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1945년 8월 9일 소련은 150만이 넘는 대병력을 출동시켜 중국 동북 지역으로 들어왔다. 주력 부대는 목단강(牡丹江)을 공격하고 보조적으로 하얼빈, 장춘 및 심양을 공격했다. 동경 전범재판 당시 관동군 참모장을 지낸 가사하라 유키오(笠原幸雄)의 증언에 따르면 1944년 당시 관동군의 정예부대는 최전선이나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빠져나갔고 관동군에는 이미 제대로 훈련받은 사단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당시 관동군은 일본 교포들로 채워졌으며 이미 대국을 좌우할 힘이 없었다. 8월 17일 관동군은 “일황(日皇)의 명령을 받들어 군사행동을 중단”했고 소련군에 투항했다.
소련군은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고도 시가 8억 5800만 불에 달하는 동북의 산업설비를 운반해간 외에도 총 20억불을 약탈해갔다.
당시 동북은 일본의 건설에 힘입어 중국에서 가장 선진적인 공업기지이자 농업기지였으며 12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에 3800만의 인구를 지닌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이는 웬만한 유럽의 강국과 비슷한 규모였다.
모택동은 소련이 동북으로 출병할 것을 알고 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에서 “동북은 극히 중요한 지역이며 장차 우리의 영도 하에 있을 것이다. 만약 동북이 우리의 영도 하에 들어온다면 그럼 중국혁명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는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승리는 기초를 다진 것이라고 보는데 다시 말해 우리의 승리를 확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발언했다.
중국의 동북지역은 소련을 배경으로 하면서 좌우에 몽골과 조선이 있어 한마디로 그 형상을 비유하자면 뒤로는 소파에 기대고 앞으론 카펫을 밟고 있다고 했다.
소련 군대는 동북지역에서 강간, 살인, 약탈 등을 자행했다.
“당신이 만주사람을 만난다면 그들은 두말없이 당신을 깨끗이 털어갈 겁니다. 하지만 소련 홍군을 만난다면 그건 더욱 두려운데 그들은 직접 일본인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살인을 위해 살인을 합니다! 나는 칼에 찔려 죽은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을 보았습니다.”(Ronald Spector, In the Ruins of Empire: The Japanese Surrender and the Battle for Postwar Asia)
미국 전략정보국(OSS) 주임 할 레이스(Hal Leith)는 심양에서 소련군의 만행을 목격한 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러시아인들은 중국인들을 약탈하고 강간했다. 여인들은 직접 버스정류소나 기차역에서 때로는 대로변에서 홍군(紅軍)에게 강간당했다. 들리는 말로는 지방 정부가 매일 저녁 소련군 사령부에 일정 수량의 여인들을 제공하도록 강요받는다고 한다. 그 결과 여성들은 치욕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삭발하거나 얼굴에 덧칠을 하거나 가슴을 묶는다.”
중공 동북국(東北局)은 소련 공산당 지도자에게 보낸 서신에서 “홍군의 행동은 결코 무산계급군대의 행동이 아닌데 강간, 농민의 식량 약탈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라고 했다. 서신에서는 또 소련측에 “군인 기율위원회를 만들어 홍군의 군기 위반을 예방하고 광범위한 선전활동을 펼쳐 현재 소련병사들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중국 인민들의 신임을 얻어야 합니다.”라고 촉구했다.(《냉전과 중국의 분열(冷戰與中國的分割)》)
소련은 중공 부대가 동북에 들어와 소련군과 협력해 동북의 여러 전략거점을 접수하는 것에 동의했다. 중공 군대는 소련군의 우익으로 신속하게 동북에 침투했고 1945년 12월 말까지 이미 11만 명의 군대가 동북에 들어왔다. 중공은 또 소련으로부터 일본 관동군의 대량의 화기를 접수했다.
전(前) 팔로군 16군 분구(分區) 사령관을 지낸 증극림(曾克林)의 회고에 따르면 심양의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 최대 무기창고였던 소가둔(蘇家屯) 창고를 그들에게 넘겨주었다고 했다. 그들은 창고를 열어 “삼일 밤낮에 걸쳐 소총 2만여 정, 기관총 1천 정 및 다양한 구경의 150문의 박격포와 야포를 가져갔다.”
“소련 홍군은 중공의 동북 근거지 건립을 몰래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동북과 화북에 진입한 중공 군대에 수십만 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기와 탄약까지 제공했다. 또 이를 통해 과거 낙후된 장비와 탄약 부족으로 주로 유격전에만 의지하던 중공 부대를 신속하게 성장시켰고 중공중앙이 원래 예상했던 국민당에 대한 철저한 승리의 이정표를 큰 폭으로 단축시켰다.”(《모택동과 모스크바의 은혜와 원한(毛澤東與莫斯科的恩恩怨怨)》)
특히 북한(역주: 당시 북한은 소련의 관할 아래 있었다)의 특수한 위치는 중공 군대에 공격과 후퇴가 가능한 근거지를 제공했다. 중공군은 요동군구(遼東軍區) 후근부(後勤部)와 일부 후방병원을 북한 지역에 설치해 군사적으로 불리해지면 비전투요원이나 심지어 군인까지 북한 영내로 후퇴시키곤 했다. 이렇게 되면 국군은 국경을 넘어 추격할 수 없었다.
소련 점령하의 북한은 또 중공에 대량의 군수물자를 수송해주었다.
“1946~1948년까지 북한 측은 우리에게 일본군이 남기고 간 군수물품 2천여 량(철로로 운반하는 화물 객차)을 지원해주었다. 때로는 무상으로 지원했고 때로는 물물교환의 형식으로 얻을 수 있었다. 이들 물자는 전쟁 중에 몹시 소중한 것으로 북한 남포항에서 선적한 화물을 대련(大連)을 거쳐 산동까지 운반해 산동과 화동 방면의 해방전쟁에 아주 큰 역할을 했다.”
(《동북 해방전쟁 기간 북한 주재 동북국 판사처를 회상(回憶東北解放戰爭期間東北局駐北朝鮮辦事處)》)
원래 중국에 있었던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이 동북에 진입해 직접 조선족을 동원해 동북전쟁에 참가시켰는데 이 부대 병력만도 1만2천 명에 달했다.
중공은 또 많은 일본 전쟁포로들로부터 이득을 얻었다. 홍콩 봉황주간 2006년 제26기에 부락평(傅樂平)이 쓴 ‘내가 아는 4야전군 일본노병: 만여 명의 일본 국적 해방군에 대한 역사 기밀 해제’에서 해방군은 3만여 명의 일본군을 받아들여 대부분 임표의 제4야전군에 편입시켜 내전에서 중공을 돕게 했다.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위생공작의 역사》라는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위생 부문에서 유공자로 표창받은 사람의 4분의 1이 일본인이었다.
소련의 협조 하에 중공군대는 목적달성을 서둘렀고 장춘, 하얼빈, 치치하얼과 사평(四平)을 빼앗았다. 장개석이 백숭희(白崇禧)를 동북에 파견해 맞서게 하자 동북지역 국군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다. 백숭희의 독려하에 두율명(杜聿明) 휘하에 있던 손립인(孫立人)의 신1군, 요요상(廖耀湘)의 신6군, 진명인(陳明仁)의 71군이 3갈래로 길을 나눠 사평에 주둔한 임표의 부대를 향해 진격했다.
국군은 불과 3일 만인 19일 사평을 완전 수복했고 임표는 주방 요리사로 변장해 패잔병들 틈에 끼어 가까스로 송화강(松花江) 북쪽으로 도주했다. 승기를 잡은 국군은 또 장춘을 차지했고 임표의 부대를 송화강변까지 추격했으며 하얼빈까지 밀어부쳤다.
절망에 빠진 임표는 6월 1일 모택동에게 “하얼빈을 포기하고 유격전을 준비”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모택동은 6월 3일 답변에서 “당신들이 하얼빈을 포기할 준비를 한다는데 동의하며 기동전과 유격전 방침을 채택하라”고 했다. 중공의 군사 천재 임표의 정예부대가 순식간에 유구(流寇 떠돌이 도적)로 전락했다.
하지만 이 결전의 순간 마셜은 연속 3번이나 장개석에게 전보를 보내 동북에서 중공에 대한 공격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또 “만약 계속해서 추격을 한다면 미국은 더 이상 국민정부 군대의 동북 수송을 돕지 않을 것”이라며 위협했다. 5월 31일 마셜은 또 장개석에게 편지를 써서 “사정이 이미 이런 중요한 상황에 이르렀으니 본인의 입장이 정직한가 여부가 중대한 문제가 되었소. 그러니 다시 한 번 간청하건대 즉각 정부군의 추격과 공격을 중단하시오.”라고 했다.
장개석은 “마셜의 개인 감정을 상하게 할 순 없다”고 여겨 비록 “가슴이 아프고 치욕이 극에 달하지만” 정전에 동의했다.
마셜의 강력한 압박 하에 장개석은 6월 6일 15일간의 정전을 선포했다. 얼마 후 마셜은 또 장개석에게 정전기간을 4개월로 연장하라고 요구했다. 장개석은 당연히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관계는 다시 긴장되었다. 장개석은 일기에서 “마셜의 태도가 이상할 정도로 거칠고 조급하다.”고 적었다.
주은래는 마셜의 동정과 신임을 얻어 중공은 전쟁을 중단해 “모든 책임을 장개석에게 미룰 수 있다”고 표시하는 한편 마셜에 대해 “연속으로 언론공세를 발동하고” “조처(調處) 집행부가 해산하지 않을 수 없다면 미군이 철수할 수밖에 없다”며 인신공격을 했다.(《1946년 주은래 담판문선(周恩來一九四六年談判文選)》)
마셜에겐 중공을 제약할 카드가 없었기 때문에 장개석에게 압력을 가해 평화회담을 하도록 핍박할 수밖에는 없었다. 장개석은 “마셜은 우리나라의 이해관계나 본국 정책의 실현가능성 여부는 따지지도 않고 오로지 개인적인 공적과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일방적으로 공산당에 끌려 다닌다. 근본적인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니 고생한 것에 비해 공이 없다.”고 보았다.(《총통 장공 대사 장편초고(總統蔣公大事長編初稿)》)
10년 후 장개석은 《중국 안의 소련》에서 마셜의 정전명령이 끼친 해악에 대해 “동북에서 국군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고 모든 군사행동이 피동적인 지위로 떨어졌다. 이것은 제2차 정전명령의 결과이자 정부가 동북에서 최후에 실패하게 된 유일한 관건이다. 당시 이미 쌍성(雙城)부근까지 진격했던 추격부대(하얼빈과는 불과 백리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가 만약 추격을 중단하지 않았더라면 직접 중동(中東)철로의 전략적 중심인 하얼빈을 점령해 북만주에 흩어진 비적들을 어렵지 않게 숙청할 수 있었을 것이며 동북 전체 판도도 쉽게 안정되었을 것이다. 만약 ‘공비’들이 북만주에서 자리 잡을 수 없었다면 소련 역시 그들을 보충할 방법이 없었다. 동북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고 동북의 공비 역시 더는 회복가능성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임표는 이 미국인이 만들어준 기회를 이용해 군대를 확대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켰으며 포병과 공병 체계를 만들었다. 소련이 통제하던 대련과 북한의 무기 공장 및 소련 포병 전문가들에 의지해 관동군의 화포를 훈련하는 등 1947년 연초까지 동북의 중공군대에는 이미 160여 개의 포병 중대가 있었다. 1948년 연초 사평 전투 국군의 지휘관이자 71군 군단장 진명인의 회고에 따르면 동북 공산군이 지닌 포병의 강력함은 8년 항전기간 중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동북의 정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자 전(前) 중국원정군 사령관 위립황(衛立煌)은 동북을 접수한 후 병력을 움직이지 않은 채 심양만을 고수했다. 장개석은 동북정세가 불리해지자 황급히 북평(北平 북경)으로 날아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면서 위립황에게 즉각 요서(遼西)로 출격해 금주(錦州)에 포위된 국군을 돕도록 했다. 그러나 위립황은 각종 구실을 대면서 “심양은 오직 굳게 지켜야만 보호할 수 있다”며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장개석은 그가 움직이지 않자 긴급명령을 내려 심양과 금주 라인을 뚫게 했고 국군의 주력을 금주로 철수시켰다. 아울러 필요시 동북 전체 병력을 화북으로 후퇴할 수 있게 했지만 위립황은 이 명령도 거절했다.
1948년 10월 장개석은 심양으로 직접 날아가 요요상에게 남쪽으로 내려가 금주의 포위를 풀게 했다. 동시에 후경여(侯鏡如)에게는 동쪽으로 진격하는 병단을 지휘해 탑산(塔山)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위립황은 말과 행동이 달랐고 후경여에게 공격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10월 18일 장개석은 3번째로 심양에 날아가 위립황을 제치고 두율명에게 지휘를 맡아 직접 후경여의 동진병단과 요요상의 병단을 지휘해 금주를 수복하도록 했다. 그러자 위립황은 몰래 간계를 꾸며 요요상의 장갑부대에 필요한 연료와 탄약 공급을 1주일이 넘지 못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신속한 전진을 방해했다. 위립황의 부인 한권화(韓權華)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남편은 “장님이 눈먼 말을 타고 어떻게 가는지 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장개석은 중공군의 치명적인 약점이 탑산임을 알고 후경여에게 중무장한 부대를 이끌고 탑산을 공격해 간접적으로 금주를 지원하게 했다. 탑산 지역에는 주변에 험한 지형이 없어 공격은 쉬워도 수비는 어려웠다. 탑산은 또 금주에서 수십 리에 불과했고 공산군은 당시 오랫동안 금주를 함락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동진병단이 탑산을 공격해 금주를 지원했더라면 공산군은 앞뒤로 적에게 포위되는 형세가 되었다. 당시 동북의 전황은 충분히 역전이 가능했고 나중에 화북과 화동 전역도 바뀔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후경여는 1925년 주은래와 곽준의 소개로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상태였다. 그는 중공의 비밀지령을 받고 전투를 질질 끌면서 단순한 전술과 엉뚱한 전법을 구사했다. 국군은 5개 사단 병력을 집중해 처음으로 육해공 3군이 합동해 우세한 화력과 지형적인 유리함을 지니고 5일간 격렬하게 싸웠다. 국군 중하급 장교와 사병 등은 삼군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조자룡(趙子龍)부대라는 별명이 붙은 95사단은 심지어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쌓아 진지를 구축하며 향산 진지 앞으로 조금씩 전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휘관들이 혼란을 부추겨 공산군 2개 사단이 지키던 임시 야전진지를 공략하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탑산을 빼앗지 못했다. 결국 국군은 금주에서도 잇달아 패배했다. 18군 군단장 호련(胡璉)은 이를 총괄해 “당과 나라의 패배는 탑산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 후 요요상 부대마저 패하면서 모든 장병이 포로가 되었다. 장개석은 탄식하면서 일기에 “동북의 전군(全軍)이 마치 온통 검은 운명에 빠진 것 같다. 한 치의 땅조차 가슴을 졸였고 진실로 멈출 곳을 몰랐다.”라고 썼다.
내전이 끝난 후 국군은 당시 득실을 총결하면서 “동북의 함락은 금주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고 심양의 지원 병력이 오랫동안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심양의 구원 병력이 신속히 도달할 수 없었던 것은 위립황이 제때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위립황은 “군사전략을 13일이나 그르쳤으며” “동서고금에 반란을 일으킨 것을 제외하고 이 정도로 지휘권을 무시한 장교는 일찍이 없었다.”(《왜 대륙을 잃었는가(爲什麼失去大陸)》)
위립황이 임명을 받아들인 동기에 대해 그의 부인 한권화는 “장개석의 전투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개석의 실패를 촉진하기 위해서였다”고 폭로했다.(《위립황 선생 회고(回憶衛立煌先生)》))
위립황이 일찍이 중공에 보낸 전보에 따르면 주요내용이 “하루 속히 중국의 내전을 끝내기 위해 나는 인민의 편에 서기로 결심했으며 ‘유관 방면’에서 군사・정치 및 다른 일체 협력을 진행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 전보는 왕덕소(汪德昭)를 거쳐 ‘관련 방면’에 전달되었다.
1948년 연초 위립황이 받은 답신의 내용은 “서신은 이미 목적지에 전달했고 혁명권위인사의 의견에 따라 장군은 마땅히 자신이 선택한 시기와 당시의 상황을 이용해 혁명에 유리한 일을 해야 합니다.”였다.(《위립황 선생 회고》))
1955년 3월 위립황은 홍콩에서 광주를 거쳐 북경으로 들어갔고 중공 국방위원회 부주석에 임명되었다. 주은래는 그를 가리켜 ‘기의 장령(起義將領)’이라 불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