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천고영웅인물】 장개석(46): 뼈아픈 반성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종교신앙

장공은 《공산주의 사상과 방법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자》에서 자신의 지혜를 나누며 중국인들에게 서방에서 민주와 과학이 발달한 근원은 그들이 믿는 종교와 신앙에 기초했음을 알려주었다.

“내가 또 특별히 언급할 한 가지는 바로 우리 중국은 ‘5.4’운동 이후 일반적으로 신문화(新文化)를 창도한 인사들이 모두 서방의 민주와 과학의 진보는 숭배하면서도 유독 그 민주와 과학 진보의 근본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는 더 이상 연구하지 않고 줄곧 방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서방에서 민주제도와 과학이 더 발달한 국가일수록 종교와 신에 대한 신앙이 더욱 절실하다. 그들의 정부・사회・학교・여관(旅館)・가정은 물론이고 군대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한권의 성경이 있으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이 다 ‘하느님의 뜻대로 이뤄지길’이란 전통구호가 있어서 일상생활에서 음식을 먹거나 회의할 때도 기도를 하면서 이 구호를 잊지 않는다.”

장공은 서방의 뛰어난 자연과학자들일수록 오히려 신앙이 경건한 것을 관찰했고, 진정으로 서방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서방의 발달과 진보가 서방의 전통문화와 종교신앙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천문학자 및 일반 과학자들의 학문연구가 깊어질수록 우주에는 오직 한분의 주재자인 하느님만이 존재한다는 신앙에 대해 더욱 경건하다. 이는 대체 어찌된 일인가? 솔직히 말하면 대체로 진정으로 서방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설령 학자 자신이건 교육자나 정치가 또는 사회학자를 막론하고 모두 국가와 사회의 진보 및 민주와 과학의 발달이 바로 기본교육과 전통문화, 특히 종교신앙을 유일한 기초로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같은 자료)

장공은 중국의 교육자와 신(新)문화인들은 서방의 발달에 대해 오직 그 표면만 알지 근본은 모른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중국의 전통을 포기하고 국가와 사회의 진보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우리 중국의 교육자와 신(新)문화인들은 저들 서방의 민주와 과학발달을 모방해 우리나라와 사회의 진보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저들의 민주와 과학의 근본문제에 대해서는 살펴보려 하지 않으며 심지어 우리 자신의 문화정신과 전통철학에 대해서는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단 한번이라도 돌아보거나 반성하지 않는다. 이렇게 겉만 번지르르하게 민주와 과학의 껍데기만 있고 정신이 없는 육체로 국가와 사회의 진보를 추구한다면 이는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이 아닌가?”(같은 자료)

뼈아픈 반성

장공은 대만에 온 후 지난 일들을 돌아보면서 근심걱정이 그치지 않았다.

“본인은 민국 14년(1925년) 총리께서 서거하신 후 44년간 온갖 우환과 각종 치욕 등 인간세상의 고달픈 시련과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있는 대로 겪어왔다. 민국 15년 북벌(北伐)을 처음 시작하면서 당내에서 공산분자들의 반란을 숙청했고, 국내적으로는 북양군벌이 남겨 놓은 화근인 원세개 휘하의 소위 직례(直隷)계 군벌 조곤(曹錕), 오패부(吳佩孚), 손전방(孫傳芳)과 봉천(奉天)계 군벌 장작림(張作霖), 장종창(張宗昌)과 중도적인 기회주의자 풍옥상, 북벌기간에 잠시 우리 당에 붙었던 이종인(李宗仁)과 호남 군벌 당생지(唐生智), 운남의 용운(龍雲) 및 사천, 귀주 등의 여러 군벌들을 하나하나 다 제거했다. 이 해에 이종인이 북평(北平 지금의 북경)에서 급사한 후 우리 국민혁명군에 대한 적들의 반역은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심지어 일본군벌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는 물론이고 도이하라(土肥原) 등 안하무인격인 중국 침략의 원흉들도 모두 나의 14년 항일전쟁 승리로 제거되었다. 또 최근 백년 중국에 대해 치욕적이었던 국제적인 불평등조약들도 완전히 취소시켰다.”

“총리께서 국민혁명을 영도하신 이래 지금에 이르러 우리나라는 이미 평등하고 독립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다. 불행히도 항전에서 처음 승리를 알리자 소련이 우리 동북지역을 강점하고는 모택동 무리들을 비호해 나라를 배반하고 민족을 팔아먹게 했으며 전면적인 내전을 발동시켜 우리 민심을 흩어지게 하고 사기를 가라앉게 했다. 우리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대륙에서 철수해 대만으로 옮겨왔으며 지금 이미 19년이 지났다.”(장개석 《기사수록(紀事手錄)》 1969년)

산이 무너지듯 군대가 패배하면서 공비토벌 전쟁의 신속한 실패는 장공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중국이 대겁난(大劫難)에 직면한 것을 본 장개석은 가슴이 몹시 아팠다. 그는 1949년 일기에서 “부끄럽고 무안해 어쩔 줄 모르겠으며 세상 사람들을 대할 면목이 없다.” “오직 지은 죄를 보완해 스스로 속죄할 뿐이다.”라고 했다. 장개석은 공개 강연이나 문장, 일기에서 혁명의 실패에 대해 여러 차례 반성했다.

1949년 장개석은 대북(台北 타이베이) ‘혁명실천연구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이번 실패는 공비들에게 타도당한 게 아니라 사실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타도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군대는 ‘주의가 없고 기율이 없으며 조직이 없고 훈련이 없으며 영혼이 없고 기초가 없는’ 군대였고, 우리 군인도 ‘신앙이 없고 염치가 없으며 무책임하고 지식이 없으며 생명과 기개가 없는’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 장공은 실패를 총결했다.

“모두들 군대의 부패와 정치의 탐오(貪汚)를 말하지만 이런 것들은 다만 실패했을 때의 각종현상에 불과할 뿐 실패를 조성한 근본적 원인은 아니다. 우리는 진일보로 군대가 왜 부패했고 정치는 왜 탐오했는지 연구해야 한다. 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실패한 이유는 첫째 제도(制度)를 세우지 못했고 둘째 조직이 건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국군실패의 원인과 치욕을 씻고 나라를 회복하는 급선무(國軍失敗的原因及雪恥複國的急務》)

1956년 장개석은 《중국 안의 소련》이란 책에서 거듭 몇 가지 교훈을 열거했다. 그중 소련을 진심으로 상대한 것에 대해 “우리 중국은 언제 어디서나 소련 공산당의 기만을 진심으로 대해왔다. 때문에 매번 소련과 교섭할 때마다 결국에는 피동적인 대응에 빠져버렸다.”

소련은 미중관계를 이간하는데 성공했다.

“스탈린은 중국과 미국의 협력을 이간시키기 위해 우리 정부에 중립전술을 이용해 중국의 중립화를 꾀하는 한편 미국 측에는 국공(國共)의 충돌을 조사 처리하는 과정에 중립전술로 미국의 대중정책을 중립화시키려 했다.”

1944년 스탈린은 소련 주재 미국 대사에게 중공에 대해 ‘아이스크림 공산당원’이라면서 진정한 공산당이 아니라고 말했다. 스탈린의 이런 연막작전은 루즈벨트를 미혹시켰고 그는 중공이 미국의 합작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는 루즈벨트, 마셜에서 트루먼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대중정책을 심각하게 오도(誤導)시켰다.

장개석은 또한 국민당은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공산당의 짐승같은 본성과 만행을 소홀히 했다”고 인식했다.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민족지상(民族至上)’ 원칙에 따라 그들을 대할 때 너무 관대했고 철저한 수단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산당이 틈 탈 기회를 주었다는 점이다.” 장개석에게 반성한 의미는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소 잃고 외양간을 고쳐서라도 미래에 공산당에 반대하는 투쟁을 고려한 것이다.

남경대학 역사학과 교수 고화(高華)는 “당시 세속적인 국민당 군대로 탈속하고 강렬한 이상주의(理想主義)의 색채를 띤 중공과 해방군을 싸워 이기기란 몹시 힘들었기에 장개석과 국민당의 실패는 불가피했다.”라고 보았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중공의 ‘강렬한 이상주의’란 솔직히 말해서 ‘공산 사탄 사교(邪敎)’의 ‘정교일치(政敎一致)’란 세뇌를 거친 결과물이다.

3. 청사에 이름을 남기다

중국 계책

장개석은 대만으로 물러난 후에도 줄곧 대륙에 대한 반격을 염두에 두었다. 그 사이 미국인들은 여러 차례 중공에 대한 원자탄 공격을 고려했지만 장개석은 오히려 이를 반대했다.

1950년 12월 1일 일기에서 “트루먼과 미국 조야는 중공에 대해 원자탄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며 마땅히 방법을 찾아 쳐부숴야 한다고 했다.”라고 썼다. 장개석은 이런 방법에 대해 “모든 재앙의 뿌리는 소련에 있기 때문에 효과를 낼 수 없다”며 반대했다.

미국 정부는 또 프랑스군이 월남에서 패배하는 국면을 만회하기 위해 수소폭탄과 원자폭탄으로 월남과 중국 대륙을 공습하려 했다. 미국은 다방면의 고려를 거쳐 태평양본부 참모장 하워드를 파견해 장개석을 만나게 했다. 1954년 4월 17일 장개석은 《금주 예정된 업무일정》 중 3번째 항목에서 “월남과 중국 대륙에서 미국의 수소폭탄과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1954년 10월 20일 장개석은 일기에서 “숙명(叔明)을 불러 미국 공군부 계획처장이 제안한 미국 측에 원자무기 대여를 신청하는 일에 대해 이것이 공군부의 독자적인 의견인지 정부에는 이런 의견이 없는지 상세히 문의했다. 국내 전투에 대한 반격에서 만약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이 물건을 사용할 수 없다. 장차 민심에 불리한 영향을 줄 것이니 마땅히 특별히 주의해서 연구해야 한다.”라고 적었다.

1958년 8월 23일 오후 복건(福建)연해에 주둔한 중공군 포병부대에서 갑자기 금문(金門)을 향해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8.23포격전(금문포격전)’이라 부른다. 국군은 즉각 반격에 나서 중공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공산당의 대만 적화 시도를 철저히 분쇄했으며 대만, 팽호, 금문, 마조(馬祖)열도에 지금처럼 안정적인 기초를 다져주었다.

장공은 금문, 마조 등 최전선의 군사기지를 자주 순시하며 여러 항목의 군사훈련을 주관했다. 이외에도 일본 군사고문단인 백단(白團) 및 미군 고문단과 협력해 군사교육훈련을 진행했으며 방어 및 반격에 관한 큰 계획들을 협의했다. 1960년대 초반에는 장개석이 직접 ‘국광(國光)계획’을 주도하면 단순히 서류상의 대책 외에도 여러 차례 실전 훈련을 진행했다.

1964년 10월 16일 대륙에서 최초로 원자탄 발사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장개석에게 바로 전해졌다. 며칠 후 장개석은 대북 석패(石牌)에서 국민당 고위 장령들에게 “우리는 오직 싸워야만 살길이 생기며 싸우지 않으면 오직 죽음의 길뿐이다. 싸우지 않고 죽기보다는 공산당의 원자탄이 터져 죽는 게 낫고 대만에서 죽는 것보단 대륙에서 죽는 게 낫다. 또 미국인들에게 배반당해 죽는 것보다는 전장에서 싸우다 죽는 게 낫다.”(《장개석이 ‘대륙반격’을 포기한 자초지정(蔣介石放棄“反攻大陸”始末)》)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의 미국은 중공과의 전쟁을 거부했다. 반면 소련은 중공과 불화가 심해지면서 장경국(蔣經國)과 담판해 경비, 무기 및 군사기지를 제공하기로 했다. 장개석은 일기에서 자신을 일깨우며, 소련이 좋은 의도를 품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며 오삼계(吳三桂)나 홍승주(洪承疇 역주: 오삼계와 홍승주는 명나라 말기의 장군으로 청나라에 투항해 명나라를 멸망시킨 앞잡이가 되었다)가 될 수는 없고 소련에게 중국으로 진출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경계했다.

장개석은 대륙을 중공의 마수에서 광복시킬 결심을 포기한 적은 없지만 국제 형세와 군사력의 격차 때문에 끝내 성공하진 못했다.

필생의 반공

1927년 국민당에서 공산분자들을 숙청한 후 장개석은 일찍이 친구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공산당의 공포정책 거동을 반대했음에도 더 일찍 움직이지 못한 이유는 공산당의 죄악이 폭로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신경이 마비된 중국 민중들이 18층 지옥에서 고통을 받지 않고는 각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중정(中正)이 여러분들이 임의로 군벌의 압박과 제국주의자들의 학대를 받게 했다거나 또는 국민 혁명이 암암리에 중국을 공산당의 공포정치에 넘겨 처분하게 했다면, 이는 중정이 혁명 군인으로서의 천직을 멸시한 것으로 천추만세의 죄인이 될 것이다.”(《남경을 도읍으로 세우면서 전국 동포들에게 알리는 글(建都南京告全國同胞書)》 )

1950년 3월 장개석은 대만에서 총통에 복직하면서 “이번에 복직한 후 우리 혁명의 목표는 중화민국을 회복하고 코민테른을 소멸시키는 것이다.”라고 선포했다.”(《복직의 목적과 사명》)

1951년 한국전쟁이 격화되자 장개석은 “오늘날 공산집단은 이미 세계의 공적(公敵)이 되었고 우리 중화민족은 이미 세계에서 침략에 반대하는 선봉이 되었다. 우리의 반공(反共)항소(抗蘇) 호소는 전 인류를 일깨우는 구원의 목탁이며, 민주자유의 우리 대만성(台灣省)은 중화민족을 부흥할 빛나는 등대이다.”(《중화민국 40년 국경기념일에 전국 군민동포들에게 알리는 글(中華民國四十年國慶紀念告全國軍民同胞書)》)

1952년 설날 그는 동포들에게 이렇게 알렸다.

“정의와 폭력은 완전히 상반되기에 서로 병존하거나 융합할 수 있는 방법 없습니다. 우리는 비록 세계적으로 일부 나라들이 잠시 정의와 폭력 양 진영 사이에서 배회하거나 관망할지라도 단호하게 정의의 편에 설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배회와 타협정책은 결코 구차하게 지속될 수 없습니다.”

1954년 6월 15일 장개석 총통은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한국에서 아시아반공연맹 설립을 주도했다. 여기에는 중화민국, 한국, 필리핀, 태국, 월남 다섯 나라가 참가했다. 장 총통은 미국 측이 직접 나서 모든 동아시아 반공국가들을 이끌고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와 유사한 반공협정을 맺어 공산당의 극동지역 확장을 저지하라고 촉구했다.

1954년 10월 7일 장 총통은 또 미국의 AP통신 기자에게 “공비들이 대만을 침범한다면 우리 국군이 적에 맞서 통렬히 반격할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한 준비와 자신감을 갖고 있으며 또한 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만약 앞으로 소련이 진짜 모습을 드러내 대륙에 군대를 출동시켜 싸우려 한다면 나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충분히 지지를 얻어 반드시 소련을 물리칠 것입니다.”(《나는 대륙 중공비적의 군대를 반드시 이길 수 있다(我必能戰勝大陸中共匪軍)》)라고 했다.

1956년 중공의 ‘사회주의개조’ 운동이 고조에 진입하면서 정치・경제・문화 영역에서 시대흐름에 역행하며 전통을 뒤엎었다. 장개석은 이를 통렬히 비판했다.

“나라와 백성을 해치는 죄악이 중국 역사상 그 어떤 시기의 매국노도 뛰어넘었으며, 만주족의 청나라 황제가 권리를 빼앗고 나라에 굴욕을 주며 멋대로 과중한 세금을 뜯어갔던 가혹한 정치는 (중공폭정에 비하면)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최근 수년간 공비들은 대륙에서 더 잔인무도한 수단으로 소위 ‘농업집체화’, ‘공업과 상업공사합영’ 및 ‘문자개혁’ 등 폭정을 추진했다. 이는 사실상 바로 우리 대륙 백성들을 정신에서 육체까지, 개인에서 가정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예리한 총검 아래 단단히 묶어놓은 것으로 소련의 노예이자 세계 정복의 침략도구로 전락시킨 것이다.”(《중화민국 45주년 국경기념일에 전국 군민과 동포들에게 알리는 글》)

이해에 중공은 느닷없이 손중산 90주년 탄신을 기념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장개석은 “공비들이 대륙을 점거한 지 이미 7년이 되었다. 저들은 올해 들어 갑자기 또 우리 국부의 탄신을 대대적으로 기념한다고 하는데 여러분이 한번 보기만 하면 저들의 뻔뻔한 수법을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 가소로운 것은 공비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국부(國父)의 삼민주의를 곡해하고 있다는 것인데 게다가 ‘연소(聯蘇 소련과 연대)・용공(容共)・농공(農工) 삼대정책’을 모두 왜곡해 ‘용공’을 ‘연공(聯共)’으로 고쳐 과거의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당시 중공 대표였던 이대조(李大釗)의 성명을 한번 보기만 해도 그 어떤 궤변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성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오직 본 당(本黨 국민당)만이 하나의 위대하고 보편적인 국민혁명당을 만들 수 있고, 민족해방・민권회복・민생안정의 중대한 책임을 맡을 수 있기 때문에 의연히 본 당에 들어왔다. 우리가 본 당에 가입한 것은 본 당에 공헌하하고 국민혁명 사업에 공헌하기 위해 온 것이다. 절대로 교묘하게 이익을 취하거나 국민당의 명의를 빌려 공산당의 운동을 하려고 온 게 아니다.’”(《국부 탄신 91주년 기념일에 전국 동포들에게 알리는 글》 1956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7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