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고구려 원정
고구려는 중국 한(漢)나라 때 건국되어 한반도 북부 및 중국 동북지역의 동부를 차지한 나라다.대체적인 위치는 한 무제 때4개 군(郡)이 설치되었던 낙랑군,현도군,진번군 및 임둔군 지역에 해당한다.
고구려는 겉으로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긴 했지만 사실상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또 요동지역에 천리장성을 수축해 당군(唐軍)의 공격을 방어하려 했다.정관16년(642년)고구려가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해오자 신라는 당나라 측에 위급함을 알려왔다.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원조하고 또 고구려가 차지한 요동지역을 회복하기 위해 태종은 직접 고구려를 원정하기로 결정했다.이때 동돌궐 한국(汗國)은 이미 멸망했기 때문에 고구려를 도울 수 없었고 또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견제했다.
또 막북(漠北)의 설연타가 기회를 틈타 침공할 것을 우려한 태종은 설연타에게 “우리 부자가 모두 고구려를 치러 가면 장안이 텅 빌 터이니 그 허점을 타고 들어오고 싶다면 얼마든지 들어오라!”고 경고했다.그러자 설연타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구당서》기록에 따르면 고구려가 설연타를 유혹해 당나라에 반기를 들도록 했으나“이남(夷男설연타 가한)이 두려워하며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태종《고구려를 친정하는 수조(親征高麗手詔)》
“군사를 움직여 병력을 사용함은 고대의 일상적인 도(道)이고‘혼란한 나라를 취하고 망할 나라를 능멸함(取亂侮亡)’은 선철(先哲)이 귀하게 여긴 바다.고구려의 막리지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신하들을 학대하니 변방을 차지하고 멋대로 해독을 끼치고 있다.짐은 군신(君臣)의 의리로써 차마 이 상황을 지켜볼 수 없노라.만약 멀리 더러운 곳을 주벌(誅伐)하지 않는다면 중화(中華)를 깨끗히 숙청할 수 없을 것이다.…게다가 짐이 몸소 솔선해 정예 병력을 이끌고 직접 뛰어난 전략을 결정해 공격을 막을 수 없게 하고 싸움에 항거할 수 없게 할 것이니,대체로 필승(必勝)의 도를 말하면 대략5가지가 있노라.
첫째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함이고 둘째는 순리로 반역을 치는 것이고 셋째는 잘 다스려진 것으로 혼란한 틈을 타는 것이고 넷째 편안한 상태로 수고로운 적을 상대하는 것이요 다섯째 기쁜 마음으로 원망하는 적을 상대하는 것이다.어찌 이기지 못함을 근심하고 꺾지 못할까 걱정하겠는가?백성들에게 널리 알리노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정관19년(645년)당군이 요동(遼東)으로 진군했다.태종은 가는 길에 정주(定州)에서 수하들에게 말했다. “짐이 지금 동방을 정벌하는 것은 중국을 위해 자제들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것이며 고려를 위해 군부의 치욕을 갚으려는 것뿐이다.또 사방이 기본적으로 안정되어 있는데 남은 것은 오직 이곳뿐이니,내게 아직 힘이 있고 장수들의 정력이 남아 있을 때 반드시 해결하고자 한다.”
태종은 결심을 굳히고 고구려 원정을 대당이 천하를 통일하는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삼기로 했다.
정관19년 여름 이적(李勣)이 몰래 진창(陳倉)을 건너 갑자기 요동성을 공격하자 고구려 군이 크게 당황했다.영주도독(營州都督)장검(張儉)과 강하왕 이도종(李道宗)역시 병력을 이끌고 요동을 공격해 고구려 군을 격파하고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4월 당군이 고구려의 개모성을 무너뜨리고2만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식량10여만 석(石)을 획득했다. 5월 또 다른 당군이 산동에서 바다를 건너 고구려 비사성을 공격해8천명을 포로로 잡았다.
정관19년5월 초 이적과 이도종이 선봉부대인4천 여 기병을 이끌고 요동성 아래에 도착했다. 5월8일 고구려의 연개소문이4만의 구원병을 보내왔다.이때 당군의 여러 장수들은 중과부적을 우려해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고 주력부대가 전부 집결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다시 출격하자고 주장했다.
오직 부총관 이도종만이 승기를 타고 적의 구원병이 먼 길을 와서 피곤한 틈을 이용해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이적도 이 의견에 찬동했다. 또 부장인 과의도위(果毅都尉)마문거(馬文舉)도10배가 넘는 적을 상대해 자발적으로 참전할 것을 주장하며“강적을 만나지 않고 어찌 장사(壯士)임을 드러내리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말을 몰아 적진을 향해 진격하니 가는 곳마다 병사들이 쓰러졌다.이에 양군이 요동성 아래에서 큰 전투를 벌였다.고구려군이 마문거의 습격에 대해 결사적인 반격에 나서자 행군총관 장군예(張君乂)가 고구려군의 우세한 병력에 겁을 먹고 뒤로 퇴각하는 바람에 당군의 전세가 불리해졌다.이도종이 장군예의 부대가 혼란에 빠진 것을 보고 즉각 직접 앞으로 나아가 군사들을 지휘하면서 흩어진 병력을 다시 모았다.그가 높은 곳에 올라가 상대 진영을 바라보니 고구려 군진(軍陣)에 다소 문란한 기미를 발견했다.이를 기회로 여긴 이도종이 수십 명의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적진에 뛰어들어 좌충우돌하니 그 기세를 막을 수 없었다.이에 고구려군의 진영이 더욱 혼란해졌다.전황을 관찰하던 이적이 대군을 동원해 전면적인 공격에 나서자 고구려군이 붕괴되면서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태종의 대군이 도착한 후 요동성 주변은 물샐 틈 없이 포위된 상태였다.하지만 연일 지속된 여러 차례 공격에도 성이 함락되지 않자 태종은 화공(火攻)을 쓰기로 했다.남풍이 부는 때를 기다려 횃불을 들고 장대를 타고 올라가 요동성 서남 성루에 불을 지르게 했다.고구려 군사들이 불을 끄려 했지만 거센 바람을 타고 불길이 성안으로 번졌다.고구려 병사들이 당황한 틈에 당군이 성벽을 오르자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다.당군은 고구려 병사1만 여 명을 죽이고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외 민간인4만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요동성을 공략한 당군은 계속해서 백암성(白巖城)으로 향했다.인근에 있던 고구려 오골성(烏骨城)에서1만 명의 지원군을 보냈으나 당군에게 격퇴당했다.이 전투에서 당군은 계필하력이 이끄는8백 기병만을 사용했다.결국 백암성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당군은 계속해서 안시성(安市城)으로 향했다.고구려 장수 고연수(高延壽)등이 말갈과 고구려 병사15만을 이끌고 지원을 나왔으나 당군에게 격퇴 당했다.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한 고연수와 고혜진(高惠眞)이3만6천8백 명을 거느리고 당나라 군문(軍門)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항복을 청했다.태종이 그들에게 말했다. “동이(東夷)의 어린아이가 바다 근처에서 뛰어나다고 해도…앞으로 다시 감히 천자와 싸우겠는가?”그러자 모두 땅에 엎드린 채 대답하지 못했다.태종은 투항한 군인들 중에서 고구려의 군관과 추장 등3천여 명을 중원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다 석방했다.
하지만 안시성은 비록 성은 작아도 견고해서 당군이 수개월을 포위했음에도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늦가을이 다가오면서 풀이 시들고 물이 얼자 병사와 말들이 오래 버티기 힘들어졌다.결국 태종은 원정을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9월 당군이 군사를 돌렸다.
이번 고구려 원정에서 현도(玄菟),횡산(橫山),개모(蓋牟),마미(磨米),요동(遼東),백암(白岩),비사(卑沙),맥곡(麥穀),은산(銀山),후황(後黃) 10개 성을 뽑고 요(遼州),개주(蓋州),암주(岩州)의 호구를 옮겨 당나라로 들어온 사람이7만 명이었다.또 신성(新城),건안(建安),주필(駐蹕) 3차례 큰 전투에서4만여 명을 베었다.
이번 고구려 원정은 시일이 오래 걸렸고 최종적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목표에 도달하진 못했다.그럼에도 이 원정은 의미가 중대했는데 우선,삼국시기 위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 왕성을 공략한 지 수백 년 만에 중원 군대가 처음으로 고구려 군과 싸워 진정으로 승리했고,남북조 시기 이래 장기간 고구려가 차지해왔던 지금의 요녕 일대를 수복했다.또 나중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철저히 정복하기 위한 기초를 다져주었다.
정관20년(646년)당나라는 회흘(回紇위구르)과 함께 설연타(薛延陀)를 멸망시켰다.그후 배후의 부담을 덜게 된 태종은 정관21년(647년)우진달(牛進達)에게 해상으로 공격하게 하고 이적에게 병력을 주어 육로로 요동반도를 공격하게 했다.
정관22년(648년)태종은 다시 설만철(薛萬徹)을 파견해 해로를 이용해 압록강 입구를 공격하게 했다.뒤이어 당은 육군과 해군 부대를 집결해 다시 한 번 대규모 고구려 공격을 준비했다.하지만 정관23년 태종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당 고종 이치가 잠시 동정계획을 중단시켰다.
고종은668년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당시 호적에 이름을 올린 것만 약70만 호에 달했다.당나라는 이곳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요동 및 고구려 옛 땅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6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