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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31): 미국의 소련원조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2. 폭정을 도운 미국

미국의 소련원조

소련은 2차 대전 기간에 미국으로부터 대대적인 원조를 받았다. 미국의 소련지원은 중국보다 7배에 달했다. 1941년 3월 미국 의회는 무기대여법(Lend-Lease Program 역주: 우방에 무기를 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른 전쟁기간 미국의 대외원조 총액은 모두 506억불에 달했다. 이중 소련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누계 109억불의 원조를 받았고 이는 전체 원조 총액의 22%에 달한다. 반면 중국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누적 원조액이 16억불로 원조 총액의 3%에 불과했다. 게다가 항전기간 중 중국이 가장 곤경에 처해 있던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미국의 원조물자는 극히 적었고 대부분의 원조물자는 1945년에 집중되었다.(《전시미국의 대중정책(戰時美國對華政策)》)

1941년 7월 미국은 일본에 대해 석유수출금지 조치를 실시했고 곧이어 영국과 네덜란드 정부도 보조를 맞췄다. 이 정책으로 일본은 소위 ABCD포위망(A는 미국 B는 영국 C는 중국 D는 네덜란드)에 갇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일본 해군부 장관을 역임한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는 일황(日皇)에게 “이렇게 되면 앞으로 겨우 2~3년의 비축분 밖에 남지 않으며 만약 전쟁을 치른다면 1년 반이면 다 소모되어 말을 타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진술했다.(《일본외교사(日本外交史)》)

일본은 이에 소련을 공격하려던 북진(北進)정책을 포기하고 남진정책을 시작했다.

“소련 전장에 어떤 변화가 있든 1941년 안에 북방문제를 해결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남방을 해결하는 방침에 전력을 다하라.”(《대동아전쟁사(大東亞戰爭史)》)

이후 일본군은 동남아로 남진했고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완벽한 음모

태평양전쟁의 발발은 오히려 소련과 중공에게 중국 국민정부에 대해 체계적인 파괴와 전복을 진행하게 했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대중국정책은 오히려 이로 인해 전면적으로 수정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 소련은 중국이 장기간 항전해서 일본의 북진을 저지하길 원했다. 중공은 장기 항전과정 중 무력을 강화하고 지반을 확대해 중국을 분열시키며 중국을 정복하는 목적에 도달하고자 했다. 1942년 1월에 이르러 중국이 워싱턴동맹 참가를 선언한 후 스탈린은 어떻게 해서든 중국 항전승리의 성과를 파괴하려 했으며 우리가 독립하고 통일해 강대한 중화민국이 부활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 모택동 역시 모스크바를 위해 이런 전면적인 태도변화를 준비했다. 그 최초의 한 수는 미영(美英) 양국정부의 중국내 특권을 취소하라는 중대절차를 선포하도록 요구해 중국 국민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친서방적 경향이 생기지 않게 했다.”

“때문에 소련과 중공은 이때부터 전력을 다해 국제사회에서 우리 국민정부의 지위 및 위신을 파괴하려 했다. 또한 중국 국민 사이에서 서방 동맹의 우리나라에 대한 우호를 파괴해 평등한 새 조약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려 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바로 그들이 주중(住中) 미국 군사대표단 내부 및 각국 사절들 사이에서 다방면으로 중국 정부가 이미 일본과 비밀리에 단독으로 정전협상에 들어갔다고 선전한 것이다. 그 목적은 전적으로 미국에 영향을 끼쳐 우리 정부에 대한 원조를 단절하고 우리의 항전을 하루 빨리 붕괴시켜 정부를 전복시킬 음모를 달성하려는 것이다.”(《중국 안의 소련》)

1943년 5월 스탈린은 코민테른을 해산하고 서방측에 잠시 타협해 정세를 만회하고자 했다. 당시에는 장개석도 이것이 공산당의 진심이라고 여겼다.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해산 선포는 세계를 진동시켰다. 나 역시 이는 미국에 대한 소련의 정성어린 합작 표현이라고 믿으며 결코 위장행동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코민테른과 같은 이런 국제 공산당 사령부이자 그들 공동 신앙의 중심을 스탈린이 장차 해체하려 하는데,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 위장술이라면 세계적으로 그의 신용은 완전히 파산할 것이며 앞으로 그 누구도 스탈린과 소련이 하는 모든 행동을 믿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이는 미국 외교가 2차 대전 중 얻은 가장 큰 승리입니다’라고 말했다.”

장공(蔣公)은 나중에야 코민테른 해산은 일시적인 타협에 불과하며 소련의 국제음모를 위한 복선을 깐 것임을 발견했다. “그러나 당시 스탈린은 왜 소련의 기초를 뒤흔드는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코민테른 해산이란 계획을 세웠을까? 그것은 바로 소련이 당시 서쪽에서 독일군의 강대한 공세에 대응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동쪽에서는 일본이 독일군과 협력해 시베리아를 공격해 동서 양쪽에서 소련을 공격하는 태세를 갖추려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합국이 신속히 제2의 전장을 열어주길 원했고 그러자면 소련도 큰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코민테른 해산을 선포해야만 했고 또 미국이 제안한 4강 회담을 받아들여 전후 모든 문제를 미리 협상해 소련이 민주국가들과 평화롭게 공존하길 원한다는 표시를 해야 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제2전장을 열기 위한 유리한 조건으로 바꾸려 한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일본과 비밀리에 불가침조약을 체결해 시베리아에 대한 위협이 사라졌고 또 독일군이 7~8월 잇따라 패배하고 오룔전투에서 승리하자 이후 태도를 돌변했다. 미국의 건의에 대해 뒤로 미루면서 상관하지 않게 되었다.”(장개석 강연,《첫번째 회담의 승리(第一回合的勝利)》)

“스탈린이 뜻밖에 코민테른을 해산한 것은 겉으로 보면 독일 일본 이탈리아 반공동맹을 겨냥해 추축국에 반대하는 세계민주전선의 단결을 촉진시킨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역시 스탈린의 정치전술과 선전수법이다. 다시 말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후 소련의 국제음모를 세계적으로 전개한 것이다. 왜냐하면 코민테른 해산 이후 각국 공산당이 모스크바의 전략계획의 지휘 아래 제멋대로 음모와 폭력을 행사해도 모스크바는 아무런 정치적 책임도 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중국 안의 소련》)

장개석은 소련의 세계전략을 개괄하면서 그 첫걸음은 동유럽 몰락으로 보았다.

“민국 32년(1943년) 소련은 독일군에 여름 공세를 펼쳐 잃었던 영토의 3분의 2를 되찾았다. 독일의 최후 패배는 이미 예견되었다. 전후 세계에 대한 스탈린의 전반계획은 이 시기에 처음으로 확립되었다. 그는 카이로 회담 참가를 거부했다. 같은 해 12월 완벽한 한 세트의 음모를 갖고 테헤란에서 미국 및 영국과 영수회담을 가졌다. 유럽방면에서 그는 처칠이 주장한 발칸반도에서 제2의 전장을 열자는 제안을 거부하고 연합국의 프랑스 상륙계획을 독촉했다. 이는 스탈린 세계전략의 최초 승리로 전후 동유럽이 몰락하는 운명을 결정지었다.”(《중국 안의 소련》)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진격함에 따라 공산주의는 유럽에서 신속히 확장되었다.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의 동유럽 국가들은 공산국가로 색깔이 변했다. 처칠은 ‘철의 장막’이란 용어로 이 변화를 개괄했다. 즉 “폴란드 북서 해안의 슈체친에서 이탈리아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유럽대륙을 가로지르는 철의 장막이 이미 쳐졌다.”

장공은 소련이 2번째 회담에서 미국 측에 중국의 이익을 희생하도록 요구했고 이를 통해 중공이 중화민국을 전복하려 했다고 지적했다.

“민국 34년(1945년) 2월 미국 영국 소련의 영수가 얄타에서 회의를 가졌다. 스탈린은 두 번째 회담에서 거의 전면적인 승리를 거뒀다고 말할 수 있다. 폴란드 문제, 독일 점령문제 및 유엔헌장의 거부권 문제 등에서 모두 스탈린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특히 외몽골과 동북삼성은 우리 중화민국의 행정력이 완전히 발휘되고 있었음에도 소련의 대일전쟁 참가로 인한 희생양이 되었다. 스탈린은 또 우리 중화민국에 대한 완전한 음모를 계획해 미국 공산당 및 그 동료들에게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반화도장(反華倒蔣 중화민국에 반대하고 장개석을 타도하자는 주장)’의 선전활동을 확대했다. 동시에 중공 및 그 위성 당파들의 중국 내 임무는 정권을 전복하고 군사 반란을 꾀하는 것이다.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이 모두 확실한 증거다.”

(《중국 안의 소련》)

중국을 팔아넘기다

최근 일부 연구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스탈린과 친분이 아주 두터웠다고 한다. 이들은 처칠과 함께 회동해 1943년 테헤란 회담 및 1945년 얄타밀약에서 중국을 팔아넘기는데 동의했다. 루스벨트는 중화민국의 영토와 주권을 팔아넘긴 대신 소련의 대일(對日)참전을 얻어내 미군 사상자수를 줄이려했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미영과 소련이 각자의 세력범위를 획정으며, 중국은 소련에 귀속하고 유럽은 미영에 귀속했다고 한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이 일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얄타밀약이야말로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지적했다.

‘얄타밀약’의 보다 많은 부분은 스탈린과 루스벨트의 구두협상이라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주로 중국을 겨냥해 장개석과 국민정부 정권을 희생한 것이다. 마치 손중산이 생전에 예견했던 것처럼 외교수단이 중국을 멸망시킨 것이다.

손중산은 일찍이 《삼민주의(三民主義)》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정치력을 사용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는 두 가지 수단이 있다. 하나는 병력이고 다른 하나는 외교다. 병력은 총과 대포를 사용하기에 저들이 총과 대포를 사용하면 우리는 그래도 저항해야 함을 안다. 만약 외교적인 수단을 사용하면 오직 종이와 펜뿐이다. 종이와 펜을 사용해 중국을 망하게 하면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는 것조차 모르게 된다.”

“오직 각국 외교관이 한곳에 모여 매 사람이 한 글자만 서명해도 중국을 망하게 할 수 있다.” “만약 몇몇 강대국이 하루아침에 타협한다면 중국은 멸망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정치력이 나라를 망치는 상황을 말하자면 지금 중국이 처한 지위는 몹시 위험한 것이다.”

독일 뮌스터 대학의 화이언보그(懷恩博格) 교수는 《중화민국의 외교대책(中華民國的外交對策)》이란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념의 측면에서 보자면 서방 국제주의자들(일부 자본주의자가 있고 나머지는 공산당에 찬성하는 자유파 인사들)은 줄곧 소련 및 중공과 지성방면에서 연관성이 있고, 민족주의를 몹시 혐오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애국주의, 국가존엄 및 조국에 대한 사랑은 모두 정치사상적으로 착오적인 표현방식이니 마땅히 철저히 제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 자본주의자와 자유파 국제주의자들은 줄곧 공산당을 민주와 관련된 자제(子弟)로 보았다. 때로 이들 공산당원은 악질 자제가 될 수도 있는데 특히 인권방면에서 저지른 범죄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역사의 관건적인 시각에 서방 국제주의자들은 늘 공산당을 지지하며 민족주의에 대항했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그들의 세계 정책 및 범우주적 권력에 가장 큰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