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5. 병정천하(兵征天下)
각개격파
신해혁명 이후 국부(國父)가 직면한 난제는 잔여 군벌세력들을 제거하고 ‘민국을 창립하고 평균지권(平均地權 역주: 토지소유의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개혁)’이었다. 1917년부터 1924년까지 손중산은 3차례에 걸쳐 북벌(北伐)을 발동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고집스레 장개석에게 군사학교를 만들어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명을 계승하게 했다.
1925년 3월 12일 국민당 총리 손중산이 북경에서 갑자기 서거했다. 임종을 지킨 왕정위는 나중에 장개석에게 “손 선생이 임종하기 전에 거듭 개석, 개석을 찾으셨네….”라고 전했다.
총리가 세상을 떠날 때 장개석은 동정(東征)에 나서 일선에서 진형명(陳炯明)을 토벌하고 있었다. 그는 부고를 듣자마자 ‘대원수께서 서거하신 슬픈 소식을 전군에 알리며’라는 글을 발표하고 곧장 광주로 돌아와 추도회를 주관했다.
그는 추도사에서 “20년간 서로 따르며 조석(朝夕)으로 의지했는데 하루아침에 떠나시니 무슨 낙으로 살아갈 것인가? 옆에서 국부를 따른 이후 환난이 많고 즐거움은 적었다. 매번 생사를 넘나들 때마다 비분강개하고 탄식하면서 하루 종일 같이 하며 이심전심하던 장면을 누가 또 알겠는가? 황포 전투에서 당신께선 중화민국의 문천상(文天祥 역주: 끝까지 원나라에 항복을 거부한 남송의 충신)을 자처하시며 중정을 육수부(陸秀夫 역주 : 남송의 충신으로 어린 황제를 안고 투신함)로 대하셨노라. 작년에 헤어질 때 북으로 올라가시면서 이제 군사학교가 생겨 뒤를 이어 주의(主義)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있으니 비록 죽을지라도 유감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라고 했다.
그는 또 “우리 총리께서는 중화민국의 국부셨다.”라고 말했다.
당시 국민당원 중 경력이 가장 많은 사람은 왕정위(汪精衛), 호한민(胡漢民), 요중개(廖仲愷) 세 사람이 있었지만 보로딘(소련 고문)이 태상황처럼 영향력이 커서 풍파를 일으켰다. 장개석은 당시 군사(軍事)를 주관하며 정치를 멀리했기 때문에 이들 모두와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1925년 7월 왕정위가 국민정부 및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고 장개석은 군사위원회 상무위원이 되었다. 8월 요중개가 암살당했다. 보로딘은 호한민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 허숭지(許崇智)에게 호한민 등 여러 명을 총살시켜야 한다면서 “일단 먼저 사형을 판결하면 그들의 시체 머리가 증거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장위국,《나의 아버지 장개석(我的父親蔣中正)》)
호한민은 황포군사학교로 도피해 교장 장개석의 보호를 받다가 나중에 압력을 받아 출국했다. 이때 장개석은 권력의 정상에서 겨우 한걸음 떨어져 있었다.
1925년 국민당 정부는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을 건립해 황포군관 및 국부에게 충성스런 각 지역 군인들로 5개 군을 편성했다. 장개석이 1군 군장(軍長)을 맡았다. 1년 후 호남, 운남, 광동, 광서의 군벌세력을 흡수해 8개 군으로 확장되었고 장개석이 총사령관이 되었다.
1926년 1월 4일 장개석은 광동 국민정부 공식 연회에서 최초로 공개강연을 통해 북벌을 주장했다. 그는 “우리 당이 금년에 더욱 노력한다면 조만간 군벌을 전부 타도하고 북경을 수복해 총리의 운구를 남경 자금산(紫金山)으로 모셔다 안장할 수 있을 것이다.”
때가 되자 천지가 모두 힘을 합쳤고 장개석은 북벌의 기치를 높이 들고 국민정부의 당정군(黨政軍) 대권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4월 16일 장개석은 왕정위를 대신해 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았다. 5월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 2중 전회에서 장개석 등이 제출한 ‘당무정리안’이 통과되면서 국민당 내에서 중공의 활동을 제한했다.
7월 6일 그는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고 7월 9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취임선서를 발표했다. “혁명전쟁의 목적은 자유 독립국가를 만들고 삼민주의로 국가와 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세력은 반드시 삼민주의 아래 집중해 군벌과 군벌들이 의지하는 제국주의를 타도해야 한다.”(《국민혁명군 총사령관 대외선언(國民革命軍總司令對外宣言)》,1926)
위풍당당한 혁명군은 군장을 갖추고 출발명령을 기다렸다.
1916년 원세개가 사망한 후 지도자가 사라지자 여러 군벌들이 직례(直隷), 봉천(奉天), 안휘(安徽) 등 3대 파벌로 나뉘어 북양정부의 주도권을 놓고 다퉈왔다. 10년간 단기서, 풍국장(馮國璋), 조곤(曹錕), 장작림(張作霖) 등이 차례대로 북경 정권을 주도했다.
북벌을 할 무렵에는 단기서를 중심으로 한 안휘파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북양세력은 3개로 갈라져 있었다. 오패부(吳佩孚)는 화중(華中)을 통제하면서 호남과 호북을 포괄했고, 손전방(孫傳芳)은 화동(華東)의 소주 상해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고 장작림(張作霖)은 동북과 화북에 웅거하며 북양정부를 통제하고 있었다. 이들 세 군벌은 전투경험이 풍부했고 총 병력이 70만에 달했다. 장비는 우수했지만 군벌의 사적인 군대라 웅지가 없었고 그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종군했다.
반면 북벌군은 겨우 10만에 불과했고 장비도 부족했지만 국부가 창립하고 장공(蔣公)이 총수가 되었으니 이념과 믿음을 지닌 의병(義兵)이었다. 그러니 그 우열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황포군사학교 교문의 “승진하고 돈을 벌려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가고(升官發財請往他處) 죽음이 두려워 구차히 살려는 자는 이 문을 들어서지 말라(貪生怕死勿入斯門)”는 대련이야말로 북벌군의 정신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이다.
각개격파 전략에 근거해 총사령관은 “오패부를 타도하고 손전방과 연계하며 장작림은 상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26년 7월 9일 국민혁명군은 광주에서 출정식을 갖고 7월 11일 장사(長沙)를 점령했다. 북벌군이 호남에서 벌인 전투에서 최초의 대승을 거둔 것이다. 7월 12일 새벽 3시 장사의 5만인파가 손에 촛불을 들고 총사령관과 북벌군의 장사 진주를 환영했다.
무창전투는 북벌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북벌군이 처음 승리를 거둔 후 오패부는 직접 하승교(賀勝橋)에 와서 배수진을 펼쳤다. 그는 적진을 앞에 두고 도망간 여(旅), 단(團), 영(營)장 등 9명의 지휘관을 직접 총살하고 대도대(大刀隊)를 파견해 독려하면서 북벌군에 반격을 가했다. 좁은 장소에 많은 병력이 결집해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고 전황이 아주 참혹했다.
정사교(汀泗橋) 전투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장개석은 7월 28일 포은(蒲圻)에 와서 직접 전선에 나섰다. 당시 장령들의 희생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일시적인 정전 주장이 있었지만 장개석은 단호하게 말했다. “북벌의 성패가 이 전투에 달려 있다. 만약 조금이라도 사기가 꺾이면 이후 더는 승리할 기회를 잡지 못할 것이다. 오패부의 군대는 이미 모든 것을 다 걸었기 때문에 우리가 단호히 최후 1분까지 버텨낼 수 있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혁명군은 결국 10월 10일 신해혁명 15주년 기념일에 무창을 차지했다. 오패부는 나중에 장개석을 찬양하며 “그 뛰어난 용병술과 확고한 의지는 적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라고 말했다.(《장공기념전집(紀念蔣公專輯)》,대만 청산출판사)
장개석의 지휘 하에 진격을 멈추지 않은 북벌군은 11월 9일 남창(南昌)에 진입했다.
동남쪽의 제1군은 군장인 하응흠(何應欽)의 지휘 하에 12월 18일 복주(福州)성을 차지했다.
1927년 초 북벌군은 동로(東路), 중앙, 서로(西路) 세 방면으로 나눠 장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남경을 공략하기로 했다. 3월 21일 송강(淞江), 소주(蘇州), 상해를 차지했고 3월 23일 마침내 남경을 공략했다. 이때 오패부의 세력은 기본적으로 소멸되었고 잔여부대는 사천(四川)으로 도주했다. 손전방 역시 큰 타격을 입고 장작림에게 투항했다.
북벌성공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이 상해에서 당을 청리한 후부터 보로딘은 왕정위를 우두머리로 하는 무한 정부를 조종해 공산당과 연합해 장개석에 반대하도록 했다. 4월 17일 무한 국민당 중앙은 장개석을 총사령관 직에서 해임하고 아울러 그의 당적을 박탈하고 수배령을 내린다고 통보했다.
같은 날 장개석은 호한민 등과 함께 남경에서 국민정부를 조직하고 보로딘 및 주요 중공 지도자들을 지명 수배했다. 이때부터 2개의 국민정부가 남경과 무한에서 대치하는 ‘영한대립(寧漢對立 역주: 영은 남경 한은 무한을 가리킨다)’으로 북벌은 심각한 좌절을 겪었다. 1927년 8월 전체적인 대국을 고려해 장개석은 사직서를 내고 하야하면서 왕정위에게 ‘남경과 무한이 다시 합치고’ 남경으로 천도할 것을 촉구했다.
이때 이종인(李宗仁)의 광서군벌이 잠시 군사업무를 주관했는데 왕정위와 불화했다. 사령관을 잃은 국군이 북벌의 발걸음을 멈춘 사이 다시 권토중래한 손전방이 북벌군을 겨냥해 ‘남벌(南伐)’을 시도했다. 당시 남경을 거의 빼앗길 만큼 정세가 심각했다.
장개석의 벗들은 물론이고 그의 정적들까지도 북벌을 영도하고 중국을 통일할 사람은 장개석 외에는 없음을 알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의 독촉 하에 장개석은 1928년 1월 5일 다시 복직해 군사위원회 주석 겸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을 맡아 기치를 재정돈하고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북벌을 지속했다. 이때부터는 장작림에 대한 공격에 집중했다.
1928년 4월 총사령관은 2차례 북벌을 발동시켜 신속하게 장종창(張宗昌), 손전방의 부대를 와해시키고 북상하는 길에 일본군의 저지를 우회해 직접 북경을 공격했다. 장작림은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알고 6월 4일 북경에서 철수했다. 동북으로 돌아가던 도중 심양 황고둔(皇姑屯) 기차역에서 일본 관동군이 설치한 폭탄이 터지면서 사망했다.
6월 8일 북벌군은 평화적으로 북경에 진입해 북벌의 성공을 선포했다. 12월 말 장개석이 부친의 뒤를 이어 동북을 통치하던 장학량에게 투항을 권고하자 그는 기치를 바꿔 민국에 귀순해왔다.
신해혁명 이후 17년 만에 마침내 중국대륙(몽골은 제외)이 통일되었고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 중화민국 국기)가 동사성(東四省 역주: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 열하성을 말한다. 열하성은 나중에 없어짐.)의 하늘에 휘날렸다. 영국, 미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 프랑스, 스페인 등 세계 열강들이 앞을 다퉈 국민정부를 중국의 합법적인 정부로 승인했다.
1928년 7월 6일 장개석은 장령들과 함께 북경 향산(香山) 벽운사(碧雲寺 역주: 1925년 손문이 사망한 후 운구를 모신 사찰)에서 국부의 제사를 올리며 “총리의 정신으로 우리 당의 정신을 단결시키고 총리의 사상으로 전국의 사상을 통일”해야 하며 “전국 인민의 사상이 모두 삼민주의로 돌아오게 하고 전국의 정치가 모두 우리 당의 지도에 따르도록 이당치국(以黨治國)이란 총리의 주장을 힘껏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국민정부는 남경으로 옮겨 중화민국의 수도로 삼는다. 지금 북평(北平 북경의 옛이름) 옛 도읍은 이미 이름을 바꿨고 과거 기구는 내가 모두 접수했으니 새로운 도읍을 확립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북평을 되찾고 총리께 제를 올리는 글(克複北平祭告總理文)》,1928)라고 했다.
도읍을 남경으로 정한 것은 국부의 소원에 따른 것으로 삼민주의를 실현하는 중요한 조치였다. 또 전략적인 각도에서 볼 때 북방 영토를 노리고 있던 일본이나 러시아에 직면해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는 것이 국가안전을 고려한 것이다.
1928년 10월 10일 장개석은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했다. 그는 ‘동포들에게 알리는 글’에서 “북벌은 이미 끝났지만 혁명은 아직 성공을 기다려야 한다.… 지금 중국이 망하지 않고 독립과 자유의 목적을 달성하자면 오직 전국을 통일하는 혁명사상으로 계급투쟁이란 사악한 설을 배제해야 하며, 국민을 단결시키는 애국정신으로 국내 무력전쟁을 단절시켜야 한다.”라고 했다.
(《중화민국 17년 국경기념회에서 전국 동포들에게 알리는 글(中華民國十七年國慶紀念告全國同胞書)》,1928)
북벌 후 항일전쟁 전까지 비록 중원에서 큰 전투가 펼쳐졌고 동북이 함락되고 상해 일대에서 전투가 있었으며 강서에서 공산당을 포위 공격하는 등 크고 작은 전란(戰亂)이 있었지만 중국은 마침내 원기를 회복했고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51년 중국지역 미군사령관 겸 합동참모본부장을 역임한 웨더마이어는 미국 의회연설에서 “1927년부터 1937년 기간은 중국에서 오래 거주한 영국인이나 미국인은 물론 각국 교민들이 공인하는 10년 황금기였다.” “교통이 발달했고 경제는 안정되었으며 수많은 학교가 세워졌고 교육이 널리 보급되었으며 다른 방면에서도 수많은 진보적인 제도들이 만들어졌다.”
통일 후 중화민국은 군정에서 훈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시작되었다.
약 1300년 전 수나라의 보허(步虛)대사는 일찍이 예언시에서 “전쟁이 일어나 권력투쟁에 바쁜데 장차 민간에서 영웅이 나타날 것이다. 많은 호걸들이 강남에 모여 금릉(金陵 남경)의 일월이 다시 빛나리라(幹戈起,逐鹿忙,草莽英雄將出山,多少枕戈豪傑士,風雲聚會到江南,金陵日月又重光).”라고 했다. 여기서 민간에서 영웅이 나타난다는 구절의 원문을 보면 초(草는 艹와 같다)와 장(將)을 합하면 장(蔣)이 되니 분명 장공(蔣公)이 병사를 일으켜 북벌에 나서고 남경에 도읍을 정하는 역사적인 숙명을 지적한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