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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수민족의 신전문화(4): 상고시대의 민족 융합 (하)

글/ GZ

【정견망】

(4) 문정중원(問鼎中原)–상고시대의 민족융합(하)

상편에선 황제가 염제와 연합해 치우를 물리친 후 어진 정치를 베풀고 “덕을 닦아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오행을 다스리며 오곡을 심고 만민을 위로해 사방을 제도해”(《사기–오제본기》) 각 부락연맹의 지지를 받은 일에 대해 말했다. 판천 전투와 탁록 전투는 부락연맹 시대의 국면을 변화시켰고 황제는 새로운 종주(宗主)가 되어 하화 문명의 개창과 번영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황제 이후에 또 현명(賢明)한 군주가 나왔으니 바로 요(堯)다. 그가 집정하던 시기 세 가지 큰 일이 발생해 중국의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첫째는 순(舜)의 건의로 당시 “네 죄인”인 즉 공공(共工), 환두(歡兜), 곤(鯀)과 삼묘(三苗)를 변경으로 유배시켜 영토를 개척한 것이다.

《상서 순전(舜典)》에 따르면 “삼묘가 강회(江淮), 형주(荊州)에서 여러 차례 난을 일으켰다. 이에 순은 요임금께 공공을 유릉에 유배하여 북적(北狄)으로 변하게 했고 환두를 숭산에 유배해 남만(南蠻)으로 변하게 했으며 삼묘를 삼위(三危)에 보내 서융(西戎)으로 변하게 했고 곤을 우산(羽山)에서 죽여 동이(東夷)로 변하게 했다. 네 악당을 벌주자 천하가 모두 복종했다.”라고 한다.

이것은 황제가 구리족 전쟁 포로를 유배한 이후 또 한 차례 중요한 민족분화였다. 북적, 남만, 동이, 서융이 바로 중국 현재 여러 소수민족들의 기원이 되는데 중국 판도에 처음으로 열 민족이 융합한 국면이 나타났다.(그림 1)

중국 상고시기 여러 민족이 융합한 판도
두 번째 큰 일은 바로 요임금 재위기간 사상 유례없는 대홍수가 발생했다. 이 대홍수는 지상의 거의 모든 문명과 인류를 훼멸시켜 모든 것을 다시 씻고 새로운 질서를 건립하게 했다. 상편에서 우리는 신이 극히 소수의 사람만 새 문명의 인종으로 남겼고 전반 신주대지는 홍수에 덮여 이전의 만국 연맹 시대는 물바다 중에서 지난 일이 되어버렸음을 알았다. 하지만 곤륜산 부근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남겨져 후일 화하문명의 개척을 준비하게 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당시 요임금 일족이 있던 곳이 바로 곤륜산 일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홍수를 피해 다행히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홍수 기간에 요는 순에게 제위를 선양하면서 아주 중요한 한마디 말을 했다.

“그대 순이여! 하늘의 역수(曆數)가 그대의 몸에 있으니, 진실로 그 중심을 잡도록 하라. 천하가 곤궁해지면 하늘이 내려준 녹위(祿位)도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이 문장은 《논어》 〈순왈(舜曰)〉에서 인용)

이 문장을 풀이하면 “하늘의 변화규율이 그대 수중에 있고 그대가 장악하고 있으니 ‘중(中)’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하늘의 복록이 영원히 끝날 것이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중’은 방위의 중심이자 천하의 중심이다. 이것 역시 ‘중국(中國)’이란 명칭이 근대에 들어와 심오한 뜻이 있음을 예시한다. 그러면 새로운 천하의 중은 어디에 있는가? 하지 날 정오 그림자가 한척 오촌이 되는 지방이 바로 천하의 중이다.

상편에서 우리는 대홍수 이전 우주 천상에 발생한 세차 현상이 천하 ‘중(中)’에 편이가 발생하게 했고 따라서 하늘에서 별들의 변동이 생겼다고 말했다. ‘중’의 위치는 곤륜산 일대에서 점점 하남 숭산 지역으로 옮겨갔고 그곳이 새로운 천하의 중심이 되었다. 그곳에는 지금도 주공 당시 축성한 측영대(測影台 그림2)가 남아 있다.

또 천하의 중심을 차지한 국가가 바로 중국(中國)이 된다. 이때부터 각 조대(朝代)의 갱신과 변환은 모두 ‘문정중원(問鼎中原 중원을 차지하는 일)’을 둘러싸고 전개되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 선인들이 말한 ‘중심에 거처하며 다스린다(居中而治)’는 정치관점이다. 왜냐면 ‘중심’위치를 점거한 사람이 바로 중심이 되는 나라의 천자가 되기 때문이다.

하남 숭산 주공의 측영대
‘중’의 갑골문 자형을 보면 바로 고대 해 그림자를 측량하던 도구에서 내원한다. (그림 3, 4) 천문과 인문의 이런 대응 관계는 바로 중국문명이 형성되는 기초가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선조들의 사고와 논술이 매우 자세하면서도 깊다.

‘중(中)’자의 변화
북경 고대 천문대에서 해 그림자를 관측하는데 사용하던 표(表)
리훙쯔(李洪志) 대사님은 일찍이 설법에서 이번 차례 대홍수에 대해 말씀하셨고 우리에게 5천년 인류문화의 변화과정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셨다.

“여러분 알다시피 4, 5천년 이전 이번 인류문명 초기에 우리 지구상에는 한 차례 대홍수가 출현하여 유럽 전반의 백인문명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물론 남겨진 유적은 아주 적지만 일부 문물고적 중에서 일부 사전(史前)의 것들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옛 희랍문화가 남겨놓은 일부 출토문물 중에서 우리는 여전히 사전문명의 존재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동방에는 대홍수 이후에 남겨진 것들이 상대적으로 비교적 많았다. 여러분은 우 임금(大禹)이 물을 다스린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 당시 물이 대단히 불어났으며 물이 물러간 다음 우 임금은 사람들을 데리고 물에 잠긴 토지의 물을 빼냈다는 이러한 역사상의 기록이 있다. 당시 인류의 그 옛 문명, 전번 한 시기의 문명은 대홍수로 훼멸되었다. 그러나 중국인의 조상은 대홍수 이후에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으며 남겨 놓은 문명도 비교적 많았다. 그러나 서방인은 살아남은 사람이 비교적 적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서방문화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이며 그 어떤 옛 역사가 없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이다. 이렇게 해서 중국의 옛 문명은 아주 연원(淵源)이 있는 역사가 되었으며 따라서 지금의 과학이 걷는 길과도 같지 않았다.

그럼 이러한 옛 문명 속에는 지금 사람들이 아직 모르는 많은 것들이 있고, 한편으로 현대문화와는 괴리되어 있기 때문에 서방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중국 이곳에는 많은 신비한 것과 현대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중국인 자신도 알고 있다. 중국 이곳의 많은 옛 문화를 아직도 현대인은 인식하지 못한다. 일부 사람은 듣기도 하고 보기도 했지만 역시 해석하지 못하며 또한 이런 옛것들을 내놓아 사람들에게 말해 주는 사람이 없다. 당시 살아남은 중국인의 조상이 비교적 많았기 때문에 일부분 상고(上古) 문화가 남게 되었다.

과거 상고(上古)시기 중국 종족의 중심지역은 현재의 황하유역이 아니라 신장(新疆) 이 일대였다. 이 민족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 역시 이 일대에서였다. 왜냐하면 쿤룬산(崑崙山)이 이 일대 가까이에 있어 주위의 지표면이 비교적 높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 한 차례 홍수는 수위(水高)가 2천 미터에 달했으며 지구 전반이 수몰되게 했다. 많은 사람이 홍수가 넘쳐날 때 쿤룬산으로 대피하여 살아남았고 상고시기의 일부 문화를 남겼다. 예를 들면 중국의 일부 사람들이 아직도 잘 알지 못하는 하도(河圖)·낙서(洛書)·태극(太極)·선천팔괘(先天八卦) 등등과 또 오늘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부 옛 기공(氣功)들이다.”(《싱가포르 법륜불학회 설립식에서의 설법》)

세 번째 사건은 바로 대우(大禹)가 물을 다스린 일이다. 우(禹)는 성이고 이름은 문명(文命)인데 사서에서는 흔히 대우(大禹), 제우(帝禹), 신우(神禹) 등으로 불린다. 하후씨(夏后氏)의 수령이자 하나라 개국 군주다. 대우는 또 황제의 현손(玄孫)이자 전욱(顓頊)의 손자이며 곤의 아들이니 황제의 진정한 직계 혈맥이다.

우의 부친 곤과 다른 부족 사람들이 함께 동부로 유배되어 동이(東夷)가 되었다. 곤은 나중에 치수에 실패해 죽음에 처해졌다. 곤의 아들인 대우는 죄를 짊어지고 치수를 했으며 13년간 세 번이나 자기 집 앞을 지나갔으나 들어가지도 않고 마침내 치수에 성공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대우는 하후씨 일족이라고 한다. 사마천은 《사기-육국연표》에서 “우는 서강(西羌)에서 일어났다.”고 썼다. 《집해集解》에서 황보밀(皇甫謐)은 “맹자가 말하길 ‘우는 석뉴(石紐)에서 태어난 서이(西夷)인이다.’라고 했다.”

《촉왕 본기》에서는 “우는 본래 문산(汶山)군 광유(廣柔)현 사람이며 석뉴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많은 사서에 대우는 ‘서강인’이라고 기록했고 석뉴는 바로 지금의 사천 서북 문천지구인데 그곳에 옛날부터 아직도 강족의 거주지가 있다. (그림5)

현재 아파장족(阿壩藏族)강족(羌族) 자치주와 북천 강족 자치현에 전해오는 ‘화등희(花燈戲)’라는 연극에 ‘대우치수(大禹治水)’란 내용의 연극이 있다. 그중 한 단락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먼저 하늘이 있고 나중에 땅이 생겼네
후에 사람이 있고 남자 여자가 생겼네
먼저 와서 노래하는데 아래는 모자 쓴 한(漢)인이다
우리 위에는 신을 신은 장족(藏族)이다
그 중간에 강족이 산다. 이 즐거운 날에
우리 민족을 노래하고 우리 선조를 노래한다
산에 나무가 있고 나무에 뿌리가 있으니 우리는 강족의 뿌리를 노래한다.
가장 능력있는 “야거시”는 9 줄기 강을 통했는데
8년의 시간이 걸렸네. 처음 집 문앞을 지나며
아이 울음 소리를 들었지만 오로지 마음속에는
야수를 없애지 못했다는 마음뿐. 두 번째 집 문앞을 지날 때
아이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온몸에 용기가 솟아났네
세 번째 집문 앞을 지날 때 아이는 이미 자랐고
의지가 배가 되어 기세높이 9 줄기 강물을 소통시켰다
하늘의 큰 곤란에 놀라 넘어지지 않았다네…….

先有天,後有地,後有人,有男有女。
先來唱,在下面,是戴帽子的漢人。
在我們上面,是穿靴子的藏人。
居中間的是羌人。在這喜慶的日子裏,
歌唱我們的民族,歌唱我們的祖先。
山有樹,樹有根,我們來唱羌族的根。
最能幹的“耶格西”,是他疏通了九條河,
時間用了八年整。第一次路過家門口,
聽見孩子的哭聲,可他心中只想到,
還有野獸未消滅。第二次路過家門口,
聽見孩子的笑聲,頓覺渾身是勇氣。
第三次路過家門口,看見孩子已長高,
毅力倍增氣昂昂,九條河水定疏通,
天大困難嚇不倒……

사천 아파 장족강족 자치주에서 흥겹게 춤추는 강족 처녀
여기서 ‘야거시(耶格西)’란 대우의 강족 이름이며 노래한 것은 대우가 치수하면서 세 차례나 집문 앞을 지나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 지역 사람들은 대대로 대우를 그들의 선조이며 영웅으로 보고 있다.

대우는 치수할 때 세 가지 법기를 사용했다 :개산부(開山斧 산을 가르는 도끼), 피수검(避水劍 물을 피하는 검)과 하도낙서(河圖洛書)였다. 대우는 반복적으로 천문현상을 관측하고 하도낙서의 연화에 근거해 천지의 대응 관계를 추산했다. 그는 장강 남북을 두루 돌며 지형을 자세히 관찰했고 개산부로 용문과 이궐을 쪼갰고 적석산과 청동협을 뚫고 아홉 산맥을 통하게 했다. 피수검으로 아홉 줄기 큰 강을 소통시켜 흐름이 막힘없이 바다로 들어가도록 했다. 9개의 큰 호수를 팠고 13년의 시간을 들여 마침내 치수를 완성했다. 새로운 지형을 지도로 그려 다시 이름을 붙였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우적도(禹跡圖 우의 자취도란 의미 그림 6)’라고 한다,

송나라 때 바위에 새긴 ‘우적도’, 대우가 치수할 때 측량해선 그린 9주 지도
중국 역사상 첫 번째 왕조의 제왕으로서 대우는 일생동안 중화문명의 기초를 다진 많은 큰 일을 했다.

그는 성상(星象)분야에 근거해 –다시 말해 하늘의 28수와 사상(四象)이 대지 위에 투영된 것(그림 7)에 근거하여 9주를 다시 나눴다. 그는 또 부세(賦稅 부역과 세금)제도 및 오복(五服) 제도를 창립했으며, 주마다 12개의 사(師)를 설치하고 5개 제후국마다 한명의 오장(五長)을 임명하여 그들에게 직책을 지키고 공을 세우게 했으며 마지막으로 국가의 경계를 5천리까지 늘렸다.

대우는 사람됨이 근면하고 인자한데다 품덕이 고상했다. 《사기 하본기》에선 이렇게 묘사했다. “우는 사람됨이 극히 총명하고 민첩하며 지혜가 있으며 도덕을 준수하고 믿을 만했다. 목소리는 음률에 맞았고 행동거지도 규범에 맞았으며 일 처리를 잘 가늠하고 부지런하며 단정하고 공경하여 백관들의 모범이라 칭했다.”

그의 감화 아래 화하족의 명성은 널리 사해에 퍼져나갔다. 천하 여러 제후들을 대우가 어질고 밝다는 것을 알고 모두 대우를 존중하고 따랐으며 대우가 세운 법도와 예절 음률 등을 채용했으며 그를 산천(山川)신령(神靈)의 주재자로 여겨 존중했다. 이것은 이후 왕조의 예악제도 확립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주지하다시피 예악을 숭상한 것은 화하족이 다른 부족과 구별되는 현저한 특징이었다. ‘예(禮)’를 사회 각 계층의 등급과 질서를 유지하는 제도로 삼았으며 중화문명 발전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 고대의 성상분야도
대우는 치수에 공이 있고 고상한 덕행을 구비했기 때문에 순이 세상을 떠난 후 대우에게 제위를 전했다. 대우는 도산(塗山)에서 33명의 제후를 불러 모아 중국 최초의 왕조인-하왕조를 세웠고 도읍을 양성(陽成 오늘날 하남 등봉登封 동쪽)에 정했다. 그 후 대우는 <홍범구주>를 제정해 국가를 관리하는 법칙으로 삼았고 각 제후들이 제공한 쇠로 만든 9개의 솥을 주어 9주를 상징했으며 이후 천하의 공통 주인으로 대표하여 9개 솥은 지존인 천자로서 천하를 통치하는 권력을 누렸다.

주지하다시피 중화문명은 화하(華夏)족에서 기원한다. 여기서 화(華)는 화서(華胥)씨에 기원한다. 화서씨에서 여와와 복희가 태어나고 나중에 여와와 복희는 또 소전(少典)을 낳았다. 소전은 황제를 낳았고 줄곧 대우에 이르러 화하족이 형성되었다. ‘예약의 교화(敎化)’로 천하를 원융하는 도로 삼았으며 각 민족의 후예들과 손발이 닳도록 열심히 일해 신주대지 위에서 중화문명이란 다채로운 큰 연극을 연기했다. (그림 8)

송대 석각지도(石刻地圖) : 화이도(華夷圖)

(계속)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95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