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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장개석(47): 중류지주(中流砥柱)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중류지주(中流砥柱)

[역주: 중류지주란 황하 가운데 기둥처럼 서 있는 지주석(砥柱石)을 가리킨다. 험하기로 유명한 황하의 세찬 물살에도 굴하지 않고 홀로 우뚝 선 기둥의 모습에서 역경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기둥이나 인물을 표현한다.]

장개석은 국제정의역량에 호소해 ‘반공진영을 만들어’ 도처에 침투하는 공산주의의 사악한 힘을 쓸어버리자고 호소했다.

1967년 아시아반공연맹이 세계반공연맹으로 확대되었다. 세계반공연맹 창립총회에서 창시자인 장개석은 치사를 통해 “중화민국은 공산 재앙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심각하게 받은 나라이자 공산 죄악을 폭로함에 가장 빠르고 가장 유력한 나라이자 선혈로 공산재앙을 깨끗이 씻어낸 나라입니다.” “지금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바로 자유국가가 일치단결해 분열된 공산집단을 공격해 물리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자유세계는 이에 대해 오히려 청성하게 인식하지 못했다. 장개석은 비통하게 말했다. “애석하게도 공산죄악에 대한 자유세계의 대항은 너무 느리거나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중공 2세대가 변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중공이 여전히 대륙의 7억 인구를 통제할 수 있는 전쟁자산으로 착각하며, 중공과 ‘대화’로 그 방자하고 난폭함을 감소시킬 수 있으리라 착각한다.…중정(中正)은 세계반공연맹이 결성된 이후 각국 반공 영수들의 노력이 모두 ‘나쁜 것을 쓸어버리고 재앙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세계반공연맹 제1회 대회 치사》, 1967년)

약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당시 장공의 말이 멀리 내다본 탁견이었음을 분명히 알게 된다.

1967년 대륙에서는 문화혁명의 혼란 속에 반(反)전통이 최고조에 달했다. 장개석은 이에 대해 몹시 가슴 아파하며 중공을 비난했다.

“전 인류와 전 민족의 이 큰 적은 오직 시간의 고험과 민족 대의(大義)를 앞에서만 비로소 그것의 기만적이고 공포 스럽고 잔인하며 미친 듯한 추잡한 죄상들을 드러낼 수 있다.”

(《중화민국 56주년 국경기념일에 전국 군민과 동포들에게 알리는 글》)

1970년대 초 중공이 내부 위기를 전이하기 위해 새로운 국제통일전선을 전개했다. 소위 ‘미소외교’와 ‘경제원조’를 수단으로 국제사회의 동정을 얻으려 했다. 일부 반공국가들이 이 수법에 말려들어 중공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중화민국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1970년 1월 13일 외신기자회견에서 어떤 사람이 장개석에게 질문했다.

“만약 서방 국가들이 정치적인 원칙을 저버리고 중공과의 무역을 확대하려 한다면 각하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장공은 이에 대해 “공산당에게 있어, 정치란 바로 경제고 경제가 바로 정치입니다.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산당이 경제를 수단으로 해서 그것의 정치적 목적에 도달하려는 것을 똑똑히 모르고 있습니다.”(《공비는 결코 일본과 벗이 될 수 없다(共匪決不可能與日本爲友)》)라고 대답했다.

1971년 장공은 일기에서 자신의 걱정과 믿음을 기록했다.

“자유세계의 경제와 정치제도는 모두 연구할 필요가 있고 오직 우리 삼민주의(三民主義)만이 그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 “이는 어두운 시기 고통의 시기라고 하여 바로 치욕이 아니며 광명이 눈에 보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내심(內心)에 자문해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다면 사물이 극에 달해 반대로 바뀌듯이 분발하면 곤란을 타파할 때가 올 것이다. 다만 마음고생은 극심하다고 할 수 있다.”(《혁명정신을 수양하는 지침과 근거(革命精神修養的指針和依據)》, 1971년)

1971년 7월 16일 대륙에서 닉슨이 중국대륙을 방문한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발표했다. 장개석은 이에 대해 공개적인 입장을 밝히진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닉슨의 배신행동에 대해 ‘추한 닉슨(尼醜)’이라고 평가했다.

닉슨은 1967년 일찍이 장공을 만나 대선에 필요한 자금제공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장공은 1971년 12월 14일 일기에서 “추한 닉슨이 당선 전 대북(台北)을 방문했을 때 내가 선거자금을 도와줬으면 하는 속내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나 역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정객(政客)은 일을 성사시키기에는 부족하지만 일을 망치기엔 충분하다.” 3년 후 닉슨은 소위 ‘워터게이트’ 추문으로 낙마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장공이 ‘일을 망치기엔 충분하다’고 한 말이 사실로 입증된 것이다.

1971년 쌍십절(雙十節 중화민국 건국기념일) 장공은 중화민국 60년 국경대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세계는 정(正)과 사(邪), 선과 악, 흑과 백,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하면서 탐욕・미망(迷妄)・소란(騷亂)으로 가득한 고통의 시대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국제적으로 일시적 안일만을 추구하는 자들이 비록 우리 민족의 잠재력을 무시하고 있지만 자유와 정의에 있어 우리는 조금도 두려움 없는 이 시대의 중류지주(中流砥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1971년 10월 26일 중공이 유엔에 가입하자 장개석은 공개적으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발표했다.

“우리는 한적(漢賊 역주: 한나라의 적, 여기서는 중화민국의 적인 중공을 지칭)과는 양립할 수 없다는 입장과 유엔헌장의 존엄을 수호하기 위해 이 결의안이 표결에 부쳐지기 전에 미리 우리나라가 참여하고 창설했던 유엔의 탈퇴를 선포한다.”

“이번 유엔총회는 어찌하여 스스로 유엔헌장의 취지와 원칙을 훼손하고 공리(公理)와 정의를 돌보지 않으면서, 치욕스럽게 사악에게 고개를 숙이고 폭력 앞에 비겁하게 굴종할 수 있는가? 전에 우리가 참여해 힘들게 창립했던 유엔이 오늘날 어찌하여 이미 죄악의 온상이 되어버렸는가?”(《중화민국 유엔 탈퇴에 전국 동포들에게 알리는 글(中華民國退出聯合國告全國同胞書)》)

1973년 장공은 국민당 10기 4중 전회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해외에서도 일부 맹종자들이 공비(共匪)들이 꾸며낸 기세야말로 ‘중국’을 대표하고 중국인의 ‘영광’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아울러 중국인들이 무엇을 선택해야 정확한 역사의 길인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나아가 중국인들이 마땅히 사랑해야 할 중국이 ‘중국인들의 중국’인지 아니면 ‘마르크스-레닌-스탈린의 중국’인지는 더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또한 오늘날 공산주의 ‘중국의 강대함’에 7억 대륙 동포들이 그것의 ‘수혜자’인지 아니면 그것의 ‘피해자’인지, 어떻게 해야 백성들이 국가가 강대한 ‘행복’을 누리고 ‘고통’으로 바꿔오지 않게 하거나 심지어 히틀러 식의 ‘훼멸’을 초래하지 않을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는다.”

장공은 말했다.

“우리 당의 결정은 아주 명확하고 확고하다. 즉 공비들과는 절대 ‘담판’하거나 ‘타협’의 여지란 없다! 우리의 통일은 북벌 통일이다!”(《세상의 변화와 공비들의 난을 겨냥한 우리 혁명복국의 결심과 행동(針對世變匪亂貫徹我們革命複國的決心和行動)》, 1973년)

1975년 장개석은 생애 마지막 원단(元旦) 치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공)의 중압이 만들어낸 정치・경제・사회적 및 무수한 계급적 격차와 불평은 이미 그 어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정도다.”(《중화민국 64년 원단에 전국 군민과 동포들에게 알리는 글》)

이 해에 장공은 유촉(遺囑)에서 자신의 일평생 최대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총결했다.

“최근 20년간 자유기지는 날로 착실하고 강대해져 대륙의 공산사악에 대해 끊임없이 정치작전을 펼치고 있다. 공산당에 반대하고 나라를 수복하는 대업은 바야흐로 날로 융성해지고 있다. 전국 군인과 국민들 우리 당의 전체 동지들은 절대 내가 일어나지 못한다고 해서 상심하거나 뜻을 잃지 말라!”

미국 전(前) 하원의원 월터 저드(Walter Judd)는 장공의 장례식에 참가해 “장개석 선생은 일찍이 세계 그 어떤 지도자보다 독재의 본질과 공산당의 해악에 대해 똑똑히 인식했으며 또한 공산당에 항거하신 지 이미 48년이 되었다.”(이등휘,《장중정 선생의 근대 역사상 지위와 공헌(蔣中正先生在近代曆史上的地位與貢獻)》)라고 말했다. 저드는 일찍이 1928년부터 장공과 알고 지낸 오랜 지인이었다.

미국 역사상 유일한 중국계 상원의원을 지낸 하이람 퐁(Hiram Fong)은 국회 추도사에서 장공에 대해 “장개석 총통의 이름은 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세계 영수들 중에서 기나긴 반공 기간과 공산당에 대한 단호함에 있어 그 어떤 인물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Judgement of History,” 《Taiwan Today》 June 1, 1975)

장공은 공산 사탄의 발전과정을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또 그것이 멸망할 운명임을 알고 있었고 심지어 그 시간까지 알았다. 1972년 전(前) 한국 국무총리 정일권(丁一權)이 대만을 방문해 장개석 총통을 예방했다. 장개석은 그에게 유럽의 공산주의가 1990년에 붕괴된다고 알려주었다.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정일권이 되물었다. “1990년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러자 장공은 “아닙니다. 내가 말한 것은 1990년입니다. 하지만 중공은 한발 늦을 겁니다.”

(장위국 《나의 아버지 장중정》 1998년)

장공은 어떻게 이런 정확한 예언을 할 수 있었을까? 아들인 장위국은 이에 대해 “거의 신기(神奇)에 가깝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신통(神通)한 사람들이 남긴 예언은 보통 직접 말하지 않고 암시하거나 글자 수수께끼를 푸는 방식이다. 이 경우 아주 총명한 사람이라도 일이 끝난 후에야 수수께끼의 답을 추측할 뿐이다. 반면 장개석의 예견은 아주 명확해서 그 어떤 해석도 필요 없다. 장공의 신통이 역사상 고인(高人)들보다 결코 낮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7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