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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천고신장(千古神將) 악비전(岳飛傳) (1)

청년 악비 정충(精忠)의 뜻을 세우다

글/ 유적(柳笛)

악비는 어려서부터 정충보국의 뜻을 세웠다(에포크타임스 삽화)

북송 말년인 1103년,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항금(抗金) 장군 악비(岳飛)가 상주(相州) 탕음현(湯陰縣 지금의 하남성 안양)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았으며 부모님도 청빈하게 사셨다. 하지만 이렇게 평범한 가정에서 오히려 천고(千古)에 이름을 떨친 대 영웅을 배출했다.

악비는 비록 집안이 가난해서 풍족하게 살진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아주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에게는 품덕(品德 인품과 덕행)이 고상한 부모님이 계셨고 또 무예가 고강한 사부님도 계셨다. 이들이 모두 그의 성장의 길에 도움을 주었다. 가령 ‘송사(宋史)’의 기록에 따르면 부친 악화(岳和)는 평소 자신이 입을 옷과 먹는 음식을 절약해서 늘 이웃을 돕곤 했다. 그는 이렇게 인정 많고 정의감이 두터워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던 아주 선량한 사람(大善人)이었다.

가령 이웃 농가의 농작물이 악(岳)씨 집안 경작지에서 자라면 악화는 그것을 관리해 수확한 다음에 돌려주었다. 또 만약 급히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상대방에게 상환을 요구하지 않았다.[1]

악비가 출생할 때 지붕 위로 한 마리 신기하고 거대한 새가 날아갔는데 몹시 장관이었다. 부모님이 이것을 보고는 장차 아들이 큰 업적을 남길 나라의 동량(棟梁)이 될 것을 믿었다. 그래서 이름을 ‘악비(岳飛)’라 짓고 또 나중에 자를 ‘붕거(鵬舉 대붕처럼 큰일이란 뜻)’[2]라 했다. 이 이름을 보면 아들에 대한 부모님의 희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 수 있다.

고상한 덕행을 지닌 악비의 부모는 아들에게 훌륭한 가정교육을 했고 이것은 악비 일생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림은 청나라 화가 냉매(冷枚)가 그린 《연생귀자도(連生貴子圖)》

모친인 요씨(姚氏) 역시 극히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악비가 출생한 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이때 갑자기 황하 제방이 터져 탕음현에 큰 홍수가 발생했다. 이 갑작스런 뜻밖의 상황에도 모친은 급한 가운데 지혜를 내어 악비를 품에 안고 큰 항아리로 뛰어들었다. 두 모자는 이렇게 항아리 속에 앉아 물결에 따라 떠내려갔고 나중에 강변에 도착한 후 구조되었다.[3]

위기에 처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하고 절처봉생(絕處逢生 역주: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나다)의 지모(智謀)를 발휘한 것은 모두 전장에서 반드시 갖춰야 할 소질이다. 악비는 병법(兵法)은 물론 실전(實戰)에서 모두 자신만의 깨달음이 있었고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것은 용감한 모친에게 물려받은 유전자가 아닐까?

소년 시절 악비는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비범한 능력을 드러냈다. 그는 내성적이지만 성격이 돈독했고 역사서와 병법(兵法) 공부에 힘을 들였다. 특히 ‘춘추좌전(春秋左傳)’과 ‘손오병법(孫吳兵法 역주: 손자와 오기의 병법)’에 자못 심득이 있었다. 그는 또 타고난 신력(神力)을 지닌 무학(武學)의 기재였다. 스물이 되기 전에 약 3백 근의 활과 8석의 궁노(弓弩)를 당길 수 있었다.[4]

물론 아무리 좋은 원석이라도 갈고 닦지 않으면 훌륭한 그릇이 될 수 없다. 악비는 현지의 호걸(豪傑)이자 역사적으로 유명한 무술가였던 주동(周同)을 스승으로 삼아 뛰어난 무공을 깊이 있게 연마했다. 특히 좌우 두 손으로 모두 활을 쏠 수 있는 절기(絶技)를 익혔다. 나중에 악비는 이 절정의 무예를 수하 장수들에게 전수해주었고 송나라 군대의 실전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주동(周同)이 사망하자 악비는 몹시 비통해했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늘 제물을 마련해 스승의 무덤 앞에 찾아가 제사를 올리곤 했다. 악화가 그의 효심을 알고는 크게 칭찬했고 또 아들에게 무예를 연마하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 제때 일깨워주었다. “만약 장래 네게 나라에 보답할 기회가 있다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사생취의(捨生取義) 할 수 있겠느냐?”[5]

공자는 일찍이 “10가구가 사는 읍(邑)에는 반드시 나처럼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다.”고 했다. 악화야말로 공자가 말한 충의(忠義)로 나라에 보답하는 현인(賢人)이라 할 수 있다.

이때의 송나라는 내우외환이 겹쳐 있었고 북방의 금나라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문무쌍전(文武雙全)의 악비가 난세를 만났으니 바로 그가 나라를 위해 힘 쓸 때가 온 것이다. 선화(宣和) 2년(1120년) 송과 금 두 나라는 ‘해상맹약(海上盟約)’을 맺고 공동으로 요(遼)나라를 공격하기로 했다. 송나라 장군 유겹(劉韐)이 ‘용감한 전사’를 모집하자 막 스물이 된 악비가 자원해서 용사(勇士)가 되었다.

본시 전투란 극히 위험한 일이라 언제든 생명을 잃을 수 있었다. 게다가 군인은 남북을 옮겨 다니며 싸우다보니 거처도 일정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전란(戰亂)의 시대를 사는 군인들은 거의 가족과 연계가 단절되었다. 악비는 비록 종군(從軍)할 뜻을 세우긴 했지만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멀리 떠나지 말라”는 옛 가르침 때문에 고민했다. 자신이 고향을 떠난 후 연로한 부모님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악비에게 활쏘기를 가르쳐주는 주동

바로 이때 아들의 대의(大義)를 잘 알던 모친이 나섰다. 이것이 저 유명한 ‘악모자자(岳母刺字 악비 모친이 글씨를 새겨 아들의 뜻을 격려한 이야기)’란 미담이다. 모친은 악비를 도와 ‘충과 효 둘을 완전히 할 순 없다’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즉 몸소 아들의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이란 4글자를 쓰고는 자수바늘로 한 점 한 점 새긴 후 먹물로 칠했다.[6] 이때부터 악비는 전장에 나가 적을 죽이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나라에 보답할 신념을 더 확고히 했으며 평생을 행군과 전투 중에서 보냈다.

《송사》의 또 다른 기록에는 악비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 자신의 결백을 보여주기 위해 옷을 벗고 등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심문하던 관리는 그의 등에 새겨진 ‘진충보국(盡忠報國)’이란 커다란 4글자가 살 속 깊이 새겨진 것을 보고는 큰 감동을 받았다![7]

‘정충보국’이든 ‘진충보국’이든 모두 악비의 충의(忠義)로운 모습을 여실히 보여줌에는 차이가 없다. 부모님의 정성스런 가르침 덕분에 그는 나라의 치욕를 잊지 않았고 강산을 되찾을 포부를 품었으며 역사적으로 깊은 감동을 준 충의(忠義)문화를 남겨놓았다.

나중에 장상(將相 장군과 재상)의 지위에 오른 후 악비는 자신의 종군 생활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나라에서 연운16주를 평정하려던 초기 나는 막 성년이 되어 종군을 시작했다. 나는 나라를 위해 온 마음과 힘을 다 쓸 것을 맹세했고 내 집에 대해서는 일찍이 잊어버렸다.”

이 말은 전장을 누빈 악비의 일생을 개괄한 것이자 악비 부모님의 고심한 가르침이 응결된 것이다.

(계속)

주석:
[1] 《송사(宋史)》365권:父和,能節食以濟饑者。有耕侵其地,割而與之;貰其財者不責償。
[2] 《宋史》卷365:飛生時,有大禽若鵠,飛鳴室上,因以爲名。
[3] 《宋史》卷365:未彌月,河決內黃,水暴至,母姚抱飛坐甕中,沖濤及岸得免。
[4] 《宋史》卷365:少負氣節,沉厚寡言,家貧力學,尤好《左氏春秋》、孫吳兵法。生有神力,未冠,挽弓三百斤,弩八石。
[5] 《宋史》卷365:父義之,曰:“汝爲時用,其徇國死義乎。”
[6] [清]錢彩《說嶽全傳》第22回。
[7] 《宋史》卷365:初命何鑄鞠之,飛裂裳以背示鑄,有“盡忠報國”四大字,深入膚理。
[8] 《鄂國金佗稡編》卷14《乞終制劄子》:國家平燕雲之初,臣方束發,從事軍旅,誓期盡瘁,不知有家。

【천고신장악비전(千古神將岳飛傳)】 에포크타임스 시리즈 문장에서 전재

 

원문위치: http://www.epochtimes.com/gb/18/9/29/n10750460.htm