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1장 국부를 계승해 중원 통일
1. 남다른 천부적 자질
장개석(蔣介石)은 1887년 10월 31일 절강성 동부 봉화현(奉化縣)의 계구진(溪口鎮)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서원(瑞元)’ 또는 ‘주태(周泰)’, ‘지청(志清)’, ‘중정(中正)’이라 했으며 자(字)가 개석(介石)이었다. 《좌전(左傳)》에 따르면 “장(蔣)・형(邢)・모(茅)・제(祭)는 주공(周公)의 후예다.”라고 했으니 따지고 보면 장씨는 주공의 후손이다.
개석은 다섯 살 때 사숙(私塾 개인이 운영하는 글방)에 들어가 《삼자경(三字經)》, 《백가성(百家姓)》 등의 아동용 계몽서(啓蒙書)를 배웠다. 일곱 살 때부터 《대학》, 《중용》, 《논어》, 《효경(孝經)》, 《춘추(春秋)》, 《좌전》, 《시경》, 《고문사(古文辭)》 등의 고전과 역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소년시절 장개석은 배우는 것을 좋아했고 아주 총명했다. 사숙의 스승이었던 장근번(蔣謹藩)은 일찍이 개석의 모친 왕채옥(王采玉)에게 “아드님은 천부적인 자질이 뛰어나 언젠가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장개석은 열세 살 때부터 《주역》을 공부했고 이것은 그의 인생에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성년이 된 후 그는 자신의 이름을 중정(中正)이라 개명하고 자를 개석으로 바꿨는데 모두 《주역(周易)‧예괘(豫卦)》에서 유래한 것이다.
먼저 육이 효사(爻辭)에 “절개가 돌과 같이 견고하니 하루를 마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바르고 길하다(介于石 不終日 貞吉)”라고 했고 단(彖)사에서 “하루를 마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바르고 길한 것은 중정(中正)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에서 취한 것이다. 즉 가운데(中)에 거처해 바름(正)을 얻었기 때문에 길하다는 의미다.
장개석은 여덟 살 때 할아버지를 여의고 아홉 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음에도 수절하면서 온갖 역경을 딛고 아들 교육에 매진했다. 장개석은 50세 생일 때 쓴 ‘보국과 사상 오십 생일 소감(報國與思親五十生日感言)’이란 회고문장에서 모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분의 사랑은 보통 어머니들보다 훨씬 깊었으며 가르침은 일반적인 선생들보다 더욱 엄하셨다. 집에 들어오고 나갈 때면 반드시 휴대품을 검사하셨고 놀러갈 때면 반드시 가는 곳을 알려야 했으며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반드시 그날 배운 것을 물어보곤 하셨다. 또 청소와 빗질 등의 과제를 주어 힘들어도 자립하는 방법을 가르치셨고 하인들이나 하는 비천한 일도 직접 해보도록 감독해 몸과 마음을 격려하셨다. 늦게 주무시고 아침엔 일찍 일어나셨으며 아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헌신하셨다.”
즉, 모친은 어린 장개석에게 배움을 독촉하고 예의범절을 가르쳤으며 하인들이 하는 집안일을 분담시켜 자립심을 키워주었다. 말과 행동을 통한 모친의 이런 생생한 가르침은 이후 장개석의 생활과 사업에 견실한 기초가 되었다.
1907년 여름 장개석은 보정(保定)에 있는 ‘통국육군속성학당(通國陸軍速成學堂)’에 시험을 치러 들어갔다. 한번은 일본인 교관이 위생학 시간에 진흙 한 덩이를 손에 들고는 “이 진흙 속에는 마치 너희 4억 중국인들처럼 4억 마리의 미생물이 들어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격노한 장개석은 강단에 올라가 흙덩이 일부를 떼어 손에 들고는 반문했다. “일본에는 5천만 인구가 있으니 마찬가지로 이 진흙 속 미생물처럼 기생하는 게 아닙니까?”
교관이 크게 화를 내더니 말에 두서를 잃었고 장개석에게 혁명당이냐고 물었다. 다행히 학교 교장이 적당히 보호해준 덕분에 보복을 당하진 않았다.
장개석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부 일본인들이 중국을 무시하는 것을 알고는 용감하게 행동으로 나선 것이다. 이렇게 과감히 행동에 나서는 그의 성격은 점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장개석은 일본사관학교 입학을 위한 예비학교에 해당하는 신부(振武)군사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2. 청년영웅
대담한 식견
열혈청년 장개석은 시서(詩書)를 많이 읽었고 인내심이 많았으며 담략과 식견이 뛰어나 가슴속에 큰 뜻을 품었다. 일본에 머물던 기간에 쓴 시 《술지(述志)》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騰騰殺氣滿全球전 지구에 살기가 등등하니
力不如人萬事休힘이 남만 못하면 만사가 헛수고
光我神州完我責신주를 빛내 나의 책임 완수하리니
東來志豈在封侯동쪽으로 건너온 뜻 어찌 제후가 됨에 있으랴!
장개석은 일찍이 1905년 영파(寧波) 전금학당(箭金學堂)에서 고청렴(顧清廉) 선생이 손중산이 런던에서 중국공사관에 억류되었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을 듣고 손중산을 흠모하는 마음과 적(청나라 조정)에 대한 적개심이 생겼다. 장개석은 1908년 일본 유학 중에 진기미(陳其美 천치메이)의 소개로 손중산이 조직한 동맹회(同盟會)에 가입했다. 이듬해 장개석은 처음으로 손중산을 만났다. 이 젊은 생도는 손중산에게 아주 좋은 인상을 남겼다. 손중산은 진기미에게 이 사람이 장차 혁명의 중견이 될 것이며 우리 혁명운동에는 바로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시작인 무창기의(武昌起義)가 폭발했다. 일본에서 이 소식을 들은 장개석은 10월 23일 결연히 학업을 중단하고 30일 상해로 돌아와 ‘선봉결사대(先鋒敢死隊)’ 지휘를 맡아 5팀의 결사대를 이끌고 항주(杭州 당시 절강성의 성도)로 가서 절강(浙江) 순무아문(巡撫衙門)을 공격했다. 이는 장개석이 처음으로 참가한 전투였으며 진짜 총칼을 들고 청나라 정부군과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다. 당시에는 생사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목숨을) 혁명을 위해 희생할 것임을 맹세”했다.
다른 가족들은 모두 깜짝 놀랐지만 모친만은 그의 대의를 깊이 이해하고는 정색하며 말했다. “남자가 나라를 위해 죽으면 죽는 거지 뭘 걱정할게 있느냐!”
11월 4일 밤 기의군이 순무아문을 공격해 절강순무 증석(增錫)을 포로로 잡았다. 5일 의군들이 기영(旗營 팔기군 진영)을 포위하자 항주 팔기군 장군 덕제(德齊)가 어쩔 수 없이 투항했다. 항주성 전체가 불과 하룻만에 광복되었다.
4일 후 상해 ‘민립보(民立報)’에 《절강결사대의 장관(浙江敢死隊之壯觀)》이란 문장이 발표되어 당시 전투과정을 상세히 묘사했다. “절강혁명군의 편제는 모두 결사대를 선봉으로 하며 신군(新軍)이 뒤를 이었다. 결사대의 편제는 모두 5팀으로 총지휘관은 장개석이었다. 제1팀과 제2팀은 장백기(張伯岐)가 지휘했고, 제3팀은 동몽교(董夢蛟)가 이끌었으며 팀당 15명으로 소총수 10명과 폭탄수 5명으로 구성되었다. 제4팀은 왕금발(王金發)의 지휘하에 군장국(軍裝局)을 공격했다. 제5팀은 각 문마다 성문 아래 5명씩 배치되었다. 이들은 포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다.”
전투는 신속하게 끝났고 장개석은 승리의 열매를 안고 곧 상해로 돌아왔다. 진기미(陳其美)의 부탁으로 호군(滬軍 상해 지역 상인들의 자금으로 만든 혁명군) 제1사단 부사단장 겸 제1단 단장을 맡아 북벌을 준비했다. 24세의 장개석은 생각지도 못하게 아주 빨리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의 현장 속으로 말려들어갔다. 그는 또한 반드시 과감한 선택으로 역사를 추동하는 모험을 완성해야 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58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