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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10): 중원의 내란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3. 중국인들 나라의 근본을 잃다

이리를 집으로 끌어들여

1915년 일본은 ‘21개조’를 이용해 원세개(袁世凱) 정부를 압박하며 중국에서 진일보로 자국의 이익을 확대하려 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5.4운동’의 도화선이 된다. 당시 중국은 재난에 처해 있었고 사람들은 실망에서 절망으로 나아갔다. ‘5.4운동’은 바로 이런 절망을 충분히 표현한 것으로, ‘반제(反帝)반봉건(反封建)’의 구호로 서방문명과 5천년 전통문화를 배척하다가 오히려 공산주의를 중국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5.4이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이 중국에서 유행했다. 이 두 가지는 중국문화에 대해 모두 변화를 추구하려고만 할 뿐 그 정상(常)을 몰랐다. 또 서양문화에 대해서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따라했을 뿐 그 정미로운 뜻을 추구해 중국의 국가정책이나 민생에 도움을 주려고 하진 않았다. 이는 진실로 문화침략의 최대 위기이자 민족정신에 대한 최대 우환이었다.”(장개석,《중국의 운명(中國之命運)》)

“또 다른 한 방면에서는 최근 백년간 중국 문화는 뜻밖에 큰 폐단이 발생했다. 그것은 바로 불평등조약의 압박 하에 중국 국민들이 서양문화에 대해서는 거절에서 굴종으로 나아가고, 고유문화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뽐내다가 비하하게 되었다. 굴복해서 독실하게 믿는 데로 변했고 극단에 이르자 자신을 모 외국학설의 충실한 신자라고 인정했다. 또한 자기 비하가 자책으로 변했고 극단에 이르러 우리 중국 고유의 문화유산에 대한 모멸마저도 참게 되었다.”(장개석,《중국의 운명》)

장개석은 민족의 역사와 문화야말로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강력한 국력임을 분명히 인식했다.

“간단히 말해, 현재 나라가 이 정도로 쇠약해지고, 사회경제가 이 정도로 파산 지경에 이르고, 인심이 이런 정도로 마비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고유의 미덕, 완비된 입국과 치국 정신, 아주 훌륭한 주의(主義)를 전부 다 포기하고 원하지 않으면서 단지 오늘은 동쪽에서 일부를 끌어오고 내일은 서쪽에서 일부를 가져오는 식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우리 고유의 훌륭한 입국정신을 망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의 사람임을 망각한 것이자 더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하나의 중국인임을 망각한 것이다!”

“때문에 우리 민족은 도덕정신을 상실해 하나도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만약 한 사람에게 정신이 없다면 비록 살아있다 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며, 한 나라가 그 영혼의 정신을 잃으면 비록 이름은 존재한다 해도 실질적으로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사회는 파산했고 인심은 마비되어 기율이 완전히 사라졌고 질서가 어지러워졌다. 염치라고는 조금도 없으며 신의(信義)는 말하지도 않는데 이렇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전적으로 우리의 입국정신(立國精神)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다시 민족 정신을 구원하고 부흥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럼 멸망이 곧 닥쳐올 것이다!”

(《중국의 입국정신》, 1932년)

“그러므로 우리는 한 나라의 정신과 민족정신이 이렇게 중요함을 알고 있다. 민족정신이 사라지면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고 설령 존재한다 해도 망한 것과 같다! 만약 이런 민족정신이 남아있다면 설령 나라가 망했을지라도 다시 부흥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본인들이 어떻게 침략하는지 두려워할 게 아니라 오직 우리 자신에게 민족정신이 없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중국의 입국정신》, 1932년)

끊이지 않는 중원의 내란

이때 국민정부가 직접 통제한 지역은 중국 화동(華東)의 일부 구역에 불과했다. 중앙정부도 두개로 분열되어 호한민(胡漢民)이 광동에 또 다른 국민정부를 설립했다. 당시 중국의 다른 지역은 비록 명목상으로는 국민정부에 소속해 있었지만 실질상 크고 작은 60여개 군벌이 할거하고 있었다.

“군벌 정객은 나라의 통일을 원하지 않으며 이기적인 마음으로 할거 하며 관례에 따라 이어받는 것을 타파할 수 없다. 이것이 오늘날 중화가 나라를 세울 수 없는 이유이자 제국주의의 모욕이 그치지 않는 이유이다.” (《장중정 총통 곤면기(蔣中正總統困勉記)》)

밖에는 일본이 있고 안에는 중공이 있는데, 중국은 통일되지 않고 내전에 빠졌으니 일본의 치략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북벌 이후 이종인(李宗仁)과 백숭희(白崇禧)의 광서 군벌이 광서, 호남, 호북 등 성을 통제했고 풍옥상(馮玉祥)의 서북군벌이 섬서(陝西), 감숙(甘肅), 차하르(察哈爾 역주: 지금의 내몽고 하북 산서山西 일부로 구성된 성), 하남을 통제했으며 염석산(閻錫山)의 산서(山西)군벌이 섬서(陝西), 수원(綏遠)과 북경 및 천진 안쪽을 통제했고 장학량(張學良)의 동북군벌이 동북 4성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들의 병력은 각각 20만을 넘었다. 군벌의 이익은 자신의 군대와 지역적 기반에 달려 있었고 국가와 민족은 큰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때문에 군벌들은 가급적 많은 병력을 유지하려 했고 군사비 지출이 전국 재정 수입의 75%를 초과했다.

1929년 장개석은 평화적인 수단으로 군벌들의 보유 군사를 줄이기 위해 논의했다. 하지만 군벌들이 무장반란을 일으켜 중원대전이 벌어졌고 염석산과 풍옥상, 이종인 세 군벌이 연합해 무려 70만 명이 넘는 군대를 동원했다. 여기에 중앙군의 60만을 합하면 백만이 넘는 대군이 군벌이 일으킨 중국내전에 동원된 것이다.

결국 중립을 지키던 장학량이 장개석과 연합해 동북군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산해관을 넘어 들어와 북경과 천진 지역을 차지하면서 중원대전은 끝이 났다. 하지만 이로 인해 동북지역 군사력에 공백이 생겼고 일본군이 9.18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복선이 되고 만다.

한편, 중원대전의 포연이 사라지기도 전에 왕정위(汪精衛), 이종인이 또 다시 광동에 별도의 정부를 수립했다. 이들은 일본과 결탁해 중공을 지원하며 병력을 일으켜 남경의 국민정부를 토벌하려 했다. 이와 동시에 중공이 강서(江西)에 소비에트정권을 수립하자 장개석은 침식마저 편안히 할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오직 장개석만이 중공을 방치하면 호랑이를 기르는 우환을 남기게 됨을 깊이 알고 있었다. 중공에겐 뚜렷한 공산주의 신앙과 정치 강령이 있고 또 배후에 코민테른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군벌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군벌은 단지 지역을 할거해 토착 황제 노릇을 하며 지방의 생사대권을 장악하는 것만 추구했지만 중공은 중국 전체를 공산화 하려 했다.

삼민주의로 국혼을 일깨우다

일찍이 1934년 장개석은 서도린(徐道鄰)이란 가명으로 《외교평론(外交評論)》 12월 호에 ‘적인가? 아군인가?’라는 중요한 논문을 발표해 일본 측에 대중국 강경책을 포기하고 전쟁을 끝낼 것을 권고했다. 다음은 문장의 일부이다.

“중국에는 영원히 풀지 못할 무슨 원한이란 관념이 없으며 좋고 나쁨, 벗인지 적인지는 완전히 사실에 따라 변해왔다. 그러므로 일본이 만약 정말로 중국 영토에 대한 침략을 포기할 수 있다면 중국은 서방 각국에 대해서도 여전히 벗이 되길 원하는데 하물며 같은 대륙 같은 인종인 일본은 어떻겠는가? 다만 일본은 동방의 민족으로서 마땅히 동방의 심리를 분명히 알고 동방인의 특성 특히 중국인들이 감정을 중시하고 기개와 예의 및 도의를 중시함을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내가 과감히 일본에게 똑바로 알리고자 하니 무릇 특성이 있고 국가의식이 있는 국민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그 민족성과 역사문화를 소멸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장공(蔣公)은 중국 역사관에 대한 일본의 판단착오를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일본인들이 중국의 결점만을 보고 중국 민족의 우수한 점을 보지 못한다고 통찰했다. 중국 고유문화와 미덕이야말로 바로 삼민주의의 근본이며 다시 말해 중국의 국혼(國魂)이다. 오직 국혼을 일깨워야만 중국인들이 삼민주의를 믿고 중국의 정신역량이 적의 물질역량을 싸워 이길 수 있다.

“승패의 중요한 관건은 평소의 ‘지피지기(知彼知己)’에 달려 있다. 일본인들은 중국의 모든 상황에 대해 비록 아주 투철하게 보고 있지만 우리 중국민족의 역사관에 대해서는 오히려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것은 바로 우리 중국민족이 망국의 노예가 되는데 습관이 된 열등한 인종이라는 판단이다.”

“저들 일본인의 판단착오는 특히 민국 원년 이래 원세개 시기 일부 군벌과 관료들이 모두 이기적으로 뇌물을 받아먹고 법을 어기며 비루하고 열악해 국가나 민족의 관념이 전혀 없고 구국(救國)구민(救民)의 정신이 전혀 없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들은 이 때문에 중국의 관리와 군인은 모두 이와 같다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중국인들은 하나하나 열등한 인종으로 그 누구라도 다 매수해서 이용할 수 있으며 통제하고 압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로 이런 편견을 지녔기 때문에 그들은 중국에 대해 멋대로 행동하며 아무 거리낌이 없었고 중국은 싸우지 않아도 굴복시킬 수 있다고 여겨왔다. 저들 일본인의 중국민족 관찰은 다만 나쁜 측면만 본 것이며 우수한 점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시했거나 또는 설사 보았다 해도 제대로 주목하지 못했다.”

“(일본인들은) 오직 송나라가 멸망한 것만 보고 송나라 말기 순국한 충신열사들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으며, 명나라가 흥기한 원인에 대해서는 더욱 주목하지 못했다. 또 만주족의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들어온 정황만 보고 민간에 축적된 혁명사상은 보지 못했으며 더욱이 중화민국이 흥기한 이유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또 민국 이후 원세개만 보고 우리 혁명영수인 손 총리를 보지 못했으며, 오직 북양군벌의 군대만 보고 우리 혁명군을 주목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중국민족의 일부 나쁜 사실에 근거해 일체를 말살했으며, 일부가 나쁘다는 이유로 모두를 나쁘다고 여겼으며 더 나아가 (중국에는) 좋은 것이 없다고 여겼다.”

“이런 논리의 잘못은 진실로 저들 민족의 협애하고 지나치게 잘난 체 하는 심리와 편견으로 조성된 것으로 대부분 사물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들의 인식이 분명하지 못하고 판단에 잘못이 있기 때문에 장래에 상황이 변화하게 되면 당연히 저들의 생각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삼민주의는 완전히 평화적인 왕도(王道)이며, 제국주의의 야만적인 패도(覇道)와는 대립적인 지위에 있다. 우리 중국은 자고로 늘 왕도(王道)로 패도(覇道)를 극복해왔으며 소위 ‘인자무적(仁者無敵)’의 ‘인(仁)’이 바로 왕도의 근본정신이자 또한 삼민주의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삼민주의로 제국주의에 저항하게 되면 반드시 최후에 큰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러므로 삼민주의는 단순히 우리가 치욕을 씻고 혁명으로 나라를 세운 최고의 원칙일 뿐만 아니라 가장 큰 역량이다. 삼민주의의 근본정신은 바로 중국 고유의 문화와 고유의 미덕이 유전(遺傳)된 것이다. 때문에 삼민주의는 바로 우리나라의 국혼이며 우리가 나라를 구하자면 반드시 먼저 국혼을 일깨우고 국혼을 발양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삼민주의를 신앙하고 삼민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 아래에서 민족의 자신감을 다지고 민족의식을 통일하며 민족의 정신을 발양해야만 한다. 우리가 비록 물질적으로는 적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우리 민족의 정신적 역량은 반드시 적의 일체 물질 역량과 싸워 이기게 될 것이다.”

(《정부와 인민이 공동으로 나라를 구하는 중요한 도리》 1936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