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3차례 전투에서 병법을 활용해 적을 무찌르다
글/ 유적(柳笛)

처음 군에 들어가 금나라와 싸울 때 악비는 비록 직위는 낮고 미천했지만 비범한 무공과 재능으로 송나라 노장 종택(宗澤)의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문관 출신인 종택은 악비의 작전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자네의 용감한 기지와 무예 재능은 고대의 훌륭한 장수들을 훨씬 뛰어넘네. 하지만 자네가 야전(野戰)을 좋아하는 것은 만전(萬全)의 계책은 아닐세.”[1]
이에 대한 악비의 대답은 일반적인 지혜를 훨씬 뛰어넘었다.
“진세를 잘 갖춘 후에 전투하는 것은 용병에서 일반적인 법칙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영활하게 운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깊은 생각과 임기응변에 달려 있습니다.”[2] 악비는 병법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이전에 쌓은 전공(戰功)은 오랫동안 사막을 누벼왔던 백전노장 종택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찬탄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렇다면 악비는 어떤 식으로 병법의 묘를 발휘해 예상치 못한 효과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송사(宋史)》에는 악비가 초기 출전했던 한차례 전투가 나오는데 바로 ‘매복전(埋伏戰)’으로 고향인 상주(相州)의 반란을 평정한 것이다. 당시 도준(陶俊)과 가진(賈進)을 우두머리로 하는 도적들이 이 지역에서 화근이 되자 조정에서 여러 차례 병력을 파견해 토벌에 나섰다. 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때 고향 사람들이 고통 받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던 악비가 자청해서 임무를 맡아 2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몇천 명에 달하는 도준의 대군을 상대했다.
군사를 이끌고 급히 오백 리 길을 달려 상주에 도착한 후 악비는 서둘러 전투에 나서는 대신 방비를 엄하게 하며 지략을 이용해 적의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그는 우선 30명의 부하들을 상인으로 가장시켜 많은 짐을 싣고 적들의 주둔지 근처로 접근하게 했다. 과연 도준의 수하들이 이익에 눈이 멀어 30명을 붙잡아 영채로 데려갔다. 적을 유혹하는데 성공한 악비는 또 100명의 병사들을 적진이 위치한 산자락에 미리 매복시켰다. 이튿날 악비는 수십 명만을 데리고 적진 앞을 찾아가 적을 도발했다. 도준은 자신의 세력이 많은 것을 믿고 적을 얕잡아보았다. 결국 가부좌 자세로 말을 타더니 욕을 하면서 출전해왔다.
양측 군사가 잠시 교전한 후 악비는 거짓으로 패한 척하며 후퇴하며 적들을 매복병이 있는 곳으로 유인했다. 약속한 장소에 이르자 악비가 돌아서며 선봉에 나서 용맹하게 적을 무찔렀다. 앞뒤 송나라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높아져 적군을 협공했다. 이 와중에 도준 등 적장이 죽자 적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며 순식간에 진영이 혼란해졌고 크게 패했다. 악비는 이처럼 병법을 활용한 첫 전투에서 적은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로 기적적인 효과를 보았다.
정강(靖康) 원년(1126년) 송과 금이 태원(太原)에서 전투를 벌이자 악비는 명을 받고 백여 명의 경기병(輕騎兵)을 이끌고 적진을 정탐하러 나갔다. 그런데 가는 도중 갑자기 금나라 대군과 맞닥뜨렸다. 근거리에서 서로 부딪치려는 순간 아무도 진법을 운용해 병력을 배치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악비가 순간적인 결단력으로 용감하게 소리를 지르며 금나라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이렇게 장수가 앞장서며 솔선수범하자 나머지 군사들의 사기도 크게 고무되었고 모두 악비와 함께 용맹하게 적을 죽여 놀라운 실전능력을 보여주었다.
원래 용맹하기로 유명한 금나라 병사들이 뜻밖에 악비군대의 사기에 놀라 저절로 전열이 흩어졌고 싸우기도 전에 저절로 패했다. 반면 악비는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함으로 가는 곳마다 무공을 이용해 적을 쓸어버리고 또한 적을 제압하는 효과에 도달했다. 이는 병법 중의 심리전술을 활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정강의 난(역주: 정강의 치라고도 하면 1126년 송나라가 금나라에 대패해 화북을 잃고, 황제인 휘종과 흠종이 금나라의 포로로 잡힌 사건을 말함)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악비는 강왕(康王) 조구(趙構 훗날 남송의 고종)를 중심으로 한 근왕부대에 투신했고 종택의 휘하에서 온힘을 쏟았다.
당시 종택의 군대는 곧장 변경(汴京 지금의 하남성 개봉)을 향해 진격했는데 도중에 금나라 병사들이 배치한 겹겹의 방어선을 돌파하며 수많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악비 역시 그중에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겨울이 되자 송나라 군은 하남 활주(滑州) 일대에 주둔하며 금나라 병사들과 황하를 마주하고 대치했다. 강물이 단단히 얼자 악비는 곧 다른 장수들과 함께 얼음 위에서 말을 타거나 활 쏘는 연습을 하면서 황하를 건너 적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한번은 악비가 백여 명의 기병과 얼음위에서 무예를 연마할 때 갑자기 대규모 적군이 건너편에서 습격해왔다. 악비는 신속한 판단력으로 병사들을 격려하며 “적이 비록 숫자는 많지만 우리 군의 허실을 모른다. 우리는 마땅히 저들을 쫓아내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즉시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3]
말을 끝낸 악비는 기병들을 이끌고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이때 금나라 진영에서 한 대장(大將)가 큰 칼을 휘두르며 악비에게 도전했다. 악비는 태연하게 응전하며 무기를 뽑아 대항했는데 뜯밖에도 적장의 대도(大刀)를 한 치 넘게 깊이 잘라버렸다. 악비는 또 무기를 뽑아 들고 단칼에 적장을 베어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대장이 죽자 나머지 금나라 병사들은 전투의지를 상실했고 1백여 명의 송나라 군사들이 승기를 잡고 추격에 나서 적군을 대파했다.
이처럼 뛰어난 악비의 군사적인 책략은 한나라 초기의 대장군이자 병선(兵仙)인 한신(韓信)을 떠올리게 하는데 한신 역시 ‘배수전’을 칠 때 병법의 활용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지모를 활용해 극히 적은 병력으로 최소한의 손실로 적군을 대파했다. 원래 역사적인 명장(名將)들은 모두 놀랄만한 유사성이 있다!
(계속)
주석:
[1] 《宋史》卷365:戰開德、曹州皆有功,澤大奇之,曰:“爾勇智才藝,古良將不能過,然好野戰,非萬全計。”因授以陣圖。
[2] 《宋史》卷365:飛曰:“陣而後戰,兵法之常,運用之妙,存乎一心。”
[3] 《鄂國金佗續編》卷4:先臣麾其下曰:“敵雖眾,未知吾虛實。及其未定擊之,可以得志。”@#
【천고신장악비전(千古神將岳飛傳)】 에포크타임스 시리즈 문장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8/9/29/n10750526.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