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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당태종(29): 태종병법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설연타 정벌

설연타는 막북(漠北)에 위치한 유목민족이다.처음에는 막북 토라하(土拉河)유역에 거주했는데 유목에 종사하며 돌궐(突厥)에 복속되어 있었다.정관(貞觀) 2년 서돌궐에 내란이 일어나자 마침내 설연타 한국(汗國)으로 독립해 아장(牙帳가한의 막사)을 대막 울독군산(鬱督軍山지금의 몽골 항가이 산맥)아래에 설치하고 동돌궐과 대등하게 자립했다.아울러 당나라에 입조해 조공을 바치며 당나라의 막북 지역 번국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다 동돌궐이 멸망한 후 설연타의 진주가한(真珠可汗)이남(夷男)이 동돌궐의 옛 땅을 차지한 후 겉으론 당에 복속했지만 암암리에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켰다.정관13년(639년)태종이 동돌궐을 회복시키기 위해 사력필가한(俟力苾可汗)으로 아사나사마를 세워 설연타의 굴기에 맞서게 했다.설연타는 새로 일어난 동돌궐이 기반을 다져 세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태종《설연타 평정을 위해 영주에 행차하는 조서(平薛延陀幸靈州詔)》

“짐이 들으니 흉노는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재물을 탐내고 의리를 망각해 다스리기 힘들어 진한(秦漢)의 계책이 모두 효과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지금껏 화하(華夏)의 조정에 복종하지 않았다.고조(高祖이연)때는 위수(渭水)까지 진입했고 정관 초년에도 쳐들어와 함부로 힘을 과시했다.짐이 장수들에게 출정을 명해 깃발과 북을 들어 올리자 단번에 사막을 크게 평정했다.일찍이 주나라 선왕(宣王)이 당했던 경양(涇陽)의 치욕을 씻고 한나라 고조가 백등산(白登山)에서 흉노에 포위당했던 원수를 갚았노라.…설연타는 그동안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질렀으니 이제는 멸망함이 마땅하도다.그러므로 짐이 잠시 영주(靈州지금의 영하 영무시)에 가서 직접 복종시키려 하노라.변경의 혼란을 안정시켜 가업(家業)을 영원히 넓히고 한번 고생으로 영원히 편안하고자 하노라.”

동돌궐을 설연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태종은 이세적(李世勣)에게 명령해 정관15년(641년)설연타를 공격하게 하여 승리를 거뒀다.하지만 정관18년(644년)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나간 틈을 탄 설연타의 부대가 다시 공세를 펼쳐 동돌궐을 격파하자 아사나사마(阿史那思摩태종이 세운 동돌궐의 가한)가 이를 피해 운주(雲州)로 도망쳤다.그후 고구려가 설연타에 원조를 요청했으나 이남은 당나라와의 직접적인 전투는 피했다.

정관19년 이남이 사망한 후 그 아들인 다미가한(多彌可汗)발작(拔灼)이 당나라와 교전하기 시작했다.정관22년 당군이 반격에 나서 발작을 물리친 후 설연타의 부용국이던 회흘(回紇),철륵(鐵勒)등이 병력을 보내 그를 살해했다.발작의 사촌 형인 이특물실(伊特勿失)가한 돌마지(咄摩支)가 당군에 투항하면서 마침내 설연타는 멸망하고 말았다.

태종은 철륵의 옛 땅에6부와7주를 설치했다. 6부란 한해부(瀚海府회흘),금미부(金微府부골),연연부(燕然府다람갈多濫葛),노산부(盧山府사결思結),구림부(龜林府동라同羅),유릉부(幽陵府발야고拔野古)를 말한다. 7주란 고란주(皋蘭州혼渾),고궐주(高闕州곡설斛薛),계록주(雞鹿州해결奚結),계전주(雞田州아질阿跌),유계주(榆溪州계필契苾),대림주(蹛林州사결별부思結別部),전안주(窴顏州백습白霫)를 가리킨다.

당나라는 이 지역에 연연도호부(燕然都護府)를 두어 관리했는데 치소(治所)는 음산 기슭(지금의 내몽골 항금후기杭錦後旗)에 두었다.동쪽으로는 대흥안령,서쪽으로는 알타이 산맥,남쪽으로는 고비사막,북쪽으로는 바이칼 호에 이르는 광대한 몽골고원 전체를 관할했다.

당나라는 막북에 안북도호부를 설치하고 막남에 선우도호부를 설치했다.남쪽으로는 나복주(羅伏州지금의 베트남 하띤성河靜)북쪽으로는 현괄주(玄闕州지금의 안가라 강 유역)를 설치하고 서쪽으로 안식주(安息州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부하라)동쪽으로 가물주(哥勿州지금의 길림성 통화)에 이를 정도로 영토가 광활했다.

북서쪽으로는 이오(伊吾) 7성에 서이주(西伊州)를 설치해 서역 경영을 시작했다.

정관19년(645년)에는 안서도호부를 고창에서 더 서쪽인 구자(龜玆)로 옮겼다.

북동쪽으로는 정관19년 태종의 고구려 원정이후 고종(高宗)때인668년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한편 정관22년(648년)당나라는 인도에서도 한차례 전투를 치렀다.당시 왕현책(王玄策)이 당나라 사신으로 인도에 들어갔는데 중천축의 대신 아라나순(阿羅那順)이 왕위를 찬탈하고 당나라 사신을 위협했다.이에 왕현책은 토번으로 탈출한 후 토번과 네팔 왕에게 군사를 빌려 당군의 기치를 들고 인도로 향했다. 3일에 걸친 전투 끝에 당군이 인도군을 크게 물리쳤는데 삼천여 명의 목을 베고 물에 빠져 죽은 병사가 약 만 명에 달했다.아라나순은 성을 버리고 도주했으나 당나라 부사(副使)장사인(蔣師仁)이 추격에 나서 포로로 잡았다.이외에도 남녀1만2천여 명을 포로로 잡고 소와 말3만여 필을 빼앗았다.

진시황은6국을 없애 대진(大秦)의 천하통일을 이뤘고,한무제는 서역으로 가는 통로를 개척해 막북을 평정했다.위무제 조조는 직접 군사를 지휘해 오손(烏孫)을 공략했다.삼국시대 오나라의 손권과 주유는 강남을 흥성시켰고 촉나라의 유비와 제갈량은 서남쪽 이민족인 만이(蠻夷)의 땅을 차지했다.그러다 대당 태종에 이르러 전성시기 당나라의 판도는 전례 없이 광활해졌다.동쪽으로는 한반도,서쪽으로는 아랄 해까지 이르렀고,남쪽으로는 베트남,북쪽으로는 시베리아에 이르렀으며 지금 현재의 중국보다 판도가 더 넓었다.이로써 대당의 위엄이 사해팔방에 떨쳐졌다.

태종병법

세계의 왕으로 불리는 칭기즈 칸은 용병술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웅대한 전략을 지녔다.그는 싸워서 승리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공격해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으니 대사막을 통일하고 유라시아를 석권했다.그럼에도 그는 일찍이 보로굴,보르추,무칼리,치라운 등 몽골 사걸(四傑)에게“나라를 안정시키려면 반드시 태종병법을 잘 알아야 한다.”고 간곡히 타일렀다.

태종의 출정은 한 사람만의 용기에 의지한 것은 아니었다.태종은 아주 엄격하게 군사를 다스렸고 진영의 배치가 정확했으며 적을 만났을 때 임기응변이 뛰어났고 적에 대한 예상이 신묘하게 들어맞았다.용병에서도 기이한 계책이 많았고 전술이 다양했으며 전략이 뛰어나 마치 하늘의 뜻인 것처럼 딱 맞아 떨어졌다.마침내 백전백승으로 대당왕조를 개창했던 것이다.

태종은 늘 병법을 읽었고 심혈을 기울였으며 때와 세력을 파악해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뒀다.전공이 탁월해 여러 전투에서 기적을 창조한 상승장군이었지만 병법에 관한 논저(論著)는 거의 남겨놓지 않았다.앞서 칭기즈 칸이 말한 태종병법이란 후세에 전해진《당태종이위공문대(唐太宗李衛公問對당태종과 이정의 문답)》를 말한다.여기서 이위공(李衛公)은 이정(李靖)을 말한다.

이정은 앞서 언급한 능연각24개국공신의 하나로 순서는 여덟 번째에 위치한다.태종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부터 태종을 도와 대당의 천하를 다질 수 있게 도왔다.태종이 즉위한 후에는 여러 차례 총사령관(主帥)에 임명되어 출정에 나섰다.그는 당나라 때의 대표적인 출장입상(出將入相나가면 장군 들어오면 재상)으로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재였으며 천하를 통일하고 영토를 개척하는 과정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태종은 일찍이 이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 적이 있다.

“상서우복야 대국공(代國公)이정은 도량과 식견이 넓고 크며 풍격이 높으며 일찍부터 충성을 다해왔다.변방에서 공적을 쌓았으니 남으로는 형주(荊州)와 양주(揚州)를 평정했고 북으로는 사막을 깨끗이 만들어 위엄을 멀리까지 펼치고 공업(功業)을 이뤘도다.”

당 숙종(肅宗)상원(上元)원년(760년)이정을 역사상10대 명장의 하나로 삼아 무성왕(武成王강태공)의 묘에 배향했다.

《당태종이위공문대(唐太宗李衛公問對)》병법은 전서가 상,중,하3권으로 되어 있고 태종과 이정이 서로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고금의 여러 병서와 전술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내용 중에는 강태공,사마법,손무(孫武손자),한신(韓信),조조,제갈량 등 전략 명가와 병성(兵聖병법의 성인)과 전신(戰神전쟁의 신)의 병법정수가98가지 문답 속에 들어 있다.아울러 고금의 군사사상을 널리 빛내고 새로운 군사이론을 제출했기 때문에 역대로 중시되었다.

남송의 학자 대소망(戴少望)은《장감논단(將鑒論斷)》에서 이 책에 대해“흥망성쇠와 득실의 사리가 마땅하고 실정에 부합해 병가의 술법(術法)을 환히 갖췄으니 모두 장래에 모범으로 삼을만하다”고 했다.아쉽게도《당태종이위공문대》는 만 자에 달해 병서로서는 분량이 많은 편이라 편폭의 제한으로 이곳에 소개할 수는 없다.

북송 신종(神宗)원풍(元豐) 3년(1018년)에는《당태종이위공문대(唐太宗李衛公問對)》을 병서의 경전으로 인정해《무경칠서(武經七書)》에 포함시키고 무학(武學)에서 과거의 필독서로 삼았다.여기서《무경칠서》란《손자병법》,《오자병법》,《육도(六韜)》,《사마법(司馬法)》,《삼략(三略)》,《울료자(尉繚子)》및《당태종이위공문대》등 총7가지 병서를 집대성한 것을 말한다.이것은 북송 조정에서 당시 유행하던340여 부의 중국 고대병서들 중에서 무학의 경전으로 엄선된 것이다.《무경칠서》는 정식으로 반포된 후 송나라 이래 역대 왕조의 각급 군사학교와 무과시험의 기본교재가 되었다.남송에서는 무학을 배우는 학생들은 반드시 병법(兵法)을 학습하도록 규정했다.

명나라 개국황제 주원장도 병부(兵部)에 명령을 내려《무경칠서》를 간행하게 했고 또 관련 부서의 관원 및 고위 장교와 그 자손들에게 학습하도록 했다.《무경칠서》는 송나라 때 판본이 일찍이 일본으로 전해졌고17세기 이후 일본에서도 여러 종의 중간본(重刊本),번역본 및 주해본(注解本)이 등장했다.

원문위치https://www.zhengjian.org/node/153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