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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37): 강산의 색이 변하다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4. 민족정신을 잃다

강산의 색이 변하다

동북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국군의 형세는 급전직하했다.

1949년 3월 5일 모택동은 서백파(西柏坡)에서 거행된 중공 제7기 2중전회에서 “소위 인민공화국이란 바로 인민해방군이며 장개석의 망국(亡國)은 바로 군대가 망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앞서 1948년 9월 중공군이 제남(濟南)을 공략했다. 당시 제남을 지키던 국군 지휘관 왕요무(王耀武)는 중공군과의 전쟁을 내전으로 인식했다.

“이것은 항일과는 다르니 쉽게 살생할 생각을 낼 필요는 없다.”

제남전역(濟南戰役) 초기 국군 지휘관 황백도(黃百韜) 장군은 25군을 이끌고 북상해 포위를 풀었다. 황백도는 “제남전역 초기 왕요무가 무전기로 남경의 자기 가족과 통화하면서 부인에게 30분이 넘도록 시시콜콜 집안일을 당부하는 것을 들었다. 큰 적을 앞에 둔 지휘관으로서 어찌 집안일을 돌볼 여유가 있을 수 있는가? 이는 이기적이고 공(公)을 망각한 것으로 필사의 의지가 없었다.” 제남전투는 오화문(吳化文)이 3개 여단 2만 병력을 이끌고 적진에 투항하면서 제남 성문이 활짝 열렸고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국군 참모총장 진성(陳誠)은 “진포(津浦 역주: 천진에서 남경까지 남북을 연결하는 주요 철도)와 농해(隴海 역주: 연운강에서 난주를 연결하는 철도) 두 철로의 교차지역은 수정시기(綏靖時期 역주: 수정은 원래 안정과 위무의 뜻으로 여기서는 중화민국과 중공이 내전하던 시기를 가리킨다)의 주요전장이었다. 제남은 산동의 심장에 해당해 제남을 잃으면 산동 전체가 죽은 돌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에 (적군이) 진포를 열어 남북을 관통한다면 완전히 절망적이다. 본래 이 시기 공비를 토벌하는 형세는 대체로 6개 전장(戰場)에서 대치중이었다. 즉 동북전장, 화북전장, 중원전장, 소로(蘇魯)전장, 섬감녕(陝甘寧)전장과 화동(華東)전장이었다. 이 6개 전장은 병력이나 장수 등의 방면에서 대체적으로 쌍방이 상호 제약하고 대치하는 상태였고 어느 일방이 현저한 우세를 차지하진 못했다. 그러나 제남에서 패배한 후 상황이 달라졌다. 중공군이 산동에 있던 병력을 뽑아 다른 지방에 더하면서 그 지방에서 현저한 우세를 나타냈다.”라고 회고했다.(《진성선생 회고록(陳誠先生回憶錄)》)

당시 장공(蔣公)은 서방지역[徐蚌地區-서주(徐州)와 방부(蚌埠)]지역에서 중공군과 결전을 벌일 계획으로 백숭희를 한구(漢口) 및 서주(徐州) 두 지역의 공비토벌사령관에 임명했다. 백숭희는 한구에서 남경으로 날아왔지만 이튿날 갑자기 지휘권 접수를 거부했다. 장개석은 다시 서주 공비토벌사령부 부사령관 두율명을 지명했지만 동북 전장의 상황이 위급해지자 그를 긴급히 동북으로 보내야했다. 이렇게 되자 장개석은 일시적으로 쓸 인물이 없어졌고 결국 서주 공비토벌사령관 유치(劉峙)가 지휘관이 되었다.

1948년 겨울 국공 양군은 서방회전[徐蚌會戰 중공 측은 회해전역(淮海戰役)이라 부른다]을 가졌다. 서방회전의 구체적인 작전계획은 잠복한 중공 특무 곽여괴(郭汝瑰)가 만든 것이다. 전역이 시작되자 황백도 부대가 전장에서 포위되었다. 황백도는 힘껏 싸웠지만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고 전투에서 패하자 자살했다. 황유(黃維)의 부대가 서주를 지원하려다 쌍퇴집(雙堆集)에서 포위당했다.

두율명은 기밀을 지키기 위해 단독으로 장개석에게 보고해 서주를 포기하자고 결정했다. 두율명은 구청천(邱清泉), 이미(李彌), 손원량(孫元良) 3개 병단을 이끌고 서주에서 서쪽으로 영성(永城)을 거쳐 와양(渦陽), 부양(阜陽)에 이르러 회하(淮河)에 의지해 공산군에게 반격을 가하고 황유 부대를 구하려 했다. 하지만 두율명, 구청천, 이미는 서주를 포기한 후 오히려 진궁장(陳官莊)에서 적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두율명은 산채로 포로가 되었고 구청천은 전투 중 사망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 5개 병단 즉 25개군 55만의 정예부대가 전멸했다.

당시 국군 장군 손원량은 “우리는 장기간 국방부에 잠복한 간첩이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해왔다. 그들은 최고 통수권자 명의로 서방(徐蚌)전선에서 50여 만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황백도 부대가 섬멸될 때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황(黃)의 병단을 소멸시킨 것은 국방부지 진의(陳毅 중공군 지휘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방부는 왕택준(王澤浚)에게 44군을 해주(海州)에서 서주로 철수시키라고 했고, 황백도에게는 병단을 이끌고 가서 왕준(王浚)의 1개 군(軍)을 구하게 했으며, 황유에게는 천리나 떨어진 쌍퇴집(雙堆集)에 가서 자루 모양의 지형에서 적에게 포위당하게 했고, 유치에게는 경솔하게 서주를 포기하도록 했으며, 두율성 주임의 3개 병단을 도로에 길게 배치시켜 작전을 펼 수 없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유배(劉斐)와 곽여괴가 한 짓이다.”라고 회고했다.

화동(華東)전장이 끝난 후 동북의 중공군대가 화북에 진입하면서 1949년 1월 15일 천진이 함락되었다. 1월말에는 북평(北平 북경)이 함락되었다. 이때 화북전장은 염석산의 근거지였던 태원(太原)을 제외하면 전세가 이미 결정되었다.

패배의 책임을 지기 위해 장개석이 총통에서 하야하자 부총통이었던 이종인(李宗仁)이 총통이 되었다. 그는 다시 공산당과 협상하려 했으나 중공에게 실컷 이용만 당했다. 평화회담의 문이 열린 후에야 공산당의 평화회담은 단지 투항의 다른 이름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다.

“이종인 등은 공산당의 조롱과 우롱을 당한 후에야 평화를 단념했지만 이미 파산한 강산과 부대는 더 이상 공산당의 충격에 저항할 수 없었다.”(《진성선생 회고록》)

구하려 했으나 불가능

장공은 과거 손중산이 하야한 것을 거울로 삼아 의연히 하야했다. 그가 하야한 목적은 사람들이 공산당의 재앙에서 철저히 각성하게 하고 또 최후에 정세를 만회하는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기에 민국 37년(1948년) 연말은 혼란을 평정하는 정세가 악화된 시기였다. 국내 일부 ‘지식인들’ 특히 외국의 공산당 동조자들이 완전히 코민테른의 사악한 선전에 영향 받아 모두들 장개석이 하야하지 않으면 미국의 원조가 없을 것이며 평화도 가망이 없다고 했다. 오직 내가 하야해야만 모든 위기를 제거하고 모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들 했다. 당시 우리는 비록 이런 견해와 생각으로는 중국의 위기를 해결하고 세계정세를 완화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고 가중시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당시 내 심정은 진퇴와 존망이 모두 ‘약에 명현(瞑眩)반응이 없으면 병이 치료되지 않는’ 이 시기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때문에 큰 결심을 내려 이런 큰 변화에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후에 나는 ‘배수진’의 전략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만 우리 혁명전쟁이 마지막에 패배를 승리로 바꿀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하야한 후 겪은 사실의 입증을 통해, 일반 지식인들을 각성하게 하고 나아가 서방 국가들이 직접적으로 공산재앙의 참혹함과 심각함을 인식하게 만들어 결코 그들이 상상하는 그런 일이 아님을 알려줄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설사 내가 끝까지 버티면서 공산침략자들과의 전쟁에서 고군분투하며, 자유세계를 위해 장기간 홀로 감당하고 그들의 안전을 엄호할지라도, 결코 그들을 철저히 각성시켜 원래 지녔던 환상과 잘못된 시선을 바꾸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민국 38년(1949년) 대륙에서 철수한다는 결정이 초래한 직접적인 영향에 대해 내겐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며 아마도 그것이 정확한 유일한 길이었을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위급하고 긴급한 가운데 끝내 당의 개조를 촉성하고 군사・정치・경제 개조를 촉성하며 특히 공비들에게 기만당하고 이용당했던 모든 대륙 민중들은 지금은 모두 뉘우치면서 정부옹호가 부족할까봐 두려워한다. 우리가 비록 일시적으로 대륙을 포기하긴 했지만 오히려 전국의 인심을 얻었다.

국제적으로 말하자면 공산주의의 맹렬한 불길을 막아주는 자유세계의 방화벽을 철거한 것과 다름이 없어 민주국가들은 어쩔 수 없이 소련의 간사한 무리들과 직접적으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고립된 곤경 상태에서 반공(反共)을 위한 세계 대결합의 중요한 부분으로 발전했다.””(장개석 《당의 기본 공작과 발전방향(黨的基本工作和發展方向)》)

장공의 하야는 또한 대만이 미래 반공의 기지로 변하게 했다.

“내가 하야할 때 또 하나 중요한 고려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대만 지위의 중요성이다. 소련의 침략 아래 차라리 전체 대륙을 잃을지라도 대만은 지키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내가 하야하지 않고 남경을 사수했더라면 그럼 대만을 돌볼 수 없었을 것이고 대만 역시 공산주의에 반대하고 소련에 대항하는 굳센 보루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민국 35년(1946년) 대만에 온 후 일기에 나는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오직 대만만 있다면 공산당도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즉 공산당이 대륙 전체를 가져가도 오직 대만만 지켜낼 수 있다면 나는 이를 이용해 대륙을 회복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나는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고 의연하고 단호하게 하야할 수 있었던 것이다.”(장개석 《우리 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 정치보고(對本黨第七次全國代表大會政治報告)》)

1949년 12월 10일 장개석은 성도(成都)에서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떠났다.

사람들은 제2차 대전에서 승리했다는 이유로 사실상 인류 현대 역사상 가장 큰 실패를 덮어 감추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공산당이란 마귀가 인류사회에 전면적으로 달라붙게 만들어 엄연히 바른 지위에 오르게 했고 일종의 사회모델과 이념형태가 되도록 한 것으로 그 재앙이 지금까지 미치고 있다.

중국의 색이 변하자 자유세계는 중국이란 보호막을 잃었고 어쩔 수 없이 공산세력의 확장에 직접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68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