었다.”(《정관정요‧숭유학 제27》)
“태종이 시신(侍臣 황제 옆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했다. ‘정치를 하는 요체는 오직 사람을 얻는데 있소. 그 재능이 없는 사람을 임용하면 반드시 정치가 어려워지오. 지금 인재를 임용함에 반드시 덕행과 학식을 근본으로 해야 하오.’”(《정관정요‧숭유학 제27》)
태종은 또 관리를 배양하는 정규교육체제를 수립하고 완벽하게 했다.
당나라에는 쓸모없는 업(業)이 없다
《수서(隋書)》 〈지(志) 제29〉에 이르길 “유자(儒者)란 소위 임금을 도와 교화를 밝게 하는 자이다. 성인의 가르침을 집집마다 일일이 찾아가 알려줄 수 없기 때문에 유자가 존재해 (성인의 가르침을) 펼치고 밝히는 것이다.…그러나 속유(俗儒)들은 그 근본을 돌아보지 않고 구차하게 말로 환심을 사고자 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교묘한 언사를 구사해 그 대체(大體)를 어지럽혀 배우는 자가 깨닫기 힘들게 한다. 그러므로 ‘넓지만 요점이 부족하다(博而寡要)’고 하는 것이다.”
사실 ‘유자(儒者)’는 ‘법자(法者)’, ‘농자(農者)’, ‘병자(兵者)’, ‘의방자(醫方者)’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여러 가지 직업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바로 학교 교사에 해당한다. 유자의 책임은 ‘임금’을 도와 교화를 받는 사람들에게 ‘성인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중에는 책을 저술하거나 학설을 세우는 게 포함되는데 바로 ‘교재를 편찬’하는 사람이다. 유자의 직능은 장차 ‘성인의 가르침’을 ‘펼쳐서 밝히는 것(宣而明之)’이지 그 자신이 ‘성인’이거나 또는 ‘성인의 가르침’은 창조한 사람은 아니다. 요령을 얻지 못한 자는 또 성인의 가르침의 본의를 잃고 남의 자제를 잘못 이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속유가 하는 일은 그 근본을 돌보지 않고” “그 대체를 어지럽혀 배우는 자가 깨닫기 힘들게 한다”는 의미다.
이와 비교하면 《수서(隋書)》의 ‘도자(道者)’, ‘불자(佛者)’에 대한 설명은 확연히 달라서 ‘유자’와는 같은 부류가 아니다.
“도자는 대개 만물의 오(奧 깊숙하고 오묘함)로 성인의 지극히 심오한 도리다.(道者,蓋爲萬物之奧,聖人之至賾也)”
“도자(道者)・불자(佛者)는 방외의 가르침으로 성인이 멀리서 초빙한 것이다.(道、佛者,方外之教,聖人之遠致也)”
그렇다면 유자들이 마땅히 밝게 펼쳐야 할 성인의 가르침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중화의 성황(聖皇)・명군(明君)이 개창하고 창도하며 정리한 것으로 요(堯)・순(舜)・우(禹)가 처음 전해준 정통문화라야 한다. 춘추시대 공자는 ‘육경(六經)’을 사숙(私塾 사설 학원)의 교재로 편집했다. 나중에 한 무제, 당 태종, 명 성조, 강희제 등 몇몇 성황들은 직접 수집과 편집을 주관해 갈수록 더 정통적이고 완정한 판본을 규범 지었는데, 이를 통해 중화문화를 보존하고 바로 잡으며 중생을 교화하기 위함이었다.
당나라 태종시대 조정에서는 버려져서 쓰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각양각색의 다양한 개성과 장단점을 지닌 사람들이 태종 치하에서 각자 그 마땅한 바를 얻어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고 그 단점을 피했으며 공동으로 휘황함을 성취했다.
또 당나라 태종시대 조정에서는 또 어느 하나 폐지된 학문이나 업종이 없었으며, 백가(百家)와 백업(白業)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사회적 사명과 기능의 특징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었다. 태종 치하에서 각자의 천명(天命)을 받들어 각기 그 직능을 주관하면서 공동으로 휘황함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4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