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례 종군한 ‘국사(國士)’
글/ 유적(柳笛)

1127년 연호가 정강(靖康)에서 건염(建炎)으로 변했다. 강왕 조구가 고종(高宗)이 되어 새로 제위에 올랐고 이때부터 정식으로 남송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20대였던 새로운 천자는 금나라에 대해 화전(和戰) 양면책을 썼는데 태도가 일정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젊었던 악비는 황제에게 간절하면서도 감동적인 한 통의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등극하신 것은 백성들에게 돌아갈 곳이 생기고 나라에 주재자가 생긴 것으로, 송나라를 망하게 하려던 금인(金人)들의 음모를 이미 완전히 격파하신 것입니다.”[1]
근왕(勤王)의 군대는 날로 강력해졌고 금나라 병사들은 해이해져 전투를 소홀히 했으니 그야말로 군대를 이끌고 북벌(北伐)에 나설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황잠선(黃潛善), 왕백언(汪伯彥) 등이 황제를 부추겨 도읍을 남쪽으로 옮기고 지역에 안주하게 했다. 악비는 고종이 동경(東京)인 개봉을 회복해 항금(抗金)의 대업을 주관하길 원했다. 그는 또 그때가 되면 “장수들이 한마음이 되고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가” “중원 땅 회복은 시간문제”[2]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당시 악비의 나이는 겨우 25세였고 관직은 불과 7품의 하급 무관에 불과했다. 하지만 방대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을 써서 당시의 시대 병폐를 정확히 지적하는 간언을 올렸다. 그의 비범한 충성심과 용기, 담력과 식견은 많은 이들을 탄복시켰다. 하지만 조정에는 여전히 주화파(主和派) 간신들이 황제를 꼬득여 절개를 꺾고 투항하게 했으며 주전파 충신들이 뜻이 있어도 펼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황잠선 등은 “하찮은 관리가 직분을 뛰어넘어 부적당한 말을 했다(小臣越職,非所宜言)”[3]는 이유로 악비의 관직을 박탈했다. 군영에서 쫓겨난 악비는 어쩔 수 없이 “혈혈단신으로 곤경에 처해 객지를 떠돌아 다녀야 했다.”[4]

20세에 머리를 묶고 종군(從軍)에 나선 후 악비는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돌아가 삼년상을 치른 후 다시 종군했다. 하지만 위임장을 잃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또 군대를 떠나야 했다. 이렇게 두 번을 떠난 후 3번째 종군에서 직언(直言)으로 상서를 올렸다는 이유로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쫓겨난 것이다. 비록 악비의 초기 군 생활은 마난(磨難)의 연속이었지만 마음속으로 나라에 보답하려던 악비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8월 그는 의연히 북상해 항금의 최전선인 대명부(大名府 지금의 하북성 대명현 동남부 지역)로 달려갔다. 이곳에 의병을 모집하는 하북(河北) 초무사(招撫司 역주: 전란으로 흩어진 백성을 모으고 위로하는 관청)가 있었기 때문이다.
초무사에서 조구령(趙九齡)이란 사람이 악비를 맞았다. 그는 항금 명신 이강거(李綱舉)가 천거한 관리로 북송 말기 악비의 작전능력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또한 그를 ‘천하기재(天下奇才)’[5]로 평가해 수장인 장소(張所)에게 힘껏 추천했다.
장소 역시 재주를 사랑하고 아끼는 대장이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악비는 비록 권력자들의 죄를 얻어 관직에서 쫓겨난 몸이었지만 장소는 정중하게 ‘국사(國士)의 예로 대우했다.’[6] 여기서 ‘국사’란 나라에서 가장 우수하고 출중한 동량이 되는 재목을 말하는데 흔히 존경의 뜻으로 ‘국사무쌍(國士無雙 역주: 비교할 대상이 없는 천하제일의 인물이란 의미)’이라 불렀다. 역사적으로 용병의 신(神)이자 천하를 통일한 한나라의 대장 한신(韓信)과 같은 사람만이 이런 존칭을 감당할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장소는 악비를 전신(戰神 한신을 말함)의 환생으로 보았고 금나라를 토벌해 나라를 구할 가장 중요한 위치에 그를 천거했다.
그렇다면 장소는 어떤 식으로 국사인 그를 대우했을까? 우선 그는 악비의 진짜 능력에 대해 간절히 알고 싶어 물었다. “당신 혼자 얼마나 많은 적병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악비가 대답했다. “용기란 믿을 게 못되며 용병에선 지략을 정하는 게 우선입니다.(勇不足恃也,用兵在先定謀)”[7]
악비의 말뜻은 자기 혼자만이 지닌 무예만으로는 최상의 장수가 될 수 없고 오직 지모(智謀)만이 승부를 결정짓는 관건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병법(兵法)에서 “가장 우수한 병사는 지모를 자랑하고 그 다음이 전투능력을 자랑한다.”고 했다. 《송사》에는 악비가 춘추시대 진(晉)나라 대부 난지(欒枝 역주: 춘추시대 진나라의 대부로 진문공을 도와 성복 전투에서 초나라에 승리했다.)가 나뭇가지를 전차 뒤에 묶어 흙먼지를 일으켜 초나라 군사들이 진나라가 패해 도망치는 것으로 속인 후 크게 이긴 것을 예로 들었다. 또 초나라의 막오(莫敖 역주: 재상에 해당하는 초나라의 최고위 관직) 굴하(屈瑕)가 나무꾼의 계책을 채택해 교(絞)나라를 물리친 것을 예로 들며 전장에서 모략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장소가 그의 말을 듣고는 숙연하게 공경하고 찬탄하면서 “당신은 절대 행오(行伍 군대의 대열 여기서는 평범한 사병을 말함) 속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8]라고 했다.
정충보국(精忠報國) 문무쌍전(文武雙全)의 악비 (에포크타임스 자료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눌수록 서로 의기투합했다. 악비는 장소에게 격앙된 어조로 자신의 견해를 말했고 잃어버린 하북(河北) 땅을 되찾으려는 뜻을 밝혔다. 본래 북송의 도성인 개봉(開封)은 하북의 울타리가 있어야만 안정될 수 있는 곳이다. 만약 장소가 병력을 내어 출정한다면 그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이며 만 번을 죽어도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이렇게 상세한 대화를 나눈 후 장소는 악비야말로 쉽게 만날 수 없는 천하의 기재임을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이에 평민 신분에 불과했던 그를 파격적으로 발탁해 수무랑(修武郎 역주: 송나라 때 52개 무관 관위 중 44번째 직위) 중군통령(中軍統領)을 맡겼고 또 아주 빨리 무경랑(武經郎 역주: 무관 중 40번째 관위)으로 승진시켰다.
비록 한신과 같은 대장군(大將軍)은 되지 못했지만 악비는 종택 이외에 또 다시 진정으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4번째 군 생활을 펼치게 되었다. 타고난 신력(神力)과 충성심으로 악비는 신속하게 많은 군공을 세웠고 송나라 군영에서 삼군을 통 털어 용맹이 으뜸인 대영웅이 되었다.
예를 들면, 수 만 명에 달하는 금나라 병사들과 맞서 싸울 때의 일이다. 선임인 왕언준(王彥准)이 휴전을 준비하면서 용맹한 악비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자 그는 수하에 거느린 소수의 인마(人馬)만을 거느리고 홀로 출전했다. 그는 수하 병사들을 격려하면서 “우리가 비록 인원수는 적어도 승리를 위해 노력해야 하며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9]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악비 자신도 금나라 병사들과 목숨을 건 격투를 벌였고 이 과정에 십여 군데 상처를 입었지만 끝내 금나라 병사들을 압박해 물러나게 했다.
송나라의 유송년(劉松年)이 그린 《중흥 4장수 악비(岳飛), 장준(張俊), 한세충(韓世忠), 유광세(劉光世)의 그림》 중 일부. 가운데가 악비다.
또 건염 3년(1129년) 악비는 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개봉성 남쪽 남훈문(南薰門)에서 자칭 50만 대군을 자랑하던 금나라의 왕선(王善), 조성(曹成) 군대를 물리쳤다. 당시 성 밖에서 금군의 커다란 북소리가 울려퍼지자 송나라 군은 모두 겁을 먹었고 이길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악비만은 미리 대책을 마련했다는 듯 확신을 갖고 말했다. “내가 제군들을 위해 적을 깨뜨리는 것을 보라!” 그러면서 단기필마로 선두에 서서 왼손으로는 활과 화살을 잡고 오른 손으로 철창(鐵槍)을 들고 용사들을 이끌고 맞서 싸웠다. 이들이 적군 가운데를 종횡무진하면서 약 5~6시간 격전을 벌이자 과연 금나라 군사들의 대열이 크게 어지러워졌고 대오가 흩어져버렸다.[10]
악비의 작전은 무공, 모략, 담략과 식견은 물론이고 충의(忠義)에서도 모두 으뜸이었고 북송과 남송을 통틀어 전쟁의 신으로 불릴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는 늘 자신이 병사들의 선봉에 서서 주변 인물들을 감화시켰고 또한 자기 주변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충성스럽고 의리 있는 용사들을 모으니 남송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정예인 악가군(岳家軍)이 조성되었다.
주석:
[1],[2] 出自《鄂國金佗稡編》卷10《南京上皇帝書略》:陛下已登大寶,黎元有歸,社稷有主,已足以伐敵人之謀。⋯⋯將帥一心,士卒作氣,中原之地指期可複。
[3] 出自《鄂國金佗續編》卷17。
[4] 出自《鄂國金佗稡編》卷11《乞以明堂恩奏張所男宗本奏》。
[5] 出自《鄂國金佗續編》卷27:九齡一見,便識公爲天下奇才。
[6],[7],[8] 出自《宋史》卷365:詣河北招討使張所,所待以國士,借補修武郎,充中軍統領。所問曰:“汝能敵幾何?”飛曰:“勇不足恃,用兵在先定謀,欒枝曳柴以敗荊,莫敖采樵以致絞,皆謀定也。”所矍然曰:“君殆非行伍中人。”飛因說之曰:“國家都汴,恃河北以爲固。苟馮據要沖,峙列重鎮,一城受圍,則諸城或撓或救,金人不能窺河南,而京師根本之地固矣。招撫誠能提兵壓境,飛唯命是從。”所大喜,借補武經郎。
[9] 《鄂國金佗稡編》卷4:先臣預戒士卒曰:“吾巳兩捷,彼必並力來。吾屬雖寡,當爲必勝,計不用命者斬!”
[10] 《鄂國金佗稡編》卷4:春正月,賊首王善、曹成、張用、董彥政、孔彥舟率眾五十萬,薄南薰。⋯⋯時先臣所部才八百人,眾皆懼不敵。先臣謂曰:“賊雖多不整也,吾爲諸君破之。”左挾弓矢,右運鐵矛,領數騎橫沖其軍。賊軍果亂,後騎皆死戰,自午及申,賊眾大敗。
【천고신장악비전(千古神將岳飛傳)】 에포크타임스 시리즈 문장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8/9/29/n10750540.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