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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48): 황금 10년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7장 문명을 수호한 바다의 방주(方舟)

1. 신생활운동

손중산과 장개석의 사상은 중화 5천년문명이란 비옥한 땅에 뿌리를 내렸다. 근대에 중국이 안된 이유는 바로 중국인들이 전승되어 온 자신의 가보(家寶)에서 빗나가거나 심지어 포기했기 때문이다. 중국이 부강하고 존엄이 있으려면 반드시 고개를 돌려 이 감춰진 보배들을 찾아야한다. 장개석은 나라를 구하려면 반드시 사람마음을 바로잡아 국민의 소양을 제고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신이 전해준 조상들의 전통과 고인(古人)의 지혜를 이용해 국민의 양지를 열어주고자 했다.

‘예의염치(禮義廉恥)’

1932년 장개석은 당시 중국인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우리는 ‘예의염치라’는 이 하나의 처방을 제외하면 그 어떤 다른 처방도 병의 증상에 분명히 맞지 않는다.”(《인격과 혁명》)라고 했다. 장공은 이 처방을 더 거창하게 바꿔 ‘신생활운동’이라 불렀다.

1934년 5월 15일 장개석은 남창(南昌)에서 《신생활운동요강》을 발표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 심리는 구차하고 의기소침하다.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은 선악(善惡)을 가리지 못하고 공사(公私)를 구별하지 못하며 본말(本末)을 모르는 것이다. 선악을 가리지 못하기에 옳고 그름이 뒤섞이고 공사를 구별하지 못하니 주고받음이 적당하지 않다. 본말을 제대로 모르니 앞뒤가 뒤집힌다. 그러므로 관리는 거짓과 탐오하고 백성은 산만하고 마비되어 있으며 청년들은 타락하고 방종하며 성인(成人)은 부패하고 어리석다. 부자들은 번거롭고 겉만 화려하며 가난한 자들은 품격이 떨어지고 혼란하다.”

“우리 중화민족 5천년 문화는 그 의식주행(食衣住行 의식주와 행동)의 법칙이 본래 극히 고상했지만 오늘에 이르러 오히려 거칠고 비루한 상태가 되어 비인간적인 생활로 흐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예의염치’를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신생활운동요강》)

장개석은 《중국의 운명》에서 당시 중국사회 풍조에 대해 진실하게 묘사해냈다.

“사회풍조를 말하자면 5천 년간 특히나 우리나라 선성(先聖)과 선현(先賢)들이 평생 창도하며 힘을 기울여온 대업(大業)이었다. 그들은 사회풍조가 변화하면 국가의 치란(治亂)과 민족의 존망(存亡)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잘 알았다.”

“때문에 역사상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이 교대로 일어났음에도 사회풍조는 여전히 정성스럽고 독실하며 근면하고 검소했다. 예의를 숭상하고 염치를 잘 알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 중화민족이 세상에서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하지만 최근 백 년간 중국은 불평등조약의 압박 아래 사회풍조가 날로 부패해졌다. 우리가 사회풍습을 나눠서 검토해보면 즉각 일반 국민의 무질서한 악습을 볼 수 있으니 그 표현은 방탕하고 방종하는 현상이다. 또 부조리한 퇴폐풍속은 난잡하고 엉망진창인 현상으로 표현된다.”

“사람마다 독실하지 않고 하는 일마다 민첩하지 못하다. 도처에서 경박하고 가식적이며 태만하고 나태한 심리를 볼 수 있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이리저리 관망만 하고 신념을 상실하고 결심이 없다. 남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고 공적인 것은 경시하고 사적인 것을 중시한다.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예의는 땅바닥에 버려졌고 염치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민족도덕의 추락이 이보다 심할 수는 없다!”

“국민의 일상생활이 퇴폐풍조의 악습(惡習)에 빠져 있다. 이에 사람마다 이기적인 이익에 따라 옳고 그름을 결정하며 이기적인 욕심에 따라 선과 악을 결정한다. 즉 이기적 이익에 부합하면 옳은 것이고 이기적 욕심에 부합하면 선한 것이다. 이에 시골에서는 간사한 자들이 득세하고 도시에서는 교활한 자들이 설치고 다니면서 공공의 안전과 타인의 행복을 자신의 이익과 욕심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학자와 정치인들은 이를 꾸미거나 더 나아가 이를 이용한다. 이를 꾸미는 자들은 이욕(利欲 이익과 욕심)을 개인의 자각(自覺)이라고 널리 찬양하며, 이를 이용하는 자들은 이욕을 사회를 위한 투쟁이라며 선동한다. 이렇게 되자 성철(聖哲 성인과 철인)을 본받고 영웅을 숭배하며 고인(古人)의 풍속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점차 죽어들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경멸받게 되었다. 더 나아가 외국의 사람과 문물은 찬양하면서 조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헌신짝처럼 버리고 있다. 공동의 신뢰(共信)가 몰락하자 자기에 대한 믿음 역시 중심을 상실했다. 때문에 우리 민족이 마치 쟁반 위의 흩어진 모래처럼 되었고 나라는 사분오열되었다. 이것은 민족과 국가가 위험에 처하면 개인의 생존 역시 의지할 곳이 없음을 모르는 것이다.”

장개석이 제창한 ‘신생활운동’은 바로 ‘예의염치’의 규칙적인 생활을 제창하는 것이다. 평소 ‘예의염치’를 행하면 일상생활에서 ‘의식주행’ 4가지 일속에 습관이 될 것이다.

“우리 중화민족은 본래 ‘예의를 중시하고’ ‘염치에 밝은’ 민족이었으며 ‘예의염치’는 오늘날 나라를 세움에 특히 절박하고 잠시라도 늦출 수 없는 것이다.” (《신생활운동요강》)

비참한 국운

“중국은 5천 년 간 근로(勤勞)를 중시하고 검소함을 숭상했으며 옷과 음식도 간소했다. 여자는 옷을 만들었고 남자는 농사를 짓는 풍속이 있었다. 하지만 조계(租界 역주 : 외국 열강의 중국내 치외법권 지역)에서 비롯된 아편・도박・기생・도적떼의 유행 때문에 모조리 사라져버렸다.”(《중국의 운명》)

“자고로 우리 중국의 윤리철학은 인류사회의 서로 연계하고 서로 유지하는 도(道)에 대해 아주 상세하고 정밀한 연구를 해왔다. 사회조직이 비록 끊임없이 발전하긴 하지만 부자(父子), 부부, 형제, 친구의 도(道)와 상하존비(上下尊卑)・남녀와 장유(長幼)의 순서 내지는 이웃 사이에 서로 구휼하고 병에 걸리면 서로 돕는 것은 사실상 사회생활의 변하지 않는 상리(常理)였다. 하지만 최근 백년간 조계의 풍속이 흘러들어오자 일반인들도 이런 상리(常理)에 대해 무시할 뿐만 아니라 경멸하고 있다.”(같은 자료)

“이에 부자, 부부, 형제, 친구, 존비(尊卑), 장유(長幼) 사이 및 이웃과 향당(鄕黨)의 모임에서 더 이상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더욱이 서로 모여 협력하는 우의를 잃어 버렸다. 일에 부딪히면 오직 물질적 이익만을 도모하고 도처에서 도덕표준의 자율(自律)이 사라졌다. 의리가 있는 곳은 서로 회피하고 이익이 있는 곳이면 서로 앞을 다툰다. 위아래가 속이고 좌우가 서로 속인다. 노약자는 돌봐줄 사람이 없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도 구제하지 못한다. 혈육을 남처럼 대하고 동포를 원수처럼 여긴다. 심지어 적을 아버지로 모시며 뻔뻔하게도 원수를 섬기며 인륜(人倫)을 거스르면서도 잘못임을 모른다. 예의를 숭상하던 중화의 나라에서 염치가 거의 사라져버렸다. 불평등조약의 영향으로 중독이 심해지더니 급기야 이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참을 수 있단 말인가? 국민도덕이 날로 퇴락했고 특히나 국민의 체격에도 영향을 끼쳐 날로 쇠약하게 만들었다.”(같은 자료)

중국인들은 자신의 문화를 저버리고 자신의 휘황한 문화를 업신여기면서 외래의 의식형태 속에서 출로를 찾았으나, 그 내함을 몰랐기에 나중에 공산당 붉은 왕조가 무대 위로 올라가게 했고 민족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했다.

“중국 국민은 서양문화에 대해 거절하다가 굴복에 이르렀고 자기비하에서 자책(自責)에 이르렀다. 이것이 극에 달하자 냉담하게 우리 중국 고유의 문화유산을 모멸하기에 이르렀다.”(같은 자료)

국민 악습 개조

장개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사회를 개혁하고 나라와 민족을 부흥해자면 무력으로는 효과를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첫째는 일반 국민이 국민도덕을 구비해야 하며 둘째는 일반 국민이 국민지식을 구비하도록 해야 한다.”(《신생활 요강》)

“일체의 학술과 기능은 모두 교육 이후의 것이며 가장 근본적이고 긴급한 일은 바로 사람이 되는 도리를 가르쳐 완벽한 덕성과 인격을 갖춘 학생을 양성해 예의와 염치를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장 먼저 그들의 의식주행(衣食住行 의식주와 행동)에서 시작해 그들이 모두 단정・청결・간단・소박한 신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만약 이런 근본적인 것을 망각하고 단순히 물리, 화학, 영어, 수학 등의 지식과 기능만을 가르친다면 당신이 아무리 잘 교육한다해도 역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식과 기능은 금수(禽獸)도 가질 수 있고 금수라도 가르칠 수 있지만 사람이 금수와는 다르게 사람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사람이 되는 도리를 알기 때문이다. 즉 예의에 밝고 염치를 아는 것이다.”

(《신생활운동 요의(新生活運動之要義)》)

당시 유행하던 가곡 중에 《국민도덕(國民道德)》, 《예의가 있네(有禮貌)》, 《노약자를 돕자(扶老助弱)》, 《허물을 인정하는 용기(勇於認過)》, 《어른 공경(敬尊長)》, 《시비곡직을 분명히(明是非辯曲直)》, 《아우와 누이를 사랑하자(愛弟妹)》, 《의지는 굳세야 한다(意志要堅定)》, 《정의를 보고 용감히 나서자(見義勇爲)》 등이 있다. 이는 사람들이 보고 듣기를 즐기는 형식을 사용해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 풍속을 바꾸고 민중을 교화한 것이다.

1936년 신생활운동 2주년에 장공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창도한 신생활운동은 바로 잘못을 고쳐 바른길로 돌아오는 것으로 바로 일종의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운동이다.”

1938년 신생활운동 4주기 기념일은 남경대학살이 발생한 후 불과 두 달 후였다.

장개석은 비분해서 말했다.

“지금 우리 민족부흥의 사업이 막 중간까지 왔는데 적들이 흉악하고 폭력적으로 침입해왔다.”

그는 전국 동포들에게 “굴복하거나 마음을 굽히지 말아야 하며 위협에 굴하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순종하지 말아야 하며, 차라리 사이비조직에 불복할지언정 적과 거래하거나 왕래하지 말아야 한다. 소위 필부(匹夫)라도 그 뜻을 꺾을 수는 없다.”(《신생활운동 4주기 기념일에 전국 동포들에게 알리는 글》 1938년)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신생활운동으로 백년을 이어온 중국인들의 악습을 바꾸기에는 어려움이 몹시 컸고 각종 무지한 조소(嘲笑)와 악의적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그 속에서 실마리를 보아냈다.

가령 9.18사변을 주도한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 중장은 일찍이 중국에 대해 “관리들은 탐관이고 백성들은 간사하며 병사들은 무뢰배다. 정부는 민중을 속이고 억압하며 관민(官民)이 대립해 설사 외국에서 침입해도 민중들이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노구교 사건(역주: 1937년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 이후 오히려 전장의 확대에 반대했다. 그는 “중국은 신생활운동을 실행한 이후 전국 군인과 국민들의 정신이 분발해 이미 얕잡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일본 수상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일찍이 “중국에는 3가지 무시할 수 없는 큰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군비정리, 재정정리 및 신생활운동이다.”(《백년대업-중화민국발전사》))라고 했다.

만약 북벌과 청당(淸黨 국민당내 공산당 숙청)이 중국이란 육체와 내장의 질병을 치료했다면 신생활운동은 정신적 측면의 병을 고친 것이다.

실제로 장개석의 사생활은 담백하고 아주 규칙적이었다. 또 절제를 잘해서 지도자로서 자신의 성의를 잘 보여주었으며 내재적인 정신의 소양을 반영했다. 그는 평소 담배를 전혀 피우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으며 식탁 위에서는 끓인 물로 술을 대신했다.

불행한 것은 신생활운동이 당시 전란(戰亂)으로 중단되었고 중일전쟁 이후에도 이어진 공산당의 내란과 정권찬탈의 교란으로 장개석에게 국민의 도덕을 부흥시킬 충분한 시간을 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2. 황금 10년

장개석이 중국을 통치했던 1927년부터 1937년까지 기간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민국건설의 ‘황금10년’이라 부른다. 이 10년간 중국은 비록 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건설 자금이 부족했으며 많은 자본이 조계로 도피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국가건설에 큰 장애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공은 이런 험악한 환경 하에서 온갖 노력을 기울여 경제를 되살리고 국가건설을 실현했다.

공산주의의 파괴

장공은 황금10년에 각종 제약으로 나라를 통일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국민정부로 하여금 이 사명을 완수할 수 없게 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국민정부가 정치적으로 겪은 최대의 좌절은 바로 국가통일의 장애였다.”

장공은 당시 경제학계가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았다. 공산주의는 자본의 조계도피를 조성했고 자유주의는 국가의 집중적인 자원사용에 반대해 국가건설에 착수할 방법이 없었다.

“10년간 사실상 제국주의자들의 간섭과 반(反)혁명세력의 방해로 경제건설을 예정한 대로 추진할 수 없었다. 이론적으로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사조가 당시 경제학계를 비슷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소위 ‘토지혁명’과 ‘농민혁명’에 힘을 기울였고 군대가 가는 곳마다 천리를 적화(赤化)시켜 우리나라의 평화롭던 농촌을 파괴했다. 그들은 민족의 공업(工業)에 대해서는 눈꼽 만큼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고 오직 증오와 투쟁을 말하면서 사회와 청년들 사이에 주입해 생산의 진보를 가로막았다. 이에 많은 자본이 조계로 이탈해 제국주의 침략의 영향을 보다 크고 깊게 만들었다.”

“한편, 자유주의자들은 중국이 오랫동안 불평등 조약의 지위 아래 놓여 있었고 세계경제가 1차 세계대전 이래 이미 자유경쟁에서 독점이 집중되는 추세로 진입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1차 산업혁명 시기의 경제학설에 근거해 구미(歐美)의 2차 산업혁명 조류에 직면한 중국에 적용하면서 스스로를 참신하다고 오판했다. 그러므로 민생주의(民生主義)와 실업계획의 정신이 마침내 어두워졌다. 국민정부는 이 시기에 솔직하게 건설계획이 예기했던 효과를 보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니 혁명건설 업무는 착수하지 못했고 또 착수할 수도 없었다.”

거대한 진보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 도적들의 무력 침공은 언제든 가능했다. 우리 중국은 더는 여유 있게 건설할 가능성이 사라졌고 삼민주의를 실현해 혁명을 완수할 기회는 더욱 사라졌다. 이에 국민정부는 어쩔 수 없이 사회, 교통, 경제 등 각종 건설 공작을 추진하는 방식으로 군사적으로 침략에 저항하는 준비를 엄호해야 했다. 그러므로 이 10년 기간에 국민정부는 울분을 삼키고 두려움에 떨며, 아침이면 저녁을 장담할 수 없는 험악한 환경 아래서 국민경제를 촉진시켜야 했다. 소비재 수입이 점점 줄어들었고 기계류의 수출은 점차 증가했으니 이는 국내 산업이 진보한 사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가장 성과가 좋았던 분야는 특히 교통과 재정분야였다. 교통을 말하자면 청말(淸末)에서 민국 16년(1927년)까지 48년간 총 건설된 철도가 8300킬로미터였지만 민국 17년 이후 10년 사이에 새로 신설된 철도가 7300킬로미터에 이른다. 특히 도로 건설은 무려 10만 킬로미터가 넘는다. 전신(電信)도 성과가 있었는데 전화망은 전국적으로 3만 6천 킬로미터 이상 부설되어 가장 눈부셨다. 재정을 말하자면 상품통과세를 줄이고 세율을 평준화했으며 세관의 세칙을 수정하고 국내외의 공채를 정리했다. 화폐는 과거화폐인 양(兩)을 없애고 원(元)으로 고쳤으며 특히 화폐를 통일한 법폐(法幣)정책을 실천해 국가의 통일과 독립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中중국의 운명》 제4장)

이 시기에 중국 전력업은 연평균 9.4%의 속도로 성장했고 석탄 산업은 7%, 시멘트 산업은 9.6%씩 성장했다.

1951년 전(前) 중국전구 참모장인 미국의 웨더마이어 장군은 미 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1927년부터 1937년 기간은 수많은 중국 및 영미의 각국 교포들이 공인하는 황금 10년이었다. 이 10년 중에 교통이 발달했고 경제는 안정되었으며 수많은 학교가 설립되어 교육이 널리 보급되었고 다른 방면에서도 역시 대부분 거대한 진보가 있었다.”

두 차례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중국 출신의 문인 임어당(林語堂)은 《우리나라와 우리 백성》에서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다.

“중일전쟁 이전 연대야말로 중화민족 내부건설이 가장 양호하고 가장 희망적인 시기였다.”(《우리나라와 우리 백성》)

“전쟁이 터지기 전 11년간 그(장개석)는 남경 정부를 중국의 안정적인 국민정부로 변화시켜 중국 내부에 새로운 건설의 기초와 중심으로 만들었다.”(같은 자료)

“일본이 장개석정부를 타도하려 한 것은 그것이 바로 가장 강력하고 단결하며 가장 현대화되어 위험 국면을 만회할 수 있는 중국정부였기 때문이다.”(같은 자료)

“새로 탄생한 중국은 진일보로 탄탄해졌고 경제는 신속히 재건되었으며 민족 자위(自衛)를 위한 준비도 긴장감 속에 진행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 몇 가지 사례를 들 수 있다. 도량형 개혁, 국립은행 설립, 중국재정의 공고화, 정부에 은(銀)을 집중시켜 외국에 대한 중국의 준비금으로 삼았고 전국적으로 거대한 도로망이 신속히 발전되었다. 가령 남경에서 서북(西北)과 서남(西南) 지역까지 연결되었다.(1921년 1185킬로미터, 1937년에 3만 킬로미터, 1936년 9만 6345킬로미터로 증가) 또 4개의 철도노선과 4개의 지선(支線)이 새로 건설되거나 수리되었다. 가장 중요한 광동(廣東) 한구(漢口)철도는 작업이 완전히 야간에만 진행되었다.”(같은 자료)

“농촌의 생산과 건설업의 회복 계획도 있었다. 특히 강서(江西)에서 농업의 합작화가 신속히 발전했고 보갑제도를 강제로 실행했다.”(같은 자료)

“이렇게 보면 중국은 마침내 진보의 길로 걸어 나와 새로운 자신감이 생긴 것처럼 보인다. 응당 주의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민족정신이 이상 언급한 각종 진보로 인해 변화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정신이 중국 인민들이 최후에 승리할 때까지 왜적과 자웅을 겨룰 수 있도록 결심하게 한 것이다.”(같은 자료)

임어당은 장개석을 몹시 존경했다.

“그는 자신에게 엄격했고 흡연이나 음주는 물론이고 차조차 마시지 않았다. 그는 말이 많지 않았고 회의를 소집할 때면 자신은 발언하지 않고 조용히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곤 했다. 사람들을 내보낸 후 스스로 다시 결정했다. 그는 한여름에도 선 채로 하급 군관들에게 몇 시간씩 연설할 수 있었다. 그는 또 개인의 안위는 거의 고려하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최전선에 나타나기도 했다.”(같은 자료)

“이번 (민족)해방전쟁은 장개석이란 영도의 소질과 책략에 의지한 부분이 아주 많았다.”

“그의 계산은 매번 늘 옳았다. 그는 장차 도래할 항전(抗戰)의 성질에 대해 정확하면서도 멀리까지 내다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나로 하여금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민족이 위기에 처했던 시기의 민족 지도자로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으며 그가 지닌 내심의 예지(叡智)와 도덕품격은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모두 형세에 대응할 수 있었다.”(같은 자료)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7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