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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수민족의 신전문화(5): 조대를 교체한 큰 연극은 법을 위해 온 것

글/ GZ

【정견망】

(5) 조대를 교체한 큰 연극은 법을 위해 온 것

모두들 중국의 문화는 신전문화(神傳文化)라고 한다. 우리가 이 5천년 역사를 회고할 때면 한 막 한 막 큰 연극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사람 이 한 층의 이치로 보자면 중국 역사는 바로 왕이 된 자가 나라를 다스리고 군대로 천하를 정벌하며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도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보면 중국 역사의 매 한 단계는 모두 대법이 널리 전해질 때 중생이 ‘진선인(眞・善・忍)’의 내함을 인식하게 하기 위해 층층 바탕을 깐 것이다.

우리가 자세히 관찰해보기만 하면 ‘진선인(眞・善・忍)’의 내함이 시종 오천년 역사에 관통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신전문화는 바로 말겁(末劫) 시기 중생이 ‘진선인(眞・善・忍)’의 내함을 이해하고 동화하는 것을 돕고 있다. 신은 5천 년간 펼쳐낸 각종 요소의 계발을 이용해 사람들이 속세에서 구르는 중에 반본귀진(返本歸真)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인도했으며, 매 한 조대(朝代)의 역사・사상・문화는 모두 오늘의 이런 수련환경을 구축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다. 대법의 홍전은 진정으로 사람이 신이 되는 한갈래 길을 열어주었으니 이는 천지가 개벽한 이래 처음이다.

수련에 대해 리훙쯔(李洪志) 대사는 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두 수련, 수련을 이야기한다. 무엇이 수련인가? 사실 그것의 진정한 함의를 진정하게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수련이란, 바로 생명을 성취하는 것이다. 종교 중에 있다고 해서 곧 수련이 아니고, 또 수련단체만이 수련이 아니다. 만약 이 우주가 안 되고 있을 때 개창(開創)한 이 삼계, 더욱이 오늘날의 인류사회, 이곳에 받아들여진 생명이 다 고층의 거대한 생명과 군체(群體)를 대표한 생명이라면, 그럼 이 사회는 어떠한 사회여야 하며, 마땅히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는가? 여러분, 생각해보라. 이는 정말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실 그가 인류사회에 올 수 있었던 만큼 그는 이미 수련환경에 온 것이다. 내가 줄곧 말하는데, 이 전반 사회는 사실 바로 우리 대법제자에게 개창한 수련환경이다. 당신이 종교 중에 있지 않고, 당신이 사회 중에서 수련하는데, 그럼 각 업종이 모두 당신의 수련장소가 아닌가? 사실은 이런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 또한 모두 이 수련환경 중에 있지 않은가?! 역사상 이런 사회가 있었는가?!

매 사회 계층, 매 사회 환경, 매 사회의 부동한 형식의 표현이 모두 사람마음을 고험한다. 생활 중에서 발생하는 매 한가지 일이 모두 사람마음을 어디에 두는지를 보며, 모두 이 일체를 기재하고 있다. 왜 션윈(神韻)은 한차례 공연으로 사람을 구도할 수 있는가? 그는 그런 기초와 환경이 있는가? 내가 줄곧 이야기하는데, 션윈은, 온 관객이 간단하지 않고, 마음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이미 그 기초가 있고, 사회상에서 그는 이미 선정되었으며, 그가 이 기연을 얻을 수 있었기에 비로소 그 극장에 들어올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인류사회 중에서, 이 큰 환경 중에서, 그는 이미 수련하고 있었다.” <2018년 워싱턴 DC 설법>

션윈(神韻)은 중국 5천년 신전문화의 정수를 펼쳐주었고 매 관중마다 내심 깊은 곳에서 중국에 대한 기억을 일깨워주었다. 이 인연은 바로 이 5천년간 조대가 갱신하는 중에 맺은 것이다. 곤륜산(崑崙山) 위의 작은 씨족에서 시작한 염황자손(炎黃子孫)들이 점차 번성하면서 신주대지로 퍼졌고 오늘날과 같은 이런 다민족이 융합하는 국면을 형성했다. 화하(華夏)족은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음양(陰陽)이란 두 가지 물질이 인간 세상에서 체현된 것으로 중국 역사는 기본적으로 바로 이 민족간의 관계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다 (그림1)

중국 여러 민족 분포도

중국역사를 두루 살펴볼 때 ‘민족’이란 이런 기점에 서서 보자면 한 대(漢代)에 ‘한족(漢族)’이 형성된 이래 한족이 건립한 대일통(大一統) 왕조는 수(隋), 한(漢) 및 명(明) 3개다. 반면 소수민족이 건립된 대일통 왕조는 원(元)과 청(淸) 둘이다. 진나라 이전 하상주(夏商周) 시기에는 화이(華夷)의 구분만 있었을 뿐 민족의 구분은 없었다.

원래 화하족과 만(蠻), 이(夷), 융(戎), 적(狄) 등 여러 족속들은 방위로 지역을 구분했으며 합종, 연횡, 병탄과 전쟁을 통해 새로운 나라가 형성되었다. 원래 이적(夷狄)의 나라들이 점점 발전해 진(秦), 초(楚), 오(吳), 월(越) 등 강국으로 발전했다. 초나라는 남방의 용인(庸人), 백업(百濮), 균인(麇人)을 병탄했고 전국 7웅 중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진나라는 서융(西戎)12국, 파국(巴國)과 촉국(蜀國)을 병탄한 후 역시 전국 7웅의 하나가 되었다.

당조(唐朝)를 건립한 이씨 가족은 절반은 선비족 혈통을 가졌다. 당태종 이세민의 조모, 생모와 황후 모두 선비족이었다. 나머지 역사 중 삼국과 양진(兩晉 즉 동진과 서진), 남북조, 오호십육국, 양송(兩宋 북송과 남송), 요, 금, 서하 등의 왕조는 모두 각 민족이 권력을 잡고 자립한 시기였다. 이것은 바로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둘에서 셋이 나오며 셋은 만물을 형성한다(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萬物)”는 것이다.

중국의 오천년 역사는 바로 염황자손으로부터 변해 내려온 다민족 융합의 역사였다. 나뉘었다 합하고, 물러나고 나아가고, 상보상성 중에 다양한 조대를 연화해냈다.

우주 정법 중에서 인류는 어떻게 해야 과거의 관념을 돌파할 수 있는가? 역사의 미혹을 간파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반대 이치의 환경 중에서 마난을 겪으며 업력을 제거하는가? 그로부터 진리를 찾아 걸어 나올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신전문화의 핵심인 수련(修煉)이다.

우주 특성 진선인(眞・善・忍)에 더 가까운 조대일수록 더욱 창성하고 번영하며 진선인(眞・善・忍) 우주 특성에서 멀어진 왕조일수록 쇠패(衰敗)의 상을 나타냈다. 거시적인 각도에서 보자면 역사상 적은 더는 적이 아니고 재난도 더는 재난이 아니다. 한 차례 한 차례 씩의 전쟁과 융합과정 중에서 중국은 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바다가 온갖 하천을 받아들이듯 갈수록 더욱 커졌다.

춘추전국 형세도

이 오천년의 연출 중에서 ‘진선인(眞・善・忍)’의 내함이 그 속을 관통하는 가운데 층층마다 바탕을 깔았다. 고대인은 어떻게 ‘진(眞)’을 이해했는가?

노자는 “바탕이 참된 것은 마치 변한 듯하다(質真若渝)” “제 몸에 닦으면 그 덕이 진이다(修之於身,其德乃真)”라고 했다.

장자는 “진(真)이란 하늘에서 받은 것이라 자연히 바꿀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의 법은 하늘(天)을 본받고 진(真)을 귀하게 여긴다(真者, 所以受於天也, 自然不可易也. 故聖人法天貴真)”라고 했다.

진실한 말을 하고 진인(真人)이 되고 수진양성(修眞養性), 반본귀진(返本歸真)을 고대인의 도덕관으로 삼아 올라가 치국의 도에 이르면 그 표현이 바로 “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것(依法治國)”이다.

진(秦)나라를 예로 들어보자. 진나라는 어떻게 난세 중에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는가? 우리가 역사를 돌이켜보면 알 수 있는데 진나라는 상대적으로 말해 우주 ‘진’의 특성에 가까웠다. 그 구체적 표현은 바로 법가(法家)로 나라를 다스리는 수단을 채택해 ‘법치’를 시행함으로써 국가를 고도로 통일집권하기에 이르렀고 국가 내부에 한 세트의 법제를 기초로 하는 관리 계통을 형성했다. 농업 경제는 물론이고 군사적으로 모두 가혹한 형법이 있었고 이 때문에 전반 국가는 높은 압력 하에서 신속하게 발전한 것이다.(그림 3)

문자를 통일한 후 소전(小篆)으로 쓴 《역산비嶧山碑》. 진시황의 풍부한 공적을 기록했고 이사가 썼다.

하지만 지나치게 “진”만 강조하고 “선”과 “인”의 평형이 균형이 없었다. 또 우주 특성의 제약을 받아 그 표현은 살벌한 결단으로 “인애관용”을 말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진나라는 짧은 13년의 역사 중에 비록 중원 지구를 빨리 점거하고 문자, 도량형, 화폐와 사상 등을 통일했지만 중과세, 가혹한 형벌, 인력을 남용하는 정책으로 점점 백성의 수용력을 벗어났고 마침내 멸망에 이르고 말았다. (그림4)

진나라 병마용

진나라와 유사한 것은 대몽골국이 있다. 칭기스 칸이 세운 이 제국은 당시 세상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했다. 이것은 중원지구에 오랜 두통거리인 ‘외환’이었는데 사실 중원인과 같은 염황의 자손이다. 하나라 말기 걸(桀)의 후예인 순유(淳維)가 북방으로 도망가서 흉노를 세운 이후 이 강력한 민족이 바로 중원 최대의 외환이 되었고 나중에 몇 세기가 지난 후 흥망성쇠와 융합을 거쳐 몽골족이 된 것이다.

이처럼 여러 민족이 융합해 만들어진 대제국은 진나라와 마찬가지로 ‘법치(法治)’를 숭배했다. 칭기스 칸은 세계에서 가장 이른 헌법인 ‘칭기스칸 법전’을 반포해 행정권과 사법권을 분리하고 부락 민주적 색채가 있는 군주정권제도를 세웠다. 이것이 몽골제국으로 하여금 고도의 집권 통일을 이루게 하였으며 이러한 원칙과 제도 역시 ‘진’의 체현이다. 하지만 너무 살벌했기 때문에 도처에서 생명이 도탄에 빠졌다. 더욱이 ‘선’과 ‘인’이 부족해 한인을 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심을 잃었고 마침내 명나라에 의해 교체되었다.

1248년 몽골 제국의 판도(푸른 색)

‘선’에 대해 중국에서는 자고로 ‘덕을 쌓아 선을 이룬다(積德成善)’는 말이 있다. 착한 일을 하여 선연(善緣)을 맺는다는 말이다. 노자는 ‘선’을 더욱 높은 경지로 올려놓았다.

“높은 선은 물과 같아 만물에 이로우면서도 다투지 않는다(上善若水,水利萬物而不爭)”

노자가 말한 ‘선’은 마치 물처럼 만물에 이로우면서도 만물과 부딪히지 않는다.

‘진’은 사람 중에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파생했다. 당나라야말로 “높은 선은 물과 같아 만물에 이로우면서도 다투지 않는다”는 이치와 ‘인의예지신’을 결합해 만든 왕조이며 ‘진선인(眞・善・忍)’을 두루 갖추었다.

여러분 알듯이 당나라는 중국 고대사회 발전의 최정상으로 개명(開明)하고 포용적인 민족정책은 당나라가 신속하게 발전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당나라의 이씨 황실은 절반은 호인(胡人)의 혈통이다. 때문에 여러 민족에 대해 매우 포용적이었으며 사회 전체에 민족간격이 거의 없었다. 각 민족에 대한 당태조 이세민의 기본적인 태도는 “항복하면 위무하고 반역하면 토벌하는” 것이었다.

만약 주변 여러 민족들이 당조에 대항하지 않으면 ‘회유’책을 실시했고 반대로 집요하게 내지를 교란하거나 침략해 중대한 위협이 되는 경우에는 무력으로 해결했다. 당조는 또한 사신을 파견하고 은혜를 베풀며 화친(결혼) 정책 등의 다민족 정책으로 주변 각 민족을 안무하고 안정시켰다.

그중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화친정책이다. 당나라가 세워진지 289년간 토번, 토욕혼, 돌궐, 거란, 해(亥), 위구르, 위전, 영원(寧遠)국, 남조의 9개 소수민족 정권과 화친한 것이 29차례였다. 이전에 중원의 ‘외환(外患)’이 되었던 나라들이 모두 당나라의 친척 국가가 되었다. 이 일은 민족 관계를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중원의 신전문화(神傳文化), 사상, 예술, 생산기술을 그곳에 전파했다.

당태종의 넓고 어진 흉금은 주변 민족을 감화시켰으며 만방(萬邦)이 조공하러 오게 했으며 대당문화가 사해에 전파되게 했다. 당태종은 ‘천가한(天可汗)’으로 존칭되었다. 당조는 ‘진선인(眞・善・忍)’을 다 갖추었기 때문에 당조는 중화문명을 최정상으로 우뚝 솟게 했으며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되었다. (그림 6)

문성공주와 송첸감보의 상

‘인(忍)’은 중화 오천년 문화 중에서 한가지 대지혜(大智慧)로 본다. 공자는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큰 일을 어지럽힌다.”고 했다. 오천년 역사 중에 신(神)은 각종 각도에서 ‘인’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빚어내어 사람들이 그 내함을 이해하게 했다.

한신과 악비는 모두 대인지심(大忍之心)을 지닌 영웅인 동시에 ‘진(眞)’과 ‘선(善)’을 겸비했다. 때문에 이들은 진리를 위해 생명을 버릴 수 있었고 천고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영웅이 되었다. 만약 오로직 외부의 압력을 참고 견디기만 했다면 유약(柔弱)해서 업신여김을 당한다.

송나라는 매우 유약해서 149년간이나 요, 금나라의 시달림을 받았으며 매번 거액의 배상을 해야 했고 끝내 망국의 길로 들어섰다. 우리는 ‘진선인(眞・善・忍)’ 세 가지를 겸비해야만 비로소 장기간 안정된 통치를 할 수 있음을 알았다.

예를 들어 청나라는 바로 ‘진선인(眞・善・忍)’ 셋을 겸비했기 때문에 소수민족이 건립한 왕조임에도 4억 한인과 공생하며 거의 3백년간 번영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의지한 것은 법치뿐 아니라 다른 민족의 사상문화에 대한 포용이었다. 대신 바꾸어 온 것은 만한(滿漢 만주족과 한족) 문화의 대융합과 약 3백년에 가까운 중국의 안정이었다.

당조와 청조는 모두 중국 역사상 융성한 시기였다. 차이점은 청조는 완전히 소수민족이 건립한 왕조였고 또 전에 몽골족 원나라의 가혹한 통치를 겪었기 때문에 중원 백성들은 외족을 극력 배척했다. 청나라 정부 관리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국면을 맞이하여 청군은 관내에 들어온 후 전 왕조인 몽골족 원나라의 비통한 교훈을 흡수해 적극적으로 한인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특히 강희대제(康熙大帝)가 집정한 후 널리 어진 정치를 펼쳐 ‘안민(安民)’과 ‘혜민(惠民)’ 정책을 펼쳐 사회경제를 신속하게 회복하고 발전시켰다. 특히 ‘영불가부(永不加賦 영원히 부세를 증가하지 않고 세금을 동결한다는 뜻)’와 ‘탄정입무(攤丁入畝 인두세를 폐지하고 토지세에 합산하는 세제개혁)’개혁을 실시하여 중국에 2천년 이상 시행해 온 ‘인두세’ 정책을 폐지했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백성의 부담을 완화하자 청나라는 인구가 신속히 증가했다.

또 만한(滿漢)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강희대제는 팔기귀족들의 권지운동(圈地運動 만주족이 한족의 땅을 빼앗은 일)을 폐지하고 경전제(更田制)를 실시해 명나라 때 번방의 토지를 원래 경작하던 백성들에게 되돌려주었다. 강희제의 이런 행동은 민심을 얻었을 뿐 아니라 경지면적을 급증시켜 농업생산을 재빨리 회복하게 했다.

강희어제 경직도

강희대제의 또 다른 위대한 업적은 공묘(孔廟 공자사당)를 건립하고 친히 ‘만세사표(萬世師表)’라는 편액을 내린 것이다. 천자로서 그는 세 차례나 공자상에 대해 삼배구고(三拜九叩-세번 절하고 아홉 번 우러러보는)의 대례(大禮)를 올렸고 심지어 직접 공자의 묘지를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 이런 거동은 세인들에게 이렇게 선포한 것이다. “만주족도 마찬가지로 중원문화를 받아들여 유가 사상을 치국의 도로 삼았다.” 이러한 거동은 즉각 사대부들의 존중을 받았으며 얻었으며 강희를 ‘천고일제(千古一帝)’라 칭찬했다. 기효람, 유용, 이홍장, 증국번, 임측서, 장지동, 좌종당, 호설암 등의 한인(漢人) 신하들이 진심으로 있는 힘을 다해 청나라의 번영에 땀 흘리는 공로를 세우게 했다. 이것이 바로 대인지심(大忍之心)의 지혜가 아닌가?

강희대제가 공자묘를 위해 친히 쓴 편액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는 즉위 후 ‘인속이도(因俗利導)’를 제창했으며 손자인 건륭제 역시 ‘종속종의(從俗從宜)’라 하여 각 민족의 “풍습에 따라 다스렸다.” 때문에 청나라 조정은 변방지역에 대해 계통적이고 효과적인 민족 정책을 실시했다. 예를 들면 몽골과 티베트에서 백성들이 보편적으로 티베트 불교를 믿었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를 제창해 두 지역 민족들의 지지와 옹호를 얻었다. 서남 지역에서는 주로 ‘토지개혁’ 정책을 실시했으며 신강의 회족에 대해서는 ‘백극제(伯克制)’를, 몽골 지역에서는 ‘맹기제(盟旗制)’ 등을 시행했다.

이것은 모두 그곳 민족의 특징과 사회 현상에 근거하여 취한 민족정책이었다. 청나라는 포용으로 민족 융합을 이루었는데 우주 ‘진선인(眞・善・忍)’ 특성에 부합하므로 얻은 것은 장기적인 통치와 번영이었다. (그림9)

옹화궁에서 모시는 미래불인 미륵대불상

리훙쯔(李洪志) 대사는 《전법륜》에서 “진선인(眞・善・忍)은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유일한 표준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 표준으로 주위의 모든 것을 가늠해보면 진정한 선과 악, 좋고 나쁨, 진과 가를 구별할 수 있다. 사람도 이렇고 국가도 마찬가지다. 신은 5천년 역사 중에서 각종 방식을 이용해 ‘진선인(眞・善・忍)’의 내포를 해석해주었고 “전통으로 돌아가 하늘로 통하는 길을 찾으리니” <재조再造>에서 인용- 이 역사 연극의 마지막 막에서 우주 대법이 인간에 널리 전할 때 그와 상반된 ‘거짓(假)・사악(惡)・투쟁(鬥)’의 중공 당문화 역시 천지를 뒤덮듯이 내려왔다. 이처럼 문화에 이끌려 중화민족 융합의 역사는 민족 투쟁사로 고쳐졌고 신전문화의 빛은 무신론과 진화론의 거짓에 덮여 버렸으며 전통의 보편적 가치는 헛소리와 이기적인 가치관으로 대체되었다.

서양에서 온 유령인 ‘공산주의’는 중화 문명의 맥을 끊었으며 마르크스 엥겔스가 중국인의 조상이 되어 이런 세뇌에 이끌려 하늘의 이치는 존재하지 않고 인륜이 상실되고 골육상잔으로 사람마다 적이 되었고 사람들은 천지인(天地人)과 투쟁하는 중에 선념(善念)을 잃고 국가는 분열로 향하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강택민(江澤民 장쩌민)은 강희대제가 체결한 ‘네르친스크’ 조약을 철폐하고 중국 영토 100만 평방 킬로를 러시아에게 팔아먹었고 폭력독재로 신강과 티베트 문제를 일으켰으며 이 지역의 분리 경향을 더 엄중하게 촉발시켰다. 본래 찬란했던 동방 명주(明珠)- 홍콩은 오늘날 폭력 독재하에 타락했고 더 두려운 것은 ‘거짓 사악 투쟁’의 문화가 이윤 추구를 따라 전 세계로 펴져나가며 민족갈등과 종족 충돌 국제분쟁을 일으켰으며 변이된 사상 문화가 사람들의 관념에 충격을 주었다.

난세 중에 운명의 문은 이미 열렸다. ‘진선인(眞・善・忍)’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거짓 사악 투쟁’를 선택하느냐? 매 사람의 운명은 바로 자기 손안에 달려 있다.

(계속)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59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